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정권과 산업화, 민주화의 중심에 서서 우리 현대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큰 산, 거산 김영삼.
최연소, 최다선 정치인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영광과 시련, 성공과 좌절을 반복한 굴곡 많은 삶을 산 정치인.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74년 신민당 총재 취임연설) : "나는 앞으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나에게 준 이 영광이 결코 영광이 아니요, 십자가로 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김영삼 前 대통령이 22일 새벽 0시 22분.
파란만장한 88년 일기를 마치고 서거했습니다.
부인 손명순 여사를 제외한 가족과 의료진이 자리를 지킨 가운데 조용한 임종을 맞았습니다.
<인터뷰> 정연국(청와대 대변인) : "(박 대통령은) 유가족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난 1927년 12월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습니다.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형제 둘이 어려서 요절하는 바람에 사실상 외아들로 자랐습니다.
멸치잡이 어장집 아들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일제 식민지, 가난한 나라, 더 열악한 농촌의 삶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란 그는 천진난만한 개구장이에서 의협심 강한 소년으로 성장합니다.
학창 시절 일본인 학생과 마찰을 빚어 정학을 당하고, 일본인 교장의 설탕 10부대를 빼돌린 건 유명한 일화입니다.
<인터뷰> 박기영(김 전 대통령 중학교 선배) : "그때 우리는 2학년이고 YS는 1학년이었는데 우리가 가만 있는데 YS가 나서가지고 그 설탕 갔다가 이웃 사람 나눠주고 그 흙탕물 요즘 말하면 개고랑인데 개고랑 흙탕물로 다 집어넣고..."
조그만 섬 마을 시골 소년은 책상 머리맡에 "미래의 대통령은 김영삼"이라 써붙이며 정치 지도자의 꿈을 키웠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합니다.
이후 부친의 권유로 선을 봐 부인 손명순 여사를 만나 결혼합니다.
마산에서 고무회사를 운영하던 집안의 딸인 손명순 여사는 평생 조용한 내조로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합니다.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2011년 3월, 결혼 60주년 회혼식) : "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민주화를 이룩해 낸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30년 전, 아니 60년 전 손명순 여사를 제 아내로 맞이한 일입니다."
54년 만 25살의 나이에 3대 민의원 선거에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녹취> 1954년 대한뉴스 : "역사적인 막을 올렸습니다. 홍안(붉은 얼굴)의 김영삼 의원이...투표는 질서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한국 정치사의 기념비적인 기록들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화려함보다는 험로에 가까웠습니다.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자유당 입당 7개월만에 탈당해 민주당으로 당적으로 옮겼습니다.
반독재 투쟁이란 험로를 걷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1960년대부터 한국 정치의 거두로 성장합니다.
1963년 군정 연장 반대집회. 가두시위로 서대문형무소에 23일 간 수감됐습니다.
1965년 만 37살의 나이로 첫 야당 총무로 선출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맹렬한 비판과 저항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괴한들에게 초산으로 습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969년 6월, 귀가하던 길이었습니다.
<인터뷰> 김현철(김 전 대통령 차남) : "(2013년 회고 인터뷰) 차가 보니까 완전히 분화구예요. 분화구. 막 그냥 이 거품이...차 본네트부터 유리창(까지)...완전히 차가 엉망입니다. 결국 그게 초산이었어요."
1970년 43살의 나이에 김영삼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면서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듭니다.
같은 40대인 김대중, 이철승 후보와의 경쟁에서 1차에서는 승리하지만 2차 투표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를 당합니다.
패배를 승복한 이후 약속대로 김대중 지원 유세에도 나섰습니다.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1971년,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 지원 유세) : "이 땅은 우리만이 살다가 죽을 땅이 아니요. 우리의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 그러한 수모를 당할지라도 우리 당은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와 꽃피는 평화, 자유스러운 평화를 가져와야 되겠습니다."
1979년에는 YH 여성 노동자의 야당 당사 농성 사태가 터집니다.
회사 측의 일방적인 폐업으로 직장을 잃은 YH여성 노동자들이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자 김영삼은 이들을 위로하며 당사 사수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강제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한 노동자가 목숨을 잃습니다.
<녹취> 김영삼(1979년 YS 여공 피습당시) : "살인 정치를 감행한 이 정권은 피를 보고 멀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염원에 두는 것입니다."
