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대선 ‘제 3 후보’ 운명은?

입력 2014.11.06 (16:28) 수정 2014.11.0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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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그 사건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때 그 사건이라는 코너를 한번 저희들이 마련해 봤습니다.

과거 제3후보들 한창 떴는데 지금 이 시각에, 지금 이 시점에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홍성걸 교수님 그리고 김만흠 원장님 두 분 모시고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8개월 정도 흘렀는데 벌써 갑자기 때아닌 무슨 차기 대권 논란이 불거졌어요.

이른바 반기문 대망론이 이번 주에 갑자기 확 떴어요.

사실은 지난주부터도 조금씩 얘기가 나왔는데.

그래서 오늘은 제3후보론을 둘러싸고 그때 그 사건을 한번 되돌아보면서 지금 이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얘기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 얘기에 앞서서 이 시기에 갑자기 반기문 대망론이 왜 나왔는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두 분 어떻게 보시는지 먼저 말씀 듣겠습니다.

-우선 이 얘기가 나오게 된 것은 여론조사 기관들이 반기문 지금 사무총장을 차기대권 후보자로서의 지지도 조사를 할 때 넣기 시작을 한 거예요.

그랬더니 여론의 지금 현재 정치권에 있는 어떤 후보들보다도 사실상 솔직히 그대로 얘기하면 박원순 후보보다 한 3배 정도 앞서게 나온 겁니다.

-30.7%, 40%.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확 올라간 거죠.

그러니까 물론 그전에도 조사할 때는 높게 나옵니다마는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놀라는 점도 있고 그다음에 여야 정치권에서는 이걸 가지고 사실은 자기들의 정치적인 여러 가지 계산 속에서 반기문 총장을 등장시킴으로써 지금 상당한 말하자면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겠다라고 계산한 그런 정치세력들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그것이 반기문 총장 자신은 단 한마디라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마치 그런 것처럼 반기문 대망론 이런 아주 거창한 이름으로 지금 나오게 된 겁니다.

-여야 정치권이 왜 양쪽에서 동시에 다 이런 건지.

지금 반기문 총장이 제발 얘기 좀 하지 말아달라고 얘기했으니까 좀 잦아들지 궁금한데 어떻게 보십니까?-이게 최근 또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마는 여야 모두가 지금 세계 재편기입니다.

알다시피 새누리당도 김무성 임시정부 체제로 가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갔던 관계를 구성하는 좀 복잡한 거 있지 않습니까?개헌론 나갔다 물리기도 하고.

그래서 여당도 지금 권력 재편 기구, 야당도 지금 사실상 경우에 따라서는 분단 얘기가 나올 정도로 권력이 재편 과정에 있고 그런데 확실한 차기주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다른 것 중 하나는 과거에 한쪽은 확실한 차기주자가 있고 다른 한쪽이 비어 있고 그쪽만 향해서 제3후보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반기문 총장이 여야 다 거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반기문 총장의 특성이 여야의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은 점도 있지만 여야 모두가 확실하게 독점후보가 없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얘기가 나왔고요.

예전에도 반기문 총장이 거론되기도 했었고 사실은 이전 대선에서도 거론된 적이 잠깐 있었죠.

그러다가 이번에는 올초에 반기문 총장 본인이 앞으로 차기대권주자 조사에서 거기서 빼달라 그랬다가 오랜만에 넣었는데 세게 나왔는데 그랬는데요.

저는 이게 당분간은 반기문 총장이 확실하게 본인은 아니다라고 쐐기를 박지 않는 한 좀 시간을 겪으면서 반복적으로 거론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시는군요.

그러면 반기문 총장이 일각에서 지적을 했어요.

나는 확실히 안 나간다 그런 말은 안 하고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이렇게만 얘기했는데 그렇게 얘기한 것도 있던데.

어떻게 보시는지?-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가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건데요.

지금 상황에서 반기문 총장이 아주 안 나간다, 절대 안 나간다라고 얘기하기도 좀 어렵고요.

본인의 여러 가지 상황이라든가 또 나간다는 모양새를 조금이라도 비출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전혀 관심이 없고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는 정도로 정리를 한 것 같아요.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그래서 정치전문가들이 분석하기를 야, 이건 나중에 그때 되면 상황을 봐서 나올 수도 있는 그런 항상 그야말로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와일드카드 아니냐 이렇게 지금 보고 있는 거죠.

-그러면 과거 대선에서도 이렇게 반기문 총장처럼 제3후보로서 거론됐던 그런 인물들이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한번 살펴봤으면 싶은데요.

이승현 아나운서 준비해 오셨죠.

-1987년 대통력 직선제로 개헌 이래 역대 대선마다 끊임없이 무당파 제3후보가 등장해 왔습니다.

모두 이들 후보들은 기성정치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해 왔는데요.

그때 그 제3의 후보들 정리해 봤습니다.

제일 먼저 1992년 대선에 나선 정주영 후보입니다.

당시 파격적인 공약과 함께 경제, 통일 대통령을 자임하면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했죠.

유세 중 연설장면 함께 들어보시겠습니다.

-내가 하는 흉내를 내느라고 자기가 1만 5000불 국가를 만들겠다네요.

참 소가 웃을 일이에요.

경제경제하면서 공부를 하는데 언제 경제 공부를 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한 5년 하는 거 구경하고 그리고 한 15년 후에 하라고 그랬습니다.

-1997년 대선입니다.

이인제 당시 경기도 지사가 경선 패배 후에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독자 출마를 선언했죠.

출마 선언 영상도 보시겠습니다.

