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김일성 사후 20년…북한 어디로 가나?

입력 2014.08.16 (08:05) 수정 2014.08.1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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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녹취> 조선중앙TV (1994년 7월 9일)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영원한 권력이 없는 것처럼, 영원한 삶도 없었습니다.

1994년, 반세기에 가깝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갑작스런 소식에 북한 주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녹취> 북한 주민 : “우리는 정말, 이런 날이 세상에 있으리라곤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하고…….”

북한을 둘러싸고 긴장감이 고조됐습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도 다음을 기약하지 못한 채 무기한 연기됐습니다.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하면서 경제 위기를 맞은 북한, 절대 권력자 김일성의 사망은 북한 붕괴론으로까지 번졌습니다.

<인터뷰> 강명도(경민대 북한학과 교수) : “89년도 동구권 사회지도자들이 다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를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나라들이 무너지면서, 자기네들끼리 무역하면서 서로 도와주고 차관도 빌려주고 하면서 살아왔던 이 경제 그룹이 파괴가 되면서 북한 경제도 이제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거죠.”

북한의 ‘경제 위기 극복’은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일 위원장의 몫으로 넘겨졌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일성의 장례식 이후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100일의 애도기간 내내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애도기간 이후에도 공식 활동을 자제하며 은둔정치를 이어갔습니다.

1990년대 들어 북한엔 이미 에너지와 전력, 그리고 수송까지 기간산업과 대부분의 공장들이 정상적인 가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 잇따라 발생한 대홍수와 가뭄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빠지게 됩니다.

김일성 사망 이전부터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 배급제는 완전히 마비됐고,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장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3년간의 자연재해 속에서 당이나 국가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서 장마당 활동에 관여한다라든가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터득을 하게 되었습니다.”

3년의 유훈통치를 마친 1997년, 김정일은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되며 공식적인 권력 승계를 시작했습니다.

2000년 방중 길에 오른 김정일은 발전된 중국의 모습을 보고 개혁, 개방 정책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베이징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 북한도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그런 절박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일은 2001년에 상하이를 방문했고 상하이의 발전된 모습에 또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2002년에는 신의주특구 등을 재정하는 등 경제개방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정상을 모색을 했습니다.”

김정일의 경제 개혁 구상은 2002년에야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로 나타났습니다.

장마당을 양성화시키고 기업의 자율권을 확대하는 등 부분적으로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해 붕괴된 경제를 회생시키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인터뷰> 박형중(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 소장) : “일단은 경제가 국가의 정책에 의해가지고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넘어가지고 시장경제가 자율적으로 발전을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국가의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부수적이고 차후적인 관리정책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7.1개선조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시장 경제의 확대가 체제 위협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북한 당국이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채 정책적인 혼선만 반복했습니다.

급기야 북한은 2009년, 화폐 개혁을 단행해 시장 거래로 돈을 번 중소 상공인들을 통제하는 등 체제 단속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녹취> 조선중앙TV (2005년 1월 3일) : “선군의 위력을 더 높이 떨치자는 구호를 들고 선군 영령 총진군을 힘차게 다그쳐 나가야 한다.”

<앵커 멘트>

군대를 우선으로 하는 북한의 ‘선군정치’는 김정일 시대 중심 노선인데요,

김정일은 체제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군사력 확장과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습니다.

<리포트>

만성적인 경제난이 계속된 가운데, 김정일은 ‘선군사상’을 강조하며 핵무기 개발에 막대한 비용을 퍼붓습니다.

1998년 8월, 북한이 장거리 로켓 광명성1호를 발사했고, 2006년 7월에는 대포동2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1차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미국의 전쟁 위협에 대한 방어적 조치라는 것입니다.

<녹취> 조선중앙TV (2006년 10월) : “미국의 극단적인 핵전쟁 위협과 제재 압력 책동은 우리로 하여금 상응한 방어적 대응 조치로써 핵 시험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은 국제사회의 공분을 샀고, 제2차, 3차 핵실험을 하면서 북한은 더욱 고립됐습니다.

<인터뷰> 박형중(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 소장) “북한이 핵 무력을 증강할수록 서방국가들로부터, 자본과 기술과 그리고 수출시장을 제공할 수 있는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가 더 악화일로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고 하면 핵무기를 가질수록 북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라고 하는 것은 더 줄어든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의 건강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서 후계자에 대한 추측이 쏟아졌습니다.

김정일과 그의 셋째 부인 고영희 사이에서 태어난 3남 김정은 역시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습니다.

<녹취> 후지모토 켄지(김정일 전속 요리사) : “장군님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두 형제에 대해 ‘정철이는 너무 착해서 안 된다. 정은이는 나와 비슷하다, 굉장히 닮았다’고 라고요.”

