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17년전 IMF 금융위기

입력 2014.11.21 (16:01) 수정 2014.11.2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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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7년 전이죠.

당시 IMF와 국운을 건 협상을 이끌었던 주역.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당시 IMF 우리 외환위기 발생에서부터 그 이후에 직접 외환위기 협상, 그 이후에 또 뉴욕 외채협상까지 전 과정에 참여를 해 주셨었는데 당시 직책이 국제금융 차관보셨던가요?

-그런데 공식직함은 제2차관보, 재정경제원 제2차관보였죠.

제1차관보는 국내, 제2차관보는 대외 이렇게.

대외 담당 차관보였죠.

-그러니까 모든 과정을 잘 아셨던 것 같은데.

이런 얘기를 하셨죠.

소를 잃는 데도 기여하고 외양간을 고치는 데도 기여를 했다.

이런 표현을 하셔서 무슨 의미인지 들어봤으면 싶습니다.

-사실 97년에 그런 악몽과 같은 IMF 체제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 우리가 많은 회한이 있습니다.

좀 더 빨리 의사결정을 했으면, 대통령선거가 그때 없었더라면 하면서 많은 의문부호를 갖게 되는데.

-그렇죠.

사실은 위기는 거의 97년 초부터 쭉 있었는데 말이죠.

-많은 경고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을 포함해서 우리 관료, 정치권이 모두 대통령 선거에 매달리는 과정에서 의사결정을 너무 늦게 하기 때문에 협상카드를 쓸 여유도 없는 벼랑끝에서 협상이 시작되는 비운을 겪었기 때문에 그 자체는 소를 잃는 데 나도 그 당시에 공무원이었고 그래서 기여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왕 IMF 체제에 들어간 이상 우리 국민들은 우수했고 현명했고 뒤늦게 외양간을 고치는 데 국민들의 협조 하에서 우리 협상팀도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위기를 사전에 좀 방지하지 못한 데 대해서도 책임이 있으시고 그 이후에 협상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셨다.

외환위기 끝나고 10년 뒤에 책을 하나 쓰셨어요.

징비록이라는, 외환위기 징비록이라는 책인 것 같은데.

-이 책인데.

-갖고 나오셨군요.

-이 책은 제가 그 이후에 재정경제부 1.

-돌려봐주시죠.

-재정경제부 1차관, 재정경제부 차관 그리고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다음에 은퇴 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로 갔어요.

그래서 국제금융연구센터 소장을 맡았는데 그때 여기저기서 이 외환위기에 대해서 막 출판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 대부분 맞지만 안 맞는 부분도 상당히 있는 것 같고 현장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쓴 것도 있고 그래서 책임감 같은 것이 있었어요.

이걸 하나의 정사로.

야사가 지배하지 않게 정사로 한번 써야겠다.

그런데 이걸 아주 결벽증 나게 정확하게 한다고 10년이나 걸렸습니다.

-걸려서 쓰셨군요.

징비록은 유성룡 선생이 임진왜란 끝나고 나서 쓴 책인데 왜 그런 이름을 쓰셨는지요?

-저는 역사가 항상 반복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경제나 사회 구조, 정치적인 지배구조 이런 것들이 기본적으로 취약점을 갖고 있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사가 짧고 이런 데서 나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IMF 체제 하에서 완전히 정리하기 어려웠고 예를 들면 한국 경제라는 이 환자를 배를 가르고 그 안을 들여다본 몇몇 사람 중에 하나인데 그때 모든 걸 다 정리 못하고 다시 꿰맬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위기의 요인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다.

그래서 이걸 보고 한국 국민들이나 우리 공무원이나 누구나 잘 망각하죠.

자주 잊어버리고.

그래서 이걸 계율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교훈은 뭐고 그 당시에 우리가 다 못한 회한은 무엇인가.

이것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임진왜란 이후에 만일 유성룡 선생이 징비록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았으면 아마 야사가 엄청나게 지배하는 그런 상황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걸 쓰게 됐습니다.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 그런 의미에서 징비록이다.

그러면 외환위기 당시 긴박했던 협상과정 어떻게 진행됐는지 이승현 아나운서가 정리를 좀 해 주시죠.

-17년 전 초로 가보겠습니다.

우리 경제에 눈에 보이는 경고등이 켜지기 시작하던 시기인데요.

한보, 삼미, 진로 등 대기업들의 부도가 이어졌고요.

또 동남아시아의 외환위기까지 와서 한국 경제 단기외채가 물밀듯이 빠져나가던 상황이었습니다.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긴급자금지원을 공식 요청합니다.

그리고 23일 IMF 협상단 1진이 도착하고 4일 후인 11월 26일 협상단장이 입국해서 정부와의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12월 3일 오전에는 당시 IMF 총재였던 캉드쉬가 서울에 도착했는데요.

그날 밤 정부와 IMF 간의 협상이 타결됐습니다.

-국민 여러분에게 진실로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위기는 계속됐습니다.

