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주양 유괴사건'은 부산에서 재력가로 알려진 정모(당시 42세)씨의 4남매 가운데 외동딸로 태어나 2번의 유괴라는, 불우한 유년시절을 겪은 소녀의 이야기다.
효주(당시 12세)양은 1978년 9월 15일 낮 12시 20분께 재학 중이던 부산의 옛 남성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골목길을 내려오다가 대기 중인 검은색 승용차 운전자에 의해 유괴됐다.
1960년 12월 경무대 경호책임자로, 발포명령 혐의로 구속됐던 곽영주의 아들을 유괴하고, 1964년에는 100원짜리 위조지폐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전과 9범의 매석환(당시 42세)에 의해서다.
매석환은 "아버지가 5천만원의 빚을 져 세관에 잡혀가 당분간 내가 너를 보살펴야 한다"면서 효주양을 차 트렁크에 태우고 서울, 부산, 수원 등지를 오가며 도망 다녔다.
그는 효주양을 유괴한 지 33일째, 효주양의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5천만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다가 극비리에 수사 중인 부산진경찰서 소속 공길용 경사에게 덜미를 잡혔다.
공 경사는 효주양 사건을 포함해 1971년 부산 송미장 여관 암달러상 살해범 검거, 1975년 영도 청학동 수출품 컨테이이너선 도난사건, 이후 1980년 미국문화원방화사건 등을 해결하며 순경에서 경감까지 4번의 특진을 해 '포도왕'으로 불린 인물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납치 차량 번호판을 알아내려고 최면술 수사기법을 최초로 도입하고, 유명한 무속인 '김중산'에게 점을 보게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두 번째 불행은 7개월 뒤에 찾아왔다.
1979년 4월 14일 오전 8시 15분, 효주양이 등굣길이던 부산시 중구 대청동 메리놀병원 앞길에서 비닐로 차 번호판을 가린 승용차에 타고 있던 괴한에게 납치돼 행방불명됐다. 첫 납치사건 후 가족들이 매일같이 등하교를 함께했는데, 딱 하루 거른 날 또다시 유괴된 것이다.
효주양 유괴소식은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최석원 당시 부산시장은 시민에게 "효주양 구출에 협조해 달라"며 효주양의 사진이 든 전단 60만 장을 배부했고, 효주양의 아버지 정씨도 TV에 출연해 "딸을 살려만 준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부모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호소했다.
1차 때 범인인 매석환이 2차 유괴범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사건발생 5일째인 4월 18일, 범죄사건과 관련해 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특별 담화가 발표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죄를 뉘우치고 효주양을 무사히 돌려보낸다면 관계기관에 죄과를 관대하게 다루도록 하겠다"며 범인을 회유하기도 했다.
담화가 발표된 날 저녁 10시 50분께 효주양이 경부고속도로 경주톨게이트 인근에서 택시기사에 의해 발견되면서 두 번째 사건은 막을 내렸다.
범인은 1년 8개월 뒤 붙잡혔는데 효주양 아버지 밑에서 운전기사 일을 했던 이원석(당시 25세)으로 밝혀졌다.
이씨는 경찰에서 "병으로 일을 할 수 없자 좀 더 편히 사는 방법을 찾다가 효주양을 유괴했다"면서 "압박감 때문에 범행을 포기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효주(당시 12세)양은 1978년 9월 15일 낮 12시 20분께 재학 중이던 부산의 옛 남성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골목길을 내려오다가 대기 중인 검은색 승용차 운전자에 의해 유괴됐다.
1960년 12월 경무대 경호책임자로, 발포명령 혐의로 구속됐던 곽영주의 아들을 유괴하고, 1964년에는 100원짜리 위조지폐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전과 9범의 매석환(당시 42세)에 의해서다.
매석환은 "아버지가 5천만원의 빚을 져 세관에 잡혀가 당분간 내가 너를 보살펴야 한다"면서 효주양을 차 트렁크에 태우고 서울, 부산, 수원 등지를 오가며 도망 다녔다.
그는 효주양을 유괴한 지 33일째, 효주양의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5천만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다가 극비리에 수사 중인 부산진경찰서 소속 공길용 경사에게 덜미를 잡혔다.
공 경사는 효주양 사건을 포함해 1971년 부산 송미장 여관 암달러상 살해범 검거, 1975년 영도 청학동 수출품 컨테이이너선 도난사건, 이후 1980년 미국문화원방화사건 등을 해결하며 순경에서 경감까지 4번의 특진을 해 '포도왕'으로 불린 인물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납치 차량 번호판을 알아내려고 최면술 수사기법을 최초로 도입하고, 유명한 무속인 '김중산'에게 점을 보게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두 번째 불행은 7개월 뒤에 찾아왔다.
