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론스타가 보낸 한 장의 팩스를 아십니까?
입력 2015.05.27 (16:45)
수정 2015.05.27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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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 이슈가 왜 이토록 오래 지속되고 있고, 급기야 국제 법정까지 가게 됐는지 지난 9년 간 론스타를 지켜본 취재기자 입장에서 그들의 속내와 전후 사정을 들여다봤습니다.
지금부터 9년전, 2006년 4월 14일 과천 정부종합청사에 있는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집무실로 A4 한장 짜리 팩스가 들어왔습니다. 발신지는 영국, 보낸 사람은 엘리스 쇼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선덜랜드 AFC의 회장입니다. 국제 금융계에선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데, 당시에는 외환은행 대주주였던 사모펀드 론스타의 2인자(부회장)였죠.
당시 론스타는 KB금융에게 외환은행을 매각하려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한 지 불과 3년만에 수조원대의 차익을 남기고 떠나려 하자 여론은 들끓었죠.
이런 분위기에서 엘리스 쇼트는 한덕수 부총리에게 팩스를 보냈습니다. 이 론스타가 보낸 팩스는 기자가 특종 보도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죠.
보도 과정의 전말을 여기서 밝힐 순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이 보도에 대해 론스타측이 반색했다는 사실입니다. 론스타는 이 팩스 내용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길 바랬죠.
기자가 당시 입수한 엘리스 쇼트의 서한에는 론스타가 한국 정부에 한 몇가지 약속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선 거액의 사회공헌기금을 내놓겠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쇼트는 서한에서 외환은행 매각 차익에 대한 한국민들의 시각을 이해한다면서, 이 중 1000억 원을 사회공헌기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한국 조세주권과 사법주권에 대한 무조건적 승복이었습니다.
당시 서한에서 쇼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금 추징에 론스타가 응할지 한국 정부가 걱정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해한다. 한국의 법과 규제에 따르는 것은 물론 현재 진행중인 사법당국과 세무당국의 조사에도 전적으로 협력할 것이다"
그러면서 국내 과세 주권 승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죠.
"외환은행 매각 이익 중 일부(7250억원)를 과세 논란이 끝날 때까지 국내 은행에 예치한다. 역삼동 소재 대형 빌딩인 스타타워의 매각 차익에 대한 추징세금(1400억원)도 법적인 결론이 내려지면 납부하겠다"
철저히 몸을 낮춘 자세였습니다.
론스타는 이런 내용의 팩스를 보낸지 5일 뒤에는 기자회견도 했죠. 4월 19일 전격 방한한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은 63빌딩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덕수 부총리에게 보낸 팩스 내용을 모두 이행하겠다"는 공개적인 약속도 했습니다.
이후 9년이 흘렀습니다. 론스타는 지금 한국을 완전히 떠난 상태입니다. 극동건설이나 스타타워, 스타리스 등을 되팔아 엄청난 대박을 올렸고, 마지막으로 2012년 외환은행을 팔아 큰 돈을 남기고 훨훨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론스타는 당시 한국의 한덕수 부총리, 아니 한국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사회공헌기금과 관련해 론스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앞서 2005년에 제일은행을 팔고 나간 비슷한 성격의 사모펀드 뉴브리지 캐피탈은 1조1500억원의 이익을 내고, 기부금 200억원을 냈습니다.
반면 외환은행 인수에 2조1549억원을 투자해 6조원이 넘는 돈을 챙긴, 그래서 매각 차익이 4조원이 넘는(배당액 포함) 론스타는 자신들이 한 기부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회공헌기금은 법적 의무가 아니기에 스스로 내지 않는다면 강제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진짜 심각한 건 "한국의 사법제도를 존중한다"는 공언이 무색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 시작된 거액 소송전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거액의 소송전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론스타가 세계은행 산하 중재지구인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중재 신청이 지난 15일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열흘간 열렸습니다. 2차 심리는 다음달 29일부터 열흘간 열릴 예정이랍니다.
쟁점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금융당국에 제때 안 해 줘 손해가 컸으니 이를 배상하라는 것, 그리고 매각 차익에 대해 과세하면 안되는데 했으니 낸 세금을 돌려 달라는 것이죠. 소송 가액이 46억 7900만달러(5조 1000억원)에 이릅니다. 천문학적인 규모입니다.
이번 소송이 어떻게 결론을 맺을지 전문가들 조차 쉽게 예상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로서도 ISD 소송이 거의 처음인데다가, 재판이 미국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국익에 맞는 판결이 나오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지난 9년간 론스타를 취재해본 경험을 되살려 이번 소송의 몇가지를 이면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 환차손으로 속 쓰린 론스타
론스타 입장에서 보면 외환은행 매각이 늦어지면서 매각 이익이 다소 줄어든 건 사실이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손해'가 아닌 '매각 이익의 감소'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론스타는 2006년에는 KB금융에, 2007년에는 HSBC에 외환은행을 팔기로 계약까지 맺었다가 계약이 파기됐습니다. 정부 승인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2006년 KB금융과 계약했을 당시 외환은행 매각가는 6조3347억원 수준이었습니다. 반면 2012년 하나금융지주에 팔면서 받은 돈은 4조6888억원입니다. 두 계약 사이에는 1조 7000억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국민은행에 팔지 못한 이후, 즉 2006년~2011년 사이 론스타는 외환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배당이익, 그리고 일부 지분 매각으로 적지 않은 돈을 챙깁니다.
이 부분까지 감안하면 두 계약 사이에 매각 이익 차이는 1000억 정도에 불과합니다. 2007년 9월 HSBC에 5조 9376억원을 받기 한 계약의 매각 이익도 엇비슷합니다. 물론 자금 회수 시점이 늦었으니, 그만큼의 이자 손해는 있었겠죠.
금융계에서는 오히려 론스타의 '쓰린 속'은 다른 이유에 있다고 합니다. 바로 환차익 감소입니다.
달러를 들고와 원화로 투자하고 다시 달러로 환전해 나가는 미국 펀드의 특성상 환차익은 투자 수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헌데 론스타가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180원 수준이었죠. 이후 국민은행과 매각 계약을 할 당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950원까지 하락(원화가치 상승)했습니다. 론스타에겐 엄청나게 좋은 매각 타이밍이었죠.
하지만 론스타 입장에서 아쉽게도 당시 매각은 실패했고, 환율이 상승하면서(원화가치 하락) 결국 론스타는 달러당 1128원 수준이던 2012년 외환은행을 매각했죠.
원화 5조원을 달러로 환전해 나간다고 가정할 때 2006년과 2012년 사이 론스타는 챙길 수 있는 환차익 1조 원을 허공에 날린 것입니다.
하지만 환차익이란 건 국제거래에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 법정에서 자기의 권리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국제중재 전문 변호사들은 말합니다. 론스타도 이번 ISD 소송에서 표면적으로는 환차익 부분은 얘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국계 자금에 대한 한국 정부의 차별대우로 매각 승인이 늦어졌고, 이에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는 논리를 내세웁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타당할까요?