1998년 1월에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 외채가 당시에 200억불이 넘는 상황이었는데요.

단기외채 문제를 재조정하기 위해 정부가 직접 협상에 나섰습니다.

이른바 뉴욕 외채협상이었죠.

-백마고지의 전투와 비유를 할 만큼 한쪽이 설득력을 얻는 방안을 제시하면 다시 상대방에서 그에 반대되는 걸 제기하고.

-결국 더 최악으로 빠질 수 있는 상황을 막고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무리지으면서 외환위기의 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제 97년 초 외환위기 상황부터 뉴욕 외채협상까지 쭉 살펴봤는데.

당시 이런 표현을 쓰셨더라고요.

굴욕협상이었다.

협상 분위기가 어땠길래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요?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죠.

-어떤 물건을 시중에 내다 판다.

시장에서 이걸 매각을 할 때 언제 매각하느냐에 따라서 이게 폐품 가격으로 팔리기도 하고 굉장히 프리미엄 받고 팔기도 하고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 상황을 좀 단호하게 정리를 못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인 여건 때문에 막바지에 가서 이걸 이미 이제 국제적인 신뢰를 다 잃어버린 후에 IMF행을 결정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미 IMF에서 한국을 어떻게 요리해야 될까, 카드를 다 가지고 왔기 때문에 협상의 여지가 없죠.

그러니까 결국 보면 우리가 씨름판에서 씨름을 하다가 샅바를 놓치면 아주 처절하게 끌려다니는 그런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와 유사한 관계에 있었고 IMF가 일방적으로 자기들의 협상카드를 밀어붙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거기의 독소조항을 빼려고 무진장 노력하는 그런 과정에서 처절한 샅바싸움이 계속됐던 것이죠.

-당시 입국했던 캉드쉬 총재가 우리 대통령 후보들한테도 각서까지 받아와라 그런 얘기도 있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휴버트 나이스 아시아태평양국장과 우리 사이의 일단 가조인 상태의 협상카드가 완성이 됐었는데 그 당시에 시장에서 IMF 협상카드라는 것이 별로 쓸모가 없다.

돈은 전부 1998년 하반기 이후에 들어오게 돼 있고 일부만 조기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외화유동성을 막기에는 좀 부족한 카드다라는 것이 굉장히 확산되니까 이런 분위기를 막기 위해서 캉드쉬 총재가 우리는 그걸 굉장히 고통스러운 고문이라고 그러는데, 고통스러운 고문을 우리한테 줬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목적인데, 그 양반이 온 건 자기가 이렇게 최선을 다했다고 국제금융 사회에 과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김대중 후보 등 많은 후보들이 IMF와 재협상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새로 들어오는 정부가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단계였지만 이것이 이행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각서를 받는.

그런데 그 자체는 논리적으로 서양에서는 있을 수 있지만 한국 같은 입장에서는 굉장히 굴욕적이라고 생각이 되는 거죠.

-우리 후보들이 다 각서를 써줬습니까?

-예.

우리 재경원 간부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비행장에서 사인을 받기도 하고 그래서 다 받아서 줬습니다.

-협상 과정 중에 당시 이사장님께서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흘리셨다 이런 대목이 있다는데.

그러셨습니까?-그런데 사나이가 엉엉 울 수는 없고 그 이후에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당선자로 나오면서 클린턴 대통령하고 통화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상황이 이렇게 어렵고 또 우리도 실무진들도 대통령 당선자 측에 외환 보유고가 38억불밖에 안 남았다, 이런 상황을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그 대통령 당선자가 아주 노련한 분이기 때문에 자기의 평소의 지론을 다 접고 어떻게든지 국제금융 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아주 정치적인 발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 덕을 많이 봐서 결국은 그다음부터 한국이 싹수가 있는 나라겠다 그래서 특히 백악관의 로빈 재무장관 같은 매파를 물리치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또 국방장관 이런 사람들이 우군이 돼서 백악관의 분위기가 이제는 한국을 살리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맞다, 이런 판단을 한 것으로 저희들이 전해 듣고 그때부터 우리는 이제부터 강공이다.

협상 전략을 수정하게 되죠.

-그런데 그전에 말이죠.

협상을 할 때 일부 돌이켜보면 IMF가 우리한테 참으로 무리한 요구를 많이 하고 긴축조정하고 각 기업들 구조조정 요구 많이 했을 때 우리가 물론 카드가 없어서 그랬기는 했습니다마는 대부분 그 요구를 다 받아서 결국 그것이 나중에 한국 경제에 큰 부담이 되지 않았느냐, 그런 지적들도 많은데 어떻습니까?

-나중에 1998년 4월에 IMF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라는 사람이 그건 롱 메디슨(wrong medicine)이었다.

처방이 잘못됐었다 하는 걸 인정했는데.

모든 것이 그런 건 아니고, IMF의 세칭 얘기하는 부대조건이라는 게 네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거시경제정책을 긴축으로 가져간다.

