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특강] 음식 문화로 본 언어

입력 2016.11.30 (08:48) 수정 2016.11.3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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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근철입니다.

언어 속에 숨어있는 생각과 문화를 들여다보고 그 이유도 함께 찾아보는 시간, 오늘은 ‘음식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저는 외국인 친구들이 서울에 오면 꼭 한식당에 데리고 갑니다.

고소한 향이 가득한 흑임자 죽, 이 죽과 궁합이 딱 맞는 입맛을 돋우는 백김치, 상큼한 유자소스가 살짝 어우러진 아삭한 연근, 넣자마자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애호박 볶음, 여기에 산속에서 나들이 나온 각종 나물아이들과 밥 그리고 강된장을 넣고 서로 친해지도록 젓가락으로 잘 비벼줍니다.

마지막으로 떡갈비를 조금 얹어 그것을 곰취에 싸서 입안에 넣게 하면, 외국인들의 입에서는 예외 없이 heaven이라는 단어가 연발해서 나옵니다.

그리고 식혜나 수정과 같은 후식까지 먹고 나면, 외국 친구들은 그들이 맛본 한식을 왕의 정찬이라고 부릅니다.

자, 그럼 이번에는 양식을 떠올리며 뉴욕으로 가보실까요?

자리에 앉으면 먼저 음료 혹은 술을 주문합니다.

음료를 마시면서 메뉴에서 먹고 싶은 것을 고르면, 빵, 샐러드나 전채가 나온 후에 주요리, 그리고 후식의 순서로 식사가 끝나게 되죠.

그런데 이 모든 요리는 대부분 별개로 선택을 해야 하고, 또 같은 메뉴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무료로 추가 제공되지는 않습니다.

한식과 양식의 식단구성과 서비스문화가 왜 이렇게 다른지는, 동서양의 문화차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어렵지 않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독립성이 강하고 개인의 선택이 중요시 되는 서양 사회, 특히 미국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을 아이들이 직접 선택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아침식사"라는 표현이 우리에게는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아침상이지만, 서양의 아이들에게는 시리얼, 빵, 베이컨, 혹은 계란 중에 무엇을 먹을 건지에 대한 본인의 선택일 뿐이죠.

이런 점에서 한국의 식당주인은 반찬이 모자라면 언제든 엄마의 마음으로 더 주는 것이고, 또 관계지향적 문화인 한국에서는 전체 밥상을 하나의 완성체로 보기 때문에 반찬 값을 따로 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모든 식사 메뉴가 철저히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에 모든 메뉴에 당연히 각각의 요금이 따로 부과되는 것이죠.

음식문화에 대한 이런 차이는 언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요.

다음의 빈칸에 어울리는 단어를 한 번 채워 보시죠.

1. 한 골을 _________

2. 겁을 ________

3. 욕을 _______

4. 화장이 잘 ________

5. 더위를 ________ 6. 엿 ________

7. 풀을 ________

1부터 5까지는 '먹다' 6과 7은 '먹이다'라고 쓰셨을 겁니다.

사실 찾아보면 '한국어의 먹다'라는 단어의 쓰임은 앞에 나온 것 이외에도 '벌레 먹은 사과, 잉크 먹은 종이, 바람 먹은 무, 꿀밤을 먹이다, 나라의 녹을 먹다'처럼 그 예가 정말 많습니다.

이렇게 한 단어의 기본 뜻이 비유적 혹은 은유적으로 확장되어 서로 밀접하게 같이 쓰이는 것을 언어학에서는 연관관계(collocations)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요.

그러면 영어의 to eat이라는 단어는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을까요?

1. He ate his words. 2. He ate humble pie. 3. The vending machine ate my money.

1은 자기가 한 말을 굴욕적으로 취소하다. 2도 스스로의 잘못을 굴욕적으로 인정하다. 3은 자판기가 내 돈을 먹었다.입니다.

즉, 한국어와 비교해서 영어의 eat은 연관관계의 수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무엇의 용례가 다양하고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관심이 많고 자주 사용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한국의 음식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반찬의 가지 수 말고도 다른 나라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발효음식입니다.

서양이 우유나 고기의 염장을 중심으로 한 발효식품이 전부라면, 한국은 젖갈류, 장류, 김치류, 생선류, 곡류 등 수 십 가지가 넘는데요.

이렇게 곡물, 채소, 해산물을 발효시키는 과정에는 많은 관심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고 오랜 시간의 인내심도 필요합니다.

그런 관심이 언어에 투영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죠.

그리고 이런 발효식품이 서양의 인스턴트식품과는 비교불가 할 정도로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고, 그래서 할리우드에서 한식의 한류바람이 불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반면에 한국의 미래세대인 우리 아이들의 입맛은 어떤가요?

한식이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 서양식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점은, 이 나라의 미래건강을 위해 우리 모두 다 함께 곱씹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언어, 생각, 문화의 이근철 이었습니다. Stay happy & healthy today!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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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에 특강] 음식 문화로 본 언어
    • 입력 2016-11-30 08:50:42
    • 수정2016-11-30 08: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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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근철입니다.