YH 농성 사태 이후 김영삼이 외국 언론을 통해 당시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 철회를 요구하자 여당은 단독으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박탈을 의결합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일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의원직을 제명당하면서 민주주의를 새벽에 빗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말을 남깁니다.
<인터뷰> 김영삼(1979년 국회의원 제명 당시) :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더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서슬 퍼렇던 전두환 신군부에 온 몸으로 맞선 것도 그였습니다.
80년과 82년 두 차례에 걸쳐 가택 연금 조치에 처해졌고 83년 5월에는 언론 통제 해제, 정치범 석방,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신군부의 출국 권유를 받았지만, 보내려면 자신을 시체로 만든 뒤 보내라며 거절했습니다.
<인터뷰> 손명순(여사/김 전 대통령 부인) : "나중에는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에서 만류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만류를) 듣지 않았을 때 저는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만 했습니다."
평생 동지이자 라이벌로 불리는 김대중 前 대통령과 처음 손을 맞잡은 것도 이시기였습니다.
1984년 김영삼, 김대중 두 전 대통령은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으며 대통령직접선거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녹취> 김영삼(1987년 대선 후보 연설) : "대 민주 연합 정부의 기치 아래, 모든 민주 세력의 단결과 후보 단일화를 거듭 호소하고자 합니다."
냉랭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일주일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병상을 위문하면서 화해했습니다.
<녹취> 김영삼(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 : "(오늘 방문을 두 분의 화해로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 아닙니까."
1987년 그는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6월 민주시민항쟁을 주도했습니다.
그 해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노태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됩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한 노무현 前 대통령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의 배신이자 밀실야합' 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녹취> "제청있습니까? 삼청있습니까?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박수로써 통과된 것을 선포합니다. (무효입니다)"
자신이 평생 맞섰던 정적들과 손을 잡았다며 변절 시비가 끊이지 않자,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로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92년 12월,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경쟁에서 193만여 표 차이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문민정부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인터뷰> 김영삼(1993년 2월, 대통령 취임식) :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취임 직후 그의 최우선 정치 과제는 과거 군사정권과의 단절이었습니다.
12.12 사태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내란죄로 규정해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줄줄이 법정에 세웠습니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고, 5.16 혁명을 군사 쿠데타로 규정했습니다.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 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도 이 때 이뤄졌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 : "지금 우리는 지난 시대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국민적 여망을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경제 개혁, 금융실명제는 그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인터뷰> 김영삼(1993년 8월, 대국민 특별 담화)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 진행됩니다."
부정부패 자금의 흐름을 막고 추적을 가능하게 한 제도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올바른 길을 걸어갈 때는 거칠 것이 없다는 그의 좌우명처럼, 한 점 먼지없는 깨끗한 길을 갈 것 같았던 그도 뼈아픈 과오는 있었습니다.
임기말 외환위기와 측근 비리 의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997년 연초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삼미와 진로, 기아, 해태 그룹이 줄줄이 도산하고, 경제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습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7년 11월 경제난 극복위한 대국민 특별담화) :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고자 합니다.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 통화기금에 자원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재임 중 최악의 참사도 잇따랐습니다.
95년 6월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를 비롯해, 목포 아시아나기 추락(93.7.26) 성수대교 붕괴(94.10.24) 대구지하철 가스폭발(95.4.28) 등 집권 내내 대형 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관련' 대국민 사과) : "성수대교 사건과 관련하여, 국민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참담한 심경과 허탈감 그리고 정부에 대한 질책과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대통령으로서 저의 부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도덕성에도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소통령'이라 불리우던 둘째 아들. 차남 현철씨가 한보 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며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해야 했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7년 2월, '차남 비리 관련' 대국민 사과) :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매사에 조심하고 바르게 처신하도록 가르치지 못한 것 제 자신의 불찰입니다."
조깅과 칼국수를 좋아하던 서민적인 대통령, 대통령이 된 후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드릴 만큼 극진한 효자.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대통령.
평생 반독재, 민주화에 투신했지만, 3당 합당으로 군부 정권과 손을 잡았다는 비난도 함께 받았습니다.
88년 한국의 근현대와 영욕을 함께 해 온 거산 김영삼, 그가 영면에 들었습니다.