그러면서 금리도 30% 이상의 고금리를 가지고 간다.

예산도 굉장히 긴축으로 가져가고 또 통화증발도 최대한 억제해서 이게 첫 번째고.

두 번째가 이제 금융 구조조정과 기업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세 번째가 개방을 확대한다.

네 번째가 공기업을 민영화한다.

이 네 가지였는데 그중에 가장 잘못됐다고 일컬어지는 것이 거시경제 정책인데 그걸 30%가 넘는 이런 고금리를 하면 한 달 내지 일주일 정도의 짧은 기간에 쓰는 것이지, 우리같이 넉 달을 그 체제로 간다는 건 IMF의 큰 오류였고.

-실책이었다?-예, 그래서 우리가 연쇄부도, 흑자도산 이것이 이루어지면서 대규모 실업사태로 가게 되는 거죠.

그다음에 그중에 개방 체제로 가는 문제도 우리가 OECD와의 협상에서 50% 정도의 개방도를 가지고 가려고 했었는데 그걸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100% 개방으로 가게 됐는데, 그것이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비교환성 통화국가이면서도 완전개방해서 통화정책의 독자성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됐고.

-그래서 일각에서 말이죠, 당시 비슷한 위기를 겪었던 말레이시아나 러시아 같은 경우는 IMF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차라리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서 오히려 국부 유출 같은 피해를 겪지 않았다 그런 지적도 많은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그 당시에 그런 논의도 많이 있었습니다.

많이 있었는데, 그 나라와 우리 한국의 경우는 다른 것이 거기는 문 걸어 잠그고 바나나만 따먹어도 국민들이 굶지 않는 그런 자원 보유국이었고.

-우리는 사실은 IMF체제로 갈 수밖에는 없었던 상황이죠?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뭐냐하면 대외 신인도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리고 우리가 제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기 때문에 제조업의 도산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모라토리엄 선언한다, 그러면 연쇄부도 상태에 있고 외채에 대해서 동결을 해서 일부 이익 보는 것보다 국제 금융사회에 조기에 복귀하는 이런 걸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이사장님께서 잠깐 지적을 하셨습니다마는 우리가 자본시장을 개방을 하면서 국제투기자본들이 완전히 우리를 그냥 거의 너무나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런 체제가 된 게 아닌가 그런 지적들도 있는데 그 점은 어떻게 보십니까?-국제 금융이 완전 우리 자본시장을 100%개방도로 가지고 가면 그건 이미 각오가 돼야 됩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우리가 내부에서 체질을 강화해서 농단하지 못하게.

그런데 좀 지나고 보면 결론은 일부 자산 매각에 있어서 외국 자본들이 싸게 산다든지 그 당시에 결국 우리가 정책 미스를 해서 너무 늦게 IMF로 가는 바람에 값싸게 판 점은 있지만 지금 현재 삼성이나 현대나 이런 대기업들이 지금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크게 된 데는.

-체질 개선의 효과가 있었다.

-체질 개선의 효과가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금융 구조조정과 기업 구조조정은 어차피 우리가 해야 될 걸 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뭔가 회한이 남는 건 아니고.

그 고금리 정책을 포함한 거시경제의 긴축 그거는 남미나.


남미 국가들, 멕시코나 브라질같이 자기네들 재정 증권, 재정을 해외에서 조달해서 쓰는 나라, 이런 나라들이 주로 쓰던 카드였는데.

-그 카드를 우리한테 적용했다?

-잘못해서, 그래서 제프리 삭스라는유명한 교수는 롱 메디슨 투 아시아라는(Wrong medicine to Asia)유명한 논문을 쓰게 되죠.

-알겠습니다.

당시 우리 국민들 고통도 상당했었는데 당시 상황과 또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들, 우리 이승현 아나운서 소개를 해 주시죠.

-실제로 한국 경제 전반에 많은 구조조정이 일어났습니다.

그중에서 1998년 봄 제일은행의 4000명의 감원이 이루어졌는데요.

당시 촬영했던 눈물의 비디오 영상 준비했습니다.

함께 보시죠.

-제일은행 여러분, 제일은행 정말 사랑합니다.

제가 15년 동안 근무하면서 정말 열심히 일했고요.

남아 계신 여러분들 정말, 제일은행 진짜 똘똘 뭉쳐가지고.

-당시 IMF 체제의 고통을 상징하면서 이 눈물의 비디오가 많은 국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참 위기에 강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위기 극복을 위해서 당시 우리 국민들이 보여줬던 금모으기 운동은 해외 투자자들에게는 강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돌반지도 나오고요.

여러 가지.

-우리 영감 환갑이라고 사위가 해 준 금반지고요.

-가락지 다 빼시고 손이 너무 허전하지 않으세요?

-허전할 것 같으면 안 나오죠.

반지 끼고 앉아 배고프면 뭐 할 거예요.

