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제발 내 친구들은”…‘생존 전투’를 치렀던 탈북 어민의 기도

입력 2016.06.03 (07:31) 수정 2016.06.03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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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촬영된 거 맞아요?"

난민선을 연상케 하는 작고 낡은 어선. 남루한 옷차림의 북한 어민 10여 명이 일렬로 서서 맨손으로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어선은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았지만, 조업은 계속됐다.

올해 초 평소 알고 지내던 오징어잡이 선장이 촬영했다는 영상이다. 70~80년대의 모습이라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 선장은 당연히 진위여부를 의심할 줄 알았다며, 자신의 위치추적장비에 나온 날짜와 시간, 위치까지 함께 촬영해 보여줬다.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 2015년 8월 4일. 울릉도 북동쪽으로 300㎞ 이상 떨어진 먼바다. 북한에서 목선을 타고 이곳까지 나오려면 최소 이틀이 걸린다. 나룻배나 다름없어 보인 북한의 목선에는 항법장치는 물론 변변한 안전장비조차 없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북한 어민들의 위험한 조업은 파도가 거칠어진 뒤에도 계속됐다고 한다.



●중무장 러시아 국경수비대 출현... "허가받았어요" 해명에도....

두만강 하구, 북러 접경지역을 위성지도로 모니터하던 선배가 '특이사항'을 포착했다. 러시아 측 해안가를 따라 방치된 어선들이 수두룩했다. 10척이 넘는 어선이 몰려있는 곳도 있었다. 러시아 현지 지인을 통해 알아보니, 현지 주민들이 '북한어선 무덤'이라고 부르는 곳이란다. 우리는 서둘러 러시아로 출국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를 타고 5시간. 하산에서 국경을 따라 두만강 하구로 또 2시간을 넘게 걸었다. 출입금지 경고표시가 있었지만 사전에 어렵사리 취재허가를 받은 만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갑작스레 우리 앞에 나타난 러시아 국경수비대. 국경에서 촬영한 것을 문제 삼았다. 우리는 사전에 허가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자들에게 공개하기엔 민감한 지역이라며 촬영 내용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결국, 국경수비대 건물에서 1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우리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 "북한어선이 200척이라고요?"

포기할 수 없었다. 일주일 정도 지난 후 취재진은 지인을 통해 다시 한 번 '북한어선 무덤'에 접근했다. 이번엔 다른 경로를 이용했다. 우거진 잡초들을 헤치며 한참을 나아가던 우리는 드디어 해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위성사진으로 봤던 '북한어선 무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실제 현장 모습은 생각보다 참혹했다. 수십 척의 어선이 부서지거나 백사장에 처박혀 있었다. 낡은 목조 어선에 적힌 뚜렷한 한글. 러시아 해역에서 조난되거나 불법조업을 하다 나포된 북한어선이었다. 이런 어선이 두만강 하구에 200척이 있다고 한다. 무리하게 바다에 나섰던 북한어선들의 마지막 종착지였다.



● "신분증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해송환 요구도 없었습니다"

일본 서해안에서 만난 어민은 지난해 11월 이후 표류하거나 조난된 북한어선을 3척이나 발견했다고 한다. 어선에서는 담배와 낚시 도구, 오징어와 그물이 나왔다. 이렇게 일본으로 떠내려온 북한 어선은 최근 3년 동안에만 170척이 넘는다. 어선에서는 북한 어민으로 보이는 시신들도 발견됐다. 하지만 신분증 등 신원을 확인할 만한 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선박에 쓰여있는 뚜렷한 한글과 북한 선전구호가 전부였다. 북한 측에서는 실종 어민의 생사를 확인하는 문의도, 공식적인 유해송환 요구도 없었다. 결국, 북한 어민은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김정은 집권 이후 일본에서 발견된 북한 어민 시신은 취재진이 확인한 것만 40구가 넘는다. 이 가운데 11구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인계됐다. 나머지 시신은 화장돼 일본 사찰이나 공동묘지 등에 무연고자로 남아있다. 송환 절차가 추진되고 있다는 말도 있었지만, 언제 돌아갈지 불투명하다.