그리고 2010년, 김정은이 당중앙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면서 북한의 3대 세습이 공식화 됐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우려 섞인 시선과는 상관없이 2011년 말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김정은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앵커 멘트>

1980년대 등장해 20년이 넘는 후계 세습 준비를 한 아버지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의 세습 과정은 3년에 불과했습니다. 올해로 집권 3년을 맞은 김정은 제1위원장, 30대 초반의 젊은 지도자가 이끄는 북한은 어떤 모습일까요?

<리포트>

김정은에게 남겨진 최대 과제 역시 ‘경제난 극복’이었습니다.

북한은 김정일의 ‘강성대국 건설’을 ‘경제강국 건설’로 축소시킨 후 경제 업적 만들기에 나섰습니다.

<녹취> 김정은(지난해 신년사) : "경제 강국 건설은 가장 주요한 과업입니다. 경제 건설의 성과는 인민 생활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강성대국’의 상징물로 여겨지는 ‘희천발전소’가 완공됐고, 평양 곳곳엔 아파트와 유희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새로운 경제 정책인 이른바 ‘6.28방침’도 발표했습니다.

‘기업소 공장’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협동농장엔 포전담당제를 도입해 초과 생산물에 대해 자율 처분권을 준다는 내용입니다.

또한 지난달 추가 지정한 6곳을 비롯한 19개 경제개발구를 발표해 외자유치에 대한 의욕을 보였습니다.

북한의 식량 배급사정은 2011년 이후부터 개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자유치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고, 유엔안보리 등 국제사회의 제재가 계속되는 한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산업의 기반이 되는 에너지와 전력 사정 역시 여전히 열악합니다.

그러나 김정은은 핵-경제 병진노선을 선택하며 ‘핵무기’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 강명도(경민대 북한학과 교수) : “한손에 핵을 쥐고 그러고 우리 경제는 이제 우리를 핵을 인정해주면 경제는 서방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우리가 끌어 들이겠다 이건데, 지금북한이 노리는 건 바로 그겁니다. 핵도 견제하고 경제도 견제하겠다. 미국을 비롯한 이 경제 봉쇄 속에서 절대 지금과 같이 계속 간다면, 핵을 고집하고, 미사일을 고집하는 한 북한경제는 살아날 수가 없다는 거죠.”

김일성 사망 후 20년이 흘렀지만, 북한은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미래는 지난 20년에 대한 반성에서 진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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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4-08-18 13: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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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조선중앙TV (1994년 7월 9일)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영원한 권력이 없는 것처럼, 영원한 삶도 없었습니다.

1994년, 반세기에 가깝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갑작스런 소식에 북한 주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녹취> 북한 주민 : “우리는 정말, 이런 날이 세상에 있으리라곤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하고…….”

북한을 둘러싸고 긴장감이 고조됐습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도 다음을 기약하지 못한 채 무기한 연기됐습니다.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하면서 경제 위기를 맞은 북한, 절대 권력자 김일성의 사망은 북한 붕괴론으로까지 번졌습니다.

<인터뷰> 강명도(경민대 북한학과 교수) : “89년도 동구권 사회지도자들이 다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를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나라들이 무너지면서, 자기네들끼리 무역하면서 서로 도와주고 차관도 빌려주고 하면서 살아왔던 이 경제 그룹이 파괴가 되면서 북한 경제도 이제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거죠.”

북한의 ‘경제 위기 극복’은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일 위원장의 몫으로 넘겨졌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일성의 장례식 이후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100일의 애도기간 내내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애도기간 이후에도 공식 활동을 자제하며 은둔정치를 이어갔습니다.

1990년대 들어 북한엔 이미 에너지와 전력, 그리고 수송까지 기간산업과 대부분의 공장들이 정상적인 가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 잇따라 발생한 대홍수와 가뭄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빠지게 됩니다.

김일성 사망 이전부터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 배급제는 완전히 마비됐고,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장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3년간의 자연재해 속에서 당이나 국가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서 장마당 활동에 관여한다라든가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터득을 하게 되었습니다.”

3년의 유훈통치를 마친 1997년, 김정일은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되며 공식적인 권력 승계를 시작했습니다.

2000년 방중 길에 오른 김정일은 발전된 중국의 모습을 보고 개혁, 개방 정책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베이징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 북한도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그런 절박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일은 2001년에 상하이를 방문했고 상하이의 발전된 모습에 또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2002년에는 신의주특구 등을 재정하는 등 경제개방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정상을 모색을 했습니다.”

김정일의 경제 개혁 구상은 2002년에야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로 나타났습니다.

