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국왕 교체, 군주제 폐지 논란

입력 2014.08.23 (08:27) 수정 2014.08.2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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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입헌군주제인 스페인에서 최근 국왕이 교체됐는데요.

왕이 있는 나라에서는 보통 왕이 사망할 경우에 장남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경제 위기 속에 부패스캔들까지 터지자, 카를로스 국왕이 재위 39년 만에 물러나면서 아들인 펠리페 6세가 새로운 왕이 된 겁니다.

카를로스 전 국왕은 물러난 지 한 달 만에 친자확인 소송에도 휩싸였는데요.

이래저래 왕의 권위와 왕실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입헌군주제 자체가 존폐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입헌군주제 폐지를 놓고 국민투표를 하자는 서명운동 움직임까지 있는데요.

새 국왕의 혁신 방안이 스페인 국민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요?

이경진 순회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왕가 문장의 대형 차양막이 내걸린 스페인 의회.

그 앞으로 군인들이 힘차게 행진합니다.

스페인이 39년 만에 새로운 국왕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주인공은 46살의 펠리페 6세.

<녹취> "새 국왕 만세! 국왕 만세!"

펠리페 6세는 군복 차림에 군 최고 지휘관을 의미하는 붉은 허리띠를 두르고 즉위 행사를 치렀습니다.

스페인 국왕은 정치적 실권은 없지만 헌법이 정한 실질적인 군 통수권자입니다.

국영 방송 뉴스 앵커 출신으로 스페인 최초의 평민 출신 왕비가 된 부인 레티시아와 9살, 7살 난 두 공주.

새 국왕 일가는 즉위를 환영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했습니다.

15세기 말, 4개의 왕국이 통합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된 스페인.

오랜 왕정의 역사는 스페인의 겉모습에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16세기 중반부터 수도 역할을 해 온 마드리드의 왕궁.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데 펠리페 6세의 조상, 부르봉 왕가가 남긴 대표적인 유산입니다.

이 곳이 전세계에서 한 해 백 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스페인 왕궁입니다.

스페인의 상징이기도 한 이 왕궁의 주인 왕실과 왕이 통치하는 사회, 입헌 군주제를 두고 스페인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새 국왕의 아버지, 후안 카를로스는 1975년 왕이 됐습니다.

독재자 프랑코 장군이 사망한 지 이틀 만입니다.

독재자가 후계자로 정한 왕.

하지만 행보는 사뭇 달랐습니다.

후안 카를로스는 스페인을 민주 법치 국가로 만들겠다며 입헌군주제를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카를로스 마르티네스(스페인 하원의원/진보발전연합당) : "선왕은 독재 시절과 5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추방된 스페인 내전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복원했습니다. 선왕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죠."

그런데 2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화 코끼리 사냥을 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유례 없는 경제 위기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던 때입니다.

설상가상으로 80여 억 원의 공금 유용과 돈세탁 혐의 등으로 수사를 받던 딸 크리스티나 공주 부부가 혐의를 시인했습니다.

왕실에 치명적인 상처가 됐습니다.

<인터뷰> 카를로스 마르티네스(스페인 하원의원/진보발전연합당) : "경제 위기와 부패 스캔들로 호의적인 여론이 돌아섰습니다. 왕실은 민심을 잃었고 선왕은 그래서 사임하게 된 겁니다."

의회는 왕의 사임과 왕위 계승 안건을 다수의 동의로 통과시켰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근본적인 질문이 터져나왔습니다.

과연 군주제를 지속해야 하느냐는 문제제기였습니다.

선왕이 퇴위를 결정한 날에도, 새 국왕이 즉위한 날에도 전국 60여 개 도시에서 공화제를 상징하는 깃발을 든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녹취> "공화제! 공화제!"

이들은 군주제 폐지를 묻는 국민투표를 요구했습니다.

<인터뷰> 시위 참가자 : "스페인엔 진정한 민주주의가 없어요. 국민이 지도자를 뽑을 수 없잖아. 게다가 왕실은 엄청난 부패를 저질렀어요."

<인터뷰> 마리오(마드리드 시민) : "스페인 국민들은 세금을 왕가에 쓰고 있잖아요. 왕실보다 더 중요한 일에 쓸 수 있는 돈을 말이죠."

왕실에 대한 애정과 왕가의 도덕적 해이.

그 사이에 지도자에 대한 국민들의 고민이 있고..

