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김정일은 왜?…신상옥·최은희 납치 사건
입력 2016.09.24 (08:09)
수정 2016.09.2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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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한 독재자가 있습니다.
영화광으로 유명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얘긴데요.
그의 지시로 납북됐다 탈출한 영화감독 신상옥 씨와 배우 최은희 씨의 스토리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져 이번 주 국내에서 개봉됐습니다.
김정일이 그들을 납치하면서까지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북한 영화의 실태와 함께 <클로즈업 북한>이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녹취> 최은희(배우/‘연인과 독재자’ 中) : "들키면 목이 달아나는 거지 뭐.. 확실히 우리를 추적하는 거더라고... 그냥 신 감독하고 이렇게 (손을) 쥐고 이렇게 덜덜 떨고 있었지... 영화 슬로우 모션으로 하는 그런 생각이 났어요. 아우 어떻게 안 뛰어지는지..."
1970년대와 80년대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 씨 부부의 납치 사건.
<녹취> 美 국무부 관계자(1986년 5월 15일) : "최은희 씨는 8년 전 홍콩에 간 뒤 북한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북한으로 납치된 지 8년 만에 탈출에 성공한 두 사람은 그 후 미국에 체류하다 3년 뒤에야 한국 땅을 밟았다.
<녹취> 최은희(1989년 5월 23일) : "가슴이 떨려서 뭐라고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군요."
<녹취> 신상옥(1989년 5월 23일) : "국내에서 적응되는 기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도 많이 보고 싶고요."
하지만 귀국과 함께 신상옥 감독은 또 다시 자진 월북 논란에 휩싸인다.
<녹취> KBS 뉴스9(1989년 5월 23일) : "최은희 씨의 경우는 홍콩에서 납치된 경위가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지만 신상옥 씨의 경우 어떻게 평양으로 가게 됐는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진 월북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신상옥 감독은 지난 2006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최근 스크린을 통해 공개됐다.
<녹취>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조금 아쉬움은 있습니다. 아버님이 생존해 계시고 어머님이 건강하시면 두 분도 이 자리에 보러 오실 수 있었는데..."
젊은 두 영국인 감독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
이 영화는 지난 1월 세계적 권위의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김정일의 적나라한 육성을 공개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녹취> 김정일 : "남조선에서 누구를 제일로 꼽나? 그랬더니 신 감독이다. 자기 발로 자기 뜻대로 그렇게 뜻을 가지고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 신 감독을 유인할, 유혹하려면 뭐가 필요한가?"
1950년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최은희 신상옥 부부.
<녹취> 최은희 : "작품을 출연해달라는 요청으로 만나서 짜장면을 먹었다고... 나하고 영화를 하자, 평생 영화를 하자고 해서..."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한국 영화계에 큰 화제였다.
이후 <성춘향> <벙어리삼룡> 등 여러 히트작을 제작하면서 6-70년대 한국 영화를 주름 잡았던 두 사람.
<녹취> 최은희(1966년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 : "감개무량합니다. 너무나 가슴이 벅차올라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하지만 1978년, 사업차 홍콩을 방문한 최은희는 괴한에 의해 납치당한다.
<녹취> 최은희 : "와서 주사를 놓더라고요. 한 8일 걸려가지고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기절했다 깨어났다 아무 것도 못 먹고..."
배가 도착한 곳은 북한의 남포항.
그녀를 마중 나온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녹취> 최은희 : "쳐다볼 기운도 없어서 이렇게 그냥 봤는데 악수를 청하더라고요."
<녹취> “오시느라고 수고했습니다. 내 김정일입니다.”
6개월 뒤, 그녀를 찾아 홍콩에 간 신상옥 감독도 같은 수법으로 납치된다.
초대소에 도착한 뒤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그가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였다고 한다.
<녹취>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구타를 당하시고 그런 와중에 고막이 좀 나간 적도 있으시고... 그래서 거기 너무 힘드니까 탈출이라는 걸 다시는 꿈을 못 꾸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 아버지가 생각을 바꾼 게 탈출을 하려면 일단 잘 보여야겠다..."
신 감독은 5년간의 모진 수용소 생활을 거친 후에야 아내 최은희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녹취> 최은희: "'(김정일이) 최 선생 나 오늘 생일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기분 좋아가지고 오늘은 가족적인 모임이니까 누가 있나 보라고 그러더라고... 신 감독이 아무 소리도 안하고 이렇게 보기만하고 빙그레 웃기만하고 그냥 그러더라고..."
이후 2년 3개월 간 17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김정일의 신임을 얻은 두 사람.
탈출할 기회만 엿보던 이들은 김정일과의 대화 내용을 몰래 녹음하기로 결심한다.
<녹취> 최은희 : "신 감독이 머리를 써가지고 오늘 무슨 얘기를 하는지, 우리가 아무리 자유세계로 가서 변명을 하고 얘기를 해도 누가 알아 주겠냐 진실을... 그러니까 이걸 녹음을 하자.."
이들이 목숨을 걸고 녹음한 테이프에는 김정일이 두 사람을 납치한 이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녹취> 김정일 : "두 분을 내가 영화하는 대상으로 집었단 말입니다. 오는 과정에서부터 오늘날 이르기까지 두 분을 만나기까지는 이런 곡절이 있었단 말이야... 두 분이 꼭 필요하니까 데려와라..."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을 납치까지 감행할 정도로. 김정일이 영화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시절부터 영화는 김정일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가 소장한 세계 각국의 영화 필름은 약 만 5천여 편, 국내에서 볼 수 없는 희귀본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TV에 나오는 배우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로 남한 영화에 대한 관심 또한 깊었다.