◆ 최경환이 부각시킨 ‘의문의 팩스 5장’
사실 론스타 문제가 크게 불거진 데는 역할을 한 의외의 인물이 있답니다. 친박계 실세이자 현 경제부총리인 최경환 의원입니다. 그는 2006년 론스타 문제를 거의 처음으로 세상에 끄집어 낸 사람입니다. 지금은 여당 실세의원이지만 당시는 야당 의원이었죠.
최경환 의원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게 이른바 '의문의 팩스 5장'이었습니다.
최 의원이 국정감사 등을 통해 제기한 의혹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2003년 당시 외환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비율 연말 전망치는 10%였다. 즉 경영전망이 나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막상 외환은행이 금융감독원에 보낸 팩스 5장에는 이 수치가 6.16%로 돼 있다. 사모펀드인 론스타에게 외환은행 인수 자격을 주기 위해 누군가 고의적으로 BIS 비율을 낮춰 경영 전망을 나쁘게 한 의혹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최 의원이 제기한 이런 의혹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과 맞물려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결국 대검 중앙수사부가 나서 론스타 의혹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광범위한 압수수색과 관련자 소환, 그리고 당시 은행장과 고위 관료들에 대한 구속 기소가 이어졌습니다.
이 수사는 용두사미로 끝났습니다. 외환카드 주가 조작 등 일부 불법 행위가 적발됐지만 의혹의 핵심이었던 외환은행 인수 과정에서 불법이 있었다는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죠. 기소됐던 관련자들은 대부분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때 형성된 론스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론스타에게는 '악덕 투기 자본'이라는 주홍글씨가 붙었고, 이후 외환은행의 매각 승인 과정에서 금융당국도 이런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려스러운 건 론스타가 ISD에서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외국자본에 대한 부당한 차별, 법과 원칙보다는 여론에 휩쓸린 금융당국의 승인 지연이라는 론스타 주장에 대해 워싱턴 법조계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우려가 나옵니다. 당시 언론 기사나 검찰 수사 브리핑 내용 등을 보면 다소 감정적인 내용, 즉 여론을 한쪽으로 모는 내용들이 적지 않게 보입니다.
◆ 베일에 쌓인 ISD 재판 과정
워싱턴에서 진행중인 이번 ISD는 심리 내용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정부는 론스타와 맺은 비밀유지 약정에 따라 공개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5조 원대의 소송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난 22일 국회에서는 '론스타 ISD 긴급토론회'가 열렸죠. 여기서도 정부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론스타 문제에 정통한 홍익대 전성인 교수 등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부터 잘못됐다고 말합니다.
즉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이미 극동건설이나 스타타워, 미국 USDP 등 2조624억 원의 산업자본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비금융회사 자산규모 합계가 2조 원을 초과하면 은행 대주주 자격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전성인 교수는 "론스타가 은행을 인수할 수 없는 산업자본이라는 전제하에 소송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정부가 그렇게 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입니다. 전 교수 말대로 한다면 금융당국은 자신들이 제대로 심사하지 않아 인수 자격이 없는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게 됐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정부는 다른 논리를 개발해 론스타 측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론스타는 이번 ISD 소송을 벨기에 소재 법인을 통해 제기했는데, 한국-벨기에 투자 보장 협장에 따라 자신의 권리가 침해됐다는 주장을 하고 있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ISD를 제기한 벨기에 소재 법인(론스타 자회사)이 페이퍼 컴퍼니일뿐 사실상 미국-영국회사이고, 금융 분야는 투자보장 대상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부의 반대 논리가 진짜 이런 것이라면 다소 곁가지 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부가 ISD 소송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것도 이런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 위협받는 사법주권
이번 론스타의 ISD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ISD 제도 자체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은 각국과 자유무역협정(FTA)나 투자협정(BT)을 체결하면서 대부분 ISD 조항을 포함시켰죠. 높은 수준의 FTA에는 빠지지 않고 ISD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우리한테 들어오는 투자보다 우리 자본이 밖으로 나가는 투자가 많은 대한민국 현실은 우리가 ISD를 긍정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ISD 찬성론자들 조차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이번 론스타 ISD 소송의 두 번째 쟁점, 즉 과세 부분입니다.
조세에는 두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조세법률주의입니다. "조세의 종목과 세율을 법률로 정한다"는 것이죠. 즉 법에 없는 과세는 안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조세평등입니다. 국세기본법에 보면 조세평등의 하위개념으로서 조세에 대한 실질과세원칙이라는 걸 규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각종 소득, 수익, 거래의 귀속이 명의일 뿐이고 사실상의 귀속자가 따로 있는 경우 귀속자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주인에게 세금을 물린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죠.
론스타와 우리나라 정부의 과세 분쟁은 바로 이 부분과 맞닿아 있습니다. 론스타는 우리나라에 투자하면서 벨기에 등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투자를 했습니다. 벨기에는 우리나라와 이중 과세 방지 협정이 돼 있어 벨기에 회사는 우리나라에서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세청은 론스타에 대해 거액의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벨기에 법인은 과세를 피하기 위한 도관(導管)회사(Conduit Company)로 정상적인 사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본사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한 것이지요.
물론 론스타는 불복했습니다. 이 때부터는 론스타는 조세심판원과 법원에 무더기 소송을 냈습니다.
우리 법원의 판단은 일관됐습니다.
"실질 과세원칙을 적용해 과세한 것은 적법하다. 도관기업은 명의만 본사에 빌려주고 제3국에서 발생하는 투자소득을 본사에 보내는 조세회피용 회사로 봐야 한다"
우리나라 대법원의 공식 판단입니다.
이 대법원 판결까지 나온 사안을 가지고 론스타는 지금 워싱턴에서 세금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내고 있습니다.
지난 22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서울중앙지법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통상전문 송기호 변호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한국 법원에서 패소판결을 받은 세금 문제를 가지고 론스타는 다시 국제 중재 심판을 통해 사법부의 실질 과세 원칙을 무너뜨리려 한다. 조세주권과 사법주권을 공격하는 ISD에 대해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번 ISD는 빠르면 내년 봄쯤 결론이 날 것이라고 합니다. 민변은 승소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만, 결과를 속단할 수 없다는 의견이 더 많습니다.
