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는 대학살의 증거

입력 2015.03.01 (23:38) 수정 2015.03.02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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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서 한 시간쯤 거리에 있는 지바현.

추도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섭니다.

<인터뷰> 요시가와 기요시('관동대학살 추도' 치바 실행위원회 대표) : "스님과 마을 사람들과 저희들이 공동 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절에서 나와 좀 더 걷다 보면, 윗부분이 잘린 나무 한 그루가 나옵니다.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유골이 발견된 곳입니다.

<인터뷰> 오오다케 요네코('치바 위원회' 사무국장) : "지금 제가 서 있는 발밑에 시체들이 묻혀 있었어요."

1923년 일본 도쿄를 포함한 관동 지역에서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합니다.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만 10만 명이 넘는 참사.

대혼란 속에 난데없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유포됐고, 조선인 대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일본 군경은 물론 일반인들로 구성된 자경단이 학살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녹취> 학살 목격자 : "(조선인을) 기관총으로 쏘았지요. 강쪽으로 돌아 세우고 뒤에서 팡, 팡하고 기관총을 쏘았습니다. 시체가 점점 부패하자 구덩이를 파서 태웠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는 당시 일본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학살 피해자를 조사했고, 최소 6천6백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대부분 먹고 살려고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2년 전 끔찍한 대학살이 벌어졌던 이곳은 지금 평화롭습니다.

학살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집단 학살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광복 70주년이 되도록 제대로 진상조사를 하지 않았고, 일본 정부에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잊혀져가는 대학살, 진상 규명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발견됐습니다.

관동대지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위령당.

이곳에 보관돼있던 사망자 조사표입니다.

당시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고 도쿄 산하 기관이 작성한 것으로, 사망자의 자세한 인적 사항이 기록됐습니다.

<녹취> 이름이 안태성, 국적이 조선으로 나와있네요. 경상남도 합천군 청덕면.

관동대지진 당시 사망한 조선인의 상세한 인적사항이 일본 측 자료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녹취> 고조노 다카아키('치바 실행위원회' 회원) : "(본적, 주소, 성별, 생년월일이죠?) 이게 사망장소인데요. 빈칸인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없어요. 행방불명이라고 쓰여 있어요."

사망자 인적사항을 기록한 5만 장의 카드 가운데 일부만 조사했는데도 조선인 83명이 확인됐습니다.

사망자 조사표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진행된다면 조선인 희생자 수는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정부가 이 자료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를 요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터뷰> 김광열(광운대 국제협력학부 교수) : "행방불명이 꽤 많아습니다. 행방불명은 학살자일 가능성이 높은 거죠.(기존에 연구된) 명단들하고 비교 대조해보면 이 사람이 학살자이고 이 사람이 본적이 어디고, 당시에 몇 살이었고 이런 것을 알 수 있는 거죠."

군주제를 옹호하는 우익 세력이 버젓이 홍보 활동을 하는 도쿄 거리.

시민들에게 물었습니다.

<인터뷰> 엔도·우끼가야 :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대학살 사건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몰라요. 들어본 적 없어요.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나요?) 없어요."

<인터뷰> 쿠리타 : "할아버지 지진 당시 귀중품을 들고 도망을 가는데 조선 사람들이 그것을 주워가고 해서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어요."

그러나 그날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본인들이 있습니다.

<녹취> "조선인은 죽여도 된다! 경찰이 조선인을 죽여도 된다고 했던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관동 대학살을 알리고 추모하기 위해 모인 시민단체 회원들입니다.

각자 활동을 해오다 대학살 90주기가 된 2013년부터 함께 추도식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인터뷰> 야마모토 스미코 :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인 학살에 대해 진상규명을 말하고 연구하고, 활동하는 이유는 뭔가요?) 이건 일본인의 문제예요. 일본 정부는 1923년 이후부터 역사를 은폐하는 것 뿐만아니라 날조까지 했습니다."

대규모 공사에 동원됐던 조선인들이 대지진 이후 집단 학살됐던 곳입니다.

<녹취> 니시자키 마사오('봉선화' 이사) : "'불을 낸 것은 조선인이다, 폭발은 조선인이 폭탄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라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금세 자경단을 만들어 조선인들을 찾아서 학살했어요."