<녹취> 김정일(KBS 다큐 ‘김정일’ 中) : "김희갑이하고 저기 그 또래 배우들이 영화, 평생 일생 영화 찍었다고 보는데 한 몇 편이나 했을 거 같아요?"
<녹취> 최은희(KBS 다큐 ‘김정일’ 中) : "한 5백편 했을 겁니다. 단역도 많이 하고 그랬으니까요."
<녹취> 김정일(KBS 다큐 ‘김정일’ 中) : "정윤희는 TV 나오는 거 보니까 벌써 120편 했다고 그러더래요"
<녹취> 최은희(KBS 다큐 ‘김정일’ 中) : "그렇게 될 겁니다."
김정일은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 등 혁명 가극을 영화화하며 아버지 김일성에게 능력을 인정받는다.
1973년에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영화 제작에 접목시킨 <영화예술론>을 발표한다.
이 모든 작업은 결국 영상을 통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녹취> 北기록영화 ‘주체시대를 빛내이신 절세의 위인’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형상을 창조하는 영광스러운 영화 창작기지인 백두산 창작단을 몸소 조직해주시었습니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김정일의 특징은 영화를 자신의 통치 기반에 활용했어요. 첫째는 체제 선전, 그 다음에 주민들의 불만을 오락거리 영화 쪽으로 유도하는 그런 관점에서 영화를 정권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활용한 매우 노회한 지도자다... 영화에 대한 사랑 역시 그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를 통해 체제를 더 공고히 하고 싶었던 김정일.
신상옥, 최은희 부부를 납치해 영화 제작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녹취> 김정일 : "우리는 이런 어떤 돈을 여기다 투자하겠다. 그래서 신 감독에 대한 기대가 내가 그래서 크다는겁니다."
<인터뷰>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영화 감독) : "찍고 싶은 것을 찍을 때 안되는 게 없는 거예요. 김정일의 말 한 마디면 다 지원이 되니까. 산 넘어가고 이런 데는 눈보라가 쳐야 되는데 강풍기 갖고는 안 된다 하니까 그냥 바로 헬기 띄워가지고 하고, 기차도 미니어처 가지고 충돌하는 장면을 찍는데 아무래도 효과가 안 나니까 김정일한테 얘기하니까 진짜 기차 2대 갖다가 그냥 다이너마이트 실어놓고 폭파시키고..."
당시 제작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와 ‘소금’으로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국제 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경직된 북한 사회 분위기와 감시, 그리고 통제는 예술가인 이들 부부를 숨 막히게 할 뿐이었다.
<녹취> 최은희 : "공산주의 서적 같은 거 갖다 줘요. 책 읽으라고. 김일성 주의라든가 혁명사상이라든가 이런 걸 세뇌 공작을 한 거예요. 인형같이... 그렇게 했어요."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치밀한 계획 끝에 탈출을 감행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터뷰>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김정일이 아버지하고 한 약속이 당신이 만드는 영화에 대해서는 체제나 체제 선전이나 이런 걸 강요하지 않겠다,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라... 문제는 뭐냐하면 체제에 대한 강요는 안해도 아버지 스스로 영화를 만들 때 이 정도 선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신 거죠. 그 영화들에는 아버지의 영혼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신상옥 감독이 80년대 북한 영화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당시 제작된 영화들은 이전에 비해 체제 선동적인 요소가 비교적 약한 반면에 북한에서는 금기시하던 애정 표현도 과감히 등장한다.
하지만 신 감독이 북한을 떠나고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90년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북한 영화는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인터뷰> 전영선(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 :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 전환을 맞으면서 북한은 내부적으로 문화 예술 동원에서 다시금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어떤 공고성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선전에 활용하기 시작을 했고, 90년대 지나면서 전반적으로 북한 경제 자체가 침체가 되면서 영화에 투자할 수 있는 인프라가 많이 취약해졌다..."
그렇다면 김정은 시대에 제작된 영화에는 어떤 변화가 담겨 있을까?
<녹취> 북한-영국 합작영화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2012년) : "이 손을 공중에서 잡고 싶은데 그게 옳지 않구만. 그래도 우린 꼭 잡게 될거요."
김정은의 통치 코드인 이른바 ‘청년 띄우기’에 발 맞춰 주인공의 연령대가 점점 더 낮아진 것도 김정은 시대 영화의 한 특징이다.
무엇보다 김정일 기록영화의 홍수 속에, 연간 10여 편에 달하던 일반 영화 제작 편수 자체가 연간 한 두 편 선 까지 급감한 것은 가장 큰 변화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사실 영화 산업은 종합예술이고 여러 가지 경제적인 뒷받침도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다양한 경제적 요인들, 그 다음에 북핵 개발로 인한 대북 제재 국면, 그 다음 김정은 개인의 영화보다는 어떤 음악이라는 대중 동원 예술을 더 선호한다는 점,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북한의 영화 제작 편수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영화가 지닌 대중 선동의 힘에 일찌감치 주목했던 김정일.
