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끊나지 않은 보스니아 역사 전쟁

입력 2014.12.16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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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개의 예배당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 구시가지에는 4개의 종교 사원이 서로를 마주보며 세워져 있는 곳이 있다. 오스트리아 지배를 받던 1889년에 건설된 가톨릭 성당은 신 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물이다. 성당 앞에는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가톨릭 성당에서 왼쪽으로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토만 제국이 16세기 때 세운 이슬람 사원, 모스크가 있다. 오토만 제국은 15세기부터 19세기 까지 5백 년 동안 보스니아 지역을 지배했다. 모스크 왼쪽으로는 ‘다윗의 별’로 상징되는 자그마한 유대교 성당이 보인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오토만 제국 때부터 보스니아에 모여 들어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모스크의 오른편 골목길에서는 15세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교회 성당이 눈에 띈다. 보스니아는 이렇듯 세계 4대 종교의 예배당을 한 곳에 품고 있는 다민족 다종교 국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라예보의 역사는 평화와 용서 대신 전쟁과 증오로 얼룩져 있다.

■ 유고 연방

보스니아는 옛 유고 연방의 수도였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지만, 20여 년 전인 1990년 초 까지도 남유럽의 발칸 반도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유고 연방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몬테네그로 등을 아우르는 다민족 국가. 요시프 티토라는 탁월한 지도자에 의해 강력한 연방체를 이룩했고,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소련에 예속되기보다 비동맹 자주 외교 노선을 내세웠으며, 경제부분에도 견실한 성장을 보였다. 1984년 유고 연방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은 다민족 다종교 사회가 얼마나 풍성한 문화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지 전 세계에 보여준 모범적인 사례로 지금도 평가된다.



■ 티토의 죽음과 민족주의


하지만 비극은 티토의 죽음과 사회주의 붕괴로부터 시작됐다. 탁월한 리더십의 부재와 사회주의라는 공동 이념의 소멸은 개별 민족만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민족주의자들의 권력 의지를 부추겼고 숨겨졌던 민족 감정을 자극한다. 1991년, 연방을 이루었던 6개 공화국 중 크로아티아가 먼저 독립을 선언했고 슬로베니아도 여기에 동참했다. 이어 마케도니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독립했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마저 서로 갈라서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해체됐고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 남슬라브족의 분화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명은 사실 남쪽을 뜻하는 ‘유고’와 슬라브족이 사는 지역을 말하는 ‘슬라비아’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유고슬라비아는 '남(南) 슬라브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주변 다른 민족과 교류하면서 좀 더 분화된 개별 민족이 생겨나게 된다. 예를 들면 유고 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슬로베니아는 독일 게르만 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문화적으로는 종교가 분화를 촉진시켰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가톨릭이 다수인 국가인 반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정교회가 대표 종교다.

■ 다민족 국가...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하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보스니아)은 독특하다. 다른 5개 개별 국가와 해당 지역에는 오랜 전부터 개별 민족이 다수를 차지했었지만, 보스니아 지역에는 이슬람계와 세르비아계, 그리고 크로아티계가 서로 뒤섞여 살고 있었다. 사회주의 이념으로 뭉쳤던 유고 연방 시절에는 이런 민족적 종교적 다양성이 연방 국가의 자랑거리이었지만, 민족주의 시대에는 정반대 결과를 낳게 된다.

1992년 초에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의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2년 이슬람계와 가톨릭 크로아티아계를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지만, 정교회의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주장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사라예보에서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은 이슬람계와 가톨릭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정교회가 다수인 세르비아계가 서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민족간, 종교간 분쟁으로 확대된다. 3년 이상 계속된 전쟁으로 2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고,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른바 ‘인종 청소’가 자행된 대 학살극이 벌어졌다.

■ 종교적 관용은 사라지고...

전쟁이 끝난 지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지금도 사라예보 시내 건물 곳곳에는 총탄 자국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총탄 자국이 있는 건물을 보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둔 것이다. 특히 사라예보 도심을 벗어난 시골 마을의 경우는 총탄 자국보다 심각한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 세르비아 그리고 크로아티아 등 세 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했던 다문화 공동체가 대부분 파괴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향을 등졌고, 그나마 남은 자들은 한 마을에 살아도 종교와 민족이 다른 이들과는 왕래도, 안부도 나누지 않는다. 취재 중에 만난 신부님은 반세기 가까이 수도원을 지키며 내전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70대의 노 사제는 누가 가해지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 될 뿐,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가장 안타까워하고 있다.