시민단체 '봉선화'는 관동 대학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 지역에 작은 추도비를 세웠습니다.

일본 시민사회의 추도와 진상 규명 활동이 있기까지, 재일 동포 학자들과 일본 지식인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녹취> "안녕하세요."

강덕상 한인역사자료관 관장, 한평생 학살에 대한 증거를 없애려는 세력과 싸우며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습니다.

여든을 훌쩍 넘어서도 진실 규명을 위한 집필을 멈추지 않습니다.

<인터뷰> 강덕상(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 : "일본이 과거 이런 일을 일으켰으니 두 번 다시 반복하지 말자고 인정하는 것이 역사 인식이에요. 과거의 사실을 통해서 얻는 것이 없다고 해서 진상규명을 그만하자고 한다면 한국인이라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아요."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을 앞장서서 비판해온 야마다 쇼지 교수입니다.

희생자에 대한 조사를 방해하고, 학살을 은폐한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야마다 쇼지(릿쿄대 명예 교수) : "당시 재판 자료를 겨우 복사본을 얻었는데요. 자료를 보면 조선인 이름도, 피고인 일본인도 다 지워져 있어요."

<인터뷰> "2013년에 관동대지진 관련 한일 심포지엄이 열렸어요. 이렇게 공동으로 함께 작업하면서 교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광복 이후 우리 정부는 어떤 노력을 했을까.

이 마을에선 7명의 제사를 같은 날에 지냈습니다.

먹고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던 청년들이 모두 살아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녹취> 마을 주민 : "칠월 21날 제사가 7개인가 그래, 떼 제사라 그래. 동네에 하루종일 제사가 7개라 그래서 떼 제사."

이 마을 청년 7명 등 21명이 관동 대학살 희생자로 확인됐습니다.

과거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피살자 명부에 대한 1차 조사 결과입니다.

명부 작성 61년만에 이뤄진 뒤늦은 검증이었습니다.

<인터뷰> 정행규(관동대학살 피해자 유족) : "우리 할아버지는 글도 좀 하시고, 굉장히 뛰어났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거기 가서 돌아가셔서 참 억울하다, 하고 그랬어요."

<인터뷰> 이향순(관동대학살 피해자 유족) : "시체도 못 받고 연락도 못 받으니까는 행여나 살아올까, 그렇게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항의를 해야되지, 그거는 언제든 항의를 해야 되는 기라. 억울한 죽음이거든요."

그러나 뒤늦게나 검증에 나섰던 이 위원회의 활동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정혜경('대일항쟁기 피해조사위원회' 과장) : "저희 위원회 기간이 올 6월이에요. 그러니까 올 6월까지 이게 완결되지 못합니다. 그럼 조사를 하다가 중단될 수밖에 없는 그런 어려운 점이 있고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으로 오해받은 중국인 6백여 명도 학살됐습니다.

중국 정부의 대응은 어땠을까, 당시 중국과 일본 정부가 주고받은 외교 문서입니다.

학살당한 중국인들의 이름과 주소, 또 어떻게 숨졌는지까지 상세히 기록한 자료가 남아있습니다.

<인터뷰> 강덕상(재일한일역사자료관 관장) : "중국인 희생자는 어디서 죽였는지, 누구인지도 이름도 전부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10배 이상이 살해됐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어떻게 됐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대학살이 일어난지 92년이 지난 뒤에야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상정됐습니다.

그러나 실제 이 법안이 처리될지 여부는 불투명합니다.

<녹취> 정종섭(행정자치부 장관) : "다만 행정자치부에서는 일본과 외교적인 문제가 걸려 있어서... 이 문제는 신중하게 검토를 하겠습니다."

광복 뒤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누군가는, 이제와서 과거사를 얘기하는 게 무슨 실익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일본의 깨어있는 시민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인터뷰> 가토 나오키(저술가) :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천명이나 죽였다는 것은 누가봐도 부정적인 역사예요. 부정적인 역사도 소중한 재산이라고 생각해요. 이 역사도 서로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라를 잃고 서럽고, 억울하게 죽어간 수천 명의 죽음을, 광복 70주년을 맞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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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러나는 대학살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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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5-03-02 00: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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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서 한 시간쯤 거리에 있는 지바현.

