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온 20대 청년은 한국의 1950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65년 전 흥남부두에서 떠나온 피난민과 그 후손들이 다시 그 땅을 밟아야 작전이 끝을 맺는 것”이라며 “아직도 진행형인 흥남철수 작전을 최종 완수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벤자민 에드워드 포니(Benjamin E Forney·29, 이하 벤 포니)가 한국과 흥남철수 작전에 마음을 두는 것은 증조할아버지부터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 때문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대령은 고(故) 현봉학 박사와 함께 흥남철수 작전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당시 미 10군단 참모부장 겸 탑재참모였던 포니 대령은 선박구조와 공간을 파악해 탑승할 수 있는 인원을 예측해냈다. 10만 명의 생명을 구한 흥남철수 작전은 포니 대령과 현봉학 박사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이뤄진 것이다.
최근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으로 흥남철수 작전이 재조명됐다. 영화 속 첫 장면으로 등장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철수 작전의 마지막 배였다. 1만 4000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출발한 이 배는 1950년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하며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완성한다.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2015년, 서울에서 포니 대령의 증손자 벤 포니 씨를 만났다.
※ 흥남철수 작전은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한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세계 전쟁 역사에서 주요한 인도적 사건으로 꼽힌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연합군 사령부는 작전 중이던 국군과 미군에 철수명령을 내린다. 흥남부두에 주둔한 미 10군단은 철수하려던 뱃머리를 돌려 배에 선적된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을 태웠다.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에 걸쳐 1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
“2009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한국에 오게 됐다. 당시 전남 목포에 있는 영훈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1년간 목포에서 지낸 후 서울에 올라와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2013년부터 중국에서 회사에 다니다가, 작년에 한국전쟁기념재단의 참전용사 후손 장학생으로 선발돼 한국에 다시 오게 됐다. 지금은 서울대 국제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 원래부터 한국이나 아시아에 관심이 있었나?
“그렇지 않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 대해 잘 몰랐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작가가 되려 했었다. 하지만 한국에 온 이후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21세기 국제 사회에서 동아시아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동아시아 전문가로서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통일이나 북한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 한국전쟁이나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지 않았나?
“사실 증조할아버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는 것 정도만 알았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몰랐다.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1998년이다. 아버지께서 한국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히 ‘포니’라는 이름을 본 고(故) 현봉학 박사님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 만남을 통해 증조할아버지가 흥남부두 철수 작전을 성공하게 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 영화 ‘국제사회’ 인기로 흥남철수 작전이 재조명받고 있는데…
“한국에 왔을 때, 젊은 세대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영화로 흥남철수 작전이 많이 알려져서 감사하다. 다만, 흥남철수 작전이 영화처럼 쉽게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작전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현봉학 박사와 증조할아버지의 긴 설득이 있었고, 계속된 협상과 조율 끝에 피난민 구조 작전이 진행됐다. 배에 탈 수 있는 탑승인원도 4,000명에서 1만 명, 2만 명 이렇게 늘어났고, 최종 10만 명이라는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현재, 아버지께서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 아버지나 할아버지, 가족 이야기가 궁금하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까지 모두 해병 출신이다. 나에게도 권하셨지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거제도의 ‘포니 로드’를 보니, 해병대에 가지 않은 것이 조금 죄송해지더라. 증조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한국에 와서 수석고문으로 지내셨다고 들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에게 멘토 같은 존재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일하셨고, 카이로와 두바이를 거쳐 지금 중국 인민부속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에는 자주 들어오신다. 영화 ‘국제시장’도 아버지와 같이 봤다.”
- 생일이 8월 15일인데, 한국과 인연이 특별하다
“정말이다. 나에게 한국은 운명 같다. 그 시작은 증조할아버지일 것이다. 65년 전 일어난 사건으로 증손자인 내가 지금 서울에 있는 것이다. 흥남철수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땅을 떠나온 피난민과 그 후손들이 아직도 그 땅을 그리워하는 것을 봤다. 그들이 다시 그 땅을 밟아야 비로소 작전이 끝나는 것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시작한 그 작전을 마무리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 통일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통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통일은 한국의 국민들이 결정할 문제다. 국제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북한 김정은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것이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살고 있지만, 언젠가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아시아 전문가가 되고 싶은 이유이다.”