<스테판/신부>

"예전에는 종교와 민족,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공존했지만, 지금은 그 차이를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 않게 된 거죠. 종교가 관용과 용서를 잃고 증오의 장벽을 세우고 있어요"

■ 또 다른 내전...역사 교과서 전쟁

보스니아에서 현재,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세르비아계 민족 간의 갈등이 가장 첨예한 곳은 교육 현장이다. 내전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지역의 자치 정부에 맡겨졌고, 그 때문에 통일된 교과서 없이 지역 별로 별도의 역사책이 존재한다. 이슬람계가 다수인 지역은 이슬람 민족의 입장에서 쓰인 역사 교과서를,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은 세르비아 중심의 교과서, 그리고 크로아티아계 지역은 크로아티아 교과서를 채택하는 식이다.



문제는 각각의 교과서는 상대 민족은 침략자로 기술하고 있는 반면, 자신들은 피해자로 묘사하기 일쑤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많다. 통합된 역사 교과서가 없는 것은 물론, 자기 민족에게 불리한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거나 개요만 짧게 설명하는 교육 방법 역시 문제다. 편향된 역사 교육의 사례로 자주 지적되는 사건은 세계 2차 대전 중에 일어났던 세르비아인에 대한 강제 수용소 학살이다. 우리는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만 알고 있지만, 더 끔직한 참상이 발칸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보스니와 크로아티아 국경에 위치한 야세노바치 마을에는 1942년부터 44년까지 수용소가 세워졌다. '발칸 반도의 아우슈비츠'로 불렸던 이곳에서는 유태인들이 당했던 것처럼 단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집단적인 학살과 고문이 자행됐다. 수용소 설치와 집단 학살은 크로아티아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다. 히틀러의 인종주의를 추종한 크로아티아 독재 정권은 나치 독일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다른 민족을 살해한 것이다. 박물관 직원은 당시에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칼과 망치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커다란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눈을 뽑은 뒤 앞이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한명씩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세르비아계 사람들은 보스니아 내전 때 비슷한 방법으로 다른 민족에게 복수를 했다.

■ 조각난 과거

하지만 크로아티아가 다수인 지역에서 편찬된 역사교과서에는 야세노바치 같은 강제 수용소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이 자세히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대부분의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보스니아 국가의 통합된 역사가 아닌 개별 민족만의 조각난 과거다. 보스니아 국가 구성원이 아닌 민족 일원으로서의 정체성만 강조되고, 상대 민족과 종교에 대해서는 ‘증오의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다. 보스니아 학계에서 교과서 통합 움직임이 그동안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르비아계와 이슬람계, 크로아티계로 나눠져 있는 정치권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는 주변 유럽 국가들의 재정 지원으로 균형된 시각이 반영된 역사교과서가 편찬됐지만, 일선 학교 현장에서는 아직도 채택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편향된 민족 감정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인들의 반대 때문이다.

■ 변화는 시작될까

다양한 사실과 시각을 허용하지 않는 역사 교육이 계속되는 한 보스니아 다민족 공동체를 아우르는 국민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가장 큰 원인은 내전이후 세 민족이 전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진심어린 역사적 화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편에서 전쟁을 먼저 시작했는지 얼마나 희생을 당했는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소모적인 논쟁만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을까. 시민운동가의 목소리는 그래서 의미가 깊었다.


<폴린스비치/역사학자>

“용서가 바로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거기서 교과서 문제, 그리고 민족 간의 화해와 통합의 문제를 논의해 한다고 봅니다.“

누구도 미안하다고 찾아오지 않고 아무도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아직 내밀지 않았지만, 자신이 먼저 나서서 상대방 민족을 용서할 수 없을까. 다음 세대를 위해 과거의 사슬을 끊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보스니아의 현실은 ‘진정한 화해 없이 국가적 통합이나 미래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비슷한 역사 교과서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대한민국에게도 던지고 있는 듯하다.