-제가 출마를 결심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이 땅에 정치 명예혁명을 완수하여 국민 정치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소명감 때문입니다.

-그리고 2002년입니다.

대선을 약 3개월 앞두고 정몽준 당시 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장이 출마를 선언합니다.

-말뿐이었던 정치개혁에 제 몸을 던져야겠다는 소명의식에서입니다.

정치개혁 없이는 이 나라의 미래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몽준 후보는 노무현과 단일화에 합의했다가 대선 전날 합의를 파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기억하십니까?고건 전 총리입니다.

당시 유력후보들의 지지율을 뛰어넘으면서 주목받았습니다.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기 위해서 중도실용주의 개혁에 뜻을 같이 하는 여러 분야 인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하지만 결국 대선 불출마를 선언합니다.

2012년 지난 대선입니다.

안철수 현상이라고 불릴 만큼 정말 많은 주목을 받았었던 안철수 의원.

정치쇄신을 내걸면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었는데요.

그 영상 들어보시죠.

-저는 이번 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경험들이 정치를 하는데 플러스가 되면 됐지 마이너스는 아니라고 그렇게 판단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안철수 후보도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 중에 후보를 사퇴했습니다.

이렇게 역대 대선 제3후보들 정리해 봤습니다.

-딱 한 사람이 빠졌네요.

-누가 빠졌습니까?

-문국현 후보가.

-아, 그렇죠.

역대 대선에 나섰던 제3후보들 면면을 쭉 살펴봤는데 오늘 저희들 주제가 그때 그 사건이니까 하나하나 좀 짚어봤으면 싶습니다.

먼저 말이죠.

92년 정주영 후보 어떻게 보십니까?

-정주영 후보 사실은 이후에 다른 모든 제3후보와 다릅니다.

어떤 점에서 다르냐면 아마 오늘 보시는 시청자 여러분들께서 금방 눈치 채셨겠습니다마는 모든 후보들이 전부 다 소위 새정치, 정치개혁, 정치쇄신, 새로운 정치, 국민의 정치 이런 식으로 사실상 기존 정치권 내에 대한 불만을 등에 업고 나온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정주영 후보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경제 살린다 하고 나왔지만 사실은 여기에 우리 보도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마는 사실 정주영 후보가 아마 대한민국 기업인들 중에서 정치자금을 제일 많이 낸 분일 겁니다.

정치자금을 계속 내다 보니까 허리가 휘어진단 말이에요.

-그 불만 때문에 나왔다고 하셨죠.

-뭐 그런 얘기가 굉장히 많은데 그러니까 계속해서 민주화가 됐는데 그동안에 내가 정치자금을 엄청나게 냈는데 이게 도대체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주영 그 당시의 현대 회장께서 야, 나도 한번 정치해 보자.

내 돈이 얼마인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내가 내 돈 갖고 내가 정치하겠다는데 누가 뭐나겠느냐 이러고 나오신 거죠.

그런데 그것도 물론 기존의 정치권에 대해서 믿음이 없어져서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의미에서는 새정치의 하나의 패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마는 여하튼 그 당시의 상황은 그러한 배경이 좀 있었다.

이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게 여러 분들을 얘기했지만 지금 얘기하다시피 정주영 전 명예회장.

좀 배경이 다양하긴 합니다.

지적했다시피 당시 오공청문회에 불려나와가지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어떻게 돈을 줬는지.

내가 죽지 않으려고 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이죠.

그전에는 본인이 정치권에 협조해서 기업을 살렸지만 이제 본인이 직접 대통령이 돼서 하겠다 이렇게 나와서 그랬었는데 사실은 다른 나중에 나오는 안철수 후보는 본인이 1등을 달린 적도 있지만 정주영 후보는 가능성은 크게 뒀지만 후보군일 때 1등까지는 가지는 못했습니다.

못했고 아까 앵커께서도 자막에 나오고 화면에 나오고 했지만 기존의 대통령들하고 후보들하고 다르게 일반 국민들, 서민적인 말투로 그렇게 썼죠.

그렇게 써서 반값아파트 내세우고 심지어는 무상교육도 사실 먼저 내세우고 했었는데 당선까지 되지 못했는데 16%면 상당히 많이 얻었죠.

참고로 역대 3후보 중에서 가장 많이 득표했던 분이 나중에 이야기 된 이인제 후보가 19.2%.

역대 3후보 중에서는 가장 많이 득표를 했던 케이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정주영 후보는 그 정도로 짚어보고 말씀하셨는데 이인제 후보 좀 짚어보죠.

경선 불복을 하고 나왔다고 해서 그 이후에 지금까지도 사실은 굉장히 하여튼 정치적 타격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계속 의원직을 유지하고 계시고.

-이인제법이라는 게 생겼죠, 그래서.

그게 뭐냐하면 경선에 참여했던 사람은 해당 지역구에 나가면 못한다는 거죠.

그래서 대통령의 경우에는 그당 경선에 참여하는.

그때까지 괜찮았습니다.

이인제 의원이 경선에 참여했다가 서로 약속했다가 불복을 했는데 그 이후부터 국회의원들도 해당 당선에 참여하면 그 지역은 출마하지 못하는 이런 법이 만들어졌죠.

물론 이게 제가 보기에는 위험의 요소가 있긴 합니다마는 그게 만들어졌는데요.

당시 이인제 후보가 본인의 이야기로는 경선해 가지고 승리했던 이회창 후보와 결정적인 하자가 생겼다.

뭐냐하면 아들이 배경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그때 생겼고요.

본인 이미지는 어떻게 했냐면 당시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모델을 삼았습니다.

-아까 모습도 상당히 비슷했습니다.

