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잊지말아야 할 이름…라스팔마스의 영웅들
입력 2016.11.29 (14:45)
수정 2016.11.2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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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 저희가 파독 간호사 광부님들 위문 공연도 다녀왔거든요.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이곳 라스팔마스에 오신 원양 어선 선원분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잖아요. 저도 이번 공연하면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설운도: 이분들이 정말 애국자 아닙니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라가 힘들 때 묵묵히 일했고 그 노력은 값진 외화로 조국 산업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국의 유명 트로트 가수들이 KBS 한민족 방송 공연단의 일원으로 스페인 남부 라스팔마스를 찾았다. 원양 어업 진출 50년을 축하하고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한인들을 위문하기 위해서다.
라스팔마스에 한국에서 대규모로 공연단이 온 것은 처음이다.(11월 30일 KBS 한민족 방송에서 콘서트 실황 '감사합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가 오전 11시와 저녁 7시 두 차례 방송된다.)
1966년에 40명의 선원을 태운 강화 1호가 처음으로 라스팔마스 루스항(스페인어로 '빛'이라는 뜻이다.)에 입항하면서 한인 이민사 50년이 시작됐다. 당시 북태평양에서 원양 어업이 큰 성공을 거뒀고 그래서 정부가 눈을 돌린 곳이 대서양이었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수출액이 2억 5천만 달러 정도였는데, 수산물이 4,200만 달러로 17%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1년 우리 수출에서 반도체와 자동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17%인 것으로 보면 당시 수산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당시 정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의 원조를 받으면서까지 대서양을 개척할 배들을 사들였다.
그런데 왜 라스팔마스였을까? 지리적으로는 아프리카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아프리카 연안뿐만 아니라 먼바다까지 출항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또한 라스팔마스는 고가의 어종이 풍부한 황금어장이었다.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원양 어업을 하는 김태정 사장은 "일본 사람들이 그 당시에 선호하던 살오징어,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다는 문어,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종들이 고가의 어종들이 많이 잡혔다"고 말한다. 그런데 당시 이곳에 진출했던 일본이 인건비 상승 등으로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첫해였던 66년에는 252만 달러였지만 1987년에는 1억 천만 달러로 늘었다. 1억 천만 달러는 당시 파독 간호사·광부 1만 9천여 명이 15년간 송금한 금액과 맞먹는 규모였다고 한다.
87년까지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모두 8억 7천만 달러. 1조 원이나 되는 이 돈은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마중물이 됐다.
하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선상 환경은 '마도로스'의 낭만은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23살에 삼등 항해사로 원양어선에 몸을 실은 방성웅 씨는 KBS 한민족 방송 공연에 초대손님으로 출연해 "인간적인 무시가 가장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고향의 가족이 늘 그리웠다. 안부 편지 보내고 받는 데 3개월이 걸렸지만, 그 편지 받는 생각으로 선상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파도가 너무 세서 침몰하고 있는 다른 배를 구하지 못했다"고 증언하기도 해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바다와 사투를 벌인 경험담은 당시 선원들에게 쉽게 들을 수 있다.
17년째 라스팔마스에서 침술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일광 씨는 2년간의 선상 생활 이후 더는 배를 타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되는 반복되는 일상... 좁은 공간에 늘 쪽잠을 자거나... 그물이라도 찢어지면 그나마 쪽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워 그물 수리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선상 생활이었다고 한다.
특히 박 씨는 낯선 바다에서 헤맨 3일간은 정말 아찔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18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 보조 선장이 키를 잡으면서 낯선 바다를 헤맨 거죠. 그런데 파도가 얼마나 세던지... 밥솥에 밥을 하지 못했어요. 막 내동댕이쳐지고... 정말 그땐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을 했죠."
그는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지인들에게 "다시는 배를 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한 스페인 선사에서 70년대 당시 월급으로 3천5백 달러라는 되는 거금을 제안받았지만 결국 거절했다고 한다.