치열한 대한민국 정치사의 한 가운데에 서서 거칠 것 없이 큰 길을 걸어왔던 그의 삶은, 이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최연소, 최다선 정치인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영광과 시련, 성공과 좌절을 반복한 굴곡 많은 삶을 산 정치인.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74년 신민당 총재 취임연설) : "나는 앞으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나에게 준 이 영광이 결코 영광이 아니요, 십자가로 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김영삼 前 대통령이 22일 새벽 0시 22분.
파란만장한 88년 일기를 마치고 서거했습니다.
부인 손명순 여사를 제외한 가족과 의료진이 자리를 지킨 가운데 조용한 임종을 맞았습니다.
<인터뷰> 정연국(청와대 대변인) : "(박 대통령은) 유가족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난 1927년 12월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습니다.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형제 둘이 어려서 요절하는 바람에 사실상 외아들로 자랐습니다.
멸치잡이 어장집 아들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일제 식민지, 가난한 나라, 더 열악한 농촌의 삶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란 그는 천진난만한 개구장이에서 의협심 강한 소년으로 성장합니다.
학창 시절 일본인 학생과 마찰을 빚어 정학을 당하고, 일본인 교장의 설탕 10부대를 빼돌린 건 유명한 일화입니다.
<인터뷰> 박기영(김 전 대통령 중학교 선배) : "그때 우리는 2학년이고 YS는 1학년이었는데 우리가 가만 있는데 YS가 나서가지고 그 설탕 갔다가 이웃 사람 나눠주고 그 흙탕물 요즘 말하면 개고랑인데 개고랑 흙탕물로 다 집어넣고..."
조그만 섬 마을 시골 소년은 책상 머리맡에 "미래의 대통령은 김영삼"이라 써붙이며 정치 지도자의 꿈을 키웠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합니다.
이후 부친의 권유로 선을 봐 부인 손명순 여사를 만나 결혼합니다.
마산에서 고무회사를 운영하던 집안의 딸인 손명순 여사는 평생 조용한 내조로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합니다.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2011년 3월, 결혼 60주년 회혼식) : "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민주화를 이룩해 낸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30년 전, 아니 60년 전 손명순 여사를 제 아내로 맞이한 일입니다."
54년 만 25살의 나이에 3대 민의원 선거에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녹취> 1954년 대한뉴스 : "역사적인 막을 올렸습니다. 홍안(붉은 얼굴)의 김영삼 의원이...투표는 질서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한국 정치사의 기념비적인 기록들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화려함보다는 험로에 가까웠습니다.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자유당 입당 7개월만에 탈당해 민주당으로 당적으로 옮겼습니다.
반독재 투쟁이란 험로를 걷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1960년대부터 한국 정치의 거두로 성장합니다.
1963년 군정 연장 반대집회. 가두시위로 서대문형무소에 23일 간 수감됐습니다.
1965년 만 37살의 나이로 첫 야당 총무로 선출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맹렬한 비판과 저항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괴한들에게 초산으로 습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969년 6월, 귀가하던 길이었습니다.
<인터뷰> 김현철(김 전 대통령 차남) : "(2013년 회고 인터뷰) 차가 보니까 완전히 분화구예요. 분화구. 막 그냥 이 거품이...차 본네트부터 유리창(까지)...완전히 차가 엉망입니다. 결국 그게 초산이었어요."
1970년 43살의 나이에 김영삼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면서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듭니다.
같은 40대인 김대중, 이철승 후보와의 경쟁에서 1차에서는 승리하지만 2차 투표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를 당합니다.
패배를 승복한 이후 약속대로 김대중 지원 유세에도 나섰습니다.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1971년,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 지원 유세) : "이 땅은 우리만이 살다가 죽을 땅이 아니요. 우리의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 그러한 수모를 당할지라도 우리 당은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와 꽃피는 평화, 자유스러운 평화를 가져와야 되겠습니다."
1979년에는 YH 여성 노동자의 야당 당사 농성 사태가 터집니다.
회사 측의 일방적인 폐업으로 직장을 잃은 YH여성 노동자들이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자 김영삼은 이들을 위로하며 당사 사수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강제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한 노동자가 목숨을 잃습니다.
<녹취> 김영삼(1979년 YS 여공 피습당시) : "살인 정치를 감행한 이 정권은 피를 보고 멀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염원에 두는 것입니다."
YH 농성 사태 이후 김영삼이 외국 언론을 통해 당시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 철회를 요구하자 여당은 단독으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박탈을 의결합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일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의원직을 제명당하면서 민주주의를 새벽에 빗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말을 남깁니다.