하지만 북한 영화의 실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예술로서의 영화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한 독재자가 있습니다.
영화광으로 유명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얘긴데요.
그의 지시로 납북됐다 탈출한 영화감독 신상옥 씨와 배우 최은희 씨의 스토리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져 이번 주 국내에서 개봉됐습니다.
김정일이 그들을 납치하면서까지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북한 영화의 실태와 함께 <클로즈업 북한>이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녹취> 최은희(배우/‘연인과 독재자’ 中) : "들키면 목이 달아나는 거지 뭐.. 확실히 우리를 추적하는 거더라고... 그냥 신 감독하고 이렇게 (손을) 쥐고 이렇게 덜덜 떨고 있었지... 영화 슬로우 모션으로 하는 그런 생각이 났어요. 아우 어떻게 안 뛰어지는지..."
1970년대와 80년대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 씨 부부의 납치 사건.
<녹취> 美 국무부 관계자(1986년 5월 15일) : "최은희 씨는 8년 전 홍콩에 간 뒤 북한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북한으로 납치된 지 8년 만에 탈출에 성공한 두 사람은 그 후 미국에 체류하다 3년 뒤에야 한국 땅을 밟았다.
<녹취> 최은희(1989년 5월 23일) : "가슴이 떨려서 뭐라고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군요."
<녹취> 신상옥(1989년 5월 23일) : "국내에서 적응되는 기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도 많이 보고 싶고요."
하지만 귀국과 함께 신상옥 감독은 또 다시 자진 월북 논란에 휩싸인다.
<녹취> KBS 뉴스9(1989년 5월 23일) : "최은희 씨의 경우는 홍콩에서 납치된 경위가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지만 신상옥 씨의 경우 어떻게 평양으로 가게 됐는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진 월북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신상옥 감독은 지난 2006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최근 스크린을 통해 공개됐다.
<녹취>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조금 아쉬움은 있습니다. 아버님이 생존해 계시고 어머님이 건강하시면 두 분도 이 자리에 보러 오실 수 있었는데..."
젊은 두 영국인 감독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
이 영화는 지난 1월 세계적 권위의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김정일의 적나라한 육성을 공개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녹취> 김정일 : "남조선에서 누구를 제일로 꼽나? 그랬더니 신 감독이다. 자기 발로 자기 뜻대로 그렇게 뜻을 가지고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 신 감독을 유인할, 유혹하려면 뭐가 필요한가?"
1950년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최은희 신상옥 부부.
<녹취> 최은희 : "작품을 출연해달라는 요청으로 만나서 짜장면을 먹었다고... 나하고 영화를 하자, 평생 영화를 하자고 해서..."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한국 영화계에 큰 화제였다.
이후 <성춘향> <벙어리삼룡> 등 여러 히트작을 제작하면서 6-70년대 한국 영화를 주름 잡았던 두 사람.
<녹취> 최은희(1966년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 : "감개무량합니다. 너무나 가슴이 벅차올라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하지만 1978년, 사업차 홍콩을 방문한 최은희는 괴한에 의해 납치당한다.
<녹취> 최은희 : "와서 주사를 놓더라고요. 한 8일 걸려가지고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기절했다 깨어났다 아무 것도 못 먹고..."
배가 도착한 곳은 북한의 남포항.
그녀를 마중 나온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녹취> 최은희 : "쳐다볼 기운도 없어서 이렇게 그냥 봤는데 악수를 청하더라고요."
<녹취> “오시느라고 수고했습니다. 내 김정일입니다.”
6개월 뒤, 그녀를 찾아 홍콩에 간 신상옥 감독도 같은 수법으로 납치된다.
초대소에 도착한 뒤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그가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였다고 한다.
<녹취>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구타를 당하시고 그런 와중에 고막이 좀 나간 적도 있으시고... 그래서 거기 너무 힘드니까 탈출이라는 걸 다시는 꿈을 못 꾸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 아버지가 생각을 바꾼 게 탈출을 하려면 일단 잘 보여야겠다..."
신 감독은 5년간의 모진 수용소 생활을 거친 후에야 아내 최은희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녹취> 최은희: "'(김정일이) 최 선생 나 오늘 생일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기분 좋아가지고 오늘은 가족적인 모임이니까 누가 있나 보라고 그러더라고... 신 감독이 아무 소리도 안하고 이렇게 보기만하고 빙그레 웃기만하고 그냥 그러더라고..."
이후 2년 3개월 간 17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김정일의 신임을 얻은 두 사람.
탈출할 기회만 엿보던 이들은 김정일과의 대화 내용을 몰래 녹음하기로 결심한다.
<녹취> 최은희 : "신 감독이 머리를 써가지고 오늘 무슨 얘기를 하는지, 우리가 아무리 자유세계로 가서 변명을 하고 얘기를 해도 누가 알아 주겠냐 진실을... 그러니까 이걸 녹음을 하자.."
이들이 목숨을 걸고 녹음한 테이프에는 김정일이 두 사람을 납치한 이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녹취> 김정일 : "두 분을 내가 영화하는 대상으로 집었단 말입니다. 오는 과정에서부터 오늘날 이르기까지 두 분을 만나기까지는 이런 곡절이 있었단 말이야... 두 분이 꼭 필요하니까 데려와라..."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을 납치까지 감행할 정도로. 김정일이 영화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시절부터 영화는 김정일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가 소장한 세계 각국의 영화 필름은 약 만 5천여 편, 국내에서 볼 수 없는 희귀본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TV에 나오는 배우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로 남한 영화에 대한 관심 또한 깊었다.
