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작사자 미스터리 윤치호 vs 안창호

입력 2016.02.17 (17:41) 수정 2016.02.17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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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듣고 계신 곡.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있죠.

이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은 안익태 선생입니다.

그러면 작사를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현재 공식적으로는 미상입니다.

하지만 윤치호가 유력한 작사자로 거론되던 가운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의 작사자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논쟁이 한창입니다.

-좌옹 윤치호냐 도산 안창호냐.

60년째 미상으로 남은 애국가 작사자 과연 누구일까요.

윤치호 작사설을 지지하는 김연갑 한겨레아리랑 연합회 상임이사 그리고 안창호 작사설을 지지하는 안용환 서울 신학대학교 한국사 초빙교수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애국가 작가자는 누구인가 이런 논란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그 일지를 저희가 정리했습니다.

함께 보시죠.

국가행사나 대형 스포츠 이벤트 때마다 울려퍼지며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자랑스러운 애국가.

100여 년 동안 불린 애국가의 작곡가는 안익태 선생으로 공식 보도됐지만 작사자는 지금까지 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윤치호와 안창호 등 여러 후보를 조사했는데요.

하지만 작자 미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후 2012년 한 사단이 애국가 작가자 규명발표회를 열어 애국가의 작사자가 안창호 선생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또다시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애국가 작사자로 유력하게 거론돼 온 윤치호와 안창호.

두 인물을 놓고 치열한 공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단 양측의 입장을 다 듣기 위해서 두 분을 모셨는데요.

먼저 윤치호 작사라고 주장하시는 김 이사님의 의견부터 듣겠습니다.

-우선 윤치호 스스로가 내가 작사했다라고 해서 자필로 1907년 내가 작사했다.

물론 기록한 기간은 후기이지만 본인이 밝힌 바가 있다.

그리고 본인의 저술.

물론 역술이라고 하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책이긴합니다마는 1908년에 찬미가라고 하는 책 속에 자신의 애국가 1, 2편을 수록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고 나서 공부처에서 해외에 내보내는 기록에서는 윤치호 작, 안익태 작곡으로 밝혔다.

그리고 1950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유력하다.

그 유력하다라고 하는 것은 도산 안창호보다 유력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라는 전제에서 유력하다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문교부에 보고는 했는데 확정은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60년 동안 조사위원회에서 윤치호로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을 상부기관인 문교부에서는 확정 발표를 하지 않고 보고서도 내지 않은 실정이죠.

-유력하지만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그게 내가 애국가를 작사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이렇게 밝힌 게 돌아가시기 직전이죠?-1945년 12월에 돌아가셨는데 9월 달에 자필로 이렇게 기록을 남기신 거죠.

-자필로.

-그리고 그 뒷면에는 따님이, 따님이.

이것은 9월달에 아버님을 뵙고 자료를 받은 것이다.

여기에는 찬미가를 놓고 옮겨 쓰시고 일부 현재 불려지는 가사를 그대로 고쳐 쓴 것이다.

이렇게 밝히고 있죠.

-여기 제가 들고 있는 이 자료에는 따님이 쓰시던.

-네, 그게 따님 글씨입니다.

따님이 이 자료를 받고 나서 기록한 것이죠.

-이게 이제 자필이 맞는지 여부도 다 조사가 된 겁니까?-그건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확실히 확인이 됐고.

이후에 어떤 방송에서도 감정결과 확인을 했습니다.

-이게 자료가 상당히 많았는데 확정되지 않은 게 조금 아쉬우시겠어요.

-당시에 55년이라고 하는 거는 6.25 동란 후에 복구 과정에서 국륜불륜을 할 수 없다.

혹시라도 윤치호가 친일파이기 때문에 친일파로 발표한다면은 개정 이런 논란이 있기 때문에 하지 않은 걸로.

-친일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라고 생각을 하시는 거고요.

-그러면은 안창호 설을 주장하는 이런 근거는 무엇입니까?-우선 그 근거를 말씀 드리기 전에 김연갑 선생님이 말씀하신 찬미가 가사지를 두고 하는 얘기인데.

