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언덕배기에서 출발한 ‘무뢰한’이 칸에 오기까지

입력 2015.05.17 (09:09) 수정 2015.05.1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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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뢰한'은 형사 정재곤(김남길)이 살인사건 현장에 도달할 때까지 걸어가는 뒷모습을 따라가는 첫 장면만큼이나 길고 구부정한 발걸음 끝에 완성됐다.

'초록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를 쓴 오승욱 감독의 연출 데뷔작 '킬리만자로'(2000년)는 10만명을 채 모으지 못해 흥행에 실패했다.

2005년께 오 감독의 머릿속에서 탄생한 '무뢰한'이 제작되는 과정은 당연히 순탄치 않았다.

여러 인물이 나온 '킬리만자로'와 다른 '원맨' 영화라는 뼈대가 세워졌고 '룸살롱 다니는 지인들'의 아이디어와 여성 작가들의 소설로 여성 인물이 덧입혀졌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헌팅이나 갑시다"라고 전화를 걸어온 박일현 미술감독과 함께 인천 언덕배기의 아파트로, 아현동 뒷산으로 영화 촬영장소 헌팅을 다녔다. 미술(서울대 조소과)을 전공한 오 감독은 공간을 봐야 글이 써진다.

시나리오는 3곳의 제작사를 거쳐 마침내 4번째인 사나이픽쳐스에 정착했다. 이번에는 남자 주연배우로 기용한 이정재의 부상으로 캐스팅이 무산됐다.

한국 남자배우 명단을 뽑아 검토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우선순위는 아니었으나 어쩐지 골라낼수록 계속 명단에 남아 있던 김남길이 결국 낙점됐다.

전작으로부터 15년, 구상으로부터 10년 만에 영화는 완성됐다. 제68회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고 곧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칸 해변에 자리한 영화제 한국관에서 만난 오 감독은 "어떻게 칸을 즐기겠나"며 "칸 영화제에 초청받아 온 것보다 국내 개봉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

'무뢰한' 시나리오가 세 번째 거절당했을 때 그에게 떠오른 생각은 "나는 이것밖에 못 쓰는데 다른 걸 어떻게 하지"였다고 했다.

오 감독이 말하는 '이것'이란 '죄'다. 그의 할아버지는 목사였다. 어렸을 때부터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의 영화는 줄곧 죄라는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들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한다.

그는 "'킬리만자로'에서 안성기가 한 것을 '무뢰한'에서 전도연이, 박신양이 한 것을 김남길이 하는 것"이라며 "앞으로 영화 몇 편을 더 만들지 모르지만, 다음에도 역시 죄에 관한 더 괜찮은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킬리만자로'와 마찬가지로 '무뢰한'에서도 오 감독은 영화가 공간의 예술임을 일깨운다. 이야기가 애초에 공간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한 아파트에서 정재곤이 김혜경의 아파트를 계속 올려다보고 혜경이 아파트가 있는 언덕에서 걸어내려 오면 그 뒤를 재곤이 따라가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혜경과 재곤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신경전에 가까운 대화를 하는 장면은 오 감독 집 근처의 해장국 가게에서, 혜경이 살인자인 애인을 위해 장을 보는 장면은 아현동 시장에서 나왔다.

그는 "아직 서울이 아닌 곳에 간다는 건 생각을 못하는데, '무뢰한' 때 해보려고 한 곳이나 다음 영화를 생각해서 염두에 둔 곳 상당수가 철거됐다"고 아쉬워했다.

오 감독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여자 김혜경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여자를 정말 모른다"고 표현했다.

그는 "남자의 죄를 이야기하려면 여자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내가 여자를 모른다"며 "시나리오 쓰려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제인에어'를 읽었다"고 했다.

그러고도 여전히 책장 속의 인물이었던 김혜경은 전도연이 연기하면서 달라졌다. 전도연은 거친 남자들의 세계에 파묻힌 여자 김혜경을 전도연만의 여성성을 통해 하나의 인간으로 살려냈다.

오 감독은 "전도연씨가 시나리오를 읽고 김혜경을 분석해온 내용은 '전설급'이었다"며 "최고의 배우와 일을 하는데,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있고 그게 좀 더 좋아지겠는데 왜 마다하겠느냐"고 말했다.

