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 ‘오 마이 파파’
입력 2016.11.11 (21:42)
수정 2016.11.11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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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6.25 전쟁 직후 우리나라를 찾아와, 2만 명이 넘는 고아 등을 돌보며 평생을 바친 외국인 신부가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았던 신부의 헌신을 김빛이라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리포트>
1957년, 피난민 판자촌이 가득한 부산에 27살의 벨기에 신부가 찾아왔습니다.
알로이시오, 한국 이름 ‘소재건’.
천 여명의 전쟁 고아들을 위해 기숙사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함께 축구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그는 고아들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녹취> 故 소재건(신부) : “내 희망은 보통 가정의 아버지 희망과 똑같습니다. 재밌게 살고, 교육 잘 받고..."
매일 편지로 전 세계에서 후원금을 호소했고, 루게릭병 판정을 받아 손을 움직이지 못하자, 영상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온 몸을 바쳐 세운 학교는 이제 미혼모 자녀 기숙사 시설로 바뀌었습니다.
<녹취> 정말지(수녀/마리아수녀회 대표) : "신부님 살아계실 때 여기 살았던 아이들은, 신부님에 대해서 굉장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죠. 살아갈 수록 더 그런가봐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는 최고의 시설, 정작 자신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낡은 가방과 단벌 사제복이 전부였습니다.
<녹취> “(이 옷을) 57년도에 입고 나오셔서, 다 떨어지고..."
고아와 미혼모 자녀들의 아버지, '오 마이 파파', 소재건 신부.
그의 헌신은 작은 밀알이 되어, 풍성한 열매로 맺어지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빛이라입니다.
6.25 전쟁 직후 우리나라를 찾아와, 2만 명이 넘는 고아 등을 돌보며 평생을 바친 외국인 신부가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았던 신부의 헌신을 김빛이라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리포트>
1957년, 피난민 판자촌이 가득한 부산에 27살의 벨기에 신부가 찾아왔습니다.
알로이시오, 한국 이름 ‘소재건’.
천 여명의 전쟁 고아들을 위해 기숙사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함께 축구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그는 고아들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녹취> 故 소재건(신부) : “내 희망은 보통 가정의 아버지 희망과 똑같습니다. 재밌게 살고, 교육 잘 받고..."
매일 편지로 전 세계에서 후원금을 호소했고, 루게릭병 판정을 받아 손을 움직이지 못하자, 영상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온 몸을 바쳐 세운 학교는 이제 미혼모 자녀 기숙사 시설로 바뀌었습니다.
<녹취> 정말지(수녀/마리아수녀회 대표) : "신부님 살아계실 때 여기 살았던 아이들은, 신부님에 대해서 굉장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죠. 살아갈 수록 더 그런가봐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는 최고의 시설, 정작 자신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낡은 가방과 단벌 사제복이 전부였습니다.
<녹취> “(이 옷을) 57년도에 입고 나오셔서, 다 떨어지고..."
고아와 미혼모 자녀들의 아버지, '오 마이 파파', 소재건 신부.
그의 헌신은 작은 밀알이 되어, 풍성한 열매로 맺어지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빛이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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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 ‘오 마이 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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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6-11-11 21:44:51
- 수정2016-11-11 22:06:32
<앵커 멘트>
6.25 전쟁 직후 우리나라를 찾아와, 2만 명이 넘는 고아 등을 돌보며 평생을 바친 외국인 신부가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았던 신부의 헌신을 김빛이라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리포트>
1957년, 피난민 판자촌이 가득한 부산에 27살의 벨기에 신부가 찾아왔습니다.
알로이시오, 한국 이름 ‘소재건’.
천 여명의 전쟁 고아들을 위해 기숙사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함께 축구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그는 고아들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녹취> 故 소재건(신부) : “내 희망은 보통 가정의 아버지 희망과 똑같습니다. 재밌게 살고, 교육 잘 받고..."
매일 편지로 전 세계에서 후원금을 호소했고, 루게릭병 판정을 받아 손을 움직이지 못하자, 영상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온 몸을 바쳐 세운 학교는 이제 미혼모 자녀 기숙사 시설로 바뀌었습니다.
<녹취> 정말지(수녀/마리아수녀회 대표) : "신부님 살아계실 때 여기 살았던 아이들은, 신부님에 대해서 굉장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죠. 살아갈 수록 더 그런가봐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는 최고의 시설, 정작 자신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낡은 가방과 단벌 사제복이 전부였습니다.
<녹취> “(이 옷을) 57년도에 입고 나오셔서, 다 떨어지고..."
고아와 미혼모 자녀들의 아버지, '오 마이 파파', 소재건 신부.
그의 헌신은 작은 밀알이 되어, 풍성한 열매로 맺어지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빛이라입니다.
6.25 전쟁 직후 우리나라를 찾아와, 2만 명이 넘는 고아 등을 돌보며 평생을 바친 외국인 신부가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았던 신부의 헌신을 김빛이라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리포트>
1957년, 피난민 판자촌이 가득한 부산에 27살의 벨기에 신부가 찾아왔습니다.
알로이시오, 한국 이름 ‘소재건’.
천 여명의 전쟁 고아들을 위해 기숙사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함께 축구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그는 고아들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녹취> 故 소재건(신부) : “내 희망은 보통 가정의 아버지 희망과 똑같습니다. 재밌게 살고, 교육 잘 받고..."
매일 편지로 전 세계에서 후원금을 호소했고, 루게릭병 판정을 받아 손을 움직이지 못하자, 영상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온 몸을 바쳐 세운 학교는 이제 미혼모 자녀 기숙사 시설로 바뀌었습니다.
<녹취> 정말지(수녀/마리아수녀회 대표) : "신부님 살아계실 때 여기 살았던 아이들은, 신부님에 대해서 굉장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죠. 살아갈 수록 더 그런가봐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는 최고의 시설, 정작 자신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낡은 가방과 단벌 사제복이 전부였습니다.
<녹취> “(이 옷을) 57년도에 입고 나오셔서, 다 떨어지고..."
고아와 미혼모 자녀들의 아버지, '오 마이 파파', 소재건 신부.
그의 헌신은 작은 밀알이 되어, 풍성한 열매로 맺어지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빛이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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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빛이라 기자 glor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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