그건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사자료로 부실하다 해 가지고 채택되지도 않았어요.

채택되지도 않은 걸 그러니까 억울하니까 윤치호 사위 정광용 씨가 그 당시에 서울대 법대교수입니다.

정광용 씨가 탄원서를 냈어요.

그러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사 자료 근거도 있어요, 제가 원문도 가지고 있고요.

탄원서를 냈는데 억울하다 해서 받아가지고 읽어보니 사료 가치가 없어요.

그것도 정식 채택되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 어떻게 역사가 흐르면서 그것이 정설로 굳어져서 오늘날까지 온 거예요.

그리고 아까 김연갑 선생님 또 하나 실수를 하신 게.

우선 안창호, 그 당시에 1955년도 윤치호 유력시된 걸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1955년 4월 26일, 4월 26일 동아일보입니다.

이 뭐냐.

보류.

보류가 된 거예요, 보류.

뭘로 보류되느냐.

애국가지 윤치호, 안창호 작사설로 발표 직전에 보류가 된 거예요.

안창호, 그리고 문교부에서 작사설을 발표 직전에 여기 있는 대로 보류가 된 거예요.

-글씨가 사실 작아서 아주 잘 보이지는 않는데 이렇게 발표 직전에 보류라고 이렇게 쓰신 거.

-지금 4월, 5월은 8월 28일이 최종 3차회의입니다.

저 자료는 1차 회의 이후에 그런 얘기가 있었던 것이고요.

-알겠습니다.

-이 얘기를 계속 이어가다 보면 왜 안창호 설이 나오는가 작사가로.

그 얘기를 못 듣게 되니까 먼저 안창호 선생님 지지, 근거를 좀 말씀을 해 주세요.

-끝까지 듣고 반론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듣고 듣겠습니다.

-지지하는 건 확실한 논거는 애국가를 누가 지었느냐 흐름에 따라서 사실 애국가 작사는 결판이 나는 겁니다.

왜 결판이 나냐.

무궁화가 속에 현행 애국가에 후렴이 있어요.

후렴.

후렴을 누가 짓느냐 피해가지 않고서는 작사자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궁화가 14편에 현행 애국가 무궁화가 14편에 있고 바로 12편에 권학가라는 게 있습니다.

권학가고요.

-다음 장 보여드릴게요.

-맞습니다.

권학가 12편에 무궁화가와한곡됴라고 여기 명기가 돼있어요.

-여기 마지막에 보면 무궁화와 한곡조라는 거죠.

-이거는 뭐냐 그래서 내가 음악 전문가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안창호, 윤치호 그것을 안 따지고 14편하고 13편하고 12편하고 작사자가 똑같다는 말이냐 하니까 그렇다고 그래요.

왜 그러냐 지금이나 예나 마찬가지다.

자기 작품이 아닌데 거기다 토를 달 수 없다 이거죠.

무궁화 한 곡조니 어쩌니 달 수가 없다.

-그러니까 무궁화를 작곡한 게 안창호 선생님인데.

무궁화1이라고 표기돼 있지 않지만 한 곡조라고 써 있는 거라고 봤을 때는 같은.

-맞습니다.

그게 무궁화1로 본다는 거죠.

무궁화1자로 표시 안 되어 있지만 2가 발견됨으로써 탄력을 받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지금 말씀하시죠.

-지금 윤치호가 아니냐 기냐를 따지는 게 아니고.

윤치호다, 안창호측이다라고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윤치호측을 반론을 얘기하면은 내가 할 얘기가 없죠.

계속 자료가 많은데.

그러니까 본인인들 증거자료를 내면 되는 거죠.

지금 준비된 자료가 있습니다.

1897년 8월 13일 독립문 정치식 직전에 독립관에서 505주년 기념식을 위해서 독립협회와 외교부가 행사를 합니다.

그날 지난 3일 후에 기사에 당시 독립신문 사장은 서재필이죠.

서재필이가 편집장 노트라는 글에 3일 전에 부른 이 노래는 배제학당이 불렀는데 오늘 505주년, 개국 505주년을 기념해서 윤치호가 작사했다라고 명확하게 나옵니다.