-그렇게 모델을 나오고 새정치를 주장했던 당시 여론 사이에서 높게 나왔던 박찬정 잠재 후보까지도 본인을 지지하는 그런 상황이 되면서 이인제 후보는 앞에 나왔던 정몽준 후보와는 다르게 개인적으로는 한 달 정도는 선두를 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선두를 달린 적이 있어가지고 가능성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3등이 돼서 아마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기 쉽지 않은 상황인데 아마 결정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당선시키는 분열의 효과.

3자대결 구도를 만드는 그런 점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죠.

지금 이인제 의원은 당시에 신한국당 경선에 참여했으면 했죠.

해서 그 결과에 패배했으면 그걸 승복을 했다면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 역사가 지금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맨 처음에 승복을 했었죠, 그렇죠?그랬다가.

-결국 하여간 이회창 후보로서는 이길 수 없다라고 하는 판단을.

-병영문제 터지니까.

-그렇죠.

병영문제 터졌을 때 판단을 본인이 한 거예요.

-그렇죠, 본인이 한 거죠.

-본인이 하고 이걸 이길 수 없으니까 내가 나간다라고 한 겁니다.

인기가 굉장히 좋았죠.

요즘말로 하라면 새정치의 원조 아이돌쯤 될 겁니다.

그래서 그런데 이게 경선불복이 되면서 아까 잠깐 말씀하셨습니다마는 19.2%라는 굉장히 높은 걸 받았어요.

-500만표가 넘었죠.

-500만을 넘었는데 문제는 그 당시에 김대중 후보는 자민련의 김종필 후보를 끌어안아서 DJP 연합을 했어요.

그러니까 야당은 연합을 해서 단일후보가 나왔고.

여당은 후보가 분열됐다.

그러니까 결정적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이인제 후보가 안 나갔다면 이회창 후보가 승리할 수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던 거죠.

그렇게 DJP 연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차가 크지 않았었어요.

그래서 이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인데 그것이 그 당시에 정권도 집권여당에 넘겨줬을뿐만 아니라 신한국당이.

또 하나는 이인제 의원 본인의 정치인생도 거기서 말하자면 마침표를 찍었다, 사실상.

아까 논산에서.

이 양반이 지역구가 논산이에요.

논산의 지역구 주민들은 여전히 이인제 꿈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후보, 어느 후보도 지금 이인제 의원을 능가할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논산에서는 계속해서 지금 당선이 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19.2% 얻었는데 2007년 대선에서 자금조달 후보로 출마했을 때 1%도 안 되는 0.7% 득표를 했습니다.

-그랬죠.

-한때 19.2%였는데 당과 정치적인 환경에 따라서 그렇게 득표율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겁니다.

-경선 불복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됐죠.

-그것 때문에 2007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는 아주 깨끗하게 경선에 승복을 한 게 아닌가 그런 얘기도 있고.

이제 2002년 대선 때 정몽준 후보.

사실은 그때 우리가 월드컵 4강까지 갔고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고 해서 FIFA 부회장이었고.

굉장히 인기가 좋았었거든요.

그런데 역시 좀 끝에 가서는 후보 단일화 한다고 했다가 불복하고 결말이 안 좋았어요.

그렇죠?

-그 당시에 여론조사로.

그러니까 여론조사로 후보 단일화한 첫번째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주말에 여론조사하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은 후보단일화를 노무현 후보하고 했죠.

그래서 뭐 끝까지 가다가 나중에 밝혀진 얘기입니다마는 노무현 후보가 명동에서 마지막 날.

그러니까 선거 전날 당일 저녁에 유세를 하면서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 그러면서 후보를 거론하는데, 후보가 아니라 사람들 거론을 하는데 정몽준 후보를 거론을 안 했다.

그래서 말하자면 삐졌다 이런.

-격분하셨다.

-격분했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결국은 경선 무효를 선언했는데요.

이것이 사실 결정적으로 노무현 후보를 도와준 그런 일이었죠.

-오히려 도와줬다 그런 얘기죠.

-만약 후보단일화에서 정몽준 후보로 단정됐다고 하더라도 이게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사실 정몽준 후보로 단일화가 됐으면 당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을 테고.

결정적으로 정몽준 후보가 결정적으로 대권후보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월드컵 에너지였었는데요.

저는 그 월드컵 응원에너지가 정몽준 후보 한 사람한테만 갔던 것도 아니다.

사실은 노무현 후보가 결정적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배경도 거기에 있었다라고 봐집니다.

우리가 그때 나왔던 응원단 야간에 또.

그 에너지가 당시 새로운 정치에너지, 젊은 에너지, 변화에 대한 에너지가 있었고요.

그게 시기적으로는 초반에는 월드컵하고 직접 관련된 정몽준 후보한테 집중이 됐지만 나중에는 상당부분이 또 노무현 후보한테 반영이 됐고.

-그 열기가 노무현 당선.

-사실은 그런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에 저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거기에 보태고 싶은 게 2002년도지 않습니까?웹이 월드와이드앱이죠.

오늘날 인터넷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 대개 90년대 후반이었는데요.

그 월드컵 응원열기가 어떻게 해서 거리응원으로 우리도 처음 보는 거 아니었습니까?그 당시에 굉장히 조직화되고 100만명 이상이 모이고 하는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했느냐.

바로 인터넷을 통해서 그게 가능한 겁니다, 가능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월드컵이라고 하는 대상이 끝나고 나니까 이게 대선으로 옮겨간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노사모 활동이 온라인에서 사이버 공동체에서 굉장히 크게 일어났고 그것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노무현 후보의 당선 사례에 굉장히 크게 기여를 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죠.

