[클로즈업 북한] 북·중 국경도시 ‘단둥’…5색 사람들

입력 2014.07.26 (08:06) 수정 2014.07.2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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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떠오르는 태양, 잔잔한 압록강과 한데 어우러져 도시의 아침을 엽니다.

이른 아침, 압록강 변 공원에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음악에 맞춰 태극권을 하거나 제기차기와 배드민턴 등 운동을 하는 모습에서 활기찬 단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북한 신의주와 마주보는 국경의 도시, 중국 단둥.

북-중 무역의 거점 도시를 넘어 중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까지 3개국 간의 무역의 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 철교는 북-중 물류의 주요 이동 통로입니다.

<인터뷰> 강주원(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단둥 연구) : "단둥이란 도시도 1900년대 초반에 압록강 철교 가 건설이 되는 과정에서 양쪽 도시가 본격적으 로 형성이 되었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 고 보면 한 100년의 역사가 갓 넘은 쌍둥이 도 시의 역할을 해왔던 지점이 있고요."

단둥은 중국의 10대 휴양도시로 해마다 2천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습니다.

압록강 변에는 상인들의 좌판이 쭉 늘어서 있습니다.

북한산 담배와 인형, 화폐와 장뇌삼은 물론 한국산 과자와 식료품도 있습니다.

한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데 중국 돈으로 20위안, 관광객들은 추억을 만듭니다.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 가운데 하나는 유람선을 타고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땅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관광객이 북한 군인들에게 말을 건네자 손을 흔들어 화답합니다.

<녹취> 한국 관광객 : "안녕하세요."

북-중 교역으로 북한에서 반출되는 품목은 한정돼 있지만, 북한으로 들어가는 품목은 다양합니다.

<녹취> 북한 화교 : "(중국으로) 들어오는 건 딴 거 없습니다. 100% 가 동광입니다. 옷이면 옷, 약초 이런 것들 들어오고. (북한으로) 나가는 건 정말 별난 거 많습니다. 자동차도 나가고. 건설용 설비들과 케이블. 물건이란 건 다 나갑니다. 맥주까지, 물과 과일(까지)"

압록강 변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밀무역과 단둥 항 페리를 통해 북한으로 유입되는 물품들은 통계로 잡히지 않아 무역규모는 더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중국의 북한 전문가는 장마당이 크게 늘면서 시장경제에 참여하는 인구가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최근엔 달러를 비롯한 외화 유통도 늘었고 북한 당국에서 외화 관리를 위해 카드 결제 시스템까지 도입됐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철(요녕사회과학원 동북아연구소장) : "인민폐(위안화) 뿐만 아니라 달러, 유로, 엔, 소 위 국제 통용되는 외화는 다 통용될 수 있습니다. 은행 카드를 발급해서 조그마한 가게까지도 다 카드로 결제할 수 있게 시스템이 돼 있더라고요, 보니까."

단둥은 중국인을 비롯해 북한 화교와 조선족, 남-북한 사람을 포함한 다섯 집단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인순 기자 이 곳 단둥 사람들은 북한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아가 철저 한 현지화가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북한 화교는 북한과 직접 무역을 하거나, 중국 또는 북한과 한국을 연결해주는 직업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북한에서 태어나 중국과 북한의 실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교적 자유롭게 북한과 왕래가 가능하고 북한 내 친척들을 포함한 인맥들이 큰 이점으로 작용합니다.

<녹취> 북한 화교 : "조선말 하나 아는 것 때문에 살아가는 겁니다. 조선(북한)에서 왔다는 거 알고. 사람을 알고 하니까. 그래서 장사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완전 중국 사람이라거나 발판이 없으면 우리는 굶어 죽습니다."

이 쌍둥이 빌딩은 고급 음식점을 갖춘 ‘신안동각’으로 사장은 북한 화교 가운데 대표적인 성공 사업가로 꼽힙니다.

<녹취> 단둥 거주 한국인 : "초창기에 골동품 (장사)해서 안동각을 산거죠. 강변에 있는 거. 그걸 밑바탕으로 해서 이 사람 (사장)도 이제 한국 사람이 봤을 때에는 저 정도 담보 가 있으면 내가 같이 투자를 해도 별로 큰 손해는 없겠다, 믿을 수도 있고 하니까 같이 건물을 지은 거죠. 아파트를……."

조선족들의 생계유지 수단은 북한 화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북한과 직접 장사를 하거나 중국인이나 한국인 공장에 북한 노동자를 연계해주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평양에서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나오는 관문인 단둥역, 역 앞에는 트렁크를 끌고 나온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북한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녹취> 북한 노동자 : "(평양에서 왔습니까? 연착이 됐어요?) 아니 그런 건 없고. 좀 가다 서다 했어요. (베이징 차가 몇 시에 있어요?) 베이징 좀 한참 기다려야 돼요."