<녹취> 김정일(KBS 다큐 ‘김정일’ 中) : "김희갑이하고 저기 그 또래 배우들이 영화, 평생 일생 영화 찍었다고 보는데 한 몇 편이나 했을 거 같아요?"
<녹취> 최은희(KBS 다큐 ‘김정일’ 中) : "한 5백편 했을 겁니다. 단역도 많이 하고 그랬으니까요."
<녹취> 김정일(KBS 다큐 ‘김정일’ 中) : "정윤희는 TV 나오는 거 보니까 벌써 120편 했다고 그러더래요"
<녹취> 최은희(KBS 다큐 ‘김정일’ 中) : "그렇게 될 겁니다."
김정일은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 등 혁명 가극을 영화화하며 아버지 김일성에게 능력을 인정받는다.
1973년에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영화 제작에 접목시킨 <영화예술론>을 발표한다.
이 모든 작업은 결국 영상을 통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녹취> 北기록영화 ‘주체시대를 빛내이신 절세의 위인’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형상을 창조하는 영광스러운 영화 창작기지인 백두산 창작단을 몸소 조직해주시었습니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김정일의 특징은 영화를 자신의 통치 기반에 활용했어요. 첫째는 체제 선전, 그 다음에 주민들의 불만을 오락거리 영화 쪽으로 유도하는 그런 관점에서 영화를 정권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활용한 매우 노회한 지도자다... 영화에 대한 사랑 역시 그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를 통해 체제를 더 공고히 하고 싶었던 김정일.
신상옥, 최은희 부부를 납치해 영화 제작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녹취> 김정일 : "우리는 이런 어떤 돈을 여기다 투자하겠다. 그래서 신 감독에 대한 기대가 내가 그래서 크다는겁니다."
<인터뷰>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영화 감독) : "찍고 싶은 것을 찍을 때 안되는 게 없는 거예요. 김정일의 말 한 마디면 다 지원이 되니까. 산 넘어가고 이런 데는 눈보라가 쳐야 되는데 강풍기 갖고는 안 된다 하니까 그냥 바로 헬기 띄워가지고 하고, 기차도 미니어처 가지고 충돌하는 장면을 찍는데 아무래도 효과가 안 나니까 김정일한테 얘기하니까 진짜 기차 2대 갖다가 그냥 다이너마이트 실어놓고 폭파시키고..."
당시 제작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와 ‘소금’으로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국제 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경직된 북한 사회 분위기와 감시, 그리고 통제는 예술가인 이들 부부를 숨 막히게 할 뿐이었다.
<녹취> 최은희 : "공산주의 서적 같은 거 갖다 줘요. 책 읽으라고. 김일성 주의라든가 혁명사상이라든가 이런 걸 세뇌 공작을 한 거예요. 인형같이... 그렇게 했어요."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치밀한 계획 끝에 탈출을 감행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터뷰>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김정일이 아버지하고 한 약속이 당신이 만드는 영화에 대해서는 체제나 체제 선전이나 이런 걸 강요하지 않겠다,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라... 문제는 뭐냐하면 체제에 대한 강요는 안해도 아버지 스스로 영화를 만들 때 이 정도 선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신 거죠. 그 영화들에는 아버지의 영혼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신상옥 감독이 80년대 북한 영화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당시 제작된 영화들은 이전에 비해 체제 선동적인 요소가 비교적 약한 반면에 북한에서는 금기시하던 애정 표현도 과감히 등장한다.
하지만 신 감독이 북한을 떠나고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90년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북한 영화는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인터뷰> 전영선(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 :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 전환을 맞으면서 북한은 내부적으로 문화 예술 동원에서 다시금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어떤 공고성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선전에 활용하기 시작을 했고, 90년대 지나면서 전반적으로 북한 경제 자체가 침체가 되면서 영화에 투자할 수 있는 인프라가 많이 취약해졌다..."
그렇다면 김정은 시대에 제작된 영화에는 어떤 변화가 담겨 있을까?
<녹취> 북한-영국 합작영화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2012년) : "이 손을 공중에서 잡고 싶은데 그게 옳지 않구만. 그래도 우린 꼭 잡게 될거요."
김정은의 통치 코드인 이른바 ‘청년 띄우기’에 발 맞춰 주인공의 연령대가 점점 더 낮아진 것도 김정은 시대 영화의 한 특징이다.
무엇보다 김정일 기록영화의 홍수 속에, 연간 10여 편에 달하던 일반 영화 제작 편수 자체가 연간 한 두 편 선 까지 급감한 것은 가장 큰 변화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사실 영화 산업은 종합예술이고 여러 가지 경제적인 뒷받침도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다양한 경제적 요인들, 그 다음에 북핵 개발로 인한 대북 제재 국면, 그 다음 김정은 개인의 영화보다는 어떤 음악이라는 대중 동원 예술을 더 선호한다는 점,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북한의 영화 제작 편수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영화가 지닌 대중 선동의 힘에 일찌감치 주목했던 김정일.