"죽어도 배를 다시 탈 생각은 없다!"고 결심한 박일광 씨처럼 이 말은 한때 만 명이나 됐던 선원들이면 누구나 한 번 이상 내뱉은 말이었다.
고향의 가족들이 너무 그립지만, 그리고 선상 생활이 너무 힘들지만, 가족들을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이들은 다시 돌아왔다. 그러다 정작 계약 기간을 끝내지 못하고 바다에서 삶을 마감한 경우가 많았다.
'라스팔마스 한인 40년사'라는 책자에 보면 1969년 7월 1일 수개공 소속 선원 김정모 씨라는 분이 처음으로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또 한 지역 신문은 78년 3월 31일 자 '대왕호'가 침몰해 4명이 숨지고 11명이 실종했다는 내용을 머리기사로 전하고 있다.
이듬해인 79년 8월에는 '태창호'가 상선과 충돌해 30명이 숨지고 두 명만 겨우 생존한 경우도 있었다. 크고 작은 사고로 66년 라스팔마스 진출 이후 바다에서 숨진 분들이 117명이 된다.
그래서 라스팔마스 공동묘지에는 이들을 위한 '위령탑'과 '봉안당'이 건설돼 있다. 우리 정부가 이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사후에나마 이런 시설을 건립한 것이다.
취재진이 찾은 위령탑과 봉안당은 관리가 잘되고 있었다. 하지만 힘들었던 그들의 삶이 느껴져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들의 삶을 지금까지 몰랐다는 점이 죄책감으로 다가와서 그랬는지, 새겨져 있는 이름 이름 하나가 매우 큰 무게로 다가왔다.
시인 박목월 선생이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글을 마무리한다.
< 헌사 >
바다로 뻗으려는 겨레의 꿈을 안고
오대양을 누비며 새 어장을 개척하고
겨레의 풍요한 내일을 위하여 헌신하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허망함이여
그들은 땅끝 망망대해 파도 속에서
자취 없이 사라져 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줄기차게 전진하는 조국 근대화와
겨레의 번영 속에
그들의 숭고한 얼과 의지는 살아 있으며
수산 한국의 무궁한 발전 속에
그들은 영원히 쉬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역의 태양과 성좌 아래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나니
위대한 개척자의 영이여
보람찬 겨레의 핏줄이여
이곳에 편히 깃드소서
1978. 9. 30
박 목 월
[연관 기사]
☞ 잊지 말아야 할 이름…라스팔마스의 영웅들
☞ 라스팔마스의 영웅들…대서양에 청춘 바쳐
설운도: 이분들이 정말 애국자 아닙니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라가 힘들 때 묵묵히 일했고 그 노력은 값진 외화로 조국 산업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국의 유명 트로트 가수들이 KBS 한민족 방송 공연단의 일원으로 스페인 남부 라스팔마스를 찾았다. 원양 어업 진출 50년을 축하하고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한인들을 위문하기 위해서다.
라스팔마스에 한국에서 대규모로 공연단이 온 것은 처음이다.(11월 30일 KBS 한민족 방송에서 콘서트 실황 '감사합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가 오전 11시와 저녁 7시 두 차례 방송된다.)
1966년에 40명의 선원을 태운 강화 1호가 처음으로 라스팔마스 루스항(스페인어로 '빛'이라는 뜻이다.)에 입항하면서 한인 이민사 50년이 시작됐다. 당시 북태평양에서 원양 어업이 큰 성공을 거뒀고 그래서 정부가 눈을 돌린 곳이 대서양이었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수출액이 2억 5천만 달러 정도였는데, 수산물이 4,200만 달러로 17%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1년 우리 수출에서 반도체와 자동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17%인 것으로 보면 당시 수산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당시 정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의 원조를 받으면서까지 대서양을 개척할 배들을 사들였다.