러시아와 터키에 각각 2만 명, 단둥에 만 5천 명 이상의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단둥에 파견된 대부분의 북한 노동자들은 봉제공장과 수산물 가공공장에 종사합니다.

바쁘게 재봉틀을 돌리는 이곳은 의류생산 업체로 북한 여성 250명과 중국여성 400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강주원(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단둥 연구) : "5.24조치와 상관없이 2010년 전후에 북한의 노동자들이 만 5천 명 정도 나왔습니다. 그런 분들 이 월 평균 300달러에서 400달러 정도를 받거든 요. 단순 인건비만 하더라도 단동은 또 하나의 개성공단의 역할을 지금 북한에 하고 있는 지점이 있는 거죠."

세련된 옷차림의 북한 여성들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짝을 지어 걸어 나옵니다.

단둥에 있는 북-중 합영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들로 추정됩니다.

<녹취> 북한 여성(서비스업 종사) : "(여기서 사는 거예요?) 아니요, (관광) 실습 가는 거예요. 우리 이제 들어가야 되는데. 한 번 오십시 오."

북한 식당 가운데 한 곳을 찾았습니다.

북한 여성들이 기타와 드럼, 피아노는 물론 색소폰 연주까지 합니다.

곱게 입은 한복은 물론,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에 맞춰 단체 율동을 선보입니다.

<녹취> 북한 식당 공연 : "세상천지 둘러봐도 우리 민족 제일일세."

단둥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북한 물건을 수입해 한국에 팔거나 주로 식당업에 종사합니다.

92년 한중 수교를 전후해 한국인들의 단둥 진출이 시작됐고, 98년 단둥 페리가 운항되면서 한국과 중국의 물류 규모도 확대됐습니다.

한국제품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인기가 높아 상표를 떼 낸 뒤 북한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녹취> 북한 화교 : "조선(북한) 사람들도 이미 다 압니다. 남조선(남 한) 상품이 좋다는 것. 중국 제품보다 좋다고 압니다. 조선(북한) 사람들 다 씁니다. 쿠쿠나 냉동기(냉장고). 전자 제품은 한국산을 중국산 보다 주로 선호합니다."

단둥은 남북 교류의 역사이자, 남북관계 변화에 가장 민감한 곳입니다.

2010년 한국 정부의 5.24조치는 단둥에 큰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단둥의 한국인들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녹취> 북한 화교 : "좀 많이 힘들어졌어요. 지금. 조선(북한)에서도 많이 (수출을) 막고. 은 동광이나 아연 동광이나 많이 떨어졌고. 좀 많이 못나오는 편입니다. 옛날 보다. 많이 억제를 좀 하고 조선에서도……."

대북사업 비중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서 대부분의 한국기업들이 철수하고 소수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녹취> 단둥 거주 한국인 : "유동인구까지 하면 한 5000명? 그 당시에. 그런데 지금은 600~700명? (한국으로 돌아간 거예요?) 그렇죠. 너무 힘드니까."

우리 기업과 북한과의 접촉이 불가능해지면서 북한화교와 조선족의 역할은 더 커졌고, 가장 이득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들을 통한 간접 교역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강주원(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단둥 연구) : "한국 사람들이 5.24조치 이전에는 오히려 경제적 이익이 좀 많이 남는 행위를 할 수 있었다라고 한다면 5.24조치 이후에는 단동에서 어떤 조선족 과 북한화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맡기는 역 할이 많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어떤 경제적 이 익이 좀 많이 감소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죠."

아리축구화는 개성공단이 중단될 때도 유일하게 가동된 남북 협력사업입니다.

단순히 축구화 생산의 의미를 넘어 남북 간 의사소통의 역할을 하고 있어 중국내 남북 교류 사업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5.24조치로 단둥 경제가 전반적으로 주춤해지자 단둥 사람들은 5.24조치 해제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압록강 철교에서 10kn 하류에 건설되는 신 압록강대교입니다.

총 길이 3천 26m, 너비 33m 왕복 4차로의 웅장한 규모입니다.

2010년 말 착공해 공사비만 3천 8백억 원에 달합니다.

신압록강대교가 완공되면 북중 무역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당초 완공 예정일 보다 두 달 늦춰진 9월에 완공된다고 알려졌지만, 북한쪽 연결도로가 공사를 시작하지도 않아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인터뷰> 설영만(대한건설 엔지니어링 대표) : "지금 공정으로 보면 85%이상 되어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전체 교량으로 볼 때는 한 60개월 이 상을 보는데요. 현재 남은 기간은 약 1년 정도 남지 않나 판단됩니다."

북한의 실상을 체감하고, 남북관계의 현재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 중국 단둥.