☞바로가기 [특파원 현장보고] 민족 갈등 부추기는 '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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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끊나지 않은 보스니아 역사 전쟁
    • 입력 2014-12-16 06:05:22
    취재후·사건후
■ 4개의 예배당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 구시가지에는 4개의 종교 사원이 서로를 마주보며 세워져 있는 곳이 있다. 오스트리아 지배를 받던 1889년에 건설된 가톨릭 성당은 신 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물이다. 성당 앞에는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가톨릭 성당에서 왼쪽으로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토만 제국이 16세기 때 세운 이슬람 사원, 모스크가 있다. 오토만 제국은 15세기부터 19세기 까지 5백 년 동안 보스니아 지역을 지배했다. 모스크 왼쪽으로는 ‘다윗의 별’로 상징되는 자그마한 유대교 성당이 보인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오토만 제국 때부터 보스니아에 모여 들어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모스크의 오른편 골목길에서는 15세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교회 성당이 눈에 띈다. 보스니아는 이렇듯 세계 4대 종교의 예배당을 한 곳에 품고 있는 다민족 다종교 국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라예보의 역사는 평화와 용서 대신 전쟁과 증오로 얼룩져 있다. ■ 유고 연방 보스니아는 옛 유고 연방의 수도였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지만, 20여 년 전인 1990년 초 까지도 남유럽의 발칸 반도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유고 연방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몬테네그로 등을 아우르는 다민족 국가. 요시프 티토라는 탁월한 지도자에 의해 강력한 연방체를 이룩했고,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소련에 예속되기보다 비동맹 자주 외교 노선을 내세웠으며, 경제부분에도 견실한 성장을 보였다. 1984년 유고 연방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은 다민족 다종교 사회가 얼마나 풍성한 문화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지 전 세계에 보여준 모범적인 사례로 지금도 평가된다. ■ 티토의 죽음과 민족주의 하지만 비극은 티토의 죽음과 사회주의 붕괴로부터 시작됐다. 탁월한 리더십의 부재와 사회주의라는 공동 이념의 소멸은 개별 민족만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민족주의자들의 권력 의지를 부추겼고 숨겨졌던 민족 감정을 자극한다. 1991년, 연방을 이루었던 6개 공화국 중 크로아티아가 먼저 독립을 선언했고 슬로베니아도 여기에 동참했다. 이어 마케도니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독립했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마저 서로 갈라서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해체됐고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 남슬라브족의 분화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명은 사실 남쪽을 뜻하는 ‘유고’와 슬라브족이 사는 지역을 말하는 ‘슬라비아’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유고슬라비아는 '남(南) 슬라브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주변 다른 민족과 교류하면서 좀 더 분화된 개별 민족이 생겨나게 된다. 예를 들면 유고 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슬로베니아는 독일 게르만 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문화적으로는 종교가 분화를 촉진시켰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가톨릭이 다수인 국가인 반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정교회가 대표 종교다. ■ 다민족 국가...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하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보스니아)은 독특하다. 다른 5개 개별 국가와 해당 지역에는 오랜 전부터 개별 민족이 다수를 차지했었지만, 보스니아 지역에는 이슬람계와 세르비아계, 그리고 크로아티계가 서로 뒤섞여 살고 있었다. 사회주의 이념으로 뭉쳤던 유고 연방 시절에는 이런 민족적 종교적 다양성이 연방 국가의 자랑거리이었지만, 민족주의 시대에는 정반대 결과를 낳게 된다. 1992년 초에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의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2년 이슬람계와 가톨릭 크로아티아계를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지만, 정교회의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주장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사라예보에서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은 이슬람계와 가톨릭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정교회가 다수인 세르비아계가 서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민족간, 종교간 분쟁으로 확대된다. 3년 이상 계속된 전쟁으로 2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고,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른바 ‘인종 청소’가 자행된 대 학살극이 벌어졌다. ■ 종교적 관용은 사라지고... 전쟁이 끝난 지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지금도 사라예보 시내 건물 곳곳에는 총탄 자국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총탄 자국이 있는 건물을 보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둔 것이다. 