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수상 근무대’ 만여 명…노역·자살 공격 동원

입력 2015.08.14 (21:38) 수정 2015.08.1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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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일본 오키나와는 2차대전 말기 일본 본토에서 유일하게 미군이 상륙해, 참혹한 지상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그 때 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끌려가 큰 피해를 당했지만 그 실상은 대부분 미궁 속인데요.

KBS 취재팀이 당시 강제동원 실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한국인 부대기록을 처음 확인했습니다.

도쿄 윤석구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오키나와 섬 키타 비행장터.

지금도 옛 전투기 격납고가 남아 있습니다.

전쟁 말기 일본군은 군대 잡역부를 뜻하는‘군부(軍夫)’란 이름으로 만 명이 넘는 한인들을 비행장 건설 등에 강제 동원했지만 그 기록은 극히 드뭅니다.

'특설 수상근무대'란 이름의 이 부대 명부엔 1944년 여름 경상북도 지역에서 강제 징용된 2천 600여 명의 이름과 주소 등이 낱낱이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작업 내용을 적은 부대 일지엔 '무학문맹', '3등 국민' 등 한국인 군부를 멸시하는 표현들이 적혀 있습니다.

<인터뷰> 이즈하라(오키나와 역사연구가) : "배에서 군수물자를 내리는 게 이들의 주 임무였습니다.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중노동은 주로 한인들이 맡았습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한 뒤 최후 전투가 벌어졌던 남부 야마시로 지역.

참혹한 전투현장에 끌려와 노역을 강요당하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상근무대 사료엔 탄약 운반에 동원됐던 군부들이 막바지엔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전원 자살 공격대로 투입돼 중대가 전멸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녹취> 긴조(야마시로 주민) : "최전선에 탄약을 나르는 일이니까 숨을 곳도 없이 길에 온통 시신이 쌓여 밟고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수상근무대 한인 절반 이상이 숨진 것으로 일본 연구가는 추산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KBS 뉴스 윤석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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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키나와 ‘수상 근무대’ 만여 명…노역·자살 공격 동원
    • 입력 2015-08-14 21:39:43
    • 수정2015-08-14 21:5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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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일본 오키나와는 2차대전 말기 일본 본토에서 유일하게 미군이 상륙해, 참혹한 지상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그 때 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끌려가 큰 피해를 당했지만 그 실상은 대부분 미궁 속인데요.

KBS 취재팀이 당시 강제동원 실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한국인 부대기록을 처음 확인했습니다.

도쿄 윤석구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오키나와 섬 키타 비행장터.

지금도 옛 전투기 격납고가 남아 있습니다.

전쟁 말기 일본군은 군대 잡역부를 뜻하는‘군부(軍夫)’란 이름으로 만 명이 넘는 한인들을 비행장 건설 등에 강제 동원했지만 그 기록은 극히 드뭅니다.

'특설 수상근무대'란 이름의 이 부대 명부엔 1944년 여름 경상북도 지역에서 강제 징용된 2천 600여 명의 이름과 주소 등이 낱낱이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작업 내용을 적은 부대 일지엔 '무학문맹', '3등 국민' 등 한국인 군부를 멸시하는 표현들이 적혀 있습니다.

<인터뷰> 이즈하라(오키나와 역사연구가) : "배에서 군수물자를 내리는 게 이들의 주 임무였습니다.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중노동은 주로 한인들이 맡았습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한 뒤 최후 전투가 벌어졌던 남부 야마시로 지역.

참혹한 전투현장에 끌려와 노역을 강요당하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상근무대 사료엔 탄약 운반에 동원됐던 군부들이 막바지엔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전원 자살 공격대로 투입돼 중대가 전멸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녹취> 긴조(야마시로 주민) : "최전선에 탄약을 나르는 일이니까 숨을 곳도 없이 길에 온통 시신이 쌓여 밟고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수상근무대 한인 절반 이상이 숨진 것으로 일본 연구가는 추산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KBS 뉴스 윤석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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