개인은 부자고 나라는 가난하니까 부지런히 다 내놔서 갚아야 해요.

-지금 이렇게 어려운 때에 내가 금을 달고 옷을 입고 다닌다는 자체가 잘못된 인식이 가기 때문에 내놨습니다.

-지금 다시 봐도 참 가슴 찡하고 또 하나,우리 국민들 참 훌륭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가 그래도 이 IMF 체제를 사실은 가장 빨리 극복했던 그런 저력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결국은 우리 일반 시민들, 우리 평범한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청천벽력 같은, 자기가 경제가 이렇게 나빠지는데 별로 기여한 생각이 없는데 왜 나라가 이렇게 됐는가? 왜 정치가 이걸 이렇게 만드는가 하는 엄청난 회한이 있고 불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스스로가 하늘이 돕기 위해서 스스로 돕는 그런 행위를 함으로써 국제금융사회에서 굉장히 협상 과정에서 유효하게 작용을 했습니다.

-우리 국민이 보여준 외환위기 극복 노력이 우리 정부들의 협상단에도 엄청난 뒷받침이 됐다는 말씀입니까?

-예.

그래서 우리는 국민들이 이러이러한 마음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소상한 내용을 잘 모른다.

우리 국민들이 선택한 길은 나라를 살리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나중에 IMF가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굉장히 저평가를 받게 되고 한국에 잘못된 처방을 내린 것에 대해서 비난이 있을 때 IMF가 앞으로 잘하겠다고 비디오를 제작했는데 그 타이틀에 해당되는 그림이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IMF도 한국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을 인용해서 자기들 스스로가 살아보려고 하는 얄미운 면도 있었지만 그러나 하여튼 그 당시에 우리 국민의 저력은 만천하에 과시되는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저도 개인적인 기억이 좀 나는데, 2012년도에 제가 워싱턴의 IMF 본부에서 당시 스트로스 칸 총재랑 인터뷰를 했는데 한국에 대해서 취했던 조치는 자기들도 실수를 인정한다, 사과한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하여튼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제 우리가 이 시점에서 이것을 다시 한 번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의 얘기만 다시 들춰보자는 것이 아니라 남긴 교훈이 뭔지, 우리가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말고 지금 우리 또 경제가 어려운데 앞으로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나가야 할 것인지 그 얘기를 해보고 싶어서 오늘 이 자리에 모신 건데요.

교훈.

-지금 보면 우리가 그 당시에 박정희식 개발 모형을 87년에 민주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체제 또는 사회 지배구조 이건 박정희식 개발 모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OECD에 가입하기로 결정을 했고 우리의 경제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개혁이 필요했는데 그 당시에 우리 정경유착이라든지.

-우리가 스스로 못하고 외부에서 칼을 들이대서 타의적으로 한 게 가슴 아프다.

-예.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상황에 예민했어야 되는데, 경제의 정치화가 아주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이것을 우리 국민들이 일어나서 그렇게 하지 마라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경제에서 정치화는 최대의 독이다.

그게 첫 번째 교훈이고, 그다음에 현명한 나라의 국민은.

위기의 요인은 항상 산재해 있어요.

그 산재해 있는 위기를 잘게 잘라서 조그맣게 관리해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걸 해결할 수 있는 그 범위로 관리하는데, 대개 바보스러운 나라는 산재해 있는 위기 요인을 다 모아서 커져가지고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정도로 키운 다음에 남의 힘에 의해서 그 문제를 해소하는 이런 면이 있기 때문에 위기의 요인이 항상 산재해 있다는 걸 지금도 사실 우리는 위기의 요인에 휩싸여 있다는 것.

-커다란 위기를 잘게 쪼개서 스스로.

-관리 가능하게 해야 한다.

세 번째는 결국 한번 구조조정 해서 금융이든 기업이든 구조조정 해서 정리했다고 해서 그게 계속해서 유효한 것은 아니다.

-위기는 언제든지 또다시 올 수 있다.

-그래서 결국 그 당시의 국면을 벗어나는 데는 기여해도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이노베이션 DNA라고 할까요.

혁신적 DNA를 작동해서 해야 되는데 우리나라 대기업이라든지 이런 기업들이 상당히 성공한 부분이 바로 창의였는데, 지금 다시 2000년 넘어오면서부터 정치의 계절이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잔인한 선택을 해야 되는 구조조정이라든지 이런 걸 게을리하고 온정주의를 중심으로 해서 정치가 개입을 합니다.

-정치 배제, 위기 관리,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

-이런 것들이 지금 아쉬운 단계인데 지금 현재도 그런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알겠습니다.

17년 만에 되돌아보는, IMF 17주년에 되돌아보는 교훈으로서 이사장님이 남기신 세 가지 교훈 말씀 우리 가슴에 새기고 다시는 이런 위기가 닥치지 않도록 잘 좀 대비를 했으면 좋겠다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 좋은 말씀 정말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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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그 사건] 17년전 IMF 금융위기
    • 입력 2014-11-21 16:54:00
    • 수정2014-11-21 17:41:53
    시사진단
꼭 17년 전이죠.