이제 마지막으로 안철수 후보를 우리가 짚어봐야 되는데 우리 이승현 아나운서가 준비한 온 것이 있어서 이승현 아나운서 설명을 한번 들어보고 얘기를 해 보시죠.

11월이 되면 이상한 규칙이 있다면서요.

-오늘 11월의 저주와 관련해서 오늘도 시원하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과거 높은 지지율과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후보들이 갑자기 11월만 되면 지지율이 뚝 떨어지는 11월의 규칙이 존재하는데요.

먼저 97년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 함께 보겠습니다.

9월부터 올라서 11월 초만 하면 30%를 넘었던 지지율이 11월 말이 되면 15% 절반 정도로 뚝 떨어졌습니다.

물론 19%대로 득표를 했기 때문에 선방했다고 봐야 할까요.

2002년 정몽준 후보 지지율 볼까요.

9월 말에 30%를 넘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11월 들어서 22%까지 떨어진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때 30%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보였던 제3후보들이 대선을 한 달 앞둔 11월에 지지율이 떨어지는 현상이 반복되자 11월의 저주다 이런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설명을 들어보니까 이제 안철수 후보 때도 결국 이런 현상 때문에 안철수 후보가 결국 단일화를 문재인 후보로 한 게 아닌가.

-그게 11월의 저주에 해당되는 케이스인 건, 11월의 저주라고 하는 건 사실 선거 막판까지 갔을 때는 그동안에 막연하게 기대했던 3후보에 대한 거품이 빠지는 케이스가 있을 겁니다, 구체적으로요.

그래서 그동안에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권의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제3후보 지지로 갔다가 이제 선거 날짜 다가오면서 표가 정리되는 과정이라고 봐지고요.

안철수 후보의 경우에는 마지막까지도 상당히 높은 지지율을 가졌죠.

다만 이제 야권에서 두 사람이 나갔을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간혹 3자구도가 되는 이런 게 나왔습니다마는 확률은 굉장히 낮았습니다.

그래서 야권후보 단일화가 될 수밖에 없었고.

협상과정에서 서로 유리한 룰을 주고받다가 약속된 날짜까지 끝나지 않으려고 하니까 본인이 사퇴하는 방식으로 갔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케이스가 다르긴 합니다.

-11월이 되면 지금 말씀하셨습니다마는 부동층이 줄어들기 시작을 합니다.

강력한 여야의 대표주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말하자면 중간에 있던 부동층들이 줄어들면서 그러니까 11월의 저주라기보다는 지극히 당연하게 제3의 후보들은 어쩔 수 없이 한때 1, 2위 하는 후보가 아니라면 3위서부터는 정리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고요.

지금 안철수 후보 같은 경우에는 본래 본인이 단일화를 예정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단일화를 안 하겠다, 단일화해서 끝까지 가겠다는 얘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시간이 가면서 부동층이 줄어들면서 박근혜 후보한테는 완전히 견고한 지지층이 형성되는 데 비해서 야권후보는 두 사람으로 나눠져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둘이 단일화하지 않고서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자연스럽게 안철수 후보의 지지도가 조금 떨어지는 그런 모습을 보였다고 볼 수 있죠.

-이제 이렇게 과거 사건을 쭉 훑어보면서 지금 나오고 있는 우리 이제 반기문 대망론.

본인은 전혀 실체가 없다 이런 말씀까지 하셨는데 우리 정치권에서 이제 기존의 여야 정당 말고 제3지대에서 뭔가 대안세력을 찾으려는 그 현상, 긍정적인 측면은 뭐고 부정적인 측면은 뭔지.

이걸 어떤 면으로 봐야 되는지.

-부정적인 면까지는 볼 필요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보다시피 기존 정치인들 중에서 마땅치 않은 새로운 인물 기대하는 거 많지 않겠어요.

다만 뭔가 막연하게 정치에서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반짝 인기를 받고 가면 어떠냐라는 얘기를 하는데 그동안 여러 가지 과정을 보면 반짝 인기만 가지고 마지막까지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그만큼 검증하기 때문에요.

오히려 제3후보가 진입하기 쉽지 않은 정치적 환경 자체는 조정될 필요가 있는 다양한 세력들이 조금 진입 가능한 이걸로 바꾸는 것이 오히려 과제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동안에 저희 3후보들이 지지를 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거였거든요.

모든 제3후보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부 다 새정치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제3후보가 나와서 그야말로 새정치의 모습이 어떤 것이고 그것을 내가 실현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국민들한테 확신을 심어준다면 그렇다면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애석하게도 단 한 명도 이것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3후보가 약한 것이고요.

대선 과정이나 혹은 정치과정에서 양대세력으로 나눠지는 것은 대개 대통령제를 하고 있는 한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에요.

정당이 아무리 많아도 다당제라고 하더라도 국민의 선택은 대개 둘 중의 하나로 모아지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저는 이 시점에서는 새 정치라든가 새로운 정치, 국민의 정치 주장하는 사람들이 국민을 설득하는 신뢰를 가져야 된다 그렇게 보입니다.

-오늘은 최근 불고 있는 이른바 제3 인물론을 두고 그때 그 사건을 정리를 해 봤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시사진단에서는 앞서 어르신들을 위한 치매 얘기를 좀 나눠봤습니다.

치매를 걱정하는 분들에게는 이 얘기가 적당한 말일 듯싶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놀지 않아서 나이가 드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 어르신들의 열정을 지지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서 오늘은 이 노래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당신과 또 여러분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하다 이런 뜻입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읽는다 황상무의 시사진단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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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그 사건] 대선 ‘제 3 후보’ 운명은?
    • 입력 2014-11-06 16:50:43
    • 수정2014-11-06 17: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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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그 사건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때 그 사건이라는 코너를 한번 저희들이 마련해 봤습니다.