추도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섭니다.

<인터뷰> 요시가와 기요시('관동대학살 추도' 치바 실행위원회 대표) : "스님과 마을 사람들과 저희들이 공동 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절에서 나와 좀 더 걷다 보면, 윗부분이 잘린 나무 한 그루가 나옵니다.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유골이 발견된 곳입니다.

<인터뷰> 오오다케 요네코('치바 위원회' 사무국장) : "지금 제가 서 있는 발밑에 시체들이 묻혀 있었어요."

1923년 일본 도쿄를 포함한 관동 지역에서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합니다.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만 10만 명이 넘는 참사.

대혼란 속에 난데없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유포됐고, 조선인 대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일본 군경은 물론 일반인들로 구성된 자경단이 학살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녹취> 학살 목격자 : "(조선인을) 기관총으로 쏘았지요. 강쪽으로 돌아 세우고 뒤에서 팡, 팡하고 기관총을 쏘았습니다. 시체가 점점 부패하자 구덩이를 파서 태웠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는 당시 일본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학살 피해자를 조사했고, 최소 6천6백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대부분 먹고 살려고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2년 전 끔찍한 대학살이 벌어졌던 이곳은 지금 평화롭습니다.

학살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집단 학살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광복 70주년이 되도록 제대로 진상조사를 하지 않았고, 일본 정부에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잊혀져가는 대학살, 진상 규명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발견됐습니다.

관동대지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위령당.

이곳에 보관돼있던 사망자 조사표입니다.

당시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고 도쿄 산하 기관이 작성한 것으로, 사망자의 자세한 인적 사항이 기록됐습니다.

<녹취> 이름이 안태성, 국적이 조선으로 나와있네요. 경상남도 합천군 청덕면.

관동대지진 당시 사망한 조선인의 상세한 인적사항이 일본 측 자료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녹취> 고조노 다카아키('치바 실행위원회' 회원) : "(본적, 주소, 성별, 생년월일이죠?) 이게 사망장소인데요. 빈칸인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없어요. 행방불명이라고 쓰여 있어요."

사망자 인적사항을 기록한 5만 장의 카드 가운데 일부만 조사했는데도 조선인 83명이 확인됐습니다.

사망자 조사표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진행된다면 조선인 희생자 수는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정부가 이 자료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를 요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터뷰> 김광열(광운대 국제협력학부 교수) : "행방불명이 꽤 많아습니다. 행방불명은 학살자일 가능성이 높은 거죠.(기존에 연구된) 명단들하고 비교 대조해보면 이 사람이 학살자이고 이 사람이 본적이 어디고, 당시에 몇 살이었고 이런 것을 알 수 있는 거죠."

군주제를 옹호하는 우익 세력이 버젓이 홍보 활동을 하는 도쿄 거리.

시민들에게 물었습니다.

<인터뷰> 엔도·우끼가야 :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대학살 사건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몰라요. 들어본 적 없어요.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나요?) 없어요."

<인터뷰> 쿠리타 : "할아버지 지진 당시 귀중품을 들고 도망을 가는데 조선 사람들이 그것을 주워가고 해서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어요."

그러나 그날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본인들이 있습니다.

<녹취> "조선인은 죽여도 된다! 경찰이 조선인을 죽여도 된다고 했던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관동 대학살을 알리고 추모하기 위해 모인 시민단체 회원들입니다.

각자 활동을 해오다 대학살 90주기가 된 2013년부터 함께 추도식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인터뷰> 야마모토 스미코 :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인 학살에 대해 진상규명을 말하고 연구하고, 활동하는 이유는 뭔가요?) 이건 일본인의 문제예요. 일본 정부는 1923년 이후부터 역사를 은폐하는 것 뿐만아니라 날조까지 했습니다."

대규모 공사에 동원됐던 조선인들이 대지진 이후 집단 학살됐던 곳입니다.

<녹취> 니시자키 마사오('봉선화' 이사) : "'불을 낸 것은 조선인이다, 폭발은 조선인이 폭탄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라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금세 자경단을 만들어 조선인들을 찾아서 학살했어요."