그 노래의 1절은 성사신솔 500년이라고 나옵니다.

500년이라는 인식을 한 것은 그 행사를 주관했고 개국 505주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런 작사를 한 것이죠.

그리고 지금 안용한 교수님이 제시한 자료는 저건 1900년대 자료입니다.

-후에.

-그렇죠.

1897년 행사 3일 후에 쓴 독립신문 기록과 한글분 독립신문 기록이 중요한 것이지 10년, 20년 후에 그 기록이 나온다라고 하는 건 그건 전혀 의미가 없는 거죠.

그리고 곡조라고 하는 것은 무궁화가 곡조와 동일하다라는 것은 무궁화가 곡조가 올드랭사인 곡조와 같다라는 뜻이지 저런 해석은 저는 전혀 불가능한 해석이지요.

-반론 있으십니까?

-조금 전 김연갑 선생님이 말씀하신 1897년 독립신문이라고 써 있는데 그리고 서재필 노트를 말씀하셨는데 이게 바로 서재필이 영문노트입니다.

이걸 제가 발견해서 영어로 번역해 봤어요.

번역했는데.

계관시인이라고 읽는 거는 맞습니다.

윤치호를.

그러나 무궁화가 네셔널플라워.

이 당시에는 네셔널플라워라고 해야 맞습니다.

네셔널플라워를 했는데 윤치호는 애국가심, 애국가로 찬미가의 위조로 옮겨놨어요.

그러니까 그건 뭐냐.

그러고 보면 김인교 교수님 말씀은 1897년 행사 순서 규범을 독립신문에 말씀하신 것이지 애국가가 윤치호다 하는 건 없어요.

그리고 1897년은, 1897년에서 1904년까지는 윤치호가 해외여행.

니콜라이 러시아 소련 군의 대관,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 오면서 프랑스 유학하고 상해 또 강사 하고 해외에 돌아다니다가 귀국해 가지고 1904년까지 고위공직에 있었던 사람이 무궁화라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그당시에 반체제노래입니다.

그럼 어떻게 9급 공무원이 반체제 노래를 지어서 배제학당에 넣느냐 이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국내에서는 부를 수가 없는.

-그렇죠.

국내에서의 부를 수가 없죠.

-아니죠.

독립신문이 나오고 독립문을 정초할 때인데 왜 애국가를 못 부릅니까?지금 선생님은 기록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어요.

정황을.

정황으로 따지면은 윤치호 선생님은 10년 동안 유학을 다니면서 수많은 문서와 일기를 쓰고 기록을 남겼는데 32세 때입니다.

이듬해에 독립협회 부회장을 하십니다.

안창호 선생님은 열여덟, 열일곱, 열아홉 기록에 따라서는 그렇습니다.

기록할 상황이 아니죠.

-저희가 이런 자리를 마련하면서 저희도 공부를 좀 해 보니까 도산 안창호 선생께 비서실장인가요.

제자가 애국가를 직접 작사하신 게 맞습니까 이렇게 여쭤봤더니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이렇게.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으셨다고 하고요.

-재차 물으니 맞다고 그렇습니다.

-그건 구전으로만 전해 오는 거고요.

-동아일보에서 2013년에 취재한 게 경전이 되어 나왔어요.

동아일보.

-뒤에.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료를 보더라도 여기에 맥락상으로는 윤치호를 먼저 거론하고 무궁화를 불렀다라는 건 뒤에 도산 선생이에요.

맥락적으로 정확하게 이해를 하셔야죠.

-김 선생님 말씀하신 거 웅변으로 했다고 하는데.

1925년 동아일보 신문에 뚜렷이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나왔는데 뭐냐.

국화를 만든 사람이 안창호다.

국화라고 한 람이.

-사회자께서 해석을 해 주세요.

이게 도산 선생님이 지었다라는 기록이 어디 나오는지.

-그리고 1925년에...

-자, 우리가 윤치호를 아니다라고 하면 그것이 곧 도산 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도산 것을 주장하셔야 해요.