하지만 북한 영화의 실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예술로서의 영화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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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즈업 북한] 김정일은 왜?…신상옥·최은희 납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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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6-09-24 08:47:52
- 수정2016-09-24 12:13:08

<앵커 멘트>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한 독재자가 있습니다.
영화광으로 유명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얘긴데요.
그의 지시로 납북됐다 탈출한 영화감독 신상옥 씨와 배우 최은희 씨의 스토리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져 이번 주 국내에서 개봉됐습니다.
김정일이 그들을 납치하면서까지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북한 영화의 실태와 함께 <클로즈업 북한>이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녹취> 최은희(배우/‘연인과 독재자’ 中) : "들키면 목이 달아나는 거지 뭐.. 확실히 우리를 추적하는 거더라고... 그냥 신 감독하고 이렇게 (손을) 쥐고 이렇게 덜덜 떨고 있었지... 영화 슬로우 모션으로 하는 그런 생각이 났어요. 아우 어떻게 안 뛰어지는지..."
1970년대와 80년대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 씨 부부의 납치 사건.
<녹취> 美 국무부 관계자(1986년 5월 15일) : "최은희 씨는 8년 전 홍콩에 간 뒤 북한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북한으로 납치된 지 8년 만에 탈출에 성공한 두 사람은 그 후 미국에 체류하다 3년 뒤에야 한국 땅을 밟았다.
<녹취> 최은희(1989년 5월 23일) : "가슴이 떨려서 뭐라고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군요."
<녹취> 신상옥(1989년 5월 23일) : "국내에서 적응되는 기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도 많이 보고 싶고요."
하지만 귀국과 함께 신상옥 감독은 또 다시 자진 월북 논란에 휩싸인다.
<녹취> KBS 뉴스9(1989년 5월 23일) : "최은희 씨의 경우는 홍콩에서 납치된 경위가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지만 신상옥 씨의 경우 어떻게 평양으로 가게 됐는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진 월북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신상옥 감독은 지난 2006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최근 스크린을 통해 공개됐다.
<녹취>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조금 아쉬움은 있습니다. 아버님이 생존해 계시고 어머님이 건강하시면 두 분도 이 자리에 보러 오실 수 있었는데..."
젊은 두 영국인 감독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
이 영화는 지난 1월 세계적 권위의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김정일의 적나라한 육성을 공개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녹취> 김정일 : "남조선에서 누구를 제일로 꼽나? 그랬더니 신 감독이다. 자기 발로 자기 뜻대로 그렇게 뜻을 가지고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 신 감독을 유인할, 유혹하려면 뭐가 필요한가?"
1950년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최은희 신상옥 부부.
<녹취> 최은희 : "작품을 출연해달라는 요청으로 만나서 짜장면을 먹었다고... 나하고 영화를 하자, 평생 영화를 하자고 해서..."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한국 영화계에 큰 화제였다.
이후 <성춘향> <벙어리삼룡> 등 여러 히트작을 제작하면서 6-70년대 한국 영화를 주름 잡았던 두 사람.
<녹취> 최은희(1966년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 : "감개무량합니다. 너무나 가슴이 벅차올라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하지만 1978년, 사업차 홍콩을 방문한 최은희는 괴한에 의해 납치당한다.
<녹취> 최은희 : "와서 주사를 놓더라고요. 한 8일 걸려가지고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기절했다 깨어났다 아무 것도 못 먹고..."
배가 도착한 곳은 북한의 남포항.
그녀를 마중 나온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녹취> 최은희 : "쳐다볼 기운도 없어서 이렇게 그냥 봤는데 악수를 청하더라고요."
<녹취> “오시느라고 수고했습니다. 내 김정일입니다.”
6개월 뒤, 그녀를 찾아 홍콩에 간 신상옥 감독도 같은 수법으로 납치된다.
초대소에 도착한 뒤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그가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였다고 한다.
<녹취>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구타를 당하시고 그런 와중에 고막이 좀 나간 적도 있으시고... 그래서 거기 너무 힘드니까 탈출이라는 걸 다시는 꿈을 못 꾸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 아버지가 생각을 바꾼 게 탈출을 하려면 일단 잘 보여야겠다..."
신 감독은 5년간의 모진 수용소 생활을 거친 후에야 아내 최은희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녹취> 최은희: "'(김정일이) 최 선생 나 오늘 생일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기분 좋아가지고 오늘은 가족적인 모임이니까 누가 있나 보라고 그러더라고... 신 감독이 아무 소리도 안하고 이렇게 보기만하고 빙그레 웃기만하고 그냥 그러더라고..."
이후 2년 3개월 간 17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김정일의 신임을 얻은 두 사람.
탈출할 기회만 엿보던 이들은 김정일과의 대화 내용을 몰래 녹음하기로 결심한다.
<녹취> 최은희 : "신 감독이 머리를 써가지고 오늘 무슨 얘기를 하는지, 우리가 아무리 자유세계로 가서 변명을 하고 얘기를 해도 누가 알아 주겠냐 진실을... 그러니까 이걸 녹음을 하자.."
이들이 목숨을 걸고 녹음한 테이프에는 김정일이 두 사람을 납치한 이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녹취> 김정일 : "두 분을 내가 영화하는 대상으로 집었단 말입니다. 오는 과정에서부터 오늘날 이르기까지 두 분을 만나기까지는 이런 곡절이 있었단 말이야... 두 분이 꼭 필요하니까 데려와라..."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을 납치까지 감행할 정도로. 김정일이 영화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시절부터 영화는 김정일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가 소장한 세계 각국의 영화 필름은 약 만 5천여 편, 국내에서 볼 수 없는 희귀본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TV에 나오는 배우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로 남한 영화에 대한 관심 또한 깊었다.