내년 봄 ISD 결과가 나온다면 론스타는 한덕수 부총리기에게 팩스를 보낸지 10년 만에 한국과의 질긴 인연을 끝내게 될 것입니다. 나올 소송 결과에 따라 진 쪽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지난 10년 론스타 사태를 지켜보면서 아쉬운 점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외국 자본에 대한 뿌리깊은 배타성 같은 한국 사회의 복합적인 문제가 론스타 사태에는 숨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국내 사법주권마저 무시하는 부도덕한 사모펀드, 불법은 없었다지만 멀쩡한 외환은행을 헐값에 팔아 이번 론스타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어처구니 없는 정부의 일처리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아무쪼록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워싱턴에서 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지금부터 9년전, 2006년 4월 14일 과천 정부종합청사에 있는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집무실로 A4 한장 짜리 팩스가 들어왔습니다. 발신지는 영국, 보낸 사람은 엘리스 쇼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선덜랜드 AFC의 회장입니다. 국제 금융계에선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데, 당시에는 외환은행 대주주였던 사모펀드 론스타의 2인자(부회장)였죠.
당시 론스타는 KB금융에게 외환은행을 매각하려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한 지 불과 3년만에 수조원대의 차익을 남기고 떠나려 하자 여론은 들끓었죠.
이런 분위기에서 엘리스 쇼트는 한덕수 부총리에게 팩스를 보냈습니다. 이 론스타가 보낸 팩스는 기자가 특종 보도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죠.
보도 과정의 전말을 여기서 밝힐 순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이 보도에 대해 론스타측이 반색했다는 사실입니다. 론스타는 이 팩스 내용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길 바랬죠.
기자가 당시 입수한 엘리스 쇼트의 서한에는 론스타가 한국 정부에 한 몇가지 약속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선 거액의 사회공헌기금을 내놓겠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쇼트는 서한에서 외환은행 매각 차익에 대한 한국민들의 시각을 이해한다면서, 이 중 1000억 원을 사회공헌기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한국 조세주권과 사법주권에 대한 무조건적 승복이었습니다.
당시 서한에서 쇼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금 추징에 론스타가 응할지 한국 정부가 걱정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해한다. 한국의 법과 규제에 따르는 것은 물론 현재 진행중인 사법당국과 세무당국의 조사에도 전적으로 협력할 것이다"
그러면서 국내 과세 주권 승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죠.
"외환은행 매각 이익 중 일부(7250억원)를 과세 논란이 끝날 때까지 국내 은행에 예치한다. 역삼동 소재 대형 빌딩인 스타타워의 매각 차익에 대한 추징세금(1400억원)도 법적인 결론이 내려지면 납부하겠다"
철저히 몸을 낮춘 자세였습니다.
론스타는 이런 내용의 팩스를 보낸지 5일 뒤에는 기자회견도 했죠. 4월 19일 전격 방한한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은 63빌딩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덕수 부총리에게 보낸 팩스 내용을 모두 이행하겠다"는 공개적인 약속도 했습니다.
이후 9년이 흘렀습니다. 론스타는 지금 한국을 완전히 떠난 상태입니다. 극동건설이나 스타타워, 스타리스 등을 되팔아 엄청난 대박을 올렸고, 마지막으로 2012년 외환은행을 팔아 큰 돈을 남기고 훨훨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론스타는 당시 한국의 한덕수 부총리, 아니 한국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사회공헌기금과 관련해 론스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앞서 2005년에 제일은행을 팔고 나간 비슷한 성격의 사모펀드 뉴브리지 캐피탈은 1조1500억원의 이익을 내고, 기부금 200억원을 냈습니다.
반면 외환은행 인수에 2조1549억원을 투자해 6조원이 넘는 돈을 챙긴, 그래서 매각 차익이 4조원이 넘는(배당액 포함) 론스타는 자신들이 한 기부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회공헌기금은 법적 의무가 아니기에 스스로 내지 않는다면 강제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진짜 심각한 건 "한국의 사법제도를 존중한다"는 공언이 무색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 시작된 거액 소송전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거액의 소송전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론스타가 세계은행 산하 중재지구인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중재 신청이 지난 15일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열흘간 열렸습니다. 2차 심리는 다음달 29일부터 열흘간 열릴 예정이랍니다.
쟁점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금융당국에 제때 안 해 줘 손해가 컸으니 이를 배상하라는 것, 그리고 매각 차익에 대해 과세하면 안되는데 했으니 낸 세금을 돌려 달라는 것이죠. 소송 가액이 46억 7900만달러(5조 1000억원)에 이릅니다. 천문학적인 규모입니다.
이번 소송이 어떻게 결론을 맺을지 전문가들 조차 쉽게 예상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로서도 ISD 소송이 거의 처음인데다가, 재판이 미국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국익에 맞는 판결이 나오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지난 9년간 론스타를 취재해본 경험을 되살려 이번 소송의 몇가지를 이면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 환차손으로 속 쓰린 론스타
론스타 입장에서 보면 외환은행 매각이 늦어지면서 매각 이익이 다소 줄어든 건 사실이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손해'가 아닌 '매각 이익의 감소'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론스타는 2006년에는 KB금융에, 2007년에는 HSBC에 외환은행을 팔기로 계약까지 맺었다가 계약이 파기됐습니다. 정부 승인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2006년 KB금융과 계약했을 당시 외환은행 매각가는 6조3347억원 수준이었습니다. 반면 2012년 하나금융지주에 팔면서 받은 돈은 4조6888억원입니다. 두 계약 사이에는 1조 7000억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국민은행에 팔지 못한 이후, 즉 2006년~2011년 사이 론스타는 외환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배당이익, 그리고 일부 지분 매각으로 적지 않은 돈을 챙깁니다.
이 부분까지 감안하면 두 계약 사이에 매각 이익 차이는 1000억 정도에 불과합니다. 2007년 9월 HSBC에 5조 9376억원을 받기 한 계약의 매각 이익도 엇비슷합니다. 물론 자금 회수 시점이 늦었으니, 그만큼의 이자 손해는 있었겠죠.
금융계에서는 오히려 론스타의 '쓰린 속'은 다른 이유에 있다고 합니다. 바로 환차익 감소입니다.
달러를 들고와 원화로 투자하고 다시 달러로 환전해 나가는 미국 펀드의 특성상 환차익은 투자 수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헌데 론스타가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180원 수준이었죠. 이후 국민은행과 매각 계약을 할 당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950원까지 하락(원화가치 상승)했습니다. 론스타에겐 엄청나게 좋은 매각 타이밍이었죠.
하지만 론스타 입장에서 아쉽게도 당시 매각은 실패했고, 환율이 상승하면서(원화가치 하락) 결국 론스타는 달러당 1128원 수준이던 2012년 외환은행을 매각했죠.
원화 5조원을 달러로 환전해 나간다고 가정할 때 2006년과 2012년 사이 론스타는 챙길 수 있는 환차익 1조 원을 허공에 날린 것입니다.
하지만 환차익이란 건 국제거래에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 법정에서 자기의 권리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국제중재 전문 변호사들은 말합니다. 론스타도 이번 ISD 소송에서 표면적으로는 환차익 부분은 얘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국계 자금에 대한 한국 정부의 차별대우로 매각 승인이 늦어졌고, 이에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는 논리를 내세웁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타당할까요?