당시 IMF와 국운을 건 협상을 이끌었던 주역.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당시 IMF 우리 외환위기 발생에서부터 그 이후에 직접 외환위기 협상, 그 이후에 또 뉴욕 외채협상까지 전 과정에 참여를 해 주셨었는데 당시 직책이 국제금융 차관보셨던가요?

-그런데 공식직함은 제2차관보, 재정경제원 제2차관보였죠.

제1차관보는 국내, 제2차관보는 대외 이렇게.

대외 담당 차관보였죠.

-그러니까 모든 과정을 잘 아셨던 것 같은데.

이런 얘기를 하셨죠.

소를 잃는 데도 기여하고 외양간을 고치는 데도 기여를 했다.

이런 표현을 하셔서 무슨 의미인지 들어봤으면 싶습니다.

-사실 97년에 그런 악몽과 같은 IMF 체제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 우리가 많은 회한이 있습니다.

좀 더 빨리 의사결정을 했으면, 대통령선거가 그때 없었더라면 하면서 많은 의문부호를 갖게 되는데.

-그렇죠.

사실은 위기는 거의 97년 초부터 쭉 있었는데 말이죠.

-많은 경고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을 포함해서 우리 관료, 정치권이 모두 대통령 선거에 매달리는 과정에서 의사결정을 너무 늦게 하기 때문에 협상카드를 쓸 여유도 없는 벼랑끝에서 협상이 시작되는 비운을 겪었기 때문에 그 자체는 소를 잃는 데 나도 그 당시에 공무원이었고 그래서 기여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왕 IMF 체제에 들어간 이상 우리 국민들은 우수했고 현명했고 뒤늦게 외양간을 고치는 데 국민들의 협조 하에서 우리 협상팀도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위기를 사전에 좀 방지하지 못한 데 대해서도 책임이 있으시고 그 이후에 협상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셨다.

외환위기 끝나고 10년 뒤에 책을 하나 쓰셨어요.

징비록이라는, 외환위기 징비록이라는 책인 것 같은데.

-이 책인데.

-갖고 나오셨군요.

-이 책은 제가 그 이후에 재정경제부 1.

-돌려봐주시죠.

-재정경제부 1차관, 재정경제부 차관 그리고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다음에 은퇴 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로 갔어요.

그래서 국제금융연구센터 소장을 맡았는데 그때 여기저기서 이 외환위기에 대해서 막 출판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 대부분 맞지만 안 맞는 부분도 상당히 있는 것 같고 현장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쓴 것도 있고 그래서 책임감 같은 것이 있었어요.

이걸 하나의 정사로.

야사가 지배하지 않게 정사로 한번 써야겠다.

그런데 이걸 아주 결벽증 나게 정확하게 한다고 10년이나 걸렸습니다.

-걸려서 쓰셨군요.

징비록은 유성룡 선생이 임진왜란 끝나고 나서 쓴 책인데 왜 그런 이름을 쓰셨는지요?

-저는 역사가 항상 반복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경제나 사회 구조, 정치적인 지배구조 이런 것들이 기본적으로 취약점을 갖고 있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사가 짧고 이런 데서 나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IMF 체제 하에서 완전히 정리하기 어려웠고 예를 들면 한국 경제라는 이 환자를 배를 가르고 그 안을 들여다본 몇몇 사람 중에 하나인데 그때 모든 걸 다 정리 못하고 다시 꿰맬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위기의 요인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다.

그래서 이걸 보고 한국 국민들이나 우리 공무원이나 누구나 잘 망각하죠.

자주 잊어버리고.

그래서 이걸 계율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교훈은 뭐고 그 당시에 우리가 다 못한 회한은 무엇인가.

이것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임진왜란 이후에 만일 유성룡 선생이 징비록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았으면 아마 야사가 엄청나게 지배하는 그런 상황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걸 쓰게 됐습니다.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 그런 의미에서 징비록이다.

그러면 외환위기 당시 긴박했던 협상과정 어떻게 진행됐는지 이승현 아나운서가 정리를 좀 해 주시죠.

-17년 전 초로 가보겠습니다.

우리 경제에 눈에 보이는 경고등이 켜지기 시작하던 시기인데요.

한보, 삼미, 진로 등 대기업들의 부도가 이어졌고요.

또 동남아시아의 외환위기까지 와서 한국 경제 단기외채가 물밀듯이 빠져나가던 상황이었습니다.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긴급자금지원을 공식 요청합니다.

그리고 23일 IMF 협상단 1진이 도착하고 4일 후인 11월 26일 협상단장이 입국해서 정부와의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12월 3일 오전에는 당시 IMF 총재였던 캉드쉬가 서울에 도착했는데요.

그날 밤 정부와 IMF 간의 협상이 타결됐습니다.