<녹취> 김정일(KBS 다큐 ‘김정일’ 中) : "김희갑이하고 저기 그 또래 배우들이 영화, 평생 일생 영화 찍었다고 보는데 한 몇 편이나 했을 거 같아요?"
<녹취> 최은희(KBS 다큐 ‘김정일’ 中) : "한 5백편 했을 겁니다. 단역도 많이 하고 그랬으니까요."
<녹취> 김정일(KBS 다큐 ‘김정일’ 中) : "정윤희는 TV 나오는 거 보니까 벌써 120편 했다고 그러더래요"
<녹취> 최은희(KBS 다큐 ‘김정일’ 中) : "그렇게 될 겁니다."
김정일은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 등 혁명 가극을 영화화하며 아버지 김일성에게 능력을 인정받는다.
1973년에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영화 제작에 접목시킨 <영화예술론>을 발표한다.
이 모든 작업은 결국 영상을 통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녹취> 北기록영화 ‘주체시대를 빛내이신 절세의 위인’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형상을 창조하는 영광스러운 영화 창작기지인 백두산 창작단을 몸소 조직해주시었습니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김정일의 특징은 영화를 자신의 통치 기반에 활용했어요. 첫째는 체제 선전, 그 다음에 주민들의 불만을 오락거리 영화 쪽으로 유도하는 그런 관점에서 영화를 정권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활용한 매우 노회한 지도자다... 영화에 대한 사랑 역시 그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를 통해 체제를 더 공고히 하고 싶었던 김정일.
신상옥, 최은희 부부를 납치해 영화 제작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녹취> 김정일 : "우리는 이런 어떤 돈을 여기다 투자하겠다. 그래서 신 감독에 대한 기대가 내가 그래서 크다는겁니다."
<인터뷰>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영화 감독) : "찍고 싶은 것을 찍을 때 안되는 게 없는 거예요. 김정일의 말 한 마디면 다 지원이 되니까. 산 넘어가고 이런 데는 눈보라가 쳐야 되는데 강풍기 갖고는 안 된다 하니까 그냥 바로 헬기 띄워가지고 하고, 기차도 미니어처 가지고 충돌하는 장면을 찍는데 아무래도 효과가 안 나니까 김정일한테 얘기하니까 진짜 기차 2대 갖다가 그냥 다이너마이트 실어놓고 폭파시키고..."
당시 제작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와 ‘소금’으로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국제 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경직된 북한 사회 분위기와 감시, 그리고 통제는 예술가인 이들 부부를 숨 막히게 할 뿐이었다.
<녹취> 최은희 : "공산주의 서적 같은 거 갖다 줘요. 책 읽으라고. 김일성 주의라든가 혁명사상이라든가 이런 걸 세뇌 공작을 한 거예요. 인형같이... 그렇게 했어요."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치밀한 계획 끝에 탈출을 감행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터뷰>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김정일이 아버지하고 한 약속이 당신이 만드는 영화에 대해서는 체제나 체제 선전이나 이런 걸 강요하지 않겠다,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라... 문제는 뭐냐하면 체제에 대한 강요는 안해도 아버지 스스로 영화를 만들 때 이 정도 선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신 거죠. 그 영화들에는 아버지의 영혼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신상옥 감독이 80년대 북한 영화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당시 제작된 영화들은 이전에 비해 체제 선동적인 요소가 비교적 약한 반면에 북한에서는 금기시하던 애정 표현도 과감히 등장한다.
하지만 신 감독이 북한을 떠나고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90년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북한 영화는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인터뷰> 전영선(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 :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 전환을 맞으면서 북한은 내부적으로 문화 예술 동원에서 다시금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어떤 공고성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선전에 활용하기 시작을 했고, 90년대 지나면서 전반적으로 북한 경제 자체가 침체가 되면서 영화에 투자할 수 있는 인프라가 많이 취약해졌다..."
그렇다면 김정은 시대에 제작된 영화에는 어떤 변화가 담겨 있을까?
<녹취> 북한-영국 합작영화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2012년) : "이 손을 공중에서 잡고 싶은데 그게 옳지 않구만. 그래도 우린 꼭 잡게 될거요."
김정은의 통치 코드인 이른바 ‘청년 띄우기’에 발 맞춰 주인공의 연령대가 점점 더 낮아진 것도 김정은 시대 영화의 한 특징이다.
무엇보다 김정일 기록영화의 홍수 속에, 연간 10여 편에 달하던 일반 영화 제작 편수 자체가 연간 한 두 편 선 까지 급감한 것은 가장 큰 변화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사실 영화 산업은 종합예술이고 여러 가지 경제적인 뒷받침도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다양한 경제적 요인들, 그 다음에 북핵 개발로 인한 대북 제재 국면, 그 다음 김정은 개인의 영화보다는 어떤 음악이라는 대중 동원 예술을 더 선호한다는 점,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북한의 영화 제작 편수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영화가 지닌 대중 선동의 힘에 일찌감치 주목했던 김정일.