◆ 최경환이 부각시킨 ‘의문의 팩스 5장’
사실 론스타 문제가 크게 불거진 데는 역할을 한 의외의 인물이 있답니다. 친박계 실세이자 현 경제부총리인 최경환 의원입니다. 그는 2006년 론스타 문제를 거의 처음으로 세상에 끄집어 낸 사람입니다. 지금은 여당 실세의원이지만 당시는 야당 의원이었죠.
최경환 의원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게 이른바 '의문의 팩스 5장'이었습니다.
최 의원이 국정감사 등을 통해 제기한 의혹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2003년 당시 외환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비율 연말 전망치는 10%였다. 즉 경영전망이 나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막상 외환은행이 금융감독원에 보낸 팩스 5장에는 이 수치가 6.16%로 돼 있다. 사모펀드인 론스타에게 외환은행 인수 자격을 주기 위해 누군가 고의적으로 BIS 비율을 낮춰 경영 전망을 나쁘게 한 의혹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최 의원이 제기한 이런 의혹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과 맞물려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결국 대검 중앙수사부가 나서 론스타 의혹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광범위한 압수수색과 관련자 소환, 그리고 당시 은행장과 고위 관료들에 대한 구속 기소가 이어졌습니다.
이 수사는 용두사미로 끝났습니다. 외환카드 주가 조작 등 일부 불법 행위가 적발됐지만 의혹의 핵심이었던 외환은행 인수 과정에서 불법이 있었다는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죠. 기소됐던 관련자들은 대부분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때 형성된 론스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론스타에게는 '악덕 투기 자본'이라는 주홍글씨가 붙었고, 이후 외환은행의 매각 승인 과정에서 금융당국도 이런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려스러운 건 론스타가 ISD에서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외국자본에 대한 부당한 차별, 법과 원칙보다는 여론에 휩쓸린 금융당국의 승인 지연이라는 론스타 주장에 대해 워싱턴 법조계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우려가 나옵니다. 당시 언론 기사나 검찰 수사 브리핑 내용 등을 보면 다소 감정적인 내용, 즉 여론을 한쪽으로 모는 내용들이 적지 않게 보입니다.
◆ 베일에 쌓인 ISD 재판 과정
워싱턴에서 진행중인 이번 ISD는 심리 내용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정부는 론스타와 맺은 비밀유지 약정에 따라 공개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5조 원대의 소송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난 22일 국회에서는 '론스타 ISD 긴급토론회'가 열렸죠. 여기서도 정부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론스타 문제에 정통한 홍익대 전성인 교수 등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부터 잘못됐다고 말합니다.
즉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이미 극동건설이나 스타타워, 미국 USDP 등 2조624억 원의 산업자본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비금융회사 자산규모 합계가 2조 원을 초과하면 은행 대주주 자격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전성인 교수는 "론스타가 은행을 인수할 수 없는 산업자본이라는 전제하에 소송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정부가 그렇게 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입니다. 전 교수 말대로 한다면 금융당국은 자신들이 제대로 심사하지 않아 인수 자격이 없는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게 됐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정부는 다른 논리를 개발해 론스타 측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론스타는 이번 ISD 소송을 벨기에 소재 법인을 통해 제기했는데, 한국-벨기에 투자 보장 협장에 따라 자신의 권리가 침해됐다는 주장을 하고 있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ISD를 제기한 벨기에 소재 법인(론스타 자회사)이 페이퍼 컴퍼니일뿐 사실상 미국-영국회사이고, 금융 분야는 투자보장 대상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부의 반대 논리가 진짜 이런 것이라면 다소 곁가지 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부가 ISD 소송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것도 이런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 위협받는 사법주권
이번 론스타의 ISD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ISD 제도 자체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은 각국과 자유무역협정(FTA)나 투자협정(BT)을 체결하면서 대부분 ISD 조항을 포함시켰죠. 높은 수준의 FTA에는 빠지지 않고 ISD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우리한테 들어오는 투자보다 우리 자본이 밖으로 나가는 투자가 많은 대한민국 현실은 우리가 ISD를 긍정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ISD 찬성론자들 조차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이번 론스타 ISD 소송의 두 번째 쟁점, 즉 과세 부분입니다.
조세에는 두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조세법률주의입니다. "조세의 종목과 세율을 법률로 정한다"는 것이죠. 즉 법에 없는 과세는 안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조세평등입니다. 국세기본법에 보면 조세평등의 하위개념으로서 조세에 대한 실질과세원칙이라는 걸 규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각종 소득, 수익, 거래의 귀속이 명의일 뿐이고 사실상의 귀속자가 따로 있는 경우 귀속자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주인에게 세금을 물린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죠.
론스타와 우리나라 정부의 과세 분쟁은 바로 이 부분과 맞닿아 있습니다. 론스타는 우리나라에 투자하면서 벨기에 등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투자를 했습니다. 벨기에는 우리나라와 이중 과세 방지 협정이 돼 있어 벨기에 회사는 우리나라에서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세청은 론스타에 대해 거액의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벨기에 법인은 과세를 피하기 위한 도관(導管)회사(Conduit Company)로 정상적인 사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본사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한 것이지요.
물론 론스타는 불복했습니다. 이 때부터는 론스타는 조세심판원과 법원에 무더기 소송을 냈습니다.
우리 법원의 판단은 일관됐습니다.
"실질 과세원칙을 적용해 과세한 것은 적법하다. 도관기업은 명의만 본사에 빌려주고 제3국에서 발생하는 투자소득을 본사에 보내는 조세회피용 회사로 봐야 한다"
우리나라 대법원의 공식 판단입니다.
이 대법원 판결까지 나온 사안을 가지고 론스타는 지금 워싱턴에서 세금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내고 있습니다.
지난 22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서울중앙지법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통상전문 송기호 변호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한국 법원에서 패소판결을 받은 세금 문제를 가지고 론스타는 다시 국제 중재 심판을 통해 사법부의 실질 과세 원칙을 무너뜨리려 한다. 조세주권과 사법주권을 공격하는 ISD에 대해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번 ISD는 빠르면 내년 봄쯤 결론이 날 것이라고 합니다. 민변은 승소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만, 결과를 속단할 수 없다는 의견이 더 많습니다.
내년 봄 ISD 결과가 나온다면 론스타는 한덕수 부총리기에게 팩스를 보낸지 10년 만에 한국과의 질긴 인연을 끝내게 될 것입니다. 나올 소송 결과에 따라 진 쪽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지난 10년 론스타 사태를 지켜보면서 아쉬운 점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외국 자본에 대한 뿌리깊은 배타성 같은 한국 사회의 복합적인 문제가 론스타 사태에는 숨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국내 사법주권마저 무시하는 부도덕한 사모펀드, 불법은 없었다지만 멀쩡한 외환은행을 헐값에 팔아 이번 론스타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어처구니 없는 정부의 일처리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아무쪼록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워싱턴에서 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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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후] 론스타가 보낸 한 장의 팩스를 아십니까?
