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명까지’ 세월호 실종자 수색 210일 사투

입력 2014.11.11 (14:00) 수정 2014.11.1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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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명까지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포기할 수 없었다."

설레는 수학여행길에 오른 고교생 등 476명의 승객을 태운 세월호가 4월 16일 침몰했다. 승무원을 포함해 172명만 구조됐고 295명이 사망했으며 9명이 실종됐다.

정부는 민간 합동으로 육·해·공에 걸쳐 전방위적인 수색에 나섰으나 사고 초기부터 계속된 구조 부실과 혼선으로 생존자를 한 명도 찾아내지 못하면서 국민을 분노케 했다.

침몰 210일이 지나 수색 작업은 결국 종료됐고 실종자 9명의 생사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 민·관·군 입체 수색 = 사고 발생 이후 꾸려진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해경·해군·소방대원·민간잠수사와 합동구조팀을 꾸리고 선체 수색과 구조 작업에 나섰다. 경비함정, 민간어선, 관공선, 헬기까지 투입돼 광범위한 해상 수색도 병행했다.

빠른 유속과 탁한 시야로 선체 수색은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해상 구조 작업만 이어지다가 사흘 만에 선체로 들어가는 통로를 확보하고 공기 주입이 시작됐다.

그러나 강한 조류와 장애물의 방해로 선체 진입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사흘 만에 세월호는 완전 침몰했다.

사고 발생 나흘 만에 선체 유리창을 깨고 선내에 진입, 처음으로 선체 내부에서 시신 수습이 이뤄졌다.

침몰 시점부터 사흘간 29명의 시신이 수습됐고 20여일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시신이 발견되면서 4월 29일까지 수습된 시신은 200구가 넘어섰다.

그러나 한 달이 넘어 선체 붕괴가 진행되면서 시신이 수습되지 않는 날이 차츰 늘어갔다. 사고 현장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유실된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수색 작업이 진척을 보이지 않자 다이빙벨 투입, 해저 음파 탐사, 전자코 도입 등 다양한 방법이 시도됐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5월 29일 승객이 가장 많이 잔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4층 선체 일부를 절단하고 장애물 제거 작업을 병행하면서 일반인, 단원고 학생, 서비스직 승무원의 시신이 수습되기도 했다.

이후 수색 작업이 진척이 없자 민간 잠수업체가 철수 입장을 밝히면서 수색 중단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실종자 가족들은 지난달 27일 무기명 투표로 수색 지속을 결정했고 민간 잠수업체도 철수를 번복하고 수색을 재개했다. 곧바로 마지막 실종자가 발견된 지 102일 만에 단원고 여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수색 중단 논의가 잠시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정부는 11일 수색 작업의 어려움과 잠수사 위험을 들어 수색 종료를 선언했고 실종자 가족들도 수색 중단을 요구하며 실종자 9명을 남기고 참사 발생 210일째에 수중수색은 마무리됐다.

◇ 구조 실패, 거듭된 혼선에 분노 = 현장에 최초 도착한 해경 경비함에는 선내 진입을 위한 요원이 없고 장비도 갖춰지지 않았다. 곧바로 도착한 해경 구난 헬기에도 인력이나 장비는 없었다.

해경은 해상으로 탈출한 승객이나 선체에서 손을 흔드는 승객들을 구조하기에 급급했고 그마저도 대부분 민간 어선에 의해 구조됐다.

해군 구조함도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침몰한 이후였고 링스헬기도 인원 이송용으로 구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선내 진입 장비를 갖춘 요원들이 신속하게 도착했다면 더 많은 인명이 구조됐을 것이라는 탄식이 나왔다.

선체 진입이 늦어지는 사이 세월호는 침몰했고 나흘 만에 선체 내 시신 수습이 이뤄질 수 있었다.

사고 초기부터 정부의 대응은 혼선만 지속해 분노를 샀다.

정부는 사고 당시 최초 탑승객을 477명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459명, 462명, 475명으로 정정을 계속했고 사고 발생 나흘 만에 탑승객을 476명으로 확정했다.