이것은 자료라고 하는 것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맥락적으로 이해를 해야 되지 하나를 가지고 윤치호가 아니다라고 해서 도산작이 된다면은 도산작의 증거가 있어야죠.

-알겠습니다.

일단은 시간관계상 여기까지만 듣고 다시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김 이사님께 여쭤봐야 될 것 같은데요.

국가기관이 이제 윤치호를 작사가로 인정을 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결론을 내렸는데.

-결론을 내렸는데 이제 확정을 못 받았어요.

계속 미정인 상태로 있는데.

만약에 맞다고 생각하시면 굉장히 억울하시겠어요.

-당시 상황이 55년 상황이라는 건 전쟁복구 중이었고 또 그러한 정부에서 국륜불륜을 애국가를 새로 짓자고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봐야 돼요.

-마지막으로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무궁화1 시리즈가 무궁화2가 제가 이번에 발견했어요.

뭐냐, 무궁화가 제14.

무궁화가 한문으로 2.

제목을 해 놓고 가사는 현행 애국가를 따랐습니다.

그럼 그게 뭐냐.

그 옆에 바로 보면 끝장 자료를 보면 힘을 쓰며 힘을 쓰며 돼 있어요.

그것은 뭐냐 안 도산의 브랜드 무실력행을 이건 내 작품이다 하는 암시예요.

그거 바로 끝에 힘을 쓰며 힘을 쓰며 보면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만 더 얘기하면.

안익태가, 안익태가 작곡자예요.

그럼 작곡자가 가사 받은 사람이 내가 안창호에 받았다고 하면 안창호가 되는 거고 윤초익에게 받았다고 하면 윤초익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안익태가 여덟 사람의 학자에 의해서.

-시간관계상 여기까지만 들어야 될 것 같은데요.

증거들을 갖고 계신데 구전으로 전해 오는 게.

-증거없이 윤치호 걸 부정한다는 건 부당합니다.

-알겠습니다.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냐.

이 논쟁이 뭐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정확한 규명은 필요할 것 같고요.

시사진단 오늘 여기서 모두 마치겠습니다.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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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가 작사자 미스터리 윤치호 vs 안창호
    • 입력 2016-02-17 17:49:27
    • 수정2016-02-17 19:50:46
    시사진단
-지금 듣고 계신 곡.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있죠.

이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은 안익태 선생입니다.

그러면 작사를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현재 공식적으로는 미상입니다.

하지만 윤치호가 유력한 작사자로 거론되던 가운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의 작사자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논쟁이 한창입니다.

-좌옹 윤치호냐 도산 안창호냐.

60년째 미상으로 남은 애국가 작사자 과연 누구일까요.

윤치호 작사설을 지지하는 김연갑 한겨레아리랑 연합회 상임이사 그리고 안창호 작사설을 지지하는 안용환 서울 신학대학교 한국사 초빙교수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애국가 작가자는 누구인가 이런 논란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그 일지를 저희가 정리했습니다.

함께 보시죠.

국가행사나 대형 스포츠 이벤트 때마다 울려퍼지며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자랑스러운 애국가.

100여 년 동안 불린 애국가의 작곡가는 안익태 선생으로 공식 보도됐지만 작사자는 지금까지 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윤치호와 안창호 등 여러 후보를 조사했는데요.

하지만 작자 미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후 2012년 한 사단이 애국가 작가자 규명발표회를 열어 애국가의 작사자가 안창호 선생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또다시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애국가 작사자로 유력하게 거론돼 온 윤치호와 안창호.

두 인물을 놓고 치열한 공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단 양측의 입장을 다 듣기 위해서 두 분을 모셨는데요.

먼저 윤치호 작사라고 주장하시는 김 이사님의 의견부터 듣겠습니다.

-우선 윤치호 스스로가 내가 작사했다라고 해서 자필로 1907년 내가 작사했다.

물론 기록한 기간은 후기이지만 본인이 밝힌 바가 있다.

그리고 본인의 저술.

물론 역술이라고 하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책이긴합니다마는 1908년에 찬미가라고 하는 책 속에 자신의 애국가 1, 2편을 수록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고 나서 공부처에서 해외에 내보내는 기록에서는 윤치호 작, 안익태 작곡으로 밝혔다.