<인터뷰> 김영삼(1979년 국회의원 제명 당시) :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더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서슬 퍼렇던 전두환 신군부에 온 몸으로 맞선 것도 그였습니다.
80년과 82년 두 차례에 걸쳐 가택 연금 조치에 처해졌고 83년 5월에는 언론 통제 해제, 정치범 석방,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신군부의 출국 권유를 받았지만, 보내려면 자신을 시체로 만든 뒤 보내라며 거절했습니다.
<인터뷰> 손명순(여사/김 전 대통령 부인) : "나중에는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에서 만류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만류를) 듣지 않았을 때 저는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만 했습니다."
평생 동지이자 라이벌로 불리는 김대중 前 대통령과 처음 손을 맞잡은 것도 이시기였습니다.
1984년 김영삼, 김대중 두 전 대통령은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으며 대통령직접선거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녹취> 김영삼(1987년 대선 후보 연설) : "대 민주 연합 정부의 기치 아래, 모든 민주 세력의 단결과 후보 단일화를 거듭 호소하고자 합니다."
냉랭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일주일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병상을 위문하면서 화해했습니다.
<녹취> 김영삼(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 : "(오늘 방문을 두 분의 화해로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 아닙니까."
1987년 그는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6월 민주시민항쟁을 주도했습니다.
그 해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노태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됩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한 노무현 前 대통령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의 배신이자 밀실야합' 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녹취> "제청있습니까? 삼청있습니까?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박수로써 통과된 것을 선포합니다. (무효입니다)"
자신이 평생 맞섰던 정적들과 손을 잡았다며 변절 시비가 끊이지 않자,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로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92년 12월,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경쟁에서 193만여 표 차이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문민정부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인터뷰> 김영삼(1993년 2월, 대통령 취임식) :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취임 직후 그의 최우선 정치 과제는 과거 군사정권과의 단절이었습니다.
12.12 사태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내란죄로 규정해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줄줄이 법정에 세웠습니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고, 5.16 혁명을 군사 쿠데타로 규정했습니다.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 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도 이 때 이뤄졌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 : "지금 우리는 지난 시대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국민적 여망을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경제 개혁, 금융실명제는 그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인터뷰> 김영삼(1993년 8월, 대국민 특별 담화)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 진행됩니다."
부정부패 자금의 흐름을 막고 추적을 가능하게 한 제도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올바른 길을 걸어갈 때는 거칠 것이 없다는 그의 좌우명처럼, 한 점 먼지없는 깨끗한 길을 갈 것 같았던 그도 뼈아픈 과오는 있었습니다.
임기말 외환위기와 측근 비리 의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997년 연초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삼미와 진로, 기아, 해태 그룹이 줄줄이 도산하고, 경제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습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7년 11월 경제난 극복위한 대국민 특별담화) :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고자 합니다.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 통화기금에 자원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재임 중 최악의 참사도 잇따랐습니다.
95년 6월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를 비롯해, 목포 아시아나기 추락(93.7.26) 성수대교 붕괴(94.10.24) 대구지하철 가스폭발(95.4.28) 등 집권 내내 대형 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관련' 대국민 사과) : "성수대교 사건과 관련하여, 국민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참담한 심경과 허탈감 그리고 정부에 대한 질책과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대통령으로서 저의 부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도덕성에도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소통령'이라 불리우던 둘째 아들. 차남 현철씨가 한보 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며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해야 했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7년 2월, '차남 비리 관련' 대국민 사과) :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매사에 조심하고 바르게 처신하도록 가르치지 못한 것 제 자신의 불찰입니다."
조깅과 칼국수를 좋아하던 서민적인 대통령, 대통령이 된 후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드릴 만큼 극진한 효자.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대통령.
평생 반독재, 민주화에 투신했지만, 3당 합당으로 군부 정권과 손을 잡았다는 비난도 함께 받았습니다.
88년 한국의 근현대와 영욕을 함께 해 온 거산 김영삼, 그가 영면에 들었습니다.
치열한 대한민국 정치사의 한 가운데에 서서 거칠 것 없이 큰 길을 걸어왔던 그의 삶은, 이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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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도무문, 길을 멈추다
-
- 입력 2015-11-22 23:33:47
- 수정2015-11-23 00:07:05

독재 정권과 산업화, 민주화의 중심에 서서 우리 현대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큰 산, 거산 김영삼.