이후에도 명단에 없는 시신이 발견되고 발견된 시신이 바뀐 사실이 드러나면서 가족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현장을 통제한 해경은 구호 계약을 맺은 민간잠수업체 '언딘' 소속 잠수사를 먼저 투입하려고 해군과 다른 잠수사를 막았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수색 과정에서는 '언딘'과 다른 민간업체와의 힘싸움도 불거졌다.

구조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투입이 거부된 '다이빙벨'이 다시 현장에 배치되면서 수일동안 투입 논란이 빚어졌고 결국 '투입 실패'라는 촌극도 빚어졌다.

해경은 사고 이후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도 선내 진입에 실패하고 현장마저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며 무능함을 드러내 국민적인 공분을 샀다.

◇ "1초라도 줄이자" 잠수사들 악전고투 = 실종자 수색에는 해경, 해군, 소방대원을 비롯해 민간 잠수사들까지 총동원됐다.

잠수사들은 해상에 띄운 바지선에서 선체와 연결된 가이드라인을 잡고 선체 내부로 진입해 수색을 벌였다. 수분간 수중 수색을 벌인 뒤 바지선에 설치된 장비에서 감압과 휴식을 취하고 다시 수중으로 투입됐다.

물살이 세고 시야도 흐린 상황에서 붕괴 위험까지 감수하며 잠수사들은 매일 이 같은 수색 작업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반복된 잠수로 인해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로 잠수사들의 고통은 커졌고 수색에 처음 투입되고 선체 절단 작업에 참여한 민간 잠수사들이 숨지는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결국 민간 잠수업체가 더 이상의 수색은 의미가 없다며 중단 의사를 밝혔다가 가족들의 요구로 철회하고 곧바로 102일 만에 단원고 여학생의 시신을 수습하기도 했다.