하지만 북한 영화의 실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예술로서의 영화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한 독재자가 있습니다.
영화광으로 유명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얘긴데요.
그의 지시로 납북됐다 탈출한 영화감독 신상옥 씨와 배우 최은희 씨의 스토리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져 이번 주 국내에서 개봉됐습니다.
김정일이 그들을 납치하면서까지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북한 영화의 실태와 함께 <클로즈업 북한>이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녹취> 최은희(배우/‘연인과 독재자’ 中) : "들키면 목이 달아나는 거지 뭐.. 확실히 우리를 추적하는 거더라고... 그냥 신 감독하고 이렇게 (손을) 쥐고 이렇게 덜덜 떨고 있었지... 영화 슬로우 모션으로 하는 그런 생각이 났어요. 아우 어떻게 안 뛰어지는지..."
1970년대와 80년대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 씨 부부의 납치 사건.
<녹취> 美 국무부 관계자(1986년 5월 15일) : "최은희 씨는 8년 전 홍콩에 간 뒤 북한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북한으로 납치된 지 8년 만에 탈출에 성공한 두 사람은 그 후 미국에 체류하다 3년 뒤에야 한국 땅을 밟았다.
<녹취> 최은희(1989년 5월 23일) : "가슴이 떨려서 뭐라고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군요."
<녹취> 신상옥(1989년 5월 23일) : "국내에서 적응되는 기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도 많이 보고 싶고요."
하지만 귀국과 함께 신상옥 감독은 또 다시 자진 월북 논란에 휩싸인다.
<녹취> KBS 뉴스9(1989년 5월 23일) : "최은희 씨의 경우는 홍콩에서 납치된 경위가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지만 신상옥 씨의 경우 어떻게 평양으로 가게 됐는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진 월북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신상옥 감독은 지난 2006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최근 스크린을 통해 공개됐다.
<녹취>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조금 아쉬움은 있습니다. 아버님이 생존해 계시고 어머님이 건강하시면 두 분도 이 자리에 보러 오실 수 있었는데..."
젊은 두 영국인 감독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
이 영화는 지난 1월 세계적 권위의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김정일의 적나라한 육성을 공개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녹취> 김정일 : "남조선에서 누구를 제일로 꼽나? 그랬더니 신 감독이다. 자기 발로 자기 뜻대로 그렇게 뜻을 가지고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 신 감독을 유인할, 유혹하려면 뭐가 필요한가?"
1950년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최은희 신상옥 부부.
<녹취> 최은희 : "작품을 출연해달라는 요청으로 만나서 짜장면을 먹었다고... 나하고 영화를 하자, 평생 영화를 하자고 해서..."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한국 영화계에 큰 화제였다.
이후 <성춘향> <벙어리삼룡> 등 여러 히트작을 제작하면서 6-70년대 한국 영화를 주름 잡았던 두 사람.
<녹취> 최은희(1966년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 : "감개무량합니다. 너무나 가슴이 벅차올라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하지만 1978년, 사업차 홍콩을 방문한 최은희는 괴한에 의해 납치당한다.
<녹취> 최은희 : "와서 주사를 놓더라고요. 한 8일 걸려가지고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기절했다 깨어났다 아무 것도 못 먹고..."
배가 도착한 곳은 북한의 남포항.
그녀를 마중 나온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녹취> 최은희 : "쳐다볼 기운도 없어서 이렇게 그냥 봤는데 악수를 청하더라고요."
<녹취> “오시느라고 수고했습니다. 내 김정일입니다.”
6개월 뒤, 그녀를 찾아 홍콩에 간 신상옥 감독도 같은 수법으로 납치된다.
초대소에 도착한 뒤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그가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였다고 한다.
<녹취>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구타를 당하시고 그런 와중에 고막이 좀 나간 적도 있으시고... 그래서 거기 너무 힘드니까 탈출이라는 걸 다시는 꿈을 못 꾸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 아버지가 생각을 바꾼 게 탈출을 하려면 일단 잘 보여야겠다..."
신 감독은 5년간의 모진 수용소 생활을 거친 후에야 아내 최은희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녹취> 최은희: "'(김정일이) 최 선생 나 오늘 생일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기분 좋아가지고 오늘은 가족적인 모임이니까 누가 있나 보라고 그러더라고... 신 감독이 아무 소리도 안하고 이렇게 보기만하고 빙그레 웃기만하고 그냥 그러더라고..."
이후 2년 3개월 간 17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김정일의 신임을 얻은 두 사람.
탈출할 기회만 엿보던 이들은 김정일과의 대화 내용을 몰래 녹음하기로 결심한다.
<녹취> 최은희 : "신 감독이 머리를 써가지고 오늘 무슨 얘기를 하는지, 우리가 아무리 자유세계로 가서 변명을 하고 얘기를 해도 누가 알아 주겠냐 진실을... 그러니까 이걸 녹음을 하자.."
이들이 목숨을 걸고 녹음한 테이프에는 김정일이 두 사람을 납치한 이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녹취> 김정일 : "두 분을 내가 영화하는 대상으로 집었단 말입니다. 오는 과정에서부터 오늘날 이르기까지 두 분을 만나기까지는 이런 곡절이 있었단 말이야... 두 분이 꼭 필요하니까 데려와라..."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을 납치까지 감행할 정도로. 김정일이 영화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시절부터 영화는 김정일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가 소장한 세계 각국의 영화 필름은 약 만 5천여 편, 국내에서 볼 수 없는 희귀본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TV에 나오는 배우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로 남한 영화에 대한 관심 또한 깊었다.