최연소, 최다선 정치인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영광과 시련, 성공과 좌절을 반복한 굴곡 많은 삶을 산 정치인.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74년 신민당 총재 취임연설) : "나는 앞으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나에게 준 이 영광이 결코 영광이 아니요, 십자가로 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김영삼 前 대통령이 22일 새벽 0시 22분.
파란만장한 88년 일기를 마치고 서거했습니다.
부인 손명순 여사를 제외한 가족과 의료진이 자리를 지킨 가운데 조용한 임종을 맞았습니다.
<인터뷰> 정연국(청와대 대변인) : "(박 대통령은) 유가족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난 1927년 12월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습니다.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형제 둘이 어려서 요절하는 바람에 사실상 외아들로 자랐습니다.
멸치잡이 어장집 아들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일제 식민지, 가난한 나라, 더 열악한 농촌의 삶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란 그는 천진난만한 개구장이에서 의협심 강한 소년으로 성장합니다.
학창 시절 일본인 학생과 마찰을 빚어 정학을 당하고, 일본인 교장의 설탕 10부대를 빼돌린 건 유명한 일화입니다.
<인터뷰> 박기영(김 전 대통령 중학교 선배) : "그때 우리는 2학년이고 YS는 1학년이었는데 우리가 가만 있는데 YS가 나서가지고 그 설탕 갔다가 이웃 사람 나눠주고 그 흙탕물 요즘 말하면 개고랑인데 개고랑 흙탕물로 다 집어넣고..."
조그만 섬 마을 시골 소년은 책상 머리맡에 "미래의 대통령은 김영삼"이라 써붙이며 정치 지도자의 꿈을 키웠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합니다.
이후 부친의 권유로 선을 봐 부인 손명순 여사를 만나 결혼합니다.
마산에서 고무회사를 운영하던 집안의 딸인 손명순 여사는 평생 조용한 내조로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합니다.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2011년 3월, 결혼 60주년 회혼식) : "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민주화를 이룩해 낸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30년 전, 아니 60년 전 손명순 여사를 제 아내로 맞이한 일입니다."
54년 만 25살의 나이에 3대 민의원 선거에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녹취> 1954년 대한뉴스 : "역사적인 막을 올렸습니다. 홍안(붉은 얼굴)의 김영삼 의원이...투표는 질서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한국 정치사의 기념비적인 기록들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화려함보다는 험로에 가까웠습니다.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자유당 입당 7개월만에 탈당해 민주당으로 당적으로 옮겼습니다.
반독재 투쟁이란 험로를 걷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1960년대부터 한국 정치의 거두로 성장합니다.
1963년 군정 연장 반대집회. 가두시위로 서대문형무소에 23일 간 수감됐습니다.
1965년 만 37살의 나이로 첫 야당 총무로 선출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맹렬한 비판과 저항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괴한들에게 초산으로 습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969년 6월, 귀가하던 길이었습니다.
<인터뷰> 김현철(김 전 대통령 차남) : "(2013년 회고 인터뷰) 차가 보니까 완전히 분화구예요. 분화구. 막 그냥 이 거품이...차 본네트부터 유리창(까지)...완전히 차가 엉망입니다. 결국 그게 초산이었어요."
1970년 43살의 나이에 김영삼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면서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듭니다.
같은 40대인 김대중, 이철승 후보와의 경쟁에서 1차에서는 승리하지만 2차 투표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를 당합니다.
패배를 승복한 이후 약속대로 김대중 지원 유세에도 나섰습니다.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1971년,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 지원 유세) : "이 땅은 우리만이 살다가 죽을 땅이 아니요. 우리의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 그러한 수모를 당할지라도 우리 당은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와 꽃피는 평화, 자유스러운 평화를 가져와야 되겠습니다."
1979년에는 YH 여성 노동자의 야당 당사 농성 사태가 터집니다.
회사 측의 일방적인 폐업으로 직장을 잃은 YH여성 노동자들이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자 김영삼은 이들을 위로하며 당사 사수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강제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한 노동자가 목숨을 잃습니다.
<녹취> 김영삼(1979년 YS 여공 피습당시) : "살인 정치를 감행한 이 정권은 피를 보고 멀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염원에 두는 것입니다."