과거 제3후보들 한창 떴는데 지금 이 시각에, 지금 이 시점에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홍성걸 교수님 그리고 김만흠 원장님 두 분 모시고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8개월 정도 흘렀는데 벌써 갑자기 때아닌 무슨 차기 대권 논란이 불거졌어요.

이른바 반기문 대망론이 이번 주에 갑자기 확 떴어요.

사실은 지난주부터도 조금씩 얘기가 나왔는데.

그래서 오늘은 제3후보론을 둘러싸고 그때 그 사건을 한번 되돌아보면서 지금 이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얘기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 얘기에 앞서서 이 시기에 갑자기 반기문 대망론이 왜 나왔는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두 분 어떻게 보시는지 먼저 말씀 듣겠습니다.

-우선 이 얘기가 나오게 된 것은 여론조사 기관들이 반기문 지금 사무총장을 차기대권 후보자로서의 지지도 조사를 할 때 넣기 시작을 한 거예요.

그랬더니 여론의 지금 현재 정치권에 있는 어떤 후보들보다도 사실상 솔직히 그대로 얘기하면 박원순 후보보다 한 3배 정도 앞서게 나온 겁니다.

-30.7%, 40%.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확 올라간 거죠.

그러니까 물론 그전에도 조사할 때는 높게 나옵니다마는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놀라는 점도 있고 그다음에 여야 정치권에서는 이걸 가지고 사실은 자기들의 정치적인 여러 가지 계산 속에서 반기문 총장을 등장시킴으로써 지금 상당한 말하자면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겠다라고 계산한 그런 정치세력들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그것이 반기문 총장 자신은 단 한마디라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마치 그런 것처럼 반기문 대망론 이런 아주 거창한 이름으로 지금 나오게 된 겁니다.

-여야 정치권이 왜 양쪽에서 동시에 다 이런 건지.

지금 반기문 총장이 제발 얘기 좀 하지 말아달라고 얘기했으니까 좀 잦아들지 궁금한데 어떻게 보십니까?-이게 최근 또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마는 여야 모두가 지금 세계 재편기입니다.

알다시피 새누리당도 김무성 임시정부 체제로 가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갔던 관계를 구성하는 좀 복잡한 거 있지 않습니까?개헌론 나갔다 물리기도 하고.

그래서 여당도 지금 권력 재편 기구, 야당도 지금 사실상 경우에 따라서는 분단 얘기가 나올 정도로 권력이 재편 과정에 있고 그런데 확실한 차기주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다른 것 중 하나는 과거에 한쪽은 확실한 차기주자가 있고 다른 한쪽이 비어 있고 그쪽만 향해서 제3후보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반기문 총장이 여야 다 거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반기문 총장의 특성이 여야의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은 점도 있지만 여야 모두가 확실하게 독점후보가 없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얘기가 나왔고요.

예전에도 반기문 총장이 거론되기도 했었고 사실은 이전 대선에서도 거론된 적이 잠깐 있었죠.

그러다가 이번에는 올초에 반기문 총장 본인이 앞으로 차기대권주자 조사에서 거기서 빼달라 그랬다가 오랜만에 넣었는데 세게 나왔는데 그랬는데요.

저는 이게 당분간은 반기문 총장이 확실하게 본인은 아니다라고 쐐기를 박지 않는 한 좀 시간을 겪으면서 반복적으로 거론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시는군요.

그러면 반기문 총장이 일각에서 지적을 했어요.

나는 확실히 안 나간다 그런 말은 안 하고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이렇게만 얘기했는데 그렇게 얘기한 것도 있던데.

어떻게 보시는지?-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가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건데요.

지금 상황에서 반기문 총장이 아주 안 나간다, 절대 안 나간다라고 얘기하기도 좀 어렵고요.

본인의 여러 가지 상황이라든가 또 나간다는 모양새를 조금이라도 비출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전혀 관심이 없고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는 정도로 정리를 한 것 같아요.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그래서 정치전문가들이 분석하기를 야, 이건 나중에 그때 되면 상황을 봐서 나올 수도 있는 그런 항상 그야말로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와일드카드 아니냐 이렇게 지금 보고 있는 거죠.

-그러면 과거 대선에서도 이렇게 반기문 총장처럼 제3후보로서 거론됐던 그런 인물들이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한번 살펴봤으면 싶은데요.

이승현 아나운서 준비해 오셨죠.

-1987년 대통력 직선제로 개헌 이래 역대 대선마다 끊임없이 무당파 제3후보가 등장해 왔습니다.

모두 이들 후보들은 기성정치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해 왔는데요.

그때 그 제3의 후보들 정리해 봤습니다.

제일 먼저 1992년 대선에 나선 정주영 후보입니다.

당시 파격적인 공약과 함께 경제, 통일 대통령을 자임하면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했죠.

유세 중 연설장면 함께 들어보시겠습니다.

-내가 하는 흉내를 내느라고 자기가 1만 5000불 국가를 만들겠다네요.

참 소가 웃을 일이에요.

경제경제하면서 공부를 하는데 언제 경제 공부를 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한 5년 하는 거 구경하고 그리고 한 15년 후에 하라고 그랬습니다.

-1997년 대선입니다.

이인제 당시 경기도 지사가 경선 패배 후에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독자 출마를 선언했죠.

출마 선언 영상도 보시겠습니다.