-
- 입력 2015-05-27 16:45:57
- 수정2015-05-27 18:44:20
★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 이슈가 왜 이토록 오래 지속되고 있고, 급기야 국제 법정까지 가게 됐는지 지난 9년 간 론스타를 지켜본 취재기자 입장에서 그들의 속내와 전후 사정을 들여다봤습니다.
지금부터 9년전, 2006년 4월 14일 과천 정부종합청사에 있는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집무실로 A4 한장 짜리 팩스가 들어왔습니다. 발신지는 영국, 보낸 사람은 엘리스 쇼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선덜랜드 AFC의 회장입니다. 국제 금융계에선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데, 당시에는 외환은행 대주주였던 사모펀드 론스타의 2인자(부회장)였죠.
당시 론스타는 KB금융에게 외환은행을 매각하려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한 지 불과 3년만에 수조원대의 차익을 남기고 떠나려 하자 여론은 들끓었죠.
이런 분위기에서 엘리스 쇼트는 한덕수 부총리에게 팩스를 보냈습니다. 이 론스타가 보낸 팩스는 기자가 특종 보도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죠.
보도 과정의 전말을 여기서 밝힐 순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이 보도에 대해 론스타측이 반색했다는 사실입니다. 론스타는 이 팩스 내용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길 바랬죠.
기자가 당시 입수한 엘리스 쇼트의 서한에는 론스타가 한국 정부에 한 몇가지 약속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선 거액의 사회공헌기금을 내놓겠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쇼트는 서한에서 외환은행 매각 차익에 대한 한국민들의 시각을 이해한다면서, 이 중 1000억 원을 사회공헌기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한국 조세주권과 사법주권에 대한 무조건적 승복이었습니다.
당시 서한에서 쇼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금 추징에 론스타가 응할지 한국 정부가 걱정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해한다. 한국의 법과 규제에 따르는 것은 물론 현재 진행중인 사법당국과 세무당국의 조사에도 전적으로 협력할 것이다"
그러면서 국내 과세 주권 승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죠.
"외환은행 매각 이익 중 일부(7250억원)를 과세 논란이 끝날 때까지 국내 은행에 예치한다. 역삼동 소재 대형 빌딩인 스타타워의 매각 차익에 대한 추징세금(1400억원)도 법적인 결론이 내려지면 납부하겠다"
철저히 몸을 낮춘 자세였습니다.
론스타는 이런 내용의 팩스를 보낸지 5일 뒤에는 기자회견도 했죠. 4월 19일 전격 방한한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은 63빌딩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덕수 부총리에게 보낸 팩스 내용을 모두 이행하겠다"는 공개적인 약속도 했습니다.
이후 9년이 흘렀습니다. 론스타는 지금 한국을 완전히 떠난 상태입니다. 극동건설이나 스타타워, 스타리스 등을 되팔아 엄청난 대박을 올렸고, 마지막으로 2012년 외환은행을 팔아 큰 돈을 남기고 훨훨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론스타는 당시 한국의 한덕수 부총리, 아니 한국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사회공헌기금과 관련해 론스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앞서 2005년에 제일은행을 팔고 나간 비슷한 성격의 사모펀드 뉴브리지 캐피탈은 1조1500억원의 이익을 내고, 기부금 200억원을 냈습니다.
반면 외환은행 인수에 2조1549억원을 투자해 6조원이 넘는 돈을 챙긴, 그래서 매각 차익이 4조원이 넘는(배당액 포함) 론스타는 자신들이 한 기부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회공헌기금은 법적 의무가 아니기에 스스로 내지 않는다면 강제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진짜 심각한 건 "한국의 사법제도를 존중한다"는 공언이 무색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 시작된 거액 소송전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거액의 소송전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론스타가 세계은행 산하 중재지구인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중재 신청이 지난 15일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열흘간 열렸습니다. 2차 심리는 다음달 29일부터 열흘간 열릴 예정이랍니다.
쟁점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금융당국에 제때 안 해 줘 손해가 컸으니 이를 배상하라는 것, 그리고 매각 차익에 대해 과세하면 안되는데 했으니 낸 세금을 돌려 달라는 것이죠. 소송 가액이 46억 7900만달러(5조 1000억원)에 이릅니다. 천문학적인 규모입니다.
이번 소송이 어떻게 결론을 맺을지 전문가들 조차 쉽게 예상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로서도 ISD 소송이 거의 처음인데다가, 재판이 미국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국익에 맞는 판결이 나오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지난 9년간 론스타를 취재해본 경험을 되살려 이번 소송의 몇가지를 이면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 환차손으로 속 쓰린 론스타
론스타 입장에서 보면 외환은행 매각이 늦어지면서 매각 이익이 다소 줄어든 건 사실이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손해'가 아닌 '매각 이익의 감소'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론스타는 2006년에는 KB금융에, 2007년에는 HSBC에 외환은행을 팔기로 계약까지 맺었다가 계약이 파기됐습니다. 정부 승인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2006년 KB금융과 계약했을 당시 외환은행 매각가는 6조3347억원 수준이었습니다. 반면 2012년 하나금융지주에 팔면서 받은 돈은 4조6888억원입니다. 두 계약 사이에는 1조 7000억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국민은행에 팔지 못한 이후, 즉 2006년~2011년 사이 론스타는 외환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배당이익, 그리고 일부 지분 매각으로 적지 않은 돈을 챙깁니다.
이 부분까지 감안하면 두 계약 사이에 매각 이익 차이는 1000억 정도에 불과합니다. 2007년 9월 HSBC에 5조 9376억원을 받기 한 계약의 매각 이익도 엇비슷합니다. 물론 자금 회수 시점이 늦었으니, 그만큼의 이자 손해는 있었겠죠.
금융계에서는 오히려 론스타의 '쓰린 속'은 다른 이유에 있다고 합니다. 바로 환차익 감소입니다.
달러를 들고와 원화로 투자하고 다시 달러로 환전해 나가는 미국 펀드의 특성상 환차익은 투자 수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헌데 론스타가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180원 수준이었죠. 이후 국민은행과 매각 계약을 할 당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950원까지 하락(원화가치 상승)했습니다. 론스타에겐 엄청나게 좋은 매각 타이밍이었죠.
하지만 론스타 입장에서 아쉽게도 당시 매각은 실패했고, 환율이 상승하면서(원화가치 하락) 결국 론스타는 달러당 1128원 수준이던 2012년 외환은행을 매각했죠.
원화 5조원을 달러로 환전해 나간다고 가정할 때 2006년과 2012년 사이 론스타는 챙길 수 있는 환차익 1조 원을 허공에 날린 것입니다.
하지만 환차익이란 건 국제거래에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 법정에서 자기의 권리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국제중재 전문 변호사들은 말합니다. 론스타도 이번 ISD 소송에서 표면적으로는 환차익 부분은 얘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국계 자금에 대한 한국 정부의 차별대우로 매각 승인이 늦어졌고, 이에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는 논리를 내세웁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타당할까요?