YH 농성 사태 이후 김영삼이 외국 언론을 통해 당시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 철회를 요구하자 여당은 단독으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박탈을 의결합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일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의원직을 제명당하면서 민주주의를 새벽에 빗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말을 남깁니다.
<인터뷰> 김영삼(1979년 국회의원 제명 당시) :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더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서슬 퍼렇던 전두환 신군부에 온 몸으로 맞선 것도 그였습니다.
80년과 82년 두 차례에 걸쳐 가택 연금 조치에 처해졌고 83년 5월에는 언론 통제 해제, 정치범 석방,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신군부의 출국 권유를 받았지만, 보내려면 자신을 시체로 만든 뒤 보내라며 거절했습니다.
<인터뷰> 손명순(여사/김 전 대통령 부인) : "나중에는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에서 만류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만류를) 듣지 않았을 때 저는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만 했습니다."
평생 동지이자 라이벌로 불리는 김대중 前 대통령과 처음 손을 맞잡은 것도 이시기였습니다.
1984년 김영삼, 김대중 두 전 대통령은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으며 대통령직접선거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녹취> 김영삼(1987년 대선 후보 연설) : "대 민주 연합 정부의 기치 아래, 모든 민주 세력의 단결과 후보 단일화를 거듭 호소하고자 합니다."
냉랭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일주일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병상을 위문하면서 화해했습니다.
<녹취> 김영삼(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 : "(오늘 방문을 두 분의 화해로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 아닙니까."
1987년 그는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6월 민주시민항쟁을 주도했습니다.
그 해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노태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됩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한 노무현 前 대통령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의 배신이자 밀실야합' 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녹취> "제청있습니까? 삼청있습니까?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박수로써 통과된 것을 선포합니다. (무효입니다)"
자신이 평생 맞섰던 정적들과 손을 잡았다며 변절 시비가 끊이지 않자,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로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92년 12월,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경쟁에서 193만여 표 차이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문민정부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인터뷰> 김영삼(1993년 2월, 대통령 취임식) :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취임 직후 그의 최우선 정치 과제는 과거 군사정권과의 단절이었습니다.
12.12 사태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내란죄로 규정해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줄줄이 법정에 세웠습니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고, 5.16 혁명을 군사 쿠데타로 규정했습니다.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 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도 이 때 이뤄졌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 : "지금 우리는 지난 시대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국민적 여망을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경제 개혁, 금융실명제는 그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인터뷰> 김영삼(1993년 8월, 대국민 특별 담화)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 진행됩니다."
부정부패 자금의 흐름을 막고 추적을 가능하게 한 제도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올바른 길을 걸어갈 때는 거칠 것이 없다는 그의 좌우명처럼, 한 점 먼지없는 깨끗한 길을 갈 것 같았던 그도 뼈아픈 과오는 있었습니다.
임기말 외환위기와 측근 비리 의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997년 연초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삼미와 진로, 기아, 해태 그룹이 줄줄이 도산하고, 경제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습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7년 11월 경제난 극복위한 대국민 특별담화) :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고자 합니다.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 통화기금에 자원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재임 중 최악의 참사도 잇따랐습니다.
95년 6월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를 비롯해, 목포 아시아나기 추락(93.7.26) 성수대교 붕괴(94.10.24) 대구지하철 가스폭발(95.4.28) 등 집권 내내 대형 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관련' 대국민 사과) : "성수대교 사건과 관련하여, 국민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참담한 심경과 허탈감 그리고 정부에 대한 질책과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대통령으로서 저의 부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도덕성에도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소통령'이라 불리우던 둘째 아들. 차남 현철씨가 한보 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며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해야 했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7년 2월, '차남 비리 관련' 대국민 사과) :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매사에 조심하고 바르게 처신하도록 가르치지 못한 것 제 자신의 불찰입니다."
조깅과 칼국수를 좋아하던 서민적인 대통령, 대통령이 된 후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드릴 만큼 극진한 효자.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대통령.
평생 반독재, 민주화에 투신했지만, 3당 합당으로 군부 정권과 손을 잡았다는 비난도 함께 받았습니다.
88년 한국의 근현대와 영욕을 함께 해 온 거산 김영삼, 그가 영면에 들었습니다.