● 중국 수산업자,"수산물은 북한산이 최고"

북한 어민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먼바다에서 잡은 수산물은 정작 북한 주민의 식탁에 오르지 못한다고 한다. 직접 잡아올린 배의 선주조차 물고기를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한다. 대부분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목숨 걸고 잡은 고기들은 외화벌이 수단이었다. 우리가 찾은 중국 훈춘 시장에는 살아있는 동해산 수산물이 가득했다. 육로를 통해 동해 북한수역 수산물이 들여온 것이다. 북한산 수산물이 가격도 저렴하고 품질도 제일이라고 홍보했다. 서해를 마주한 단둥은 육로가 아닌 해상 교역이 활발했다. 중국어선이 직접 북한 바다에서 조업하기도 하고 대형 운반선을 보내 해상에서 북한산 수산물을 사들이고 있었다.



● "어로 전투에 우리 해역까지 황폐화"

해마다 수천 척의 중국어선이 북한 바다로 들어간다. 북한이 돈을 받고 조업권을 넘긴 것이다. 중국어선이 동해에 진출한 2004년 이후 국내 오징어 어획량은 해마다 줄고 있다. 서해에서는 꽃게 어장을 중국어선이 휩쓸고 있다. 갯벌까지 팔아넘기면서 인위적인 중국 종패 투입에 따른 생물 다양성 훼손과 생태계 파괴 문제도 우려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북한 어민들은 목숨을 걸고 더 멀리 더 위험한 바다에서 작업할 수 밖에 없는 실정. 북한 어민들이 바다에서 벌이는 '생존 전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 "제발 내 친구들은…." 탈북 어민의 기도

강릉 주문진항에서 3년 전 중국을 통해 입국한 탈북 어민을 만났다. 그는 더는 뱃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목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사투를 벌이던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TV 일기예보가 나올 때면 바다 날씨에 주목한다고 했다. 그리고 파도가 높게 치거나 바람이 많이 불면 항상 기도한다고 했다.

*어민 출신 탈북자*
"지금도 집에서 날씨랑 기상이 나쁘다 그러면, 제발 내 친구들은 바다에 나가지 말기를 계속 빕니다."