<인터뷰> 할아버지-할머니들 : "찬성이죠. 군주제에 찬성해요. (왕가는 세상에서 가장 기품있는 사람들이잖아요.) 하지만 선왕의 사위는 진짜 잘못 했어요. (부패 혐의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죠.)"

그런 까닭에 한 가족 내에서도 의견은 엇갈립니다.

<인터뷰> 미겔 앙헬 (아들) : "스페인의 군주제요? 찬성합니다. 이미지가 좋잖아요. 스페인의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페드로 (아버지) : "왕은 카드에나 있는 거예요. 어떻게 권력을 대물림 할 수 있습니까? 일반 국민들은 왕이 될 수 없잖아요."

현실적으로는 집권당과 제1야당 모두 군주제를 지지하는 상황.

하지만 유력 일간지 엘 파이스의 최근 여론 조사 결과, 펠리페 6세에 대한 지지도는 50%에 못미치고 통치 형태에 대한 국민 투표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62%에 달했습니다.

<인터뷰> 프란치스코 페레스(공화제 연대) : "법적으로 5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의회에 청원하면 국민투표를 해야 합니다. 저희는 스페인 전역에서 서명 운동을 벌일 예정입니다."

펠리페 6세는 국왕이 되자마자 -직계 가족의 사업 금지 -왕실 재정에 대한 외부 감사 등을 담은 11가지 혁신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호화요트 같은 재산도 일부 매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구제금융은 졸업했지만 아직도 실업률이 26%에 달하는 데다, 일부 지역에선 분리독립 움직임까지 있는 스페인.

펠리페 6세는 국가적 현안을 해결하고 왕정을 지켜내려면 왕실에 대한 신뢰 회복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인터뷰> 페드로 슈바쳐(유럽군주제협회장) : "스페인 왕실의 문제점은 국민들이 그들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겁니다. 거리에 나와 국민들을 만나지도 않고요.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왕실 구성원들의 친밀함과 투명성, 명예입니다."

어떤 체제가 맞는지 그 물음은 한 동안 계속 되겠지만 공화제를 지지하든 왕정을 지지하든 스페인 국민들이 한 목소리로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기업에서 뇌물을 받고, 성 추문이 터져도 뻔뻔한 정치인 보다는 자리에서 내려온 왕이 낫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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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 국왕 교체, 군주제 폐지 논란
    • 입력 2014-08-23 08:50:52
    • 수정2014-08-23 09:25:18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입헌군주제인 스페인에서 최근 국왕이 교체됐는데요.

왕이 있는 나라에서는 보통 왕이 사망할 경우에 장남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경제 위기 속에 부패스캔들까지 터지자, 카를로스 국왕이 재위 39년 만에 물러나면서 아들인 펠리페 6세가 새로운 왕이 된 겁니다.

카를로스 전 국왕은 물러난 지 한 달 만에 친자확인 소송에도 휩싸였는데요.

이래저래 왕의 권위와 왕실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입헌군주제 자체가 존폐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입헌군주제 폐지를 놓고 국민투표를 하자는 서명운동 움직임까지 있는데요.

새 국왕의 혁신 방안이 스페인 국민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요?

이경진 순회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왕가 문장의 대형 차양막이 내걸린 스페인 의회.

그 앞으로 군인들이 힘차게 행진합니다.

스페인이 39년 만에 새로운 국왕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주인공은 46살의 펠리페 6세.

<녹취> "새 국왕 만세! 국왕 만세!"

펠리페 6세는 군복 차림에 군 최고 지휘관을 의미하는 붉은 허리띠를 두르고 즉위 행사를 치렀습니다.

스페인 국왕은 정치적 실권은 없지만 헌법이 정한 실질적인 군 통수권자입니다.

국영 방송 뉴스 앵커 출신으로 스페인 최초의 평민 출신 왕비가 된 부인 레티시아와 9살, 7살 난 두 공주.

새 국왕 일가는 즉위를 환영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했습니다.

15세기 말, 4개의 왕국이 통합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된 스페인.

오랜 왕정의 역사는 스페인의 겉모습에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16세기 중반부터 수도 역할을 해 온 마드리드의 왕궁.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데 펠리페 6세의 조상, 부르봉 왕가가 남긴 대표적인 유산입니다.

이 곳이 전세계에서 한 해 백 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스페인 왕궁입니다.

스페인의 상징이기도 한 이 왕궁의 주인 왕실과 왕이 통치하는 사회, 입헌 군주제를 두고 스페인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새 국왕의 아버지, 후안 카를로스는 1975년 왕이 됐습니다.