-제가 출마를 결심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이 땅에 정치 명예혁명을 완수하여 국민 정치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소명감 때문입니다.

-그리고 2002년입니다.

대선을 약 3개월 앞두고 정몽준 당시 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장이 출마를 선언합니다.

-말뿐이었던 정치개혁에 제 몸을 던져야겠다는 소명의식에서입니다.

정치개혁 없이는 이 나라의 미래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몽준 후보는 노무현과 단일화에 합의했다가 대선 전날 합의를 파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기억하십니까?고건 전 총리입니다.

당시 유력후보들의 지지율을 뛰어넘으면서 주목받았습니다.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기 위해서 중도실용주의 개혁에 뜻을 같이 하는 여러 분야 인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하지만 결국 대선 불출마를 선언합니다.

2012년 지난 대선입니다.

안철수 현상이라고 불릴 만큼 정말 많은 주목을 받았었던 안철수 의원.

정치쇄신을 내걸면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었는데요.

그 영상 들어보시죠.

-저는 이번 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경험들이 정치를 하는데 플러스가 되면 됐지 마이너스는 아니라고 그렇게 판단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안철수 후보도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 중에 후보를 사퇴했습니다.

이렇게 역대 대선 제3후보들 정리해 봤습니다.

-딱 한 사람이 빠졌네요.

-누가 빠졌습니까?

-문국현 후보가.

-아, 그렇죠.

역대 대선에 나섰던 제3후보들 면면을 쭉 살펴봤는데 오늘 저희들 주제가 그때 그 사건이니까 하나하나 좀 짚어봤으면 싶습니다.

먼저 말이죠.

92년 정주영 후보 어떻게 보십니까?

-정주영 후보 사실은 이후에 다른 모든 제3후보와 다릅니다.

어떤 점에서 다르냐면 아마 오늘 보시는 시청자 여러분들께서 금방 눈치 채셨겠습니다마는 모든 후보들이 전부 다 소위 새정치, 정치개혁, 정치쇄신, 새로운 정치, 국민의 정치 이런 식으로 사실상 기존 정치권 내에 대한 불만을 등에 업고 나온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정주영 후보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경제 살린다 하고 나왔지만 사실은 여기에 우리 보도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마는 사실 정주영 후보가 아마 대한민국 기업인들 중에서 정치자금을 제일 많이 낸 분일 겁니다.

정치자금을 계속 내다 보니까 허리가 휘어진단 말이에요.

-그 불만 때문에 나왔다고 하셨죠.

-뭐 그런 얘기가 굉장히 많은데 그러니까 계속해서 민주화가 됐는데 그동안에 내가 정치자금을 엄청나게 냈는데 이게 도대체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주영 그 당시의 현대 회장께서 야, 나도 한번 정치해 보자.

내 돈이 얼마인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내가 내 돈 갖고 내가 정치하겠다는데 누가 뭐나겠느냐 이러고 나오신 거죠.

그런데 그것도 물론 기존의 정치권에 대해서 믿음이 없어져서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의미에서는 새정치의 하나의 패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마는 여하튼 그 당시의 상황은 그러한 배경이 좀 있었다.

이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게 여러 분들을 얘기했지만 지금 얘기하다시피 정주영 전 명예회장.

좀 배경이 다양하긴 합니다.

지적했다시피 당시 오공청문회에 불려나와가지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어떻게 돈을 줬는지.

내가 죽지 않으려고 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이죠.

그전에는 본인이 정치권에 협조해서 기업을 살렸지만 이제 본인이 직접 대통령이 돼서 하겠다 이렇게 나와서 그랬었는데 사실은 다른 나중에 나오는 안철수 후보는 본인이 1등을 달린 적도 있지만 정주영 후보는 가능성은 크게 뒀지만 후보군일 때 1등까지는 가지는 못했습니다.

못했고 아까 앵커께서도 자막에 나오고 화면에 나오고 했지만 기존의 대통령들하고 후보들하고 다르게 일반 국민들, 서민적인 말투로 그렇게 썼죠.

그렇게 써서 반값아파트 내세우고 심지어는 무상교육도 사실 먼저 내세우고 했었는데 당선까지 되지 못했는데 16%면 상당히 많이 얻었죠.

참고로 역대 3후보 중에서 가장 많이 득표했던 분이 나중에 이야기 된 이인제 후보가 19.2%.

역대 3후보 중에서는 가장 많이 득표를 했던 케이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정주영 후보는 그 정도로 짚어보고 말씀하셨는데 이인제 후보 좀 짚어보죠.

경선 불복을 하고 나왔다고 해서 그 이후에 지금까지도 사실은 굉장히 하여튼 정치적 타격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계속 의원직을 유지하고 계시고.

-이인제법이라는 게 생겼죠, 그래서.

그게 뭐냐하면 경선에 참여했던 사람은 해당 지역구에 나가면 못한다는 거죠.

그래서 대통령의 경우에는 그당 경선에 참여하는.

그때까지 괜찮았습니다.

이인제 의원이 경선에 참여했다가 서로 약속했다가 불복을 했는데 그 이후부터 국회의원들도 해당 당선에 참여하면 그 지역은 출마하지 못하는 이런 법이 만들어졌죠.

물론 이게 제가 보기에는 위험의 요소가 있긴 합니다마는 그게 만들어졌는데요.

당시 이인제 후보가 본인의 이야기로는 경선해 가지고 승리했던 이회창 후보와 결정적인 하자가 생겼다.

뭐냐하면 아들이 배경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그때 생겼고요.

본인 이미지는 어떻게 했냐면 당시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모델을 삼았습니다.

-아까 모습도 상당히 비슷했습니다.