언어 속에 숨어있는 생각과 문화를 들여다보고 그 이유도 함께 찾아보는 시간, 오늘은 ‘음식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저는 외국인 친구들이 서울에 오면 꼭 한식당에 데리고 갑니다.

고소한 향이 가득한 흑임자 죽, 이 죽과 궁합이 딱 맞는 입맛을 돋우는 백김치, 상큼한 유자소스가 살짝 어우러진 아삭한 연근, 넣자마자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애호박 볶음, 여기에 산속에서 나들이 나온 각종 나물아이들과 밥 그리고 강된장을 넣고 서로 친해지도록 젓가락으로 잘 비벼줍니다.

마지막으로 떡갈비를 조금 얹어 그것을 곰취에 싸서 입안에 넣게 하면, 외국인들의 입에서는 예외 없이 heaven이라는 단어가 연발해서 나옵니다.

그리고 식혜나 수정과 같은 후식까지 먹고 나면, 외국 친구들은 그들이 맛본 한식을 왕의 정찬이라고 부릅니다.

자, 그럼 이번에는 양식을 떠올리며 뉴욕으로 가보실까요?

자리에 앉으면 먼저 음료 혹은 술을 주문합니다.

음료를 마시면서 메뉴에서 먹고 싶은 것을 고르면, 빵, 샐러드나 전채가 나온 후에 주요리, 그리고 후식의 순서로 식사가 끝나게 되죠.

그런데 이 모든 요리는 대부분 별개로 선택을 해야 하고, 또 같은 메뉴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무료로 추가 제공되지는 않습니다.

한식과 양식의 식단구성과 서비스문화가 왜 이렇게 다른지는, 동서양의 문화차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어렵지 않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독립성이 강하고 개인의 선택이 중요시 되는 서양 사회, 특히 미국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을 아이들이 직접 선택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아침식사"라는 표현이 우리에게는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아침상이지만, 서양의 아이들에게는 시리얼, 빵, 베이컨, 혹은 계란 중에 무엇을 먹을 건지에 대한 본인의 선택일 뿐이죠.

이런 점에서 한국의 식당주인은 반찬이 모자라면 언제든 엄마의 마음으로 더 주는 것이고, 또 관계지향적 문화인 한국에서는 전체 밥상을 하나의 완성체로 보기 때문에 반찬 값을 따로 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모든 식사 메뉴가 철저히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에 모든 메뉴에 당연히 각각의 요금이 따로 부과되는 것이죠.

음식문화에 대한 이런 차이는 언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요.

다음의 빈칸에 어울리는 단어를 한 번 채워 보시죠.

1. 한 골을 _________

2. 겁을 ________

3. 욕을 _______

4. 화장이 잘 ________

5. 더위를 ________ 6. 엿 ________

7. 풀을 ________

1부터 5까지는 '먹다' 6과 7은 '먹이다'라고 쓰셨을 겁니다.

사실 찾아보면 '한국어의 먹다'라는 단어의 쓰임은 앞에 나온 것 이외에도 '벌레 먹은 사과, 잉크 먹은 종이, 바람 먹은 무, 꿀밤을 먹이다, 나라의 녹을 먹다'처럼 그 예가 정말 많습니다.

이렇게 한 단어의 기본 뜻이 비유적 혹은 은유적으로 확장되어 서로 밀접하게 같이 쓰이는 것을 언어학에서는 연관관계(collocations)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요.

그러면 영어의 to eat이라는 단어는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을까요?

1. He ate his words. 2. He ate humble pie. 3. The vending machine ate my money.

1은 자기가 한 말을 굴욕적으로 취소하다. 2도 스스로의 잘못을 굴욕적으로 인정하다. 3은 자판기가 내 돈을 먹었다.입니다.

즉, 한국어와 비교해서 영어의 eat은 연관관계의 수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무엇의 용례가 다양하고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관심이 많고 자주 사용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한국의 음식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반찬의 가지 수 말고도 다른 나라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발효음식입니다.

서양이 우유나 고기의 염장을 중심으로 한 발효식품이 전부라면, 한국은 젖갈류, 장류, 김치류, 생선류, 곡류 등 수 십 가지가 넘는데요.

이렇게 곡물, 채소, 해산물을 발효시키는 과정에는 많은 관심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고 오랜 시간의 인내심도 필요합니다.

그런 관심이 언어에 투영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죠.

그리고 이런 발효식품이 서양의 인스턴트식품과는 비교불가 할 정도로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고, 그래서 할리우드에서 한식의 한류바람이 불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반면에 한국의 미래세대인 우리 아이들의 입맛은 어떤가요?

한식이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 서양식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점은, 이 나라의 미래건강을 위해 우리 모두 다 함께 곱씹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언어, 생각, 문화의 이근철 이었습니다. Stay happy & healthy today!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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