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없었으면 ‘이승엽 홈런 대기록 없었다?’
입력 2015.06.04 (12:16)
수정 2015.06.04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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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39·삼성 라이온즈)이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개인 통산 400홈런을 쳐내는 모습을 지켜본 박흥식(53) KIA 타이거즈 타격코치는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삼성 시절 이승엽을 홈런왕으로 조련하고 넥센 히어로즈에서 박병호를 만들어낸 박 코치는 4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오히려 도움을 받은 것은 나"이라며 "(이)승엽이 덕분에 주변에서 인정도 받았으니까 내가 승엽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박 코치가 이승엽을 키워낸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다. 경북고 시절 어깨가 강해 투수와 4번 타자로 활약했던 이승엽은 삼성 입단 첫해인 1995년 스프링캠프 때만 해도 타자가 아니었다. 좌완 유망주 투수였지만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몇 달을 쉬면서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만 해도 이승엽은 배트를 짧게 쥐고 끊어치기에 급급했다. 이승엽이 슬러거로 변신한 것은 그해 11월 박 코치가 삼성의 코치진으로 합류하면서다. 박 코치는 경산 볼파크에서 이승엽과 동고동락하며 변신을 시도했다.
"1995년 겨울 마무리캠프 때 처음 봤지. 승엽이는 그때 체격이 호리호리했고, 방망이도 짧게 잡고 치더라고. 그런데 스윙이 워낙 부드럽고 예뻤어. 치는 걸 보니 장거리 타자로도 성장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백인천 감독님에게도 의견을 전달했는데, 백 감독도 그게 맞는 길이라고 했어.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매달렸지."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박 코치였지만 잠재력을 꽃피운 것은 이승엽의 노력이었다. 박 코치는 "승엽이가 정말 무섭게 운동했다"며 "승엽이는 스펀지처럼 지시를 정말로 잘 소화해냈다"고 돌아봤다.
박 코치는 이승엽이 야구선수, 그리고 홈런 타자로 눈을 뜨기 시작한 데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의 영향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당시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 씨는 건설업에 종사했는데, IMF 사태로 사업이 많이 어려워지면서 가세가 기울자 이승엽도 많이 흔들렸다고 했다.
박 코치는 "승엽이가 고민을 털어놓기에 '승엽아, 네가 부모님과 집안을 도울 길은 딱 하나다. 우리나라 최고의 타자가 되는 길이다. 연봉을 많이 받으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조언해줬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승엽은 달라졌다. 책임감이 생긴 이승엽은 무섭게 야구에 몰두했고, 1997년 32홈런으로 처음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IMF 사태로 힘들어하던 이승엽이 시원한 홈런포를 펑펑 쳐내며 IMF 사태로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많은 기쁨을 안겨준 것은 작은 아이러니였다.
이승엽은 400홈런을 달성한 뒤 인터뷰에서 "IMF 때 많은 사람이 제 홈런 하나로 힘을 받는다고 말을 해주면 정말로 고마웠다"며 "더 열심히 해야겠다, 더 많은 홈런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박 코치와 이승엽은 여전히 서로 무척이나 아낀다. 이승엽은 400홈런 달성 뒤 자신을 키워준 지도자로 박 코치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았다. 박 코치 역시 이승엽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승엽이는 홈런 기록도 대단하지만, 자세가 정말 남다른 선수였죠. 보통 선수들이 야구가 잘 되고 그러면 우쭐해지고 하는 그런 면이 있기 마련인데, 승엽이는 그런 부분에서 철저했다. 당시 승엽이는 내게 '코치님, 제 행동이나 자세가 바뀌면 꼭 말을 해달라'고 했다. 선후배 등 팀원들을 배려하고 그런 면에서도 승엽이는 최고였다."
삼성 시절 이승엽을 홈런왕으로 조련하고 넥센 히어로즈에서 박병호를 만들어낸 박 코치는 4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오히려 도움을 받은 것은 나"이라며 "(이)승엽이 덕분에 주변에서 인정도 받았으니까 내가 승엽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박 코치가 이승엽을 키워낸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다. 경북고 시절 어깨가 강해 투수와 4번 타자로 활약했던 이승엽은 삼성 입단 첫해인 1995년 스프링캠프 때만 해도 타자가 아니었다. 좌완 유망주 투수였지만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몇 달을 쉬면서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만 해도 이승엽은 배트를 짧게 쥐고 끊어치기에 급급했다. 이승엽이 슬러거로 변신한 것은 그해 11월 박 코치가 삼성의 코치진으로 합류하면서다. 박 코치는 경산 볼파크에서 이승엽과 동고동락하며 변신을 시도했다.
"1995년 겨울 마무리캠프 때 처음 봤지. 승엽이는 그때 체격이 호리호리했고, 방망이도 짧게 잡고 치더라고. 그런데 스윙이 워낙 부드럽고 예뻤어. 치는 걸 보니 장거리 타자로도 성장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백인천 감독님에게도 의견을 전달했는데, 백 감독도 그게 맞는 길이라고 했어.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매달렸지."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박 코치였지만 잠재력을 꽃피운 것은 이승엽의 노력이었다. 박 코치는 "승엽이가 정말 무섭게 운동했다"며 "승엽이는 스펀지처럼 지시를 정말로 잘 소화해냈다"고 돌아봤다.