-국민 여러분에게 진실로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위기는 계속됐습니다.

1998년 1월에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 외채가 당시에 200억불이 넘는 상황이었는데요.

단기외채 문제를 재조정하기 위해 정부가 직접 협상에 나섰습니다.

이른바 뉴욕 외채협상이었죠.

-백마고지의 전투와 비유를 할 만큼 한쪽이 설득력을 얻는 방안을 제시하면 다시 상대방에서 그에 반대되는 걸 제기하고.

-결국 더 최악으로 빠질 수 있는 상황을 막고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무리지으면서 외환위기의 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제 97년 초 외환위기 상황부터 뉴욕 외채협상까지 쭉 살펴봤는데.

당시 이런 표현을 쓰셨더라고요.

굴욕협상이었다.

협상 분위기가 어땠길래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요?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죠.

-어떤 물건을 시중에 내다 판다.

시장에서 이걸 매각을 할 때 언제 매각하느냐에 따라서 이게 폐품 가격으로 팔리기도 하고 굉장히 프리미엄 받고 팔기도 하고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 상황을 좀 단호하게 정리를 못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인 여건 때문에 막바지에 가서 이걸 이미 이제 국제적인 신뢰를 다 잃어버린 후에 IMF행을 결정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미 IMF에서 한국을 어떻게 요리해야 될까, 카드를 다 가지고 왔기 때문에 협상의 여지가 없죠.

그러니까 결국 보면 우리가 씨름판에서 씨름을 하다가 샅바를 놓치면 아주 처절하게 끌려다니는 그런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와 유사한 관계에 있었고 IMF가 일방적으로 자기들의 협상카드를 밀어붙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거기의 독소조항을 빼려고 무진장 노력하는 그런 과정에서 처절한 샅바싸움이 계속됐던 것이죠.

-당시 입국했던 캉드쉬 총재가 우리 대통령 후보들한테도 각서까지 받아와라 그런 얘기도 있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휴버트 나이스 아시아태평양국장과 우리 사이의 일단 가조인 상태의 협상카드가 완성이 됐었는데 그 당시에 시장에서 IMF 협상카드라는 것이 별로 쓸모가 없다.

돈은 전부 1998년 하반기 이후에 들어오게 돼 있고 일부만 조기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외화유동성을 막기에는 좀 부족한 카드다라는 것이 굉장히 확산되니까 이런 분위기를 막기 위해서 캉드쉬 총재가 우리는 그걸 굉장히 고통스러운 고문이라고 그러는데, 고통스러운 고문을 우리한테 줬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목적인데, 그 양반이 온 건 자기가 이렇게 최선을 다했다고 국제금융 사회에 과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김대중 후보 등 많은 후보들이 IMF와 재협상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새로 들어오는 정부가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단계였지만 이것이 이행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각서를 받는.

그런데 그 자체는 논리적으로 서양에서는 있을 수 있지만 한국 같은 입장에서는 굉장히 굴욕적이라고 생각이 되는 거죠.

-우리 후보들이 다 각서를 써줬습니까?

-예.

우리 재경원 간부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비행장에서 사인을 받기도 하고 그래서 다 받아서 줬습니다.

-협상 과정 중에 당시 이사장님께서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흘리셨다 이런 대목이 있다는데.

그러셨습니까?-그런데 사나이가 엉엉 울 수는 없고 그 이후에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당선자로 나오면서 클린턴 대통령하고 통화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상황이 이렇게 어렵고 또 우리도 실무진들도 대통령 당선자 측에 외환 보유고가 38억불밖에 안 남았다, 이런 상황을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그 대통령 당선자가 아주 노련한 분이기 때문에 자기의 평소의 지론을 다 접고 어떻게든지 국제금융 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아주 정치적인 발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 덕을 많이 봐서 결국은 그다음부터 한국이 싹수가 있는 나라겠다 그래서 특히 백악관의 로빈 재무장관 같은 매파를 물리치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또 국방장관 이런 사람들이 우군이 돼서 백악관의 분위기가 이제는 한국을 살리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맞다, 이런 판단을 한 것으로 저희들이 전해 듣고 그때부터 우리는 이제부터 강공이다.

협상 전략을 수정하게 되죠.

-그런데 그전에 말이죠.

협상을 할 때 일부 돌이켜보면 IMF가 우리한테 참으로 무리한 요구를 많이 하고 긴축조정하고 각 기업들 구조조정 요구 많이 했을 때 우리가 물론 카드가 없어서 그랬기는 했습니다마는 대부분 그 요구를 다 받아서 결국 그것이 나중에 한국 경제에 큰 부담이 되지 않았느냐, 그런 지적들도 많은데 어떻습니까?

-나중에 1998년 4월에 IMF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라는 사람이 그건 롱 메디슨(wrong medicine)이었다.

처방이 잘못됐었다 하는 걸 인정했는데.