장마당을 양성화시키고 기업의 자율권을 확대하는 등 부분적으로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해 붕괴된 경제를 회생시키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인터뷰> 박형중(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 소장) : “일단은 경제가 국가의 정책에 의해가지고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넘어가지고 시장경제가 자율적으로 발전을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국가의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부수적이고 차후적인 관리정책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7.1개선조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시장 경제의 확대가 체제 위협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북한 당국이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채 정책적인 혼선만 반복했습니다.

급기야 북한은 2009년, 화폐 개혁을 단행해 시장 거래로 돈을 번 중소 상공인들을 통제하는 등 체제 단속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녹취> 조선중앙TV (2005년 1월 3일) : “선군의 위력을 더 높이 떨치자는 구호를 들고 선군 영령 총진군을 힘차게 다그쳐 나가야 한다.”

<앵커 멘트>

군대를 우선으로 하는 북한의 ‘선군정치’는 김정일 시대 중심 노선인데요,

김정일은 체제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군사력 확장과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습니다.

<리포트>

만성적인 경제난이 계속된 가운데, 김정일은 ‘선군사상’을 강조하며 핵무기 개발에 막대한 비용을 퍼붓습니다.

1998년 8월, 북한이 장거리 로켓 광명성1호를 발사했고, 2006년 7월에는 대포동2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1차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미국의 전쟁 위협에 대한 방어적 조치라는 것입니다.

<녹취> 조선중앙TV (2006년 10월) : “미국의 극단적인 핵전쟁 위협과 제재 압력 책동은 우리로 하여금 상응한 방어적 대응 조치로써 핵 시험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은 국제사회의 공분을 샀고, 제2차, 3차 핵실험을 하면서 북한은 더욱 고립됐습니다.

<인터뷰> 박형중(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 소장) “북한이 핵 무력을 증강할수록 서방국가들로부터, 자본과 기술과 그리고 수출시장을 제공할 수 있는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가 더 악화일로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고 하면 핵무기를 가질수록 북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라고 하는 것은 더 줄어든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의 건강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서 후계자에 대한 추측이 쏟아졌습니다.

김정일과 그의 셋째 부인 고영희 사이에서 태어난 3남 김정은 역시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습니다.

<녹취> 후지모토 켄지(김정일 전속 요리사) : “장군님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두 형제에 대해 ‘정철이는 너무 착해서 안 된다. 정은이는 나와 비슷하다, 굉장히 닮았다’고 라고요.”

그리고 2010년, 김정은이 당중앙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면서 북한의 3대 세습이 공식화 됐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우려 섞인 시선과는 상관없이 2011년 말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김정은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앵커 멘트>

1980년대 등장해 20년이 넘는 후계 세습 준비를 한 아버지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의 세습 과정은 3년에 불과했습니다. 올해로 집권 3년을 맞은 김정은 제1위원장, 30대 초반의 젊은 지도자가 이끄는 북한은 어떤 모습일까요?

<리포트>

김정은에게 남겨진 최대 과제 역시 ‘경제난 극복’이었습니다.

북한은 김정일의 ‘강성대국 건설’을 ‘경제강국 건설’로 축소시킨 후 경제 업적 만들기에 나섰습니다.

<녹취> 김정은(지난해 신년사) : "경제 강국 건설은 가장 주요한 과업입니다. 경제 건설의 성과는 인민 생활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강성대국’의 상징물로 여겨지는 ‘희천발전소’가 완공됐고, 평양 곳곳엔 아파트와 유희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새로운 경제 정책인 이른바 ‘6.28방침’도 발표했습니다.

‘기업소 공장’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협동농장엔 포전담당제를 도입해 초과 생산물에 대해 자율 처분권을 준다는 내용입니다.

또한 지난달 추가 지정한 6곳을 비롯한 19개 경제개발구를 발표해 외자유치에 대한 의욕을 보였습니다.

북한의 식량 배급사정은 2011년 이후부터 개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자유치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고, 유엔안보리 등 국제사회의 제재가 계속되는 한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산업의 기반이 되는 에너지와 전력 사정 역시 여전히 열악합니다.

그러나 김정은은 핵-경제 병진노선을 선택하며 ‘핵무기’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 강명도(경민대 북한학과 교수) : “한손에 핵을 쥐고 그러고 우리 경제는 이제 우리를 핵을 인정해주면 경제는 서방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우리가 끌어 들이겠다 이건데, 지금북한이 노리는 건 바로 그겁니다. 핵도 견제하고 경제도 견제하겠다. 미국을 비롯한 이 경제 봉쇄 속에서 절대 지금과 같이 계속 간다면, 핵을 고집하고, 미사일을 고집하는 한 북한경제는 살아날 수가 없다는 거죠.”

김일성 사망 후 20년이 흘렀지만, 북한은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미래는 지난 20년에 대한 반성에서 진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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