그런데 왜 라스팔마스였을까? 지리적으로는 아프리카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아프리카 연안뿐만 아니라 먼바다까지 출항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또한 라스팔마스는 고가의 어종이 풍부한 황금어장이었다.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원양 어업을 하는 김태정 사장은 "일본 사람들이 그 당시에 선호하던 살오징어,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다는 문어,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종들이 고가의 어종들이 많이 잡혔다"고 말한다. 그런데 당시 이곳에 진출했던 일본이 인건비 상승 등으로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첫해였던 66년에는 252만 달러였지만 1987년에는 1억 천만 달러로 늘었다. 1억 천만 달러는 당시 파독 간호사·광부 1만 9천여 명이 15년간 송금한 금액과 맞먹는 규모였다고 한다.
87년까지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모두 8억 7천만 달러. 1조 원이나 되는 이 돈은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마중물이 됐다.
하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선상 환경은 '마도로스'의 낭만은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23살에 삼등 항해사로 원양어선에 몸을 실은 방성웅 씨는 KBS 한민족 방송 공연에 초대손님으로 출연해 "인간적인 무시가 가장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고향의 가족이 늘 그리웠다. 안부 편지 보내고 받는 데 3개월이 걸렸지만, 그 편지 받는 생각으로 선상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파도가 너무 세서 침몰하고 있는 다른 배를 구하지 못했다"고 증언하기도 해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바다와 사투를 벌인 경험담은 당시 선원들에게 쉽게 들을 수 있다.
17년째 라스팔마스에서 침술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일광 씨는 2년간의 선상 생활 이후 더는 배를 타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되는 반복되는 일상... 좁은 공간에 늘 쪽잠을 자거나... 그물이라도 찢어지면 그나마 쪽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워 그물 수리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선상 생활이었다고 한다.
특히 박 씨는 낯선 바다에서 헤맨 3일간은 정말 아찔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18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 보조 선장이 키를 잡으면서 낯선 바다를 헤맨 거죠. 그런데 파도가 얼마나 세던지... 밥솥에 밥을 하지 못했어요. 막 내동댕이쳐지고... 정말 그땐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을 했죠."
그는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지인들에게 "다시는 배를 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한 스페인 선사에서 70년대 당시 월급으로 3천5백 달러라는 되는 거금을 제안받았지만 결국 거절했다고 한다.

"죽어도 배를 다시 탈 생각은 없다!"고 결심한 박일광 씨처럼 이 말은 한때 만 명이나 됐던 선원들이면 누구나 한 번 이상 내뱉은 말이었다.
고향의 가족들이 너무 그립지만, 그리고 선상 생활이 너무 힘들지만, 가족들을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이들은 다시 돌아왔다. 그러다 정작 계약 기간을 끝내지 못하고 바다에서 삶을 마감한 경우가 많았다.
'라스팔마스 한인 40년사'라는 책자에 보면 1969년 7월 1일 수개공 소속 선원 김정모 씨라는 분이 처음으로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또 한 지역 신문은 78년 3월 31일 자 '대왕호'가 침몰해 4명이 숨지고 11명이 실종했다는 내용을 머리기사로 전하고 있다.
이듬해인 79년 8월에는 '태창호'가 상선과 충돌해 30명이 숨지고 두 명만 겨우 생존한 경우도 있었다. 크고 작은 사고로 66년 라스팔마스 진출 이후 바다에서 숨진 분들이 117명이 된다.
그래서 라스팔마스 공동묘지에는 이들을 위한 '위령탑'과 '봉안당'이 건설돼 있다. 우리 정부가 이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사후에나마 이런 시설을 건립한 것이다.
취재진이 찾은 위령탑과 봉안당은 관리가 잘되고 있었다. 하지만 힘들었던 그들의 삶이 느껴져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들의 삶을 지금까지 몰랐다는 점이 죄책감으로 다가와서 그랬는지, 새겨져 있는 이름 이름 하나가 매우 큰 무게로 다가왔다.
시인 박목월 선생이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글을 마무리한다.