이후 가족들이 희망하는 구역을 중심으로 교차수색을 이어가던 민간 잠수사들은 열악한 수색 환경과 위험성을 들어 정부의 수색 중단 발표와 동시에 현장에서 철수했다.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내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결국 공약(空約)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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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한명까지’ 세월호 실종자 수색 210일 사투
    • 입력 2014-11-11 14:00:56
    • 수정2014-11-11 14:01:42
    연합뉴스
"마지막 한 명까지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포기할 수 없었다." 설레는 수학여행길에 오른 고교생 등 476명의 승객을 태운 세월호가 4월 16일 침몰했다. 승무원을 포함해 172명만 구조됐고 295명이 사망했으며 9명이 실종됐다. 정부는 민간 합동으로 육·해·공에 걸쳐 전방위적인 수색에 나섰으나 사고 초기부터 계속된 구조 부실과 혼선으로 생존자를 한 명도 찾아내지 못하면서 국민을 분노케 했다. 침몰 210일이 지나 수색 작업은 결국 종료됐고 실종자 9명의 생사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 민·관·군 입체 수색 = 사고 발생 이후 꾸려진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해경·해군·소방대원·민간잠수사와 합동구조팀을 꾸리고 선체 수색과 구조 작업에 나섰다. 경비함정, 민간어선, 관공선, 헬기까지 투입돼 광범위한 해상 수색도 병행했다. 빠른 유속과 탁한 시야로 선체 수색은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해상 구조 작업만 이어지다가 사흘 만에 선체로 들어가는 통로를 확보하고 공기 주입이 시작됐다. 그러나 강한 조류와 장애물의 방해로 선체 진입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사흘 만에 세월호는 완전 침몰했다. 사고 발생 나흘 만에 선체 유리창을 깨고 선내에 진입, 처음으로 선체 내부에서 시신 수습이 이뤄졌다. 침몰 시점부터 사흘간 29명의 시신이 수습됐고 20여일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시신이 발견되면서 4월 29일까지 수습된 시신은 200구가 넘어섰다. 그러나 한 달이 넘어 선체 붕괴가 진행되면서 시신이 수습되지 않는 날이 차츰 늘어갔다. 사고 현장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유실된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수색 작업이 진척을 보이지 않자 다이빙벨 투입, 해저 음파 탐사, 전자코 도입 등 다양한 방법이 시도됐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5월 29일 승객이 가장 많이 잔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4층 선체 일부를 절단하고 장애물 제거 작업을 병행하면서 일반인, 단원고 학생, 서비스직 승무원의 시신이 수습되기도 했다. 이후 수색 작업이 진척이 없자 민간 잠수업체가 철수 입장을 밝히면서 수색 중단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실종자 가족들은 지난달 27일 무기명 투표로 수색 지속을 결정했고 민간 잠수업체도 철수를 번복하고 수색을 재개했다. 곧바로 마지막 실종자가 발견된 지 102일 만에 단원고 여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수색 중단 논의가 잠시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정부는 11일 수색 작업의 어려움과 잠수사 위험을 들어 수색 종료를 선언했고 실종자 가족들도 수색 중단을 요구하며 실종자 9명을 남기고 참사 발생 210일째에 수중수색은 마무리됐다. ◇ 구조 실패, 거듭된 혼선에 분노 = 현장에 최초 도착한 해경 경비함에는 선내 진입을 위한 요원이 없고 장비도 갖춰지지 않았다. 곧바로 도착한 해경 구난 헬기에도 인력이나 장비는 없었다. 해경은 해상으로 탈출한 승객이나 선체에서 손을 흔드는 승객들을 구조하기에 급급했고 그마저도 대부분 민간 어선에 의해 구조됐다. 해군 구조함도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침몰한 이후였고 링스헬기도 인원 이송용으로 구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선내 진입 장비를 갖춘 요원들이 신속하게 도착했다면 더 많은 인명이 구조됐을 것이라는 탄식이 나왔다. 선체 진입이 늦어지는 사이 세월호는 침몰했고 나흘 만에 선체 내 시신 수습이 이뤄질 수 있었다. 사고 초기부터 정부의 대응은 혼선만 지속해 분노를 샀다. 정부는 사고 당시 최초 탑승객을 477명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459명, 462명, 475명으로 정정을 계속했고 사고 발생 나흘 만에 탑승객을 476명으로 확정했다. 이후에도 명단에 없는 시신이 발견되고 발견된 시신이 바뀐 사실이 드러나면서 가족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현장을 통제한 해경은 구호 계약을 맺은 민간잠수업체 '언딘' 소속 잠수사를 먼저 투입하려고 해군과 다른 잠수사를 막았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수색 과정에서는 '언딘'과 다른 민간업체와의 힘싸움도 불거졌다. 구조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투입이 거부된 '다이빙벨'이 다시 현장에 배치되면서 수일동안 투입 논란이 빚어졌고 결국 '투입 실패'라는 촌극도 빚어졌다. 해경은 사고 이후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도 선내 진입에 실패하고 현장마저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며 무능함을 드러내 국민적인 공분을 샀다. ◇ "1초라도 줄이자" 잠수사들 악전고투 = 실종자 수색에는 해경, 해군, 소방대원을 비롯해 민간 잠수사들까지 총동원됐다. 잠수사들은 해상에 띄운 바지선에서 선체와 연결된 가이드라인을 잡고 선체 내부로 진입해 수색을 벌였다. 수분간 수중 수색을 벌인 뒤 바지선에 설치된 장비에서 감압과 휴식을 취하고 다시 수중으로 투입됐다. 물살이 세고 시야도 흐린 상황에서 붕괴 위험까지 감수하며 잠수사들은 매일 이 같은 수색 작업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반복된 잠수로 인해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로 잠수사들의 고통은 커졌고 수색에 처음 투입되고 선체 절단 작업에 참여한 민간 잠수사들이 숨지는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결국 민간 잠수업체가 더 이상의 수색은 의미가 없다며 중단 의사를 밝혔다가 가족들의 요구로 철회하고 곧바로 102일 만에 단원고 여학생의 시신을 수습하기도 했다. 이후 가족들이 희망하는 구역을 중심으로 교차수색을 이어가던 민간 잠수사들은 열악한 수색 환경과 위험성을 들어 정부의 수색 중단 발표와 동시에 현장에서 철수했다.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내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결국 공약(空約)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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