<녹취> 김정일(KBS 다큐 ‘김정일’ 中) : "김희갑이하고 저기 그 또래 배우들이 영화, 평생 일생 영화 찍었다고 보는데 한 몇 편이나 했을 거 같아요?"
<녹취> 최은희(KBS 다큐 ‘김정일’ 中) : "한 5백편 했을 겁니다. 단역도 많이 하고 그랬으니까요."
<녹취> 김정일(KBS 다큐 ‘김정일’ 中) : "정윤희는 TV 나오는 거 보니까 벌써 120편 했다고 그러더래요"
<녹취> 최은희(KBS 다큐 ‘김정일’ 中) : "그렇게 될 겁니다."
김정일은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 등 혁명 가극을 영화화하며 아버지 김일성에게 능력을 인정받는다.
1973년에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영화 제작에 접목시킨 <영화예술론>을 발표한다.
이 모든 작업은 결국 영상을 통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녹취> 北기록영화 ‘주체시대를 빛내이신 절세의 위인’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형상을 창조하는 영광스러운 영화 창작기지인 백두산 창작단을 몸소 조직해주시었습니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김정일의 특징은 영화를 자신의 통치 기반에 활용했어요. 첫째는 체제 선전, 그 다음에 주민들의 불만을 오락거리 영화 쪽으로 유도하는 그런 관점에서 영화를 정권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활용한 매우 노회한 지도자다... 영화에 대한 사랑 역시 그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를 통해 체제를 더 공고히 하고 싶었던 김정일.
신상옥, 최은희 부부를 납치해 영화 제작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녹취> 김정일 : "우리는 이런 어떤 돈을 여기다 투자하겠다. 그래서 신 감독에 대한 기대가 내가 그래서 크다는겁니다."
<인터뷰>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영화 감독) : "찍고 싶은 것을 찍을 때 안되는 게 없는 거예요. 김정일의 말 한 마디면 다 지원이 되니까. 산 넘어가고 이런 데는 눈보라가 쳐야 되는데 강풍기 갖고는 안 된다 하니까 그냥 바로 헬기 띄워가지고 하고, 기차도 미니어처 가지고 충돌하는 장면을 찍는데 아무래도 효과가 안 나니까 김정일한테 얘기하니까 진짜 기차 2대 갖다가 그냥 다이너마이트 실어놓고 폭파시키고..."
당시 제작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와 ‘소금’으로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국제 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경직된 북한 사회 분위기와 감시, 그리고 통제는 예술가인 이들 부부를 숨 막히게 할 뿐이었다.
<녹취> 최은희 : "공산주의 서적 같은 거 갖다 줘요. 책 읽으라고. 김일성 주의라든가 혁명사상이라든가 이런 걸 세뇌 공작을 한 거예요. 인형같이... 그렇게 했어요."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치밀한 계획 끝에 탈출을 감행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터뷰> 신정균(신상옥·최은희 아들) : "김정일이 아버지하고 한 약속이 당신이 만드는 영화에 대해서는 체제나 체제 선전이나 이런 걸 강요하지 않겠다,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라... 문제는 뭐냐하면 체제에 대한 강요는 안해도 아버지 스스로 영화를 만들 때 이 정도 선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신 거죠. 그 영화들에는 아버지의 영혼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신상옥 감독이 80년대 북한 영화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당시 제작된 영화들은 이전에 비해 체제 선동적인 요소가 비교적 약한 반면에 북한에서는 금기시하던 애정 표현도 과감히 등장한다.
하지만 신 감독이 북한을 떠나고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90년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북한 영화는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인터뷰> 전영선(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 :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 전환을 맞으면서 북한은 내부적으로 문화 예술 동원에서 다시금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어떤 공고성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선전에 활용하기 시작을 했고, 90년대 지나면서 전반적으로 북한 경제 자체가 침체가 되면서 영화에 투자할 수 있는 인프라가 많이 취약해졌다..."
그렇다면 김정은 시대에 제작된 영화에는 어떤 변화가 담겨 있을까?
<녹취> 북한-영국 합작영화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2012년) : "이 손을 공중에서 잡고 싶은데 그게 옳지 않구만. 그래도 우린 꼭 잡게 될거요."
김정은의 통치 코드인 이른바 ‘청년 띄우기’에 발 맞춰 주인공의 연령대가 점점 더 낮아진 것도 김정은 시대 영화의 한 특징이다.
무엇보다 김정일 기록영화의 홍수 속에, 연간 10여 편에 달하던 일반 영화 제작 편수 자체가 연간 한 두 편 선 까지 급감한 것은 가장 큰 변화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사실 영화 산업은 종합예술이고 여러 가지 경제적인 뒷받침도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다양한 경제적 요인들, 그 다음에 북핵 개발로 인한 대북 제재 국면, 그 다음 김정은 개인의 영화보다는 어떤 음악이라는 대중 동원 예술을 더 선호한다는 점,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북한의 영화 제작 편수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영화가 지닌 대중 선동의 힘에 일찌감치 주목했던 김정일.
하지만 북한 영화의 실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예술로서의 영화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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