◆ 최경환이 부각시킨 ‘의문의 팩스 5장’
사실 론스타 문제가 크게 불거진 데는 역할을 한 의외의 인물이 있답니다. 친박계 실세이자 현 경제부총리인 최경환 의원입니다. 그는 2006년 론스타 문제를 거의 처음으로 세상에 끄집어 낸 사람입니다. 지금은 여당 실세의원이지만 당시는 야당 의원이었죠.
최경환 의원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게 이른바 '의문의 팩스 5장'이었습니다.
최 의원이 국정감사 등을 통해 제기한 의혹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2003년 당시 외환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비율 연말 전망치는 10%였다. 즉 경영전망이 나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막상 외환은행이 금융감독원에 보낸 팩스 5장에는 이 수치가 6.16%로 돼 있다. 사모펀드인 론스타에게 외환은행 인수 자격을 주기 위해 누군가 고의적으로 BIS 비율을 낮춰 경영 전망을 나쁘게 한 의혹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최 의원이 제기한 이런 의혹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과 맞물려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결국 대검 중앙수사부가 나서 론스타 의혹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광범위한 압수수색과 관련자 소환, 그리고 당시 은행장과 고위 관료들에 대한 구속 기소가 이어졌습니다.
이 수사는 용두사미로 끝났습니다. 외환카드 주가 조작 등 일부 불법 행위가 적발됐지만 의혹의 핵심이었던 외환은행 인수 과정에서 불법이 있었다는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죠. 기소됐던 관련자들은 대부분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때 형성된 론스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론스타에게는 '악덕 투기 자본'이라는 주홍글씨가 붙었고, 이후 외환은행의 매각 승인 과정에서 금융당국도 이런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려스러운 건 론스타가 ISD에서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외국자본에 대한 부당한 차별, 법과 원칙보다는 여론에 휩쓸린 금융당국의 승인 지연이라는 론스타 주장에 대해 워싱턴 법조계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우려가 나옵니다. 당시 언론 기사나 검찰 수사 브리핑 내용 등을 보면 다소 감정적인 내용, 즉 여론을 한쪽으로 모는 내용들이 적지 않게 보입니다.
◆ 베일에 쌓인 ISD 재판 과정
워싱턴에서 진행중인 이번 ISD는 심리 내용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정부는 론스타와 맺은 비밀유지 약정에 따라 공개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5조 원대의 소송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난 22일 국회에서는 '론스타 ISD 긴급토론회'가 열렸죠. 여기서도 정부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론스타 문제에 정통한 홍익대 전성인 교수 등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부터 잘못됐다고 말합니다.
즉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이미 극동건설이나 스타타워, 미국 USDP 등 2조624억 원의 산업자본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비금융회사 자산규모 합계가 2조 원을 초과하면 은행 대주주 자격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전성인 교수는 "론스타가 은행을 인수할 수 없는 산업자본이라는 전제하에 소송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정부가 그렇게 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입니다. 전 교수 말대로 한다면 금융당국은 자신들이 제대로 심사하지 않아 인수 자격이 없는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게 됐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정부는 다른 논리를 개발해 론스타 측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론스타는 이번 ISD 소송을 벨기에 소재 법인을 통해 제기했는데, 한국-벨기에 투자 보장 협장에 따라 자신의 권리가 침해됐다는 주장을 하고 있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ISD를 제기한 벨기에 소재 법인(론스타 자회사)이 페이퍼 컴퍼니일뿐 사실상 미국-영국회사이고, 금융 분야는 투자보장 대상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부의 반대 논리가 진짜 이런 것이라면 다소 곁가지 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부가 ISD 소송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것도 이런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 위협받는 사법주권
이번 론스타의 ISD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ISD 제도 자체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은 각국과 자유무역협정(FTA)나 투자협정(BT)을 체결하면서 대부분 ISD 조항을 포함시켰죠. 높은 수준의 FTA에는 빠지지 않고 ISD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우리한테 들어오는 투자보다 우리 자본이 밖으로 나가는 투자가 많은 대한민국 현실은 우리가 ISD를 긍정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ISD 찬성론자들 조차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이번 론스타 ISD 소송의 두 번째 쟁점, 즉 과세 부분입니다.
조세에는 두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조세법률주의입니다. "조세의 종목과 세율을 법률로 정한다"는 것이죠. 즉 법에 없는 과세는 안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조세평등입니다. 국세기본법에 보면 조세평등의 하위개념으로서 조세에 대한 실질과세원칙이라는 걸 규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각종 소득, 수익, 거래의 귀속이 명의일 뿐이고 사실상의 귀속자가 따로 있는 경우 귀속자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주인에게 세금을 물린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죠.
론스타와 우리나라 정부의 과세 분쟁은 바로 이 부분과 맞닿아 있습니다. 론스타는 우리나라에 투자하면서 벨기에 등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투자를 했습니다. 벨기에는 우리나라와 이중 과세 방지 협정이 돼 있어 벨기에 회사는 우리나라에서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세청은 론스타에 대해 거액의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벨기에 법인은 과세를 피하기 위한 도관(導管)회사(Conduit Company)로 정상적인 사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본사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한 것이지요.
물론 론스타는 불복했습니다. 이 때부터는 론스타는 조세심판원과 법원에 무더기 소송을 냈습니다.
우리 법원의 판단은 일관됐습니다.
"실질 과세원칙을 적용해 과세한 것은 적법하다. 도관기업은 명의만 본사에 빌려주고 제3국에서 발생하는 투자소득을 본사에 보내는 조세회피용 회사로 봐야 한다"
우리나라 대법원의 공식 판단입니다.
이 대법원 판결까지 나온 사안을 가지고 론스타는 지금 워싱턴에서 세금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내고 있습니다.
지난 22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서울중앙지법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통상전문 송기호 변호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한국 법원에서 패소판결을 받은 세금 문제를 가지고 론스타는 다시 국제 중재 심판을 통해 사법부의 실질 과세 원칙을 무너뜨리려 한다. 조세주권과 사법주권을 공격하는 ISD에 대해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번 ISD는 빠르면 내년 봄쯤 결론이 날 것이라고 합니다. 민변은 승소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만, 결과를 속단할 수 없다는 의견이 더 많습니다.
내년 봄 ISD 결과가 나온다면 론스타는 한덕수 부총리기에게 팩스를 보낸지 10년 만에 한국과의 질긴 인연을 끝내게 될 것입니다. 나올 소송 결과에 따라 진 쪽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지난 10년 론스타 사태를 지켜보면서 아쉬운 점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외국 자본에 대한 뿌리깊은 배타성 같은 한국 사회의 복합적인 문제가 론스타 사태에는 숨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국내 사법주권마저 무시하는 부도덕한 사모펀드, 불법은 없었다지만 멀쩡한 외환은행을 헐값에 팔아 이번 론스타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어처구니 없는 정부의 일처리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아무쪼록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워싱턴에서 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지금부터 9년전, 2006년 4월 14일 과천 정부종합청사에 있는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집무실로 A4 한장 짜리 팩스가 들어왔습니다. 발신지는 영국, 보낸 사람은 엘리스 쇼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선덜랜드 AFC의 회장입니다. 국제 금융계에선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데, 당시에는 외환은행 대주주였던 사모펀드 론스타의 2인자(부회장)였죠.