모든 것이 그런 건 아니고, IMF의 세칭 얘기하는 부대조건이라는 게 네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거시경제정책을 긴축으로 가져간다.

그러면서 금리도 30% 이상의 고금리를 가지고 간다.

예산도 굉장히 긴축으로 가져가고 또 통화증발도 최대한 억제해서 이게 첫 번째고.

두 번째가 이제 금융 구조조정과 기업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세 번째가 개방을 확대한다.

네 번째가 공기업을 민영화한다.

이 네 가지였는데 그중에 가장 잘못됐다고 일컬어지는 것이 거시경제 정책인데 그걸 30%가 넘는 이런 고금리를 하면 한 달 내지 일주일 정도의 짧은 기간에 쓰는 것이지, 우리같이 넉 달을 그 체제로 간다는 건 IMF의 큰 오류였고.

-실책이었다?-예, 그래서 우리가 연쇄부도, 흑자도산 이것이 이루어지면서 대규모 실업사태로 가게 되는 거죠.

그다음에 그중에 개방 체제로 가는 문제도 우리가 OECD와의 협상에서 50% 정도의 개방도를 가지고 가려고 했었는데 그걸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100% 개방으로 가게 됐는데, 그것이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비교환성 통화국가이면서도 완전개방해서 통화정책의 독자성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됐고.

-그래서 일각에서 말이죠, 당시 비슷한 위기를 겪었던 말레이시아나 러시아 같은 경우는 IMF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차라리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서 오히려 국부 유출 같은 피해를 겪지 않았다 그런 지적도 많은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그 당시에 그런 논의도 많이 있었습니다.

많이 있었는데, 그 나라와 우리 한국의 경우는 다른 것이 거기는 문 걸어 잠그고 바나나만 따먹어도 국민들이 굶지 않는 그런 자원 보유국이었고.

-우리는 사실은 IMF체제로 갈 수밖에는 없었던 상황이죠?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뭐냐하면 대외 신인도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리고 우리가 제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기 때문에 제조업의 도산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모라토리엄 선언한다, 그러면 연쇄부도 상태에 있고 외채에 대해서 동결을 해서 일부 이익 보는 것보다 국제 금융사회에 조기에 복귀하는 이런 걸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이사장님께서 잠깐 지적을 하셨습니다마는 우리가 자본시장을 개방을 하면서 국제투기자본들이 완전히 우리를 그냥 거의 너무나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런 체제가 된 게 아닌가 그런 지적들도 있는데 그 점은 어떻게 보십니까?-국제 금융이 완전 우리 자본시장을 100%개방도로 가지고 가면 그건 이미 각오가 돼야 됩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우리가 내부에서 체질을 강화해서 농단하지 못하게.

그런데 좀 지나고 보면 결론은 일부 자산 매각에 있어서 외국 자본들이 싸게 산다든지 그 당시에 결국 우리가 정책 미스를 해서 너무 늦게 IMF로 가는 바람에 값싸게 판 점은 있지만 지금 현재 삼성이나 현대나 이런 대기업들이 지금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크게 된 데는.

-체질 개선의 효과가 있었다.

-체질 개선의 효과가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금융 구조조정과 기업 구조조정은 어차피 우리가 해야 될 걸 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뭔가 회한이 남는 건 아니고.

그 고금리 정책을 포함한 거시경제의 긴축 그거는 남미나.


남미 국가들, 멕시코나 브라질같이 자기네들 재정 증권, 재정을 해외에서 조달해서 쓰는 나라, 이런 나라들이 주로 쓰던 카드였는데.

-그 카드를 우리한테 적용했다?

-잘못해서, 그래서 제프리 삭스라는유명한 교수는 롱 메디슨 투 아시아라는(Wrong medicine to Asia)유명한 논문을 쓰게 되죠.

-알겠습니다.

당시 우리 국민들 고통도 상당했었는데 당시 상황과 또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들, 우리 이승현 아나운서 소개를 해 주시죠.

-실제로 한국 경제 전반에 많은 구조조정이 일어났습니다.

그중에서 1998년 봄 제일은행의 4000명의 감원이 이루어졌는데요.

당시 촬영했던 눈물의 비디오 영상 준비했습니다.

함께 보시죠.

-제일은행 여러분, 제일은행 정말 사랑합니다.

제가 15년 동안 근무하면서 정말 열심히 일했고요.

남아 계신 여러분들 정말, 제일은행 진짜 똘똘 뭉쳐가지고.

-당시 IMF 체제의 고통을 상징하면서 이 눈물의 비디오가 많은 국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참 위기에 강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위기 극복을 위해서 당시 우리 국민들이 보여줬던 금모으기 운동은 해외 투자자들에게는 강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돌반지도 나오고요.

여러 가지.

-우리 영감 환갑이라고 사위가 해 준 금반지고요.

-가락지 다 빼시고 손이 너무 허전하지 않으세요?

-허전할 것 같으면 안 나오죠.

반지 끼고 앉아 배고프면 뭐 할 거예요.