서로 국적은 달라도 남북한과 중국이 공존하는 이곳 사람들은 보다 밝은 미래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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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7-26 08:57:18
    • 수정2014-07-26 22: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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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떠오르는 태양, 잔잔한 압록강과 한데 어우러져 도시의 아침을 엽니다.

이른 아침, 압록강 변 공원에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음악에 맞춰 태극권을 하거나 제기차기와 배드민턴 등 운동을 하는 모습에서 활기찬 단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북한 신의주와 마주보는 국경의 도시, 중국 단둥.

북-중 무역의 거점 도시를 넘어 중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까지 3개국 간의 무역의 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 철교는 북-중 물류의 주요 이동 통로입니다.

<인터뷰> 강주원(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단둥 연구) : "단둥이란 도시도 1900년대 초반에 압록강 철교 가 건설이 되는 과정에서 양쪽 도시가 본격적으 로 형성이 되었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 고 보면 한 100년의 역사가 갓 넘은 쌍둥이 도 시의 역할을 해왔던 지점이 있고요."

단둥은 중국의 10대 휴양도시로 해마다 2천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습니다.

압록강 변에는 상인들의 좌판이 쭉 늘어서 있습니다.

북한산 담배와 인형, 화폐와 장뇌삼은 물론 한국산 과자와 식료품도 있습니다.

한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데 중국 돈으로 20위안, 관광객들은 추억을 만듭니다.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 가운데 하나는 유람선을 타고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땅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관광객이 북한 군인들에게 말을 건네자 손을 흔들어 화답합니다.

<녹취> 한국 관광객 : "안녕하세요."

북-중 교역으로 북한에서 반출되는 품목은 한정돼 있지만, 북한으로 들어가는 품목은 다양합니다.

<녹취> 북한 화교 : "(중국으로) 들어오는 건 딴 거 없습니다. 100% 가 동광입니다. 옷이면 옷, 약초 이런 것들 들어오고. (북한으로) 나가는 건 정말 별난 거 많습니다. 자동차도 나가고. 건설용 설비들과 케이블. 물건이란 건 다 나갑니다. 맥주까지, 물과 과일(까지)"

압록강 변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밀무역과 단둥 항 페리를 통해 북한으로 유입되는 물품들은 통계로 잡히지 않아 무역규모는 더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중국의 북한 전문가는 장마당이 크게 늘면서 시장경제에 참여하는 인구가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최근엔 달러를 비롯한 외화 유통도 늘었고 북한 당국에서 외화 관리를 위해 카드 결제 시스템까지 도입됐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철(요녕사회과학원 동북아연구소장) : "인민폐(위안화) 뿐만 아니라 달러, 유로, 엔, 소 위 국제 통용되는 외화는 다 통용될 수 있습니다. 은행 카드를 발급해서 조그마한 가게까지도 다 카드로 결제할 수 있게 시스템이 돼 있더라고요, 보니까."

단둥은 중국인을 비롯해 북한 화교와 조선족, 남-북한 사람을 포함한 다섯 집단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인순 기자 이 곳 단둥 사람들은 북한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아가 철저 한 현지화가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북한 화교는 북한과 직접 무역을 하거나, 중국 또는 북한과 한국을 연결해주는 직업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북한에서 태어나 중국과 북한의 실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교적 자유롭게 북한과 왕래가 가능하고 북한 내 친척들을 포함한 인맥들이 큰 이점으로 작용합니다.

<녹취> 북한 화교 : "조선말 하나 아는 것 때문에 살아가는 겁니다. 조선(북한)에서 왔다는 거 알고. 사람을 알고 하니까. 그래서 장사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완전 중국 사람이라거나 발판이 없으면 우리는 굶어 죽습니다."

이 쌍둥이 빌딩은 고급 음식점을 갖춘 ‘신안동각’으로 사장은 북한 화교 가운데 대표적인 성공 사업가로 꼽힙니다.

<녹취> 단둥 거주 한국인 : "초창기에 골동품 (장사)해서 안동각을 산거죠. 강변에 있는 거. 그걸 밑바탕으로 해서 이 사람 (사장)도 이제 한국 사람이 봤을 때에는 저 정도 담보 가 있으면 내가 같이 투자를 해도 별로 큰 손해는 없겠다, 믿을 수도 있고 하니까 같이 건물을 지은 거죠. 아파트를……."

조선족들의 생계유지 수단은 북한 화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북한과 직접 장사를 하거나 중국인이나 한국인 공장에 북한 노동자를 연계해주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평양에서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나오는 관문인 단둥역, 역 앞에는 트렁크를 끌고 나온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북한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녹취> 북한 노동자 : "(평양에서 왔습니까? 연착이 됐어요?) 아니 그런 건 없고. 좀 가다 서다 했어요. (베이징 차가 몇 시에 있어요?) 베이징 좀 한참 기다려야 돼요."