1979년 4월 14일 오전 8시 15분, 효주양이 등굣길이던 부산시 중구 대청동 메리놀병원 앞길에서 비닐로 차 번호판을 가린 승용차에 타고 있던 괴한에게 납치돼 행방불명됐다. 첫 납치사건 후 가족들이 매일같이 등하교를 함께했는데, 딱 하루 거른 날 또다시 유괴된 것이다.
효주양 유괴소식은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최석원 당시 부산시장은 시민에게 "효주양 구출에 협조해 달라"며 효주양의 사진이 든 전단 60만 장을 배부했고, 효주양의 아버지 정씨도 TV에 출연해 "딸을 살려만 준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부모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호소했다.
1차 때 범인인 매석환이 2차 유괴범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사건발생 5일째인 4월 18일, 범죄사건과 관련해 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특별 담화가 발표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죄를 뉘우치고 효주양을 무사히 돌려보낸다면 관계기관에 죄과를 관대하게 다루도록 하겠다"며 범인을 회유하기도 했다.
담화가 발표된 날 저녁 10시 50분께 효주양이 경부고속도로 경주톨게이트 인근에서 택시기사에 의해 발견되면서 두 번째 사건은 막을 내렸다.
범인은 1년 8개월 뒤 붙잡혔는데 효주양 아버지 밑에서 운전기사 일을 했던 이원석(당시 25세)으로 밝혀졌다.
이씨는 경찰에서 "병으로 일을 할 수 없자 좀 더 편히 사는 방법을 찾다가 효주양을 유괴했다"면서 "압박감 때문에 범행을 포기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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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만들어지는 ‘효주양 유괴 사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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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4-09-18 09:14:49
'정효주양 유괴사건'은 부산에서 재력가로 알려진 정모(당시 42세)씨의 4남매 가운데 외동딸로 태어나 2번의 유괴라는, 불우한 유년시절을 겪은 소녀의 이야기다.
효주(당시 12세)양은 1978년 9월 15일 낮 12시 20분께 재학 중이던 부산의 옛 남성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골목길을 내려오다가 대기 중인 검은색 승용차 운전자에 의해 유괴됐다.
1960년 12월 경무대 경호책임자로, 발포명령 혐의로 구속됐던 곽영주의 아들을 유괴하고, 1964년에는 100원짜리 위조지폐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전과 9범의 매석환(당시 42세)에 의해서다.
매석환은 "아버지가 5천만원의 빚을 져 세관에 잡혀가 당분간 내가 너를 보살펴야 한다"면서 효주양을 차 트렁크에 태우고 서울, 부산, 수원 등지를 오가며 도망 다녔다.
그는 효주양을 유괴한 지 33일째, 효주양의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5천만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다가 극비리에 수사 중인 부산진경찰서 소속 공길용 경사에게 덜미를 잡혔다.
공 경사는 효주양 사건을 포함해 1971년 부산 송미장 여관 암달러상 살해범 검거, 1975년 영도 청학동 수출품 컨테이이너선 도난사건, 이후 1980년 미국문화원방화사건 등을 해결하며 순경에서 경감까지 4번의 특진을 해 '포도왕'으로 불린 인물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납치 차량 번호판을 알아내려고 최면술 수사기법을 최초로 도입하고, 유명한 무속인 '김중산'에게 점을 보게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두 번째 불행은 7개월 뒤에 찾아왔다.
1979년 4월 14일 오전 8시 15분, 효주양이 등굣길이던 부산시 중구 대청동 메리놀병원 앞길에서 비닐로 차 번호판을 가린 승용차에 타고 있던 괴한에게 납치돼 행방불명됐다. 첫 납치사건 후 가족들이 매일같이 등하교를 함께했는데, 딱 하루 거른 날 또다시 유괴된 것이다.
효주양 유괴소식은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최석원 당시 부산시장은 시민에게 "효주양 구출에 협조해 달라"며 효주양의 사진이 든 전단 60만 장을 배부했고, 효주양의 아버지 정씨도 TV에 출연해 "딸을 살려만 준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부모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호소했다.
1차 때 범인인 매석환이 2차 유괴범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사건발생 5일째인 4월 18일, 범죄사건과 관련해 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특별 담화가 발표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죄를 뉘우치고 효주양을 무사히 돌려보낸다면 관계기관에 죄과를 관대하게 다루도록 하겠다"며 범인을 회유하기도 했다.
담화가 발표된 날 저녁 10시 50분께 효주양이 경부고속도로 경주톨게이트 인근에서 택시기사에 의해 발견되면서 두 번째 사건은 막을 내렸다.
범인은 1년 8개월 뒤 붙잡혔는데 효주양 아버지 밑에서 운전기사 일을 했던 이원석(당시 25세)으로 밝혀졌다.
이씨는 경찰에서 "병으로 일을 할 수 없자 좀 더 편히 사는 방법을 찾다가 효주양을 유괴했다"면서 "압박감 때문에 범행을 포기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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