< 헌사 >
바다로 뻗으려는 겨레의 꿈을 안고
오대양을 누비며 새 어장을 개척하고
겨레의 풍요한 내일을 위하여 헌신하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허망함이여
그들은 땅끝 망망대해 파도 속에서
자취 없이 사라져 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줄기차게 전진하는 조국 근대화와
겨레의 번영 속에
그들의 숭고한 얼과 의지는 살아 있으며
수산 한국의 무궁한 발전 속에
그들은 영원히 쉬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역의 태양과 성좌 아래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나니
위대한 개척자의 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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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편히 깃드소서
1978. 9. 30
박 목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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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2016-11-29 14:45:38

주현미: 저희가 파독 간호사 광부님들 위문 공연도 다녀왔거든요.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이곳 라스팔마스에 오신 원양 어선 선원분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잖아요. 저도 이번 공연하면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설운도: 이분들이 정말 애국자 아닙니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라가 힘들 때 묵묵히 일했고 그 노력은 값진 외화로 조국 산업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국의 유명 트로트 가수들이 KBS 한민족 방송 공연단의 일원으로 스페인 남부 라스팔마스를 찾았다. 원양 어업 진출 50년을 축하하고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한인들을 위문하기 위해서다.
라스팔마스에 한국에서 대규모로 공연단이 온 것은 처음이다.(11월 30일 KBS 한민족 방송에서 콘서트 실황 '감사합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가 오전 11시와 저녁 7시 두 차례 방송된다.)
1966년에 40명의 선원을 태운 강화 1호가 처음으로 라스팔마스 루스항(스페인어로 '빛'이라는 뜻이다.)에 입항하면서 한인 이민사 50년이 시작됐다. 당시 북태평양에서 원양 어업이 큰 성공을 거뒀고 그래서 정부가 눈을 돌린 곳이 대서양이었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수출액이 2억 5천만 달러 정도였는데, 수산물이 4,200만 달러로 17%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1년 우리 수출에서 반도체와 자동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17%인 것으로 보면 당시 수산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당시 정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의 원조를 받으면서까지 대서양을 개척할 배들을 사들였다.
그런데 왜 라스팔마스였을까? 지리적으로는 아프리카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아프리카 연안뿐만 아니라 먼바다까지 출항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또한 라스팔마스는 고가의 어종이 풍부한 황금어장이었다.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원양 어업을 하는 김태정 사장은 "일본 사람들이 그 당시에 선호하던 살오징어,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다는 문어,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종들이 고가의 어종들이 많이 잡혔다"고 말한다. 그런데 당시 이곳에 진출했던 일본이 인건비 상승 등으로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첫해였던 66년에는 252만 달러였지만 1987년에는 1억 천만 달러로 늘었다. 1억 천만 달러는 당시 파독 간호사·광부 1만 9천여 명이 15년간 송금한 금액과 맞먹는 규모였다고 한다.
87년까지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모두 8억 7천만 달러. 1조 원이나 되는 이 돈은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마중물이 됐다.
하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선상 환경은 '마도로스'의 낭만은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23살에 삼등 항해사로 원양어선에 몸을 실은 방성웅 씨는 KBS 한민족 방송 공연에 초대손님으로 출연해 "인간적인 무시가 가장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고향의 가족이 늘 그리웠다. 안부 편지 보내고 받는 데 3개월이 걸렸지만, 그 편지 받는 생각으로 선상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파도가 너무 세서 침몰하고 있는 다른 배를 구하지 못했다"고 증언하기도 해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바다와 사투를 벌인 경험담은 당시 선원들에게 쉽게 들을 수 있다.
17년째 라스팔마스에서 침술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일광 씨는 2년간의 선상 생활 이후 더는 배를 타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되는 반복되는 일상... 좁은 공간에 늘 쪽잠을 자거나... 그물이라도 찢어지면 그나마 쪽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워 그물 수리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선상 생활이었다고 한다.