치열한 대한민국 정치사의 한 가운데에 서서 거칠 것 없이 큰 길을 걸어왔던 그의 삶은, 이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최연소, 최다선 정치인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영광과 시련, 성공과 좌절을 반복한 굴곡 많은 삶을 산 정치인.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74년 신민당 총재 취임연설) : "나는 앞으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나에게 준 이 영광이 결코 영광이 아니요, 십자가로 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김영삼 前 대통령이 22일 새벽 0시 22분.
파란만장한 88년 일기를 마치고 서거했습니다.
부인 손명순 여사를 제외한 가족과 의료진이 자리를 지킨 가운데 조용한 임종을 맞았습니다.
<인터뷰> 정연국(청와대 대변인) : "(박 대통령은) 유가족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난 1927년 12월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습니다.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형제 둘이 어려서 요절하는 바람에 사실상 외아들로 자랐습니다.
멸치잡이 어장집 아들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일제 식민지, 가난한 나라, 더 열악한 농촌의 삶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란 그는 천진난만한 개구장이에서 의협심 강한 소년으로 성장합니다.
학창 시절 일본인 학생과 마찰을 빚어 정학을 당하고, 일본인 교장의 설탕 10부대를 빼돌린 건 유명한 일화입니다.
<인터뷰> 박기영(김 전 대통령 중학교 선배) : "그때 우리는 2학년이고 YS는 1학년이었는데 우리가 가만 있는데 YS가 나서가지고 그 설탕 갔다가 이웃 사람 나눠주고 그 흙탕물 요즘 말하면 개고랑인데 개고랑 흙탕물로 다 집어넣고..."
조그만 섬 마을 시골 소년은 책상 머리맡에 "미래의 대통령은 김영삼"이라 써붙이며 정치 지도자의 꿈을 키웠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합니다.
이후 부친의 권유로 선을 봐 부인 손명순 여사를 만나 결혼합니다.
마산에서 고무회사를 운영하던 집안의 딸인 손명순 여사는 평생 조용한 내조로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합니다.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2011년 3월, 결혼 60주년 회혼식) : "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민주화를 이룩해 낸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30년 전, 아니 60년 전 손명순 여사를 제 아내로 맞이한 일입니다."
54년 만 25살의 나이에 3대 민의원 선거에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녹취> 1954년 대한뉴스 : "역사적인 막을 올렸습니다. 홍안(붉은 얼굴)의 김영삼 의원이...투표는 질서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한국 정치사의 기념비적인 기록들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화려함보다는 험로에 가까웠습니다.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자유당 입당 7개월만에 탈당해 민주당으로 당적으로 옮겼습니다.
반독재 투쟁이란 험로를 걷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1960년대부터 한국 정치의 거두로 성장합니다.
1963년 군정 연장 반대집회. 가두시위로 서대문형무소에 23일 간 수감됐습니다.
1965년 만 37살의 나이로 첫 야당 총무로 선출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맹렬한 비판과 저항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괴한들에게 초산으로 습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969년 6월, 귀가하던 길이었습니다.
<인터뷰> 김현철(김 전 대통령 차남) : "(2013년 회고 인터뷰) 차가 보니까 완전히 분화구예요. 분화구. 막 그냥 이 거품이...차 본네트부터 유리창(까지)...완전히 차가 엉망입니다. 결국 그게 초산이었어요."
1970년 43살의 나이에 김영삼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면서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듭니다.
같은 40대인 김대중, 이철승 후보와의 경쟁에서 1차에서는 승리하지만 2차 투표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를 당합니다.
패배를 승복한 이후 약속대로 김대중 지원 유세에도 나섰습니다.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1971년,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 지원 유세) : "이 땅은 우리만이 살다가 죽을 땅이 아니요. 우리의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 그러한 수모를 당할지라도 우리 당은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와 꽃피는 평화, 자유스러운 평화를 가져와야 되겠습니다."
1979년에는 YH 여성 노동자의 야당 당사 농성 사태가 터집니다.
회사 측의 일방적인 폐업으로 직장을 잃은 YH여성 노동자들이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자 김영삼은 이들을 위로하며 당사 사수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강제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한 노동자가 목숨을 잃습니다.
<녹취> 김영삼(1979년 YS 여공 피습당시) : "살인 정치를 감행한 이 정권은 피를 보고 멀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염원에 두는 것입니다."