-그렇게 모델을 나오고 새정치를 주장했던 당시 여론 사이에서 높게 나왔던 박찬정 잠재 후보까지도 본인을 지지하는 그런 상황이 되면서 이인제 후보는 앞에 나왔던 정몽준 후보와는 다르게 개인적으로는 한 달 정도는 선두를 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선두를 달린 적이 있어가지고 가능성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3등이 돼서 아마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기 쉽지 않은 상황인데 아마 결정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당선시키는 분열의 효과.

3자대결 구도를 만드는 그런 점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죠.

지금 이인제 의원은 당시에 신한국당 경선에 참여했으면 했죠.

해서 그 결과에 패배했으면 그걸 승복을 했다면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 역사가 지금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맨 처음에 승복을 했었죠, 그렇죠?그랬다가.

-결국 하여간 이회창 후보로서는 이길 수 없다라고 하는 판단을.

-병영문제 터지니까.

-그렇죠.

병영문제 터졌을 때 판단을 본인이 한 거예요.

-그렇죠, 본인이 한 거죠.

-본인이 하고 이걸 이길 수 없으니까 내가 나간다라고 한 겁니다.

인기가 굉장히 좋았죠.

요즘말로 하라면 새정치의 원조 아이돌쯤 될 겁니다.

그래서 그런데 이게 경선불복이 되면서 아까 잠깐 말씀하셨습니다마는 19.2%라는 굉장히 높은 걸 받았어요.

-500만표가 넘었죠.

-500만을 넘었는데 문제는 그 당시에 김대중 후보는 자민련의 김종필 후보를 끌어안아서 DJP 연합을 했어요.

그러니까 야당은 연합을 해서 단일후보가 나왔고.

여당은 후보가 분열됐다.

그러니까 결정적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이인제 후보가 안 나갔다면 이회창 후보가 승리할 수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던 거죠.

그렇게 DJP 연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차가 크지 않았었어요.

그래서 이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인데 그것이 그 당시에 정권도 집권여당에 넘겨줬을뿐만 아니라 신한국당이.

또 하나는 이인제 의원 본인의 정치인생도 거기서 말하자면 마침표를 찍었다, 사실상.

아까 논산에서.

이 양반이 지역구가 논산이에요.

논산의 지역구 주민들은 여전히 이인제 꿈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후보, 어느 후보도 지금 이인제 의원을 능가할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논산에서는 계속해서 지금 당선이 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19.2% 얻었는데 2007년 대선에서 자금조달 후보로 출마했을 때 1%도 안 되는 0.7% 득표를 했습니다.

-그랬죠.

-한때 19.2%였는데 당과 정치적인 환경에 따라서 그렇게 득표율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겁니다.

-경선 불복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됐죠.

-그것 때문에 2007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는 아주 깨끗하게 경선에 승복을 한 게 아닌가 그런 얘기도 있고.

이제 2002년 대선 때 정몽준 후보.

사실은 그때 우리가 월드컵 4강까지 갔고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고 해서 FIFA 부회장이었고.

굉장히 인기가 좋았었거든요.

그런데 역시 좀 끝에 가서는 후보 단일화 한다고 했다가 불복하고 결말이 안 좋았어요.

그렇죠?

-그 당시에 여론조사로.

그러니까 여론조사로 후보 단일화한 첫번째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주말에 여론조사하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은 후보단일화를 노무현 후보하고 했죠.

그래서 뭐 끝까지 가다가 나중에 밝혀진 얘기입니다마는 노무현 후보가 명동에서 마지막 날.

그러니까 선거 전날 당일 저녁에 유세를 하면서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 그러면서 후보를 거론하는데, 후보가 아니라 사람들 거론을 하는데 정몽준 후보를 거론을 안 했다.

그래서 말하자면 삐졌다 이런.

-격분하셨다.

-격분했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결국은 경선 무효를 선언했는데요.

이것이 사실 결정적으로 노무현 후보를 도와준 그런 일이었죠.

-오히려 도와줬다 그런 얘기죠.

-만약 후보단일화에서 정몽준 후보로 단정됐다고 하더라도 이게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사실 정몽준 후보로 단일화가 됐으면 당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을 테고.

결정적으로 정몽준 후보가 결정적으로 대권후보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월드컵 에너지였었는데요.

저는 그 월드컵 응원에너지가 정몽준 후보 한 사람한테만 갔던 것도 아니다.

사실은 노무현 후보가 결정적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배경도 거기에 있었다라고 봐집니다.

우리가 그때 나왔던 응원단 야간에 또.

그 에너지가 당시 새로운 정치에너지, 젊은 에너지, 변화에 대한 에너지가 있었고요.

그게 시기적으로는 초반에는 월드컵하고 직접 관련된 정몽준 후보한테 집중이 됐지만 나중에는 상당부분이 또 노무현 후보한테 반영이 됐고.

-그 열기가 노무현 당선.

-사실은 그런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에 저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거기에 보태고 싶은 게 2002년도지 않습니까?웹이 월드와이드앱이죠.

오늘날 인터넷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 대개 90년대 후반이었는데요.

그 월드컵 응원열기가 어떻게 해서 거리응원으로 우리도 처음 보는 거 아니었습니까?그 당시에 굉장히 조직화되고 100만명 이상이 모이고 하는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했느냐.

바로 인터넷을 통해서 그게 가능한 겁니다, 가능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월드컵이라고 하는 대상이 끝나고 나니까 이게 대선으로 옮겨간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노사모 활동이 온라인에서 사이버 공동체에서 굉장히 크게 일어났고 그것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노무현 후보의 당선 사례에 굉장히 크게 기여를 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죠.