오 감독은 '칸의 여왕' 전도연, 김남길과 함께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고 포토존에 서서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국내 개봉은 오는 27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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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언덕배기에서 출발한 ‘무뢰한’이 칸에 오기까지
    • 입력 2015-05-17 09:09:32
    • 수정2015-05-17 09:09:56
    연합뉴스
영화 '무뢰한'은 형사 정재곤(김남길)이 살인사건 현장에 도달할 때까지 걸어가는 뒷모습을 따라가는 첫 장면만큼이나 길고 구부정한 발걸음 끝에 완성됐다. '초록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를 쓴 오승욱 감독의 연출 데뷔작 '킬리만자로'(2000년)는 10만명을 채 모으지 못해 흥행에 실패했다. 2005년께 오 감독의 머릿속에서 탄생한 '무뢰한'이 제작되는 과정은 당연히 순탄치 않았다. 여러 인물이 나온 '킬리만자로'와 다른 '원맨' 영화라는 뼈대가 세워졌고 '룸살롱 다니는 지인들'의 아이디어와 여성 작가들의 소설로 여성 인물이 덧입혀졌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헌팅이나 갑시다"라고 전화를 걸어온 박일현 미술감독과 함께 인천 언덕배기의 아파트로, 아현동 뒷산으로 영화 촬영장소 헌팅을 다녔다. 미술(서울대 조소과)을 전공한 오 감독은 공간을 봐야 글이 써진다. 시나리오는 3곳의 제작사를 거쳐 마침내 4번째인 사나이픽쳐스에 정착했다. 이번에는 남자 주연배우로 기용한 이정재의 부상으로 캐스팅이 무산됐다. 한국 남자배우 명단을 뽑아 검토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우선순위는 아니었으나 어쩐지 골라낼수록 계속 명단에 남아 있던 김남길이 결국 낙점됐다. 전작으로부터 15년, 구상으로부터 10년 만에 영화는 완성됐다. 제68회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고 곧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칸 해변에 자리한 영화제 한국관에서 만난 오 감독은 "어떻게 칸을 즐기겠나"며 "칸 영화제에 초청받아 온 것보다 국내 개봉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 '무뢰한' 시나리오가 세 번째 거절당했을 때 그에게 떠오른 생각은 "나는 이것밖에 못 쓰는데 다른 걸 어떻게 하지"였다고 했다. 오 감독이 말하는 '이것'이란 '죄'다. 그의 할아버지는 목사였다. 어렸을 때부터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의 영화는 줄곧 죄라는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들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한다. 그는 "'킬리만자로'에서 안성기가 한 것을 '무뢰한'에서 전도연이, 박신양이 한 것을 김남길이 하는 것"이라며 "앞으로 영화 몇 편을 더 만들지 모르지만, 다음에도 역시 죄에 관한 더 괜찮은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킬리만자로'와 마찬가지로 '무뢰한'에서도 오 감독은 영화가 공간의 예술임을 일깨운다. 이야기가 애초에 공간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한 아파트에서 정재곤이 김혜경의 아파트를 계속 올려다보고 혜경이 아파트가 있는 언덕에서 걸어내려 오면 그 뒤를 재곤이 따라가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혜경과 재곤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신경전에 가까운 대화를 하는 장면은 오 감독 집 근처의 해장국 가게에서, 혜경이 살인자인 애인을 위해 장을 보는 장면은 아현동 시장에서 나왔다. 그는 "아직 서울이 아닌 곳에 간다는 건 생각을 못하는데, '무뢰한' 때 해보려고 한 곳이나 다음 영화를 생각해서 염두에 둔 곳 상당수가 철거됐다"고 아쉬워했다. 오 감독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여자 김혜경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여자를 정말 모른다"고 표현했다. 그는 "남자의 죄를 이야기하려면 여자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내가 여자를 모른다"며 "시나리오 쓰려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제인에어'를 읽었다"고 했다. 그러고도 여전히 책장 속의 인물이었던 김혜경은 전도연이 연기하면서 달라졌다. 전도연은 거친 남자들의 세계에 파묻힌 여자 김혜경을 전도연만의 여성성을 통해 하나의 인간으로 살려냈다. 오 감독은 "전도연씨가 시나리오를 읽고 김혜경을 분석해온 내용은 '전설급'이었다"며 "최고의 배우와 일을 하는데,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있고 그게 좀 더 좋아지겠는데 왜 마다하겠느냐"고 말했다. 오 감독은 '칸의 여왕' 전도연, 김남길과 함께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고 포토존에 서서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국내 개봉은 오는 27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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