그리고 1950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유력하다.

그 유력하다라고 하는 것은 도산 안창호보다 유력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라는 전제에서 유력하다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문교부에 보고는 했는데 확정은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60년 동안 조사위원회에서 윤치호로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을 상부기관인 문교부에서는 확정 발표를 하지 않고 보고서도 내지 않은 실정이죠.

-유력하지만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그게 내가 애국가를 작사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이렇게 밝힌 게 돌아가시기 직전이죠?-1945년 12월에 돌아가셨는데 9월 달에 자필로 이렇게 기록을 남기신 거죠.

-자필로.

-그리고 그 뒷면에는 따님이, 따님이.

이것은 9월달에 아버님을 뵙고 자료를 받은 것이다.

여기에는 찬미가를 놓고 옮겨 쓰시고 일부 현재 불려지는 가사를 그대로 고쳐 쓴 것이다.

이렇게 밝히고 있죠.

-여기 제가 들고 있는 이 자료에는 따님이 쓰시던.

-네, 그게 따님 글씨입니다.

따님이 이 자료를 받고 나서 기록한 것이죠.

-이게 이제 자필이 맞는지 여부도 다 조사가 된 겁니까?-그건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확실히 확인이 됐고.

이후에 어떤 방송에서도 감정결과 확인을 했습니다.

-이게 자료가 상당히 많았는데 확정되지 않은 게 조금 아쉬우시겠어요.

-당시에 55년이라고 하는 거는 6.25 동란 후에 복구 과정에서 국륜불륜을 할 수 없다.

혹시라도 윤치호가 친일파이기 때문에 친일파로 발표한다면은 개정 이런 논란이 있기 때문에 하지 않은 걸로.

-친일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라고 생각을 하시는 거고요.

-그러면은 안창호 설을 주장하는 이런 근거는 무엇입니까?-우선 그 근거를 말씀 드리기 전에 김연갑 선생님이 말씀하신 찬미가 가사지를 두고 하는 얘기인데.

그건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사자료로 부실하다 해 가지고 채택되지도 않았어요.

채택되지도 않은 걸 그러니까 억울하니까 윤치호 사위 정광용 씨가 그 당시에 서울대 법대교수입니다.

정광용 씨가 탄원서를 냈어요.

그러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사 자료 근거도 있어요, 제가 원문도 가지고 있고요.

탄원서를 냈는데 억울하다 해서 받아가지고 읽어보니 사료 가치가 없어요.

그것도 정식 채택되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 어떻게 역사가 흐르면서 그것이 정설로 굳어져서 오늘날까지 온 거예요.

그리고 아까 김연갑 선생님 또 하나 실수를 하신 게.

우선 안창호, 그 당시에 1955년도 윤치호 유력시된 걸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1955년 4월 26일, 4월 26일 동아일보입니다.

이 뭐냐.

보류.

보류가 된 거예요, 보류.

뭘로 보류되느냐.

애국가지 윤치호, 안창호 작사설로 발표 직전에 보류가 된 거예요.

안창호, 그리고 문교부에서 작사설을 발표 직전에 여기 있는 대로 보류가 된 거예요.

-글씨가 사실 작아서 아주 잘 보이지는 않는데 이렇게 발표 직전에 보류라고 이렇게 쓰신 거.

-지금 4월, 5월은 8월 28일이 최종 3차회의입니다.

저 자료는 1차 회의 이후에 그런 얘기가 있었던 것이고요.

-알겠습니다.

-이 얘기를 계속 이어가다 보면 왜 안창호 설이 나오는가 작사가로.

그 얘기를 못 듣게 되니까 먼저 안창호 선생님 지지, 근거를 좀 말씀을 해 주세요.

-끝까지 듣고 반론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듣고 듣겠습니다.

-지지하는 건 확실한 논거는 애국가를 누가 지었느냐 흐름에 따라서 사실 애국가 작사는 결판이 나는 겁니다.

왜 결판이 나냐.

무궁화가 속에 현행 애국가에 후렴이 있어요.