YH 농성 사태 이후 김영삼이 외국 언론을 통해 당시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 철회를 요구하자 여당은 단독으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박탈을 의결합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일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의원직을 제명당하면서 민주주의를 새벽에 빗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말을 남깁니다.
<인터뷰> 김영삼(1979년 국회의원 제명 당시) :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더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서슬 퍼렇던 전두환 신군부에 온 몸으로 맞선 것도 그였습니다.
80년과 82년 두 차례에 걸쳐 가택 연금 조치에 처해졌고 83년 5월에는 언론 통제 해제, 정치범 석방,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신군부의 출국 권유를 받았지만, 보내려면 자신을 시체로 만든 뒤 보내라며 거절했습니다.
<인터뷰> 손명순(여사/김 전 대통령 부인) : "나중에는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에서 만류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만류를) 듣지 않았을 때 저는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만 했습니다."
평생 동지이자 라이벌로 불리는 김대중 前 대통령과 처음 손을 맞잡은 것도 이시기였습니다.
1984년 김영삼, 김대중 두 전 대통령은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으며 대통령직접선거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녹취> 김영삼(1987년 대선 후보 연설) : "대 민주 연합 정부의 기치 아래, 모든 민주 세력의 단결과 후보 단일화를 거듭 호소하고자 합니다."
냉랭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일주일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병상을 위문하면서 화해했습니다.
<녹취> 김영삼(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 : "(오늘 방문을 두 분의 화해로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 아닙니까."
1987년 그는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6월 민주시민항쟁을 주도했습니다.
그 해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노태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됩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한 노무현 前 대통령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의 배신이자 밀실야합' 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녹취> "제청있습니까? 삼청있습니까?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박수로써 통과된 것을 선포합니다. (무효입니다)"
자신이 평생 맞섰던 정적들과 손을 잡았다며 변절 시비가 끊이지 않자,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로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92년 12월,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경쟁에서 193만여 표 차이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문민정부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인터뷰> 김영삼(1993년 2월, 대통령 취임식) :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취임 직후 그의 최우선 정치 과제는 과거 군사정권과의 단절이었습니다.
12.12 사태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내란죄로 규정해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줄줄이 법정에 세웠습니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고, 5.16 혁명을 군사 쿠데타로 규정했습니다.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 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도 이 때 이뤄졌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 : "지금 우리는 지난 시대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국민적 여망을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경제 개혁, 금융실명제는 그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인터뷰> 김영삼(1993년 8월, 대국민 특별 담화)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 진행됩니다."
부정부패 자금의 흐름을 막고 추적을 가능하게 한 제도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올바른 길을 걸어갈 때는 거칠 것이 없다는 그의 좌우명처럼, 한 점 먼지없는 깨끗한 길을 갈 것 같았던 그도 뼈아픈 과오는 있었습니다.
임기말 외환위기와 측근 비리 의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997년 연초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삼미와 진로, 기아, 해태 그룹이 줄줄이 도산하고, 경제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습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7년 11월 경제난 극복위한 대국민 특별담화) :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고자 합니다.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 통화기금에 자원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재임 중 최악의 참사도 잇따랐습니다.
95년 6월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를 비롯해, 목포 아시아나기 추락(93.7.26) 성수대교 붕괴(94.10.24) 대구지하철 가스폭발(95.4.28) 등 집권 내내 대형 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관련' 대국민 사과) : "성수대교 사건과 관련하여, 국민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참담한 심경과 허탈감 그리고 정부에 대한 질책과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대통령으로서 저의 부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도덕성에도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소통령'이라 불리우던 둘째 아들. 차남 현철씨가 한보 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며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해야 했습니다.
<인터뷰> 김영삼(1997년 2월, '차남 비리 관련' 대국민 사과) :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매사에 조심하고 바르게 처신하도록 가르치지 못한 것 제 자신의 불찰입니다."
조깅과 칼국수를 좋아하던 서민적인 대통령, 대통령이 된 후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드릴 만큼 극진한 효자.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대통령.
평생 반독재, 민주화에 투신했지만, 3당 합당으로 군부 정권과 손을 잡았다는 비난도 함께 받았습니다.
88년 한국의 근현대와 영욕을 함께 해 온 거산 김영삼, 그가 영면에 들었습니다.
치열한 대한민국 정치사의 한 가운데에 서서 거칠 것 없이 큰 길을 걸어왔던 그의 삶은, 이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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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진아 기자 aza@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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