특히 박 씨는 낯선 바다에서 헤맨 3일간은 정말 아찔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18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 보조 선장이 키를 잡으면서 낯선 바다를 헤맨 거죠. 그런데 파도가 얼마나 세던지... 밥솥에 밥을 하지 못했어요. 막 내동댕이쳐지고... 정말 그땐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을 했죠."
그는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지인들에게 "다시는 배를 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한 스페인 선사에서 70년대 당시 월급으로 3천5백 달러라는 되는 거금을 제안받았지만 결국 거절했다고 한다.

"죽어도 배를 다시 탈 생각은 없다!"고 결심한 박일광 씨처럼 이 말은 한때 만 명이나 됐던 선원들이면 누구나 한 번 이상 내뱉은 말이었다.
고향의 가족들이 너무 그립지만, 그리고 선상 생활이 너무 힘들지만, 가족들을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이들은 다시 돌아왔다. 그러다 정작 계약 기간을 끝내지 못하고 바다에서 삶을 마감한 경우가 많았다.
'라스팔마스 한인 40년사'라는 책자에 보면 1969년 7월 1일 수개공 소속 선원 김정모 씨라는 분이 처음으로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또 한 지역 신문은 78년 3월 31일 자 '대왕호'가 침몰해 4명이 숨지고 11명이 실종했다는 내용을 머리기사로 전하고 있다.
이듬해인 79년 8월에는 '태창호'가 상선과 충돌해 30명이 숨지고 두 명만 겨우 생존한 경우도 있었다. 크고 작은 사고로 66년 라스팔마스 진출 이후 바다에서 숨진 분들이 117명이 된다.
그래서 라스팔마스 공동묘지에는 이들을 위한 '위령탑'과 '봉안당'이 건설돼 있다. 우리 정부가 이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사후에나마 이런 시설을 건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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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목월 선생이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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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뻗으려는 겨레의 꿈을 안고
오대양을 누비며 새 어장을 개척하고
겨레의 풍요한 내일을 위하여 헌신하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허망함이여
그들은 땅끝 망망대해 파도 속에서
자취 없이 사라져 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줄기차게 전진하는 조국 근대화와
겨레의 번영 속에
그들의 숭고한 얼과 의지는 살아 있으며
수산 한국의 무궁한 발전 속에
그들은 영원히 쉬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역의 태양과 성좌 아래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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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9. 30
박 목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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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팔마스에 한국에서 대규모로 공연단이 온 것은 처음이다.(11월 30일 KBS 한민족 방송에서 콘서트 실황 '감사합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가 오전 11시와 저녁 7시 두 차례 방송된다.)
1966년에 40명의 선원을 태운 강화 1호가 처음으로 라스팔마스 루스항(스페인어로 '빛'이라는 뜻이다.)에 입항하면서 한인 이민사 50년이 시작됐다. 당시 북태평양에서 원양 어업이 큰 성공을 거뒀고 그래서 정부가 눈을 돌린 곳이 대서양이었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수출액이 2억 5천만 달러 정도였는데, 수산물이 4,200만 달러로 17%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1년 우리 수출에서 반도체와 자동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17%인 것으로 보면 당시 수산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당시 정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의 원조를 받으면서까지 대서양을 개척할 배들을 사들였다.
그런데 왜 라스팔마스였을까? 지리적으로는 아프리카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아프리카 연안뿐만 아니라 먼바다까지 출항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또한 라스팔마스는 고가의 어종이 풍부한 황금어장이었다.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원양 어업을 하는 김태정 사장은 "일본 사람들이 그 당시에 선호하던 살오징어,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다는 문어,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종들이 고가의 어종들이 많이 잡혔다"고 말한다. 그런데 당시 이곳에 진출했던 일본이 인건비 상승 등으로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첫해였던 66년에는 252만 달러였지만 1987년에는 1억 천만 달러로 늘었다. 1억 천만 달러는 당시 파독 간호사·광부 1만 9천여 명이 15년간 송금한 금액과 맞먹는 규모였다고 한다.