시민단체 '봉선화'는 관동 대학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 지역에 작은 추도비를 세웠습니다.

일본 시민사회의 추도와 진상 규명 활동이 있기까지, 재일 동포 학자들과 일본 지식인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녹취> "안녕하세요."

강덕상 한인역사자료관 관장, 한평생 학살에 대한 증거를 없애려는 세력과 싸우며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습니다.

여든을 훌쩍 넘어서도 진실 규명을 위한 집필을 멈추지 않습니다.

<인터뷰> 강덕상(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 : "일본이 과거 이런 일을 일으켰으니 두 번 다시 반복하지 말자고 인정하는 것이 역사 인식이에요. 과거의 사실을 통해서 얻는 것이 없다고 해서 진상규명을 그만하자고 한다면 한국인이라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아요."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을 앞장서서 비판해온 야마다 쇼지 교수입니다.

희생자에 대한 조사를 방해하고, 학살을 은폐한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야마다 쇼지(릿쿄대 명예 교수) : "당시 재판 자료를 겨우 복사본을 얻었는데요. 자료를 보면 조선인 이름도, 피고인 일본인도 다 지워져 있어요."

<인터뷰> "2013년에 관동대지진 관련 한일 심포지엄이 열렸어요. 이렇게 공동으로 함께 작업하면서 교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광복 이후 우리 정부는 어떤 노력을 했을까.

이 마을에선 7명의 제사를 같은 날에 지냈습니다.

먹고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던 청년들이 모두 살아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녹취> 마을 주민 : "칠월 21날 제사가 7개인가 그래, 떼 제사라 그래. 동네에 하루종일 제사가 7개라 그래서 떼 제사."

이 마을 청년 7명 등 21명이 관동 대학살 희생자로 확인됐습니다.

과거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피살자 명부에 대한 1차 조사 결과입니다.

명부 작성 61년만에 이뤄진 뒤늦은 검증이었습니다.

<인터뷰> 정행규(관동대학살 피해자 유족) : "우리 할아버지는 글도 좀 하시고, 굉장히 뛰어났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거기 가서 돌아가셔서 참 억울하다, 하고 그랬어요."

<인터뷰> 이향순(관동대학살 피해자 유족) : "시체도 못 받고 연락도 못 받으니까는 행여나 살아올까, 그렇게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항의를 해야되지, 그거는 언제든 항의를 해야 되는 기라. 억울한 죽음이거든요."

그러나 뒤늦게나 검증에 나섰던 이 위원회의 활동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정혜경('대일항쟁기 피해조사위원회' 과장) : "저희 위원회 기간이 올 6월이에요. 그러니까 올 6월까지 이게 완결되지 못합니다. 그럼 조사를 하다가 중단될 수밖에 없는 그런 어려운 점이 있고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으로 오해받은 중국인 6백여 명도 학살됐습니다.

중국 정부의 대응은 어땠을까, 당시 중국과 일본 정부가 주고받은 외교 문서입니다.

학살당한 중국인들의 이름과 주소, 또 어떻게 숨졌는지까지 상세히 기록한 자료가 남아있습니다.

<인터뷰> 강덕상(재일한일역사자료관 관장) : "중국인 희생자는 어디서 죽였는지, 누구인지도 이름도 전부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10배 이상이 살해됐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어떻게 됐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대학살이 일어난지 92년이 지난 뒤에야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상정됐습니다.

그러나 실제 이 법안이 처리될지 여부는 불투명합니다.

<녹취> 정종섭(행정자치부 장관) : "다만 행정자치부에서는 일본과 외교적인 문제가 걸려 있어서... 이 문제는 신중하게 검토를 하겠습니다."

광복 뒤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누군가는, 이제와서 과거사를 얘기하는 게 무슨 실익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일본의 깨어있는 시민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인터뷰> 가토 나오키(저술가) :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천명이나 죽였다는 것은 누가봐도 부정적인 역사예요. 부정적인 역사도 소중한 재산이라고 생각해요. 이 역사도 서로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라를 잃고 서럽고, 억울하게 죽어간 수천 명의 죽음을, 광복 70주년을 맞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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