-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우선 대학원에서 두 학기를 더 공부할 예정이다. 대학원을 마친 후, 한국에서 연구원으로 좀 더 경력을 쌓고 싶다. 틈틈이 봉사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3월부터는 서울 영등포의 한 교회에서 영어교사로 봉사할 예정이다.”
미국에서 온 20대 청년은 한국의 1950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65년 전 흥남부두에서 떠나온 피난민과 그 후손들이 다시 그 땅을 밟아야 작전이 끝을 맺는 것”이라며 “아직도 진행형인 흥남철수 작전을 최종 완수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벤자민 에드워드 포니(Benjamin E Forney·29, 이하 벤 포니)가 한국과 흥남철수 작전에 마음을 두는 것은 증조할아버지부터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 때문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대령은 고(故) 현봉학 박사와 함께 흥남철수 작전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당시 미 10군단 참모부장 겸 탑재참모였던 포니 대령은 선박구조와 공간을 파악해 탑승할 수 있는 인원을 예측해냈다. 10만 명의 생명을 구한 흥남철수 작전은 포니 대령과 현봉학 박사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이뤄진 것이다.
최근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으로 흥남철수 작전이 재조명됐다. 영화 속 첫 장면으로 등장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철수 작전의 마지막 배였다. 1만 4000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출발한 이 배는 1950년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하며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완성한다.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2015년, 서울에서 포니 대령의 증손자 벤 포니 씨를 만났다.
▲영화 '국제시장' 캡처 화면
※ 흥남철수 작전은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한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세계 전쟁 역사에서 주요한 인도적 사건으로 꼽힌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연합군 사령부는 작전 중이던 국군과 미군에 철수명령을 내린다. 흥남부두에 주둔한 미 10군단은 철수하려던 뱃머리를 돌려 배에 선적된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을 태웠다.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에 걸쳐 1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
“2009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한국에 오게 됐다. 당시 전남 목포에 있는 영훈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1년간 목포에서 지낸 후 서울에 올라와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2013년부터 중국에서 회사에 다니다가, 작년에 한국전쟁기념재단의 참전용사 후손 장학생으로 선발돼 한국에 다시 오게 됐다. 지금은 서울대 국제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 원래부터 한국이나 아시아에 관심이 있었나?
“그렇지 않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 대해 잘 몰랐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작가가 되려 했었다. 하지만 한국에 온 이후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21세기 국제 사회에서 동아시아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동아시아 전문가로서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통일이나 북한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 한국전쟁이나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지 않았나?
“사실 증조할아버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는 것 정도만 알았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몰랐다.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1998년이다. 아버지께서 한국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히 ‘포니’라는 이름을 본 고(故) 현봉학 박사님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 만남을 통해 증조할아버지가 흥남부두 철수 작전을 성공하게 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 영화 ‘국제사회’ 인기로 흥남철수 작전이 재조명받고 있는데…
“한국에 왔을 때, 젊은 세대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영화로 흥남철수 작전이 많이 알려져서 감사하다. 다만, 흥남철수 작전이 영화처럼 쉽게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작전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현봉학 박사와 증조할아버지의 긴 설득이 있었고, 계속된 협상과 조율 끝에 피난민 구조 작전이 진행됐다. 배에 탈 수 있는 탑승인원도 4,000명에서 1만 명, 2만 명 이렇게 늘어났고, 최종 10만 명이라는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현재, 아버지께서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 아버지나 할아버지, 가족 이야기가 궁금하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까지 모두 해병 출신이다. 나에게도 권하셨지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거제도의 ‘포니 로드’를 보니, 해병대에 가지 않은 것이 조금 죄송해지더라. 증조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한국에 와서 수석고문으로 지내셨다고 들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에게 멘토 같은 존재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일하셨고, 카이로와 두바이를 거쳐 지금 중국 인민부속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에는 자주 들어오신다. 영화 ‘국제시장’도 아버지와 같이 봤다.”
- 생일이 8월 15일인데, 한국과 인연이 특별하다
“정말이다. 나에게 한국은 운명 같다. 그 시작은 증조할아버지일 것이다. 65년 전 일어난 사건으로 증손자인 내가 지금 서울에 있는 것이다. 흥남철수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땅을 떠나온 피난민과 그 후손들이 아직도 그 땅을 그리워하는 것을 봤다. 그들이 다시 그 땅을 밟아야 비로소 작전이 끝나는 것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시작한 그 작전을 마무리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 통일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통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통일은 한국의 국민들이 결정할 문제다. 국제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북한 김정은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것이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살고 있지만, 언젠가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아시아 전문가가 되고 싶은 이유이다.”