특히 사라예보 도심을 벗어난 시골 마을의 경우는 총탄 자국보다 심각한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 세르비아 그리고 크로아티아 등 세 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했던 다문화 공동체가 대부분 파괴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향을 등졌고, 그나마 남은 자들은 한 마을에 살아도 종교와 민족이 다른 이들과는 왕래도, 안부도 나누지 않는다. 취재 중에 만난 신부님은 반세기 가까이 수도원을 지키며 내전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70대의 노 사제는 누가 가해지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 될 뿐,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가장 안타까워하고 있다. <스테판/신부> "예전에는 종교와 민족,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공존했지만, 지금은 그 차이를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 않게 된 거죠. 종교가 관용과 용서를 잃고 증오의 장벽을 세우고 있어요" ■ 또 다른 내전...역사 교과서 전쟁 보스니아에서 현재,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세르비아계 민족 간의 갈등이 가장 첨예한 곳은 교육 현장이다. 내전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지역의 자치 정부에 맡겨졌고, 그 때문에 통일된 교과서 없이 지역 별로 별도의 역사책이 존재한다. 이슬람계가 다수인 지역은 이슬람 민족의 입장에서 쓰인 역사 교과서를,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은 세르비아 중심의 교과서, 그리고 크로아티아계 지역은 크로아티아 교과서를 채택하는 식이다. 문제는 각각의 교과서는 상대 민족은 침략자로 기술하고 있는 반면, 자신들은 피해자로 묘사하기 일쑤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많다. 통합된 역사 교과서가 없는 것은 물론, 자기 민족에게 불리한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거나 개요만 짧게 설명하는 교육 방법 역시 문제다. 편향된 역사 교육의 사례로 자주 지적되는 사건은 세계 2차 대전 중에 일어났던 세르비아인에 대한 강제 수용소 학살이다. 우리는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만 알고 있지만, 더 끔직한 참상이 발칸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보스니와 크로아티아 국경에 위치한 야세노바치 마을에는 1942년부터 44년까지 수용소가 세워졌다. '발칸 반도의 아우슈비츠'로 불렸던 이곳에서는 유태인들이 당했던 것처럼 단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집단적인 학살과 고문이 자행됐다. 수용소 설치와 집단 학살은 크로아티아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다. 히틀러의 인종주의를 추종한 크로아티아 독재 정권은 나치 독일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다른 민족을 살해한 것이다. 박물관 직원은 당시에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칼과 망치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커다란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눈을 뽑은 뒤 앞이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한명씩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세르비아계 사람들은 보스니아 내전 때 비슷한 방법으로 다른 민족에게 복수를 했다. ■ 조각난 과거 하지만 크로아티아가 다수인 지역에서 편찬된 역사교과서에는 야세노바치 같은 강제 수용소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이 자세히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대부분의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보스니아 국가의 통합된 역사가 아닌 개별 민족만의 조각난 과거다. 보스니아 국가 구성원이 아닌 민족 일원으로서의 정체성만 강조되고, 상대 민족과 종교에 대해서는 ‘증오의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다. 보스니아 학계에서 교과서 통합 움직임이 그동안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르비아계와 이슬람계, 크로아티계로 나눠져 있는 정치권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는 주변 유럽 국가들의 재정 지원으로 균형된 시각이 반영된 역사교과서가 편찬됐지만, 일선 학교 현장에서는 아직도 채택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편향된 민족 감정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인들의 반대 때문이다. ■ 변화는 시작될까 다양한 사실과 시각을 허용하지 않는 역사 교육이 계속되는 한 보스니아 다민족 공동체를 아우르는 국민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가장 큰 원인은 내전이후 세 민족이 전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진심어린 역사적 화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편에서 전쟁을 먼저 시작했는지 얼마나 희생을 당했는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소모적인 논쟁만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을까. 시민운동가의 목소리는 그래서 의미가 깊었다. <폴린스비치/역사학자> “용서가 바로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거기서 교과서 문제, 그리고 민족 간의 화해와 통합의 문제를 논의해 한다고 봅니다.“ 누구도 미안하다고 찾아오지 않고 아무도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아직 내밀지 않았지만, 자신이 먼저 나서서 상대방 민족을 용서할 수 없을까. 다음 세대를 위해 과거의 사슬을 끊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보스니아의 현실은 ‘진정한 화해 없이 국가적 통합이나 미래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비슷한 역사 교과서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대한민국에게도 던지고 있는 듯하다. ☞바로가기 [특파원 현장보고] 민족 갈등 부추기는 '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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