후렴.

후렴을 누가 짓느냐 피해가지 않고서는 작사자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궁화가 14편에 현행 애국가 무궁화가 14편에 있고 바로 12편에 권학가라는 게 있습니다.

권학가고요.

-다음 장 보여드릴게요.

-맞습니다.

권학가 12편에 무궁화가와한곡됴라고 여기 명기가 돼있어요.

-여기 마지막에 보면 무궁화와 한곡조라는 거죠.

-이거는 뭐냐 그래서 내가 음악 전문가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안창호, 윤치호 그것을 안 따지고 14편하고 13편하고 12편하고 작사자가 똑같다는 말이냐 하니까 그렇다고 그래요.

왜 그러냐 지금이나 예나 마찬가지다.

자기 작품이 아닌데 거기다 토를 달 수 없다 이거죠.

무궁화 한 곡조니 어쩌니 달 수가 없다.

-그러니까 무궁화를 작곡한 게 안창호 선생님인데.

무궁화1이라고 표기돼 있지 않지만 한 곡조라고 써 있는 거라고 봤을 때는 같은.

-맞습니다.

그게 무궁화1로 본다는 거죠.

무궁화1자로 표시 안 되어 있지만 2가 발견됨으로써 탄력을 받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지금 말씀하시죠.

-지금 윤치호가 아니냐 기냐를 따지는 게 아니고.

윤치호다, 안창호측이다라고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윤치호측을 반론을 얘기하면은 내가 할 얘기가 없죠.

계속 자료가 많은데.

그러니까 본인인들 증거자료를 내면 되는 거죠.

지금 준비된 자료가 있습니다.

1897년 8월 13일 독립문 정치식 직전에 독립관에서 505주년 기념식을 위해서 독립협회와 외교부가 행사를 합니다.

그날 지난 3일 후에 기사에 당시 독립신문 사장은 서재필이죠.

서재필이가 편집장 노트라는 글에 3일 전에 부른 이 노래는 배제학당이 불렀는데 오늘 505주년, 개국 505주년을 기념해서 윤치호가 작사했다라고 명확하게 나옵니다.

그 노래의 1절은 성사신솔 500년이라고 나옵니다.

500년이라는 인식을 한 것은 그 행사를 주관했고 개국 505주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런 작사를 한 것이죠.

그리고 지금 안용한 교수님이 제시한 자료는 저건 1900년대 자료입니다.

-후에.

-그렇죠.

1897년 행사 3일 후에 쓴 독립신문 기록과 한글분 독립신문 기록이 중요한 것이지 10년, 20년 후에 그 기록이 나온다라고 하는 건 그건 전혀 의미가 없는 거죠.

그리고 곡조라고 하는 것은 무궁화가 곡조와 동일하다라는 것은 무궁화가 곡조가 올드랭사인 곡조와 같다라는 뜻이지 저런 해석은 저는 전혀 불가능한 해석이지요.

-반론 있으십니까?

-조금 전 김연갑 선생님이 말씀하신 1897년 독립신문이라고 써 있는데 그리고 서재필 노트를 말씀하셨는데 이게 바로 서재필이 영문노트입니다.

이걸 제가 발견해서 영어로 번역해 봤어요.

번역했는데.

계관시인이라고 읽는 거는 맞습니다.

윤치호를.

그러나 무궁화가 네셔널플라워.

이 당시에는 네셔널플라워라고 해야 맞습니다.

네셔널플라워를 했는데 윤치호는 애국가심, 애국가로 찬미가의 위조로 옮겨놨어요.

그러니까 그건 뭐냐.

그러고 보면 김인교 교수님 말씀은 1897년 행사 순서 규범을 독립신문에 말씀하신 것이지 애국가가 윤치호다 하는 건 없어요.

그리고 1897년은, 1897년에서 1904년까지는 윤치호가 해외여행.

니콜라이 러시아 소련 군의 대관,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 오면서 프랑스 유학하고 상해 또 강사 하고 해외에 돌아다니다가 귀국해 가지고 1904년까지 고위공직에 있었던 사람이 무궁화라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그당시에 반체제노래입니다.