러시아와 터키에 각각 2만 명, 단둥에 만 5천 명 이상의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단둥에 파견된 대부분의 북한 노동자들은 봉제공장과 수산물 가공공장에 종사합니다.

바쁘게 재봉틀을 돌리는 이곳은 의류생산 업체로 북한 여성 250명과 중국여성 400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강주원(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단둥 연구) : "5.24조치와 상관없이 2010년 전후에 북한의 노동자들이 만 5천 명 정도 나왔습니다. 그런 분들 이 월 평균 300달러에서 400달러 정도를 받거든 요. 단순 인건비만 하더라도 단동은 또 하나의 개성공단의 역할을 지금 북한에 하고 있는 지점이 있는 거죠."

세련된 옷차림의 북한 여성들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짝을 지어 걸어 나옵니다.

단둥에 있는 북-중 합영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들로 추정됩니다.

<녹취> 북한 여성(서비스업 종사) : "(여기서 사는 거예요?) 아니요, (관광) 실습 가는 거예요. 우리 이제 들어가야 되는데. 한 번 오십시 오."

북한 식당 가운데 한 곳을 찾았습니다.

북한 여성들이 기타와 드럼, 피아노는 물론 색소폰 연주까지 합니다.

곱게 입은 한복은 물론,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에 맞춰 단체 율동을 선보입니다.

<녹취> 북한 식당 공연 : "세상천지 둘러봐도 우리 민족 제일일세."

단둥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북한 물건을 수입해 한국에 팔거나 주로 식당업에 종사합니다.

92년 한중 수교를 전후해 한국인들의 단둥 진출이 시작됐고, 98년 단둥 페리가 운항되면서 한국과 중국의 물류 규모도 확대됐습니다.

한국제품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인기가 높아 상표를 떼 낸 뒤 북한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녹취> 북한 화교 : "조선(북한) 사람들도 이미 다 압니다. 남조선(남 한) 상품이 좋다는 것. 중국 제품보다 좋다고 압니다. 조선(북한) 사람들 다 씁니다. 쿠쿠나 냉동기(냉장고). 전자 제품은 한국산을 중국산 보다 주로 선호합니다."

단둥은 남북 교류의 역사이자, 남북관계 변화에 가장 민감한 곳입니다.

2010년 한국 정부의 5.24조치는 단둥에 큰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단둥의 한국인들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녹취> 북한 화교 : "좀 많이 힘들어졌어요. 지금. 조선(북한)에서도 많이 (수출을) 막고. 은 동광이나 아연 동광이나 많이 떨어졌고. 좀 많이 못나오는 편입니다. 옛날 보다. 많이 억제를 좀 하고 조선에서도……."

대북사업 비중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서 대부분의 한국기업들이 철수하고 소수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녹취> 단둥 거주 한국인 : "유동인구까지 하면 한 5000명? 그 당시에. 그런데 지금은 600~700명? (한국으로 돌아간 거예요?) 그렇죠. 너무 힘드니까."

우리 기업과 북한과의 접촉이 불가능해지면서 북한화교와 조선족의 역할은 더 커졌고, 가장 이득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들을 통한 간접 교역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강주원(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단둥 연구) : "한국 사람들이 5.24조치 이전에는 오히려 경제적 이익이 좀 많이 남는 행위를 할 수 있었다라고 한다면 5.24조치 이후에는 단동에서 어떤 조선족 과 북한화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맡기는 역 할이 많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어떤 경제적 이 익이 좀 많이 감소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죠."

아리축구화는 개성공단이 중단될 때도 유일하게 가동된 남북 협력사업입니다.

단순히 축구화 생산의 의미를 넘어 남북 간 의사소통의 역할을 하고 있어 중국내 남북 교류 사업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5.24조치로 단둥 경제가 전반적으로 주춤해지자 단둥 사람들은 5.24조치 해제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압록강 철교에서 10kn 하류에 건설되는 신 압록강대교입니다.

총 길이 3천 26m, 너비 33m 왕복 4차로의 웅장한 규모입니다.

2010년 말 착공해 공사비만 3천 8백억 원에 달합니다.

신압록강대교가 완공되면 북중 무역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당초 완공 예정일 보다 두 달 늦춰진 9월에 완공된다고 알려졌지만, 북한쪽 연결도로가 공사를 시작하지도 않아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인터뷰> 설영만(대한건설 엔지니어링 대표) : "지금 공정으로 보면 85%이상 되어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전체 교량으로 볼 때는 한 60개월 이 상을 보는데요. 현재 남은 기간은 약 1년 정도 남지 않나 판단됩니다."

북한의 실상을 체감하고, 남북관계의 현재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 중국 단둥.

서로 국적은 달라도 남북한과 중국이 공존하는 이곳 사람들은 보다 밝은 미래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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