박 코치는 이승엽이 야구선수, 그리고 홈런 타자로 눈을 뜨기 시작한 데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의 영향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당시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 씨는 건설업에 종사했는데, IMF 사태로 사업이 많이 어려워지면서 가세가 기울자 이승엽도 많이 흔들렸다고 했다.
박 코치는 "승엽이가 고민을 털어놓기에 '승엽아, 네가 부모님과 집안을 도울 길은 딱 하나다. 우리나라 최고의 타자가 되는 길이다. 연봉을 많이 받으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조언해줬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승엽은 달라졌다. 책임감이 생긴 이승엽은 무섭게 야구에 몰두했고, 1997년 32홈런으로 처음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IMF 사태로 힘들어하던 이승엽이 시원한 홈런포를 펑펑 쳐내며 IMF 사태로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많은 기쁨을 안겨준 것은 작은 아이러니였다.
이승엽은 400홈런을 달성한 뒤 인터뷰에서 "IMF 때 많은 사람이 제 홈런 하나로 힘을 받는다고 말을 해주면 정말로 고마웠다"며 "더 열심히 해야겠다, 더 많은 홈런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박 코치와 이승엽은 여전히 서로 무척이나 아낀다. 이승엽은 400홈런 달성 뒤 자신을 키워준 지도자로 박 코치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았다. 박 코치 역시 이승엽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승엽이는 홈런 기록도 대단하지만, 자세가 정말 남다른 선수였죠. 보통 선수들이 야구가 잘 되고 그러면 우쭐해지고 하는 그런 면이 있기 마련인데, 승엽이는 그런 부분에서 철저했다. 당시 승엽이는 내게 '코치님, 제 행동이나 자세가 바뀌면 꼭 말을 해달라'고 했다. 선후배 등 팀원들을 배려하고 그런 면에서도 승엽이는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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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5-06-04 12:16:33
- 수정2015-06-04 13:07:38
이승엽(39·삼성 라이온즈)이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개인 통산 400홈런을 쳐내는 모습을 지켜본 박흥식(53) KIA 타이거즈 타격코치는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삼성 시절 이승엽을 홈런왕으로 조련하고 넥센 히어로즈에서 박병호를 만들어낸 박 코치는 4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오히려 도움을 받은 것은 나"이라며 "(이)승엽이 덕분에 주변에서 인정도 받았으니까 내가 승엽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박 코치가 이승엽을 키워낸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다. 경북고 시절 어깨가 강해 투수와 4번 타자로 활약했던 이승엽은 삼성 입단 첫해인 1995년 스프링캠프 때만 해도 타자가 아니었다. 좌완 유망주 투수였지만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몇 달을 쉬면서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만 해도 이승엽은 배트를 짧게 쥐고 끊어치기에 급급했다. 이승엽이 슬러거로 변신한 것은 그해 11월 박 코치가 삼성의 코치진으로 합류하면서다. 박 코치는 경산 볼파크에서 이승엽과 동고동락하며 변신을 시도했다.
"1995년 겨울 마무리캠프 때 처음 봤지. 승엽이는 그때 체격이 호리호리했고, 방망이도 짧게 잡고 치더라고. 그런데 스윙이 워낙 부드럽고 예뻤어. 치는 걸 보니 장거리 타자로도 성장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백인천 감독님에게도 의견을 전달했는데, 백 감독도 그게 맞는 길이라고 했어.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매달렸지."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박 코치였지만 잠재력을 꽃피운 것은 이승엽의 노력이었다. 박 코치는 "승엽이가 정말 무섭게 운동했다"며 "승엽이는 스펀지처럼 지시를 정말로 잘 소화해냈다"고 돌아봤다.
박 코치는 이승엽이 야구선수, 그리고 홈런 타자로 눈을 뜨기 시작한 데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의 영향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당시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 씨는 건설업에 종사했는데, IMF 사태로 사업이 많이 어려워지면서 가세가 기울자 이승엽도 많이 흔들렸다고 했다.
박 코치는 "승엽이가 고민을 털어놓기에 '승엽아, 네가 부모님과 집안을 도울 길은 딱 하나다. 우리나라 최고의 타자가 되는 길이다. 연봉을 많이 받으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조언해줬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승엽은 달라졌다. 책임감이 생긴 이승엽은 무섭게 야구에 몰두했고, 1997년 32홈런으로 처음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IMF 사태로 힘들어하던 이승엽이 시원한 홈런포를 펑펑 쳐내며 IMF 사태로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많은 기쁨을 안겨준 것은 작은 아이러니였다.
이승엽은 400홈런을 달성한 뒤 인터뷰에서 "IMF 때 많은 사람이 제 홈런 하나로 힘을 받는다고 말을 해주면 정말로 고마웠다"며 "더 열심히 해야겠다, 더 많은 홈런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박 코치와 이승엽은 여전히 서로 무척이나 아낀다. 이승엽은 400홈런 달성 뒤 자신을 키워준 지도자로 박 코치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았다. 박 코치 역시 이승엽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승엽이는 홈런 기록도 대단하지만, 자세가 정말 남다른 선수였죠. 보통 선수들이 야구가 잘 되고 그러면 우쭐해지고 하는 그런 면이 있기 마련인데, 승엽이는 그런 부분에서 철저했다. 당시 승엽이는 내게 '코치님, 제 행동이나 자세가 바뀌면 꼭 말을 해달라'고 했다. 선후배 등 팀원들을 배려하고 그런 면에서도 승엽이는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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