87년까지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모두 8억 7천만 달러. 1조 원이나 되는 이 돈은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마중물이 됐다.
하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선상 환경은 '마도로스'의 낭만은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23살에 삼등 항해사로 원양어선에 몸을 실은 방성웅 씨는 KBS 한민족 방송 공연에 초대손님으로 출연해 "인간적인 무시가 가장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고향의 가족이 늘 그리웠다. 안부 편지 보내고 받는 데 3개월이 걸렸지만, 그 편지 받는 생각으로 선상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파도가 너무 세서 침몰하고 있는 다른 배를 구하지 못했다"고 증언하기도 해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바다와 사투를 벌인 경험담은 당시 선원들에게 쉽게 들을 수 있다.
17년째 라스팔마스에서 침술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일광 씨는 2년간의 선상 생활 이후 더는 배를 타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되는 반복되는 일상... 좁은 공간에 늘 쪽잠을 자거나... 그물이라도 찢어지면 그나마 쪽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워 그물 수리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선상 생활이었다고 한다.
특히 박 씨는 낯선 바다에서 헤맨 3일간은 정말 아찔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18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 보조 선장이 키를 잡으면서 낯선 바다를 헤맨 거죠. 그런데 파도가 얼마나 세던지... 밥솥에 밥을 하지 못했어요. 막 내동댕이쳐지고... 정말 그땐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을 했죠."
그는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지인들에게 "다시는 배를 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한 스페인 선사에서 70년대 당시 월급으로 3천5백 달러라는 되는 거금을 제안받았지만 결국 거절했다고 한다.

"죽어도 배를 다시 탈 생각은 없다!"고 결심한 박일광 씨처럼 이 말은 한때 만 명이나 됐던 선원들이면 누구나 한 번 이상 내뱉은 말이었다.
고향의 가족들이 너무 그립지만, 그리고 선상 생활이 너무 힘들지만, 가족들을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이들은 다시 돌아왔다. 그러다 정작 계약 기간을 끝내지 못하고 바다에서 삶을 마감한 경우가 많았다.
'라스팔마스 한인 40년사'라는 책자에 보면 1969년 7월 1일 수개공 소속 선원 김정모 씨라는 분이 처음으로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또 한 지역 신문은 78년 3월 31일 자 '대왕호'가 침몰해 4명이 숨지고 11명이 실종했다는 내용을 머리기사로 전하고 있다.
이듬해인 79년 8월에는 '태창호'가 상선과 충돌해 30명이 숨지고 두 명만 겨우 생존한 경우도 있었다. 크고 작은 사고로 66년 라스팔마스 진출 이후 바다에서 숨진 분들이 117명이 된다.
그래서 라스팔마스 공동묘지에는 이들을 위한 '위령탑'과 '봉안당'이 건설돼 있다. 우리 정부가 이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사후에나마 이런 시설을 건립한 것이다.
취재진이 찾은 위령탑과 봉안당은 관리가 잘되고 있었다. 하지만 힘들었던 그들의 삶이 느껴져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들의 삶을 지금까지 몰랐다는 점이 죄책감으로 다가와서 그랬는지, 새겨져 있는 이름 이름 하나가 매우 큰 무게로 다가왔다.
시인 박목월 선생이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글을 마무리한다.
< 헌사 >
바다로 뻗으려는 겨레의 꿈을 안고
오대양을 누비며 새 어장을 개척하고
겨레의 풍요한 내일을 위하여 헌신하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허망함이여
그들은 땅끝 망망대해 파도 속에서
자취 없이 사라져 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줄기차게 전진하는 조국 근대화와
겨레의 번영 속에
그들의 숭고한 얼과 의지는 살아 있으며
수산 한국의 무궁한 발전 속에
그들은 영원히 쉬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역의 태양과 성좌 아래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나니
위대한 개척자의 영이여
보람찬 겨레의 핏줄이여
이곳에 편히 깃드소서
1978. 9. 30
박 목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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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현 기자 parkj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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