그럼 어떻게 9급 공무원이 반체제 노래를 지어서 배제학당에 넣느냐 이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국내에서는 부를 수가 없는.

-그렇죠.

국내에서의 부를 수가 없죠.

-아니죠.

독립신문이 나오고 독립문을 정초할 때인데 왜 애국가를 못 부릅니까?지금 선생님은 기록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어요.

정황을.

정황으로 따지면은 윤치호 선생님은 10년 동안 유학을 다니면서 수많은 문서와 일기를 쓰고 기록을 남겼는데 32세 때입니다.

이듬해에 독립협회 부회장을 하십니다.

안창호 선생님은 열여덟, 열일곱, 열아홉 기록에 따라서는 그렇습니다.

기록할 상황이 아니죠.

-저희가 이런 자리를 마련하면서 저희도 공부를 좀 해 보니까 도산 안창호 선생께 비서실장인가요.

제자가 애국가를 직접 작사하신 게 맞습니까 이렇게 여쭤봤더니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이렇게.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으셨다고 하고요.

-재차 물으니 맞다고 그렇습니다.

-그건 구전으로만 전해 오는 거고요.

-동아일보에서 2013년에 취재한 게 경전이 되어 나왔어요.

동아일보.

-뒤에.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료를 보더라도 여기에 맥락상으로는 윤치호를 먼저 거론하고 무궁화를 불렀다라는 건 뒤에 도산 선생이에요.

맥락적으로 정확하게 이해를 하셔야죠.

-김 선생님 말씀하신 거 웅변으로 했다고 하는데.

1925년 동아일보 신문에 뚜렷이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나왔는데 뭐냐.

국화를 만든 사람이 안창호다.

국화라고 한 람이.

-사회자께서 해석을 해 주세요.

이게 도산 선생님이 지었다라는 기록이 어디 나오는지.

-그리고 1925년에...

-자, 우리가 윤치호를 아니다라고 하면 그것이 곧 도산 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도산 것을 주장하셔야 해요.

이것은 자료라고 하는 것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맥락적으로 이해를 해야 되지 하나를 가지고 윤치호가 아니다라고 해서 도산작이 된다면은 도산작의 증거가 있어야죠.

-알겠습니다.

일단은 시간관계상 여기까지만 듣고 다시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김 이사님께 여쭤봐야 될 것 같은데요.

국가기관이 이제 윤치호를 작사가로 인정을 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결론을 내렸는데.

-결론을 내렸는데 이제 확정을 못 받았어요.

계속 미정인 상태로 있는데.

만약에 맞다고 생각하시면 굉장히 억울하시겠어요.

-당시 상황이 55년 상황이라는 건 전쟁복구 중이었고 또 그러한 정부에서 국륜불륜을 애국가를 새로 짓자고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봐야 돼요.

-마지막으로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무궁화1 시리즈가 무궁화2가 제가 이번에 발견했어요.

뭐냐, 무궁화가 제14.

무궁화가 한문으로 2.

제목을 해 놓고 가사는 현행 애국가를 따랐습니다.

그럼 그게 뭐냐.

그 옆에 바로 보면 끝장 자료를 보면 힘을 쓰며 힘을 쓰며 돼 있어요.

그것은 뭐냐 안 도산의 브랜드 무실력행을 이건 내 작품이다 하는 암시예요.

그거 바로 끝에 힘을 쓰며 힘을 쓰며 보면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만 더 얘기하면.

안익태가, 안익태가 작곡자예요.

그럼 작곡자가 가사 받은 사람이 내가 안창호에 받았다고 하면 안창호가 되는 거고 윤초익에게 받았다고 하면 윤초익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안익태가 여덟 사람의 학자에 의해서.

-시간관계상 여기까지만 들어야 될 것 같은데요.

증거들을 갖고 계신데 구전으로 전해 오는 게.

-증거없이 윤치호 걸 부정한다는 건 부당합니다.

-알겠습니다.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냐.

이 논쟁이 뭐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정확한 규명은 필요할 것 같고요.

시사진단 오늘 여기서 모두 마치겠습니다.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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