-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우선 대학원에서 두 학기를 더 공부할 예정이다. 대학원을 마친 후, 한국에서 연구원으로 좀 더 경력을 쌓고 싶다. 틈틈이 봉사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3월부터는 서울 영등포의 한 교회에서 영어교사로 봉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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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남철수 작전 끝나지 않았다” 한국에 온 포니 대령의 증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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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5-01-20 15:36:55
“흥남철수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온 20대 청년은 한국의 1950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65년 전 흥남부두에서 떠나온 피난민과 그 후손들이 다시 그 땅을 밟아야 작전이 끝을 맺는 것”이라며 “아직도 진행형인 흥남철수 작전을 최종 완수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벤자민 에드워드 포니(Benjamin E Forney·29, 이하 벤 포니)가 한국과 흥남철수 작전에 마음을 두는 것은 증조할아버지부터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 때문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대령은 고(故) 현봉학 박사와 함께 흥남철수 작전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당시 미 10군단 참모부장 겸 탑재참모였던 포니 대령은 선박구조와 공간을 파악해 탑승할 수 있는 인원을 예측해냈다. 10만 명의 생명을 구한 흥남철수 작전은 포니 대령과 현봉학 박사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이뤄진 것이다.
최근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으로 흥남철수 작전이 재조명됐다. 영화 속 첫 장면으로 등장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철수 작전의 마지막 배였다. 1만 4000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출발한 이 배는 1950년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하며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완성한다.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2015년, 서울에서 포니 대령의 증손자 벤 포니 씨를 만났다.
▲영화 '국제시장' 캡처 화면 ※ 흥남철수 작전은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한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세계 전쟁 역사에서 주요한 인도적 사건으로 꼽힌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연합군 사령부는 작전 중이던 국군과 미군에 철수명령을 내린다. 흥남부두에 주둔한 미 10군단은 철수하려던 뱃머리를 돌려 배에 선적된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을 태웠다.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에 걸쳐 1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 “2009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한국에 오게 됐다. 당시 전남 목포에 있는 영훈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1년간 목포에서 지낸 후 서울에 올라와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2013년부터 중국에서 회사에 다니다가, 작년에 한국전쟁기념재단의 참전용사 후손 장학생으로 선발돼 한국에 다시 오게 됐다. 지금은 서울대 국제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 원래부터 한국이나 아시아에 관심이 있었나? “그렇지 않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 대해 잘 몰랐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작가가 되려 했었다. 하지만 한국에 온 이후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21세기 국제 사회에서 동아시아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동아시아 전문가로서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통일이나 북한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 한국전쟁이나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지 않았나? “사실 증조할아버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는 것 정도만 알았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몰랐다.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1998년이다. 아버지께서 한국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히 ‘포니’라는 이름을 본 고(故) 현봉학 박사님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 만남을 통해 증조할아버지가 흥남부두 철수 작전을 성공하게 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 영화 ‘국제사회’ 인기로 흥남철수 작전이 재조명받고 있는데… “한국에 왔을 때, 젊은 세대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영화로 흥남철수 작전이 많이 알려져서 감사하다. 다만, 흥남철수 작전이 영화처럼 쉽게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작전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현봉학 박사와 증조할아버지의 긴 설득이 있었고, 계속된 협상과 조율 끝에 피난민 구조 작전이 진행됐다. 배에 탈 수 있는 탑승인원도 4,000명에서 1만 명, 2만 명 이렇게 늘어났고, 최종 10만 명이라는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현재, 아버지께서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 아버지나 할아버지, 가족 이야기가 궁금하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까지 모두 해병 출신이다. 나에게도 권하셨지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거제도의 ‘포니 로드’를 보니, 해병대에 가지 않은 것이 조금 죄송해지더라. 증조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한국에 와서 수석고문으로 지내셨다고 들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에게 멘토 같은 존재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일하셨고, 카이로와 두바이를 거쳐 지금 중국 인민부속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에는 자주 들어오신다. 영화 ‘국제시장’도 아버지와 같이 봤다.” - 생일이 8월 15일인데, 한국과 인연이 특별하다 “정말이다. 나에게 한국은 운명 같다. 그 시작은 증조할아버지일 것이다. 65년 전 일어난 사건으로 증손자인 내가 지금 서울에 있는 것이다. 흥남철수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땅을 떠나온 피난민과 그 후손들이 아직도 그 땅을 그리워하는 것을 봤다. 그들이 다시 그 땅을 밟아야 비로소 작전이 끝나는 것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시작한 그 작전을 마무리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 통일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통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통일은 한국의 국민들이 결정할 문제다. 국제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북한 김정은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것이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살고 있지만, 언젠가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아시아 전문가가 되고 싶은 이유이다.” -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우선 대학원에서 두 학기를 더 공부할 예정이다. 대학원을 마친 후, 한국에서 연구원으로 좀 더 경력을 쌓고 싶다. 틈틈이 봉사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3월부터는 서울 영등포의 한 교회에서 영어교사로 봉사할 예정이다.”