독재자 프랑코 장군이 사망한 지 이틀 만입니다.

독재자가 후계자로 정한 왕.

하지만 행보는 사뭇 달랐습니다.

후안 카를로스는 스페인을 민주 법치 국가로 만들겠다며 입헌군주제를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카를로스 마르티네스(스페인 하원의원/진보발전연합당) : "선왕은 독재 시절과 50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추방된 스페인 내전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복원했습니다. 선왕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죠."

그런데 2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화 코끼리 사냥을 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유례 없는 경제 위기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던 때입니다.

설상가상으로 80여 억 원의 공금 유용과 돈세탁 혐의 등으로 수사를 받던 딸 크리스티나 공주 부부가 혐의를 시인했습니다.

왕실에 치명적인 상처가 됐습니다.

<인터뷰> 카를로스 마르티네스(스페인 하원의원/진보발전연합당) : "경제 위기와 부패 스캔들로 호의적인 여론이 돌아섰습니다. 왕실은 민심을 잃었고 선왕은 그래서 사임하게 된 겁니다."

의회는 왕의 사임과 왕위 계승 안건을 다수의 동의로 통과시켰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근본적인 질문이 터져나왔습니다.

과연 군주제를 지속해야 하느냐는 문제제기였습니다.

선왕이 퇴위를 결정한 날에도, 새 국왕이 즉위한 날에도 전국 60여 개 도시에서 공화제를 상징하는 깃발을 든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녹취> "공화제! 공화제!"

이들은 군주제 폐지를 묻는 국민투표를 요구했습니다.

<인터뷰> 시위 참가자 : "스페인엔 진정한 민주주의가 없어요. 국민이 지도자를 뽑을 수 없잖아. 게다가 왕실은 엄청난 부패를 저질렀어요."

<인터뷰> 마리오(마드리드 시민) : "스페인 국민들은 세금을 왕가에 쓰고 있잖아요. 왕실보다 더 중요한 일에 쓸 수 있는 돈을 말이죠."

왕실에 대한 애정과 왕가의 도덕적 해이.

그 사이에 지도자에 대한 국민들의 고민이 있고..

<인터뷰> 할아버지-할머니들 : "찬성이죠. 군주제에 찬성해요. (왕가는 세상에서 가장 기품있는 사람들이잖아요.) 하지만 선왕의 사위는 진짜 잘못 했어요. (부패 혐의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죠.)"

그런 까닭에 한 가족 내에서도 의견은 엇갈립니다.

<인터뷰> 미겔 앙헬 (아들) : "스페인의 군주제요? 찬성합니다. 이미지가 좋잖아요. 스페인의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페드로 (아버지) : "왕은 카드에나 있는 거예요. 어떻게 권력을 대물림 할 수 있습니까? 일반 국민들은 왕이 될 수 없잖아요."

현실적으로는 집권당과 제1야당 모두 군주제를 지지하는 상황.

하지만 유력 일간지 엘 파이스의 최근 여론 조사 결과, 펠리페 6세에 대한 지지도는 50%에 못미치고 통치 형태에 대한 국민 투표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62%에 달했습니다.

<인터뷰> 프란치스코 페레스(공화제 연대) : "법적으로 5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의회에 청원하면 국민투표를 해야 합니다. 저희는 스페인 전역에서 서명 운동을 벌일 예정입니다."

펠리페 6세는 국왕이 되자마자 -직계 가족의 사업 금지 -왕실 재정에 대한 외부 감사 등을 담은 11가지 혁신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호화요트 같은 재산도 일부 매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구제금융은 졸업했지만 아직도 실업률이 26%에 달하는 데다, 일부 지역에선 분리독립 움직임까지 있는 스페인.

펠리페 6세는 국가적 현안을 해결하고 왕정을 지켜내려면 왕실에 대한 신뢰 회복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인터뷰> 페드로 슈바쳐(유럽군주제협회장) : "스페인 왕실의 문제점은 국민들이 그들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겁니다. 거리에 나와 국민들을 만나지도 않고요.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왕실 구성원들의 친밀함과 투명성, 명예입니다."

어떤 체제가 맞는지 그 물음은 한 동안 계속 되겠지만 공화제를 지지하든 왕정을 지지하든 스페인 국민들이 한 목소리로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기업에서 뇌물을 받고, 성 추문이 터져도 뻔뻔한 정치인 보다는 자리에서 내려온 왕이 낫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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