개인은 부자고 나라는 가난하니까 부지런히 다 내놔서 갚아야 해요.

-지금 이렇게 어려운 때에 내가 금을 달고 옷을 입고 다닌다는 자체가 잘못된 인식이 가기 때문에 내놨습니다.

-지금 다시 봐도 참 가슴 찡하고 또 하나,우리 국민들 참 훌륭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가 그래도 이 IMF 체제를 사실은 가장 빨리 극복했던 그런 저력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결국은 우리 일반 시민들, 우리 평범한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청천벽력 같은, 자기가 경제가 이렇게 나빠지는데 별로 기여한 생각이 없는데 왜 나라가 이렇게 됐는가? 왜 정치가 이걸 이렇게 만드는가 하는 엄청난 회한이 있고 불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스스로가 하늘이 돕기 위해서 스스로 돕는 그런 행위를 함으로써 국제금융사회에서 굉장히 협상 과정에서 유효하게 작용을 했습니다.

-우리 국민이 보여준 외환위기 극복 노력이 우리 정부들의 협상단에도 엄청난 뒷받침이 됐다는 말씀입니까?

-예.

그래서 우리는 국민들이 이러이러한 마음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소상한 내용을 잘 모른다.

우리 국민들이 선택한 길은 나라를 살리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나중에 IMF가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굉장히 저평가를 받게 되고 한국에 잘못된 처방을 내린 것에 대해서 비난이 있을 때 IMF가 앞으로 잘하겠다고 비디오를 제작했는데 그 타이틀에 해당되는 그림이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IMF도 한국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을 인용해서 자기들 스스로가 살아보려고 하는 얄미운 면도 있었지만 그러나 하여튼 그 당시에 우리 국민의 저력은 만천하에 과시되는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저도 개인적인 기억이 좀 나는데, 2012년도에 제가 워싱턴의 IMF 본부에서 당시 스트로스 칸 총재랑 인터뷰를 했는데 한국에 대해서 취했던 조치는 자기들도 실수를 인정한다, 사과한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하여튼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제 우리가 이 시점에서 이것을 다시 한 번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의 얘기만 다시 들춰보자는 것이 아니라 남긴 교훈이 뭔지, 우리가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말고 지금 우리 또 경제가 어려운데 앞으로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나가야 할 것인지 그 얘기를 해보고 싶어서 오늘 이 자리에 모신 건데요.

교훈.

-지금 보면 우리가 그 당시에 박정희식 개발 모형을 87년에 민주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체제 또는 사회 지배구조 이건 박정희식 개발 모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OECD에 가입하기로 결정을 했고 우리의 경제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개혁이 필요했는데 그 당시에 우리 정경유착이라든지.

-우리가 스스로 못하고 외부에서 칼을 들이대서 타의적으로 한 게 가슴 아프다.

-예.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상황에 예민했어야 되는데, 경제의 정치화가 아주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이것을 우리 국민들이 일어나서 그렇게 하지 마라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경제에서 정치화는 최대의 독이다.

그게 첫 번째 교훈이고, 그다음에 현명한 나라의 국민은.

위기의 요인은 항상 산재해 있어요.

그 산재해 있는 위기를 잘게 잘라서 조그맣게 관리해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걸 해결할 수 있는 그 범위로 관리하는데, 대개 바보스러운 나라는 산재해 있는 위기 요인을 다 모아서 커져가지고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정도로 키운 다음에 남의 힘에 의해서 그 문제를 해소하는 이런 면이 있기 때문에 위기의 요인이 항상 산재해 있다는 걸 지금도 사실 우리는 위기의 요인에 휩싸여 있다는 것.

-커다란 위기를 잘게 쪼개서 스스로.

-관리 가능하게 해야 한다.

세 번째는 결국 한번 구조조정 해서 금융이든 기업이든 구조조정 해서 정리했다고 해서 그게 계속해서 유효한 것은 아니다.

-위기는 언제든지 또다시 올 수 있다.

-그래서 결국 그 당시의 국면을 벗어나는 데는 기여해도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이노베이션 DNA라고 할까요.

혁신적 DNA를 작동해서 해야 되는데 우리나라 대기업이라든지 이런 기업들이 상당히 성공한 부분이 바로 창의였는데, 지금 다시 2000년 넘어오면서부터 정치의 계절이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잔인한 선택을 해야 되는 구조조정이라든지 이런 걸 게을리하고 온정주의를 중심으로 해서 정치가 개입을 합니다.

-정치 배제, 위기 관리,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

-이런 것들이 지금 아쉬운 단계인데 지금 현재도 그런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알겠습니다.

17년 만에 되돌아보는, IMF 17주년에 되돌아보는 교훈으로서 이사장님이 남기신 세 가지 교훈 말씀 우리 가슴에 새기고 다시는 이런 위기가 닥치지 않도록 잘 좀 대비를 했으면 좋겠다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 좋은 말씀 정말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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