▲영화 '국제시장' 캡처 화면 ※ 흥남철수 작전은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한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세계 전쟁 역사에서 주요한 인도적 사건으로 꼽힌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연합군 사령부는 작전 중이던 국군과 미군에 철수명령을 내린다. 흥남부두에 주둔한 미 10군단은 철수하려던 뱃머리를 돌려 배에 선적된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을 태웠다.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에 걸쳐 1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 “2009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한국에 오게 됐다. 당시 전남 목포에 있는 영훈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1년간 목포에서 지낸 후 서울에 올라와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2013년부터 중국에서 회사에 다니다가, 작년에 한국전쟁기념재단의 참전용사 후손 장학생으로 선발돼 한국에 다시 오게 됐다. 지금은 서울대 국제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 원래부터 한국이나 아시아에 관심이 있었나? “그렇지 않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 대해 잘 몰랐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작가가 되려 했었다. 하지만 한국에 온 이후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21세기 국제 사회에서 동아시아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동아시아 전문가로서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통일이나 북한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 한국전쟁이나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지 않았나? “사실 증조할아버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는 것 정도만 알았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몰랐다.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1998년이다. 아버지께서 한국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히 ‘포니’라는 이름을 본 고(故) 현봉학 박사님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 만남을 통해 증조할아버지가 흥남부두 철수 작전을 성공하게 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 영화 ‘국제사회’ 인기로 흥남철수 작전이 재조명받고 있는데… “한국에 왔을 때, 젊은 세대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영화로 흥남철수 작전이 많이 알려져서 감사하다. 다만, 흥남철수 작전이 영화처럼 쉽게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작전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현봉학 박사와 증조할아버지의 긴 설득이 있었고, 계속된 협상과 조율 끝에 피난민 구조 작전이 진행됐다. 배에 탈 수 있는 탑승인원도 4,000명에서 1만 명, 2만 명 이렇게 늘어났고, 최종 10만 명이라는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현재, 아버지께서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 아버지나 할아버지, 가족 이야기가 궁금하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까지 모두 해병 출신이다. 나에게도 권하셨지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거제도의 ‘포니 로드’를 보니, 해병대에 가지 않은 것이 조금 죄송해지더라. 증조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한국에 와서 수석고문으로 지내셨다고 들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에게 멘토 같은 존재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일하셨고, 카이로와 두바이를 거쳐 지금 중국 인민부속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에는 자주 들어오신다. 영화 ‘국제시장’도 아버지와 같이 봤다.” - 생일이 8월 15일인데, 한국과 인연이 특별하다 “정말이다. 나에게 한국은 운명 같다. 그 시작은 증조할아버지일 것이다. 65년 전 일어난 사건으로 증손자인 내가 지금 서울에 있는 것이다. 흥남철수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땅을 떠나온 피난민과 그 후손들이 아직도 그 땅을 그리워하는 것을 봤다. 그들이 다시 그 땅을 밟아야 비로소 작전이 끝나는 것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시작한 그 작전을 마무리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 통일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통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통일은 한국의 국민들이 결정할 문제다. 국제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북한 김정은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것이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살고 있지만, 언젠가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아시아 전문가가 되고 싶은 이유이다.” -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우선 대학원에서 두 학기를 더 공부할 예정이다. 대학원을 마친 후, 한국에서 연구원으로 좀 더 경력을 쌓고 싶다. 틈틈이 봉사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3월부터는 서울 영등포의 한 교회에서 영어교사로 봉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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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혜원 기자 hey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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