당시 론스타는 KB금융에게 외환은행을 매각하려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한 지 불과 3년만에 수조원대의 차익을 남기고 떠나려 하자 여론은 들끓었죠.
이런 분위기에서 엘리스 쇼트는 한덕수 부총리에게 팩스를 보냈습니다. 이 론스타가 보낸 팩스는 기자가 특종 보도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죠.
보도 과정의 전말을 여기서 밝힐 순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이 보도에 대해 론스타측이 반색했다는 사실입니다. 론스타는 이 팩스 내용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길 바랬죠.
기자가 당시 입수한 엘리스 쇼트의 서한에는 론스타가 한국 정부에 한 몇가지 약속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선 거액의 사회공헌기금을 내놓겠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쇼트는 서한에서 외환은행 매각 차익에 대한 한국민들의 시각을 이해한다면서, 이 중 1000억 원을 사회공헌기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한국 조세주권과 사법주권에 대한 무조건적 승복이었습니다.
당시 서한에서 쇼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금 추징에 론스타가 응할지 한국 정부가 걱정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해한다. 한국의 법과 규제에 따르는 것은 물론 현재 진행중인 사법당국과 세무당국의 조사에도 전적으로 협력할 것이다"
그러면서 국내 과세 주권 승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죠.
"외환은행 매각 이익 중 일부(7250억원)를 과세 논란이 끝날 때까지 국내 은행에 예치한다. 역삼동 소재 대형 빌딩인 스타타워의 매각 차익에 대한 추징세금(1400억원)도 법적인 결론이 내려지면 납부하겠다"
철저히 몸을 낮춘 자세였습니다.
론스타는 이런 내용의 팩스를 보낸지 5일 뒤에는 기자회견도 했죠. 4월 19일 전격 방한한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은 63빌딩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덕수 부총리에게 보낸 팩스 내용을 모두 이행하겠다"는 공개적인 약속도 했습니다.
이후 9년이 흘렀습니다. 론스타는 지금 한국을 완전히 떠난 상태입니다. 극동건설이나 스타타워, 스타리스 등을 되팔아 엄청난 대박을 올렸고, 마지막으로 2012년 외환은행을 팔아 큰 돈을 남기고 훨훨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론스타는 당시 한국의 한덕수 부총리, 아니 한국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사회공헌기금과 관련해 론스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앞서 2005년에 제일은행을 팔고 나간 비슷한 성격의 사모펀드 뉴브리지 캐피탈은 1조1500억원의 이익을 내고, 기부금 200억원을 냈습니다.
반면 외환은행 인수에 2조1549억원을 투자해 6조원이 넘는 돈을 챙긴, 그래서 매각 차익이 4조원이 넘는(배당액 포함) 론스타는 자신들이 한 기부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회공헌기금은 법적 의무가 아니기에 스스로 내지 않는다면 강제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진짜 심각한 건 "한국의 사법제도를 존중한다"는 공언이 무색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 시작된 거액 소송전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거액의 소송전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론스타가 세계은행 산하 중재지구인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중재 신청이 지난 15일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열흘간 열렸습니다. 2차 심리는 다음달 29일부터 열흘간 열릴 예정이랍니다.
쟁점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금융당국에 제때 안 해 줘 손해가 컸으니 이를 배상하라는 것, 그리고 매각 차익에 대해 과세하면 안되는데 했으니 낸 세금을 돌려 달라는 것이죠. 소송 가액이 46억 7900만달러(5조 1000억원)에 이릅니다. 천문학적인 규모입니다.
이번 소송이 어떻게 결론을 맺을지 전문가들 조차 쉽게 예상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로서도 ISD 소송이 거의 처음인데다가, 재판이 미국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국익에 맞는 판결이 나오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지난 9년간 론스타를 취재해본 경험을 되살려 이번 소송의 몇가지를 이면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 환차손으로 속 쓰린 론스타
론스타 입장에서 보면 외환은행 매각이 늦어지면서 매각 이익이 다소 줄어든 건 사실이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손해'가 아닌 '매각 이익의 감소'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론스타는 2006년에는 KB금융에, 2007년에는 HSBC에 외환은행을 팔기로 계약까지 맺었다가 계약이 파기됐습니다. 정부 승인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2006년 KB금융과 계약했을 당시 외환은행 매각가는 6조3347억원 수준이었습니다. 반면 2012년 하나금융지주에 팔면서 받은 돈은 4조6888억원입니다. 두 계약 사이에는 1조 7000억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국민은행에 팔지 못한 이후, 즉 2006년~2011년 사이 론스타는 외환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배당이익, 그리고 일부 지분 매각으로 적지 않은 돈을 챙깁니다.
이 부분까지 감안하면 두 계약 사이에 매각 이익 차이는 1000억 정도에 불과합니다. 2007년 9월 HSBC에 5조 9376억원을 받기 한 계약의 매각 이익도 엇비슷합니다. 물론 자금 회수 시점이 늦었으니, 그만큼의 이자 손해는 있었겠죠.
금융계에서는 오히려 론스타의 '쓰린 속'은 다른 이유에 있다고 합니다. 바로 환차익 감소입니다.
달러를 들고와 원화로 투자하고 다시 달러로 환전해 나가는 미국 펀드의 특성상 환차익은 투자 수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헌데 론스타가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180원 수준이었죠. 이후 국민은행과 매각 계약을 할 당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950원까지 하락(원화가치 상승)했습니다. 론스타에겐 엄청나게 좋은 매각 타이밍이었죠.
하지만 론스타 입장에서 아쉽게도 당시 매각은 실패했고, 환율이 상승하면서(원화가치 하락) 결국 론스타는 달러당 1128원 수준이던 2012년 외환은행을 매각했죠.
원화 5조원을 달러로 환전해 나간다고 가정할 때 2006년과 2012년 사이 론스타는 챙길 수 있는 환차익 1조 원을 허공에 날린 것입니다.
하지만 환차익이란 건 국제거래에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 법정에서 자기의 권리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국제중재 전문 변호사들은 말합니다. 론스타도 이번 ISD 소송에서 표면적으로는 환차익 부분은 얘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국계 자금에 대한 한국 정부의 차별대우로 매각 승인이 늦어졌고, 이에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는 논리를 내세웁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타당할까요?