이제 마지막으로 안철수 후보를 우리가 짚어봐야 되는데 우리 이승현 아나운서가 준비한 온 것이 있어서 이승현 아나운서 설명을 한번 들어보고 얘기를 해 보시죠.

11월이 되면 이상한 규칙이 있다면서요.

-오늘 11월의 저주와 관련해서 오늘도 시원하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과거 높은 지지율과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후보들이 갑자기 11월만 되면 지지율이 뚝 떨어지는 11월의 규칙이 존재하는데요.

먼저 97년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 함께 보겠습니다.

9월부터 올라서 11월 초만 하면 30%를 넘었던 지지율이 11월 말이 되면 15% 절반 정도로 뚝 떨어졌습니다.

물론 19%대로 득표를 했기 때문에 선방했다고 봐야 할까요.

2002년 정몽준 후보 지지율 볼까요.

9월 말에 30%를 넘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11월 들어서 22%까지 떨어진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때 30%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보였던 제3후보들이 대선을 한 달 앞둔 11월에 지지율이 떨어지는 현상이 반복되자 11월의 저주다 이런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설명을 들어보니까 이제 안철수 후보 때도 결국 이런 현상 때문에 안철수 후보가 결국 단일화를 문재인 후보로 한 게 아닌가.

-그게 11월의 저주에 해당되는 케이스인 건, 11월의 저주라고 하는 건 사실 선거 막판까지 갔을 때는 그동안에 막연하게 기대했던 3후보에 대한 거품이 빠지는 케이스가 있을 겁니다, 구체적으로요.

그래서 그동안에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권의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제3후보 지지로 갔다가 이제 선거 날짜 다가오면서 표가 정리되는 과정이라고 봐지고요.

안철수 후보의 경우에는 마지막까지도 상당히 높은 지지율을 가졌죠.

다만 이제 야권에서 두 사람이 나갔을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간혹 3자구도가 되는 이런 게 나왔습니다마는 확률은 굉장히 낮았습니다.

그래서 야권후보 단일화가 될 수밖에 없었고.

협상과정에서 서로 유리한 룰을 주고받다가 약속된 날짜까지 끝나지 않으려고 하니까 본인이 사퇴하는 방식으로 갔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케이스가 다르긴 합니다.

-11월이 되면 지금 말씀하셨습니다마는 부동층이 줄어들기 시작을 합니다.

강력한 여야의 대표주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말하자면 중간에 있던 부동층들이 줄어들면서 그러니까 11월의 저주라기보다는 지극히 당연하게 제3의 후보들은 어쩔 수 없이 한때 1, 2위 하는 후보가 아니라면 3위서부터는 정리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고요.

지금 안철수 후보 같은 경우에는 본래 본인이 단일화를 예정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단일화를 안 하겠다, 단일화해서 끝까지 가겠다는 얘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시간이 가면서 부동층이 줄어들면서 박근혜 후보한테는 완전히 견고한 지지층이 형성되는 데 비해서 야권후보는 두 사람으로 나눠져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둘이 단일화하지 않고서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자연스럽게 안철수 후보의 지지도가 조금 떨어지는 그런 모습을 보였다고 볼 수 있죠.

-이제 이렇게 과거 사건을 쭉 훑어보면서 지금 나오고 있는 우리 이제 반기문 대망론.

본인은 전혀 실체가 없다 이런 말씀까지 하셨는데 우리 정치권에서 이제 기존의 여야 정당 말고 제3지대에서 뭔가 대안세력을 찾으려는 그 현상, 긍정적인 측면은 뭐고 부정적인 측면은 뭔지.

이걸 어떤 면으로 봐야 되는지.

-부정적인 면까지는 볼 필요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보다시피 기존 정치인들 중에서 마땅치 않은 새로운 인물 기대하는 거 많지 않겠어요.

다만 뭔가 막연하게 정치에서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반짝 인기를 받고 가면 어떠냐라는 얘기를 하는데 그동안 여러 가지 과정을 보면 반짝 인기만 가지고 마지막까지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그만큼 검증하기 때문에요.

오히려 제3후보가 진입하기 쉽지 않은 정치적 환경 자체는 조정될 필요가 있는 다양한 세력들이 조금 진입 가능한 이걸로 바꾸는 것이 오히려 과제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동안에 저희 3후보들이 지지를 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거였거든요.

모든 제3후보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부 다 새정치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제3후보가 나와서 그야말로 새정치의 모습이 어떤 것이고 그것을 내가 실현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국민들한테 확신을 심어준다면 그렇다면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애석하게도 단 한 명도 이것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3후보가 약한 것이고요.

대선 과정이나 혹은 정치과정에서 양대세력으로 나눠지는 것은 대개 대통령제를 하고 있는 한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에요.

정당이 아무리 많아도 다당제라고 하더라도 국민의 선택은 대개 둘 중의 하나로 모아지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저는 이 시점에서는 새 정치라든가 새로운 정치, 국민의 정치 주장하는 사람들이 국민을 설득하는 신뢰를 가져야 된다 그렇게 보입니다.

-오늘은 최근 불고 있는 이른바 제3 인물론을 두고 그때 그 사건을 정리를 해 봤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시사진단에서는 앞서 어르신들을 위한 치매 얘기를 좀 나눠봤습니다.

치매를 걱정하는 분들에게는 이 얘기가 적당한 말일 듯싶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놀지 않아서 나이가 드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 어르신들의 열정을 지지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서 오늘은 이 노래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당신과 또 여러분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하다 이런 뜻입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읽는다 황상무의 시사진단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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