[연관 기사] ☞ [시사기획 창] 북 어선 ‘생존 전투’ 죽음의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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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제발 내 친구들은”…‘생존 전투’를 치렀던 탈북 어민의 기도
    • 입력 2016-06-03 07:31:05
    • 수정2016-06-03 07:32:35
    취재후·사건후
● "이번에 촬영된 거 맞아요?" 난민선을 연상케 하는 작고 낡은 어선. 남루한 옷차림의 북한 어민 10여 명이 일렬로 서서 맨손으로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어선은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았지만, 조업은 계속됐다. 올해 초 평소 알고 지내던 오징어잡이 선장이 촬영했다는 영상이다. 70~80년대의 모습이라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 선장은 당연히 진위여부를 의심할 줄 알았다며, 자신의 위치추적장비에 나온 날짜와 시간, 위치까지 함께 촬영해 보여줬다.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 2015년 8월 4일. 울릉도 북동쪽으로 300㎞ 이상 떨어진 먼바다. 북한에서 목선을 타고 이곳까지 나오려면 최소 이틀이 걸린다. 나룻배나 다름없어 보인 북한의 목선에는 항법장치는 물론 변변한 안전장비조차 없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북한 어민들의 위험한 조업은 파도가 거칠어진 뒤에도 계속됐다고 한다. ●중무장 러시아 국경수비대 출현... "허가받았어요" 해명에도.... 두만강 하구, 북러 접경지역을 위성지도로 모니터하던 선배가 '특이사항'을 포착했다. 러시아 측 해안가를 따라 방치된 어선들이 수두룩했다. 10척이 넘는 어선이 몰려있는 곳도 있었다. 러시아 현지 지인을 통해 알아보니, 현지 주민들이 '북한어선 무덤'이라고 부르는 곳이란다. 우리는 서둘러 러시아로 출국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를 타고 5시간. 하산에서 국경을 따라 두만강 하구로 또 2시간을 넘게 걸었다. 출입금지 경고표시가 있었지만 사전에 어렵사리 취재허가를 받은 만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갑작스레 우리 앞에 나타난 러시아 국경수비대. 국경에서 촬영한 것을 문제 삼았다. 우리는 사전에 허가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자들에게 공개하기엔 민감한 지역이라며 촬영 내용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결국, 국경수비대 건물에서 1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우리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 "북한어선이 200척이라고요?" 포기할 수 없었다. 일주일 정도 지난 후 취재진은 지인을 통해 다시 한 번 '북한어선 무덤'에 접근했다. 이번엔 다른 경로를 이용했다. 우거진 잡초들을 헤치며 한참을 나아가던 우리는 드디어 해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위성사진으로 봤던 '북한어선 무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실제 현장 모습은 생각보다 참혹했다. 수십 척의 어선이 부서지거나 백사장에 처박혀 있었다. 낡은 목조 어선에 적힌 뚜렷한 한글. 러시아 해역에서 조난되거나 불법조업을 하다 나포된 북한어선이었다. 이런 어선이 두만강 하구에 200척이 있다고 한다. 무리하게 바다에 나섰던 북한어선들의 마지막 종착지였다. ● "신분증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해송환 요구도 없었습니다" 일본 서해안에서 만난 어민은 지난해 11월 이후 표류하거나 조난된 북한어선을 3척이나 발견했다고 한다. 어선에서는 담배와 낚시 도구, 오징어와 그물이 나왔다. 이렇게 일본으로 떠내려온 북한 어선은 최근 3년 동안에만 170척이 넘는다. 어선에서는 북한 어민으로 보이는 시신들도 발견됐다. 하지만 신분증 등 신원을 확인할 만한 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선박에 쓰여있는 뚜렷한 한글과 북한 선전구호가 전부였다. 북한 측에서는 실종 어민의 생사를 확인하는 문의도, 공식적인 유해송환 요구도 없었다. 결국, 북한 어민은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김정은 집권 이후 일본에서 발견된 북한 어민 시신은 취재진이 확인한 것만 40구가 넘는다. 이 가운데 11구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인계됐다. 나머지 시신은 화장돼 일본 사찰이나 공동묘지 등에 무연고자로 남아있다. 송환 절차가 추진되고 있다는 말도 있었지만, 언제 돌아갈지 불투명하다. ● 중국 수산업자,"수산물은 북한산이 최고" 북한 어민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먼바다에서 잡은 수산물은 정작 북한 주민의 식탁에 오르지 못한다고 한다. 직접 잡아올린 배의 선주조차 물고기를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한다. 대부분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목숨 걸고 잡은 고기들은 외화벌이 수단이었다. 우리가 찾은 중국 훈춘 시장에는 살아있는 동해산 수산물이 가득했다. 육로를 통해 동해 북한수역 수산물이 들여온 것이다. 북한산 수산물이 가격도 저렴하고 품질도 제일이라고 홍보했다. 서해를 마주한 단둥은 육로가 아닌 해상 교역이 활발했다. 중국어선이 직접 북한 바다에서 조업하기도 하고 대형 운반선을 보내 해상에서 북한산 수산물을 사들이고 있었다. ● "어로 전투에 우리 해역까지 황폐화" 해마다 수천 척의 중국어선이 북한 바다로 들어간다. 북한이 돈을 받고 조업권을 넘긴 것이다. 중국어선이 동해에 진출한 2004년 이후 국내 오징어 어획량은 해마다 줄고 있다. 서해에서는 꽃게 어장을 중국어선이 휩쓸고 있다. 갯벌까지 팔아넘기면서 인위적인 중국 종패 투입에 따른 생물 다양성 훼손과 생태계 파괴 문제도 우려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북한 어민들은 목숨을 걸고 더 멀리 더 위험한 바다에서 작업할 수 밖에 없는 실정. 북한 어민들이 바다에서 벌이는 '생존 전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 "제발 내 친구들은…." 탈북 어민의 기도 강릉 주문진항에서 3년 전 중국을 통해 입국한 탈북 어민을 만났다. 그는 더는 뱃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목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사투를 벌이던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TV 일기예보가 나올 때면 바다 날씨에 주목한다고 했다. 그리고 파도가 높게 치거나 바람이 많이 불면 항상 기도한다고 했다. *어민 출신 탈북자* "지금도 집에서 날씨랑 기상이 나쁘다 그러면, 제발 내 친구들은 바다에 나가지 말기를 계속 빕니다." [연관 기사] ☞ [시사기획 창] 북 어선 ‘생존 전투’ 죽음의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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