◆ 최경환이 부각시킨 ‘의문의 팩스 5장’
사실 론스타 문제가 크게 불거진 데는 역할을 한 의외의 인물이 있답니다. 친박계 실세이자 현 경제부총리인 최경환 의원입니다. 그는 2006년 론스타 문제를 거의 처음으로 세상에 끄집어 낸 사람입니다. 지금은 여당 실세의원이지만 당시는 야당 의원이었죠.
최경환 의원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게 이른바 '의문의 팩스 5장'이었습니다.
최 의원이 국정감사 등을 통해 제기한 의혹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2003년 당시 외환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비율 연말 전망치는 10%였다. 즉 경영전망이 나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막상 외환은행이 금융감독원에 보낸 팩스 5장에는 이 수치가 6.16%로 돼 있다. 사모펀드인 론스타에게 외환은행 인수 자격을 주기 위해 누군가 고의적으로 BIS 비율을 낮춰 경영 전망을 나쁘게 한 의혹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최 의원이 제기한 이런 의혹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과 맞물려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결국 대검 중앙수사부가 나서 론스타 의혹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광범위한 압수수색과 관련자 소환, 그리고 당시 은행장과 고위 관료들에 대한 구속 기소가 이어졌습니다.
이 수사는 용두사미로 끝났습니다. 외환카드 주가 조작 등 일부 불법 행위가 적발됐지만 의혹의 핵심이었던 외환은행 인수 과정에서 불법이 있었다는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죠. 기소됐던 관련자들은 대부분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때 형성된 론스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론스타에게는 '악덕 투기 자본'이라는 주홍글씨가 붙었고, 이후 외환은행의 매각 승인 과정에서 금융당국도 이런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려스러운 건 론스타가 ISD에서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외국자본에 대한 부당한 차별, 법과 원칙보다는 여론에 휩쓸린 금융당국의 승인 지연이라는 론스타 주장에 대해 워싱턴 법조계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우려가 나옵니다. 당시 언론 기사나 검찰 수사 브리핑 내용 등을 보면 다소 감정적인 내용, 즉 여론을 한쪽으로 모는 내용들이 적지 않게 보입니다.
◆ 베일에 쌓인 ISD 재판 과정
워싱턴에서 진행중인 이번 ISD는 심리 내용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정부는 론스타와 맺은 비밀유지 약정에 따라 공개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5조 원대의 소송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난 22일 국회에서는 '론스타 ISD 긴급토론회'가 열렸죠. 여기서도 정부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론스타 문제에 정통한 홍익대 전성인 교수 등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부터 잘못됐다고 말합니다.
즉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이미 극동건설이나 스타타워, 미국 USDP 등 2조624억 원의 산업자본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비금융회사 자산규모 합계가 2조 원을 초과하면 은행 대주주 자격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전성인 교수는 "론스타가 은행을 인수할 수 없는 산업자본이라는 전제하에 소송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정부가 그렇게 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입니다. 전 교수 말대로 한다면 금융당국은 자신들이 제대로 심사하지 않아 인수 자격이 없는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게 됐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정부는 다른 논리를 개발해 론스타 측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론스타는 이번 ISD 소송을 벨기에 소재 법인을 통해 제기했는데, 한국-벨기에 투자 보장 협장에 따라 자신의 권리가 침해됐다는 주장을 하고 있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ISD를 제기한 벨기에 소재 법인(론스타 자회사)이 페이퍼 컴퍼니일뿐 사실상 미국-영국회사이고, 금융 분야는 투자보장 대상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부의 반대 논리가 진짜 이런 것이라면 다소 곁가지 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부가 ISD 소송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것도 이런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 위협받는 사법주권
이번 론스타의 ISD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ISD 제도 자체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은 각국과 자유무역협정(FTA)나 투자협정(BT)을 체결하면서 대부분 ISD 조항을 포함시켰죠. 높은 수준의 FTA에는 빠지지 않고 ISD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우리한테 들어오는 투자보다 우리 자본이 밖으로 나가는 투자가 많은 대한민국 현실은 우리가 ISD를 긍정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ISD 찬성론자들 조차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이번 론스타 ISD 소송의 두 번째 쟁점, 즉 과세 부분입니다.
조세에는 두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조세법률주의입니다. "조세의 종목과 세율을 법률로 정한다"는 것이죠. 즉 법에 없는 과세는 안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조세평등입니다. 국세기본법에 보면 조세평등의 하위개념으로서 조세에 대한 실질과세원칙이라는 걸 규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각종 소득, 수익, 거래의 귀속이 명의일 뿐이고 사실상의 귀속자가 따로 있는 경우 귀속자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주인에게 세금을 물린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죠.
론스타와 우리나라 정부의 과세 분쟁은 바로 이 부분과 맞닿아 있습니다. 론스타는 우리나라에 투자하면서 벨기에 등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투자를 했습니다. 벨기에는 우리나라와 이중 과세 방지 협정이 돼 있어 벨기에 회사는 우리나라에서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세청은 론스타에 대해 거액의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벨기에 법인은 과세를 피하기 위한 도관(導管)회사(Conduit Company)로 정상적인 사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본사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한 것이지요.
물론 론스타는 불복했습니다. 이 때부터는 론스타는 조세심판원과 법원에 무더기 소송을 냈습니다.
우리 법원의 판단은 일관됐습니다.
"실질 과세원칙을 적용해 과세한 것은 적법하다. 도관기업은 명의만 본사에 빌려주고 제3국에서 발생하는 투자소득을 본사에 보내는 조세회피용 회사로 봐야 한다"
우리나라 대법원의 공식 판단입니다.
이 대법원 판결까지 나온 사안을 가지고 론스타는 지금 워싱턴에서 세금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내고 있습니다.
지난 22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서울중앙지법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통상전문 송기호 변호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한국 법원에서 패소판결을 받은 세금 문제를 가지고 론스타는 다시 국제 중재 심판을 통해 사법부의 실질 과세 원칙을 무너뜨리려 한다. 조세주권과 사법주권을 공격하는 ISD에 대해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번 ISD는 빠르면 내년 봄쯤 결론이 날 것이라고 합니다. 민변은 승소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만, 결과를 속단할 수 없다는 의견이 더 많습니다.
내년 봄 ISD 결과가 나온다면 론스타는 한덕수 부총리기에게 팩스를 보낸지 10년 만에 한국과의 질긴 인연을 끝내게 될 것입니다. 나올 소송 결과에 따라 진 쪽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지난 10년 론스타 사태를 지켜보면서 아쉬운 점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외국 자본에 대한 뿌리깊은 배타성 같은 한국 사회의 복합적인 문제가 론스타 사태에는 숨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국내 사법주권마저 무시하는 부도덕한 사모펀드, 불법은 없었다지만 멀쩡한 외환은행을 헐값에 팔아 이번 론스타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어처구니 없는 정부의 일처리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아무쪼록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워싱턴에서 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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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희 기자 theplay@kbs.co.kr
윤창희 기자의 기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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