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한국을 택했나

입력 2017.01.08 (22:33) 수정 2017.01.0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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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혼란과 어려운 경제 상황에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시작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희망을 찾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대한민국을 제2의 조국으로 선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한국은 어떤 사회이고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한국에서 어떤 희망을 찾은 희망을 찾은 걸까요?

노신사가 서울 인사동 골목길을 걸어갑니다.

발걸음을 멈춘 곳은 시인 천상병의 흔적이 가득한 카페.

귀천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녹취>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인터뷰> "내가 유일하게 외울 수 있는, 읊을 수 있는 시예요. 아주 좋아. 아름답고 심플하고 인간적이고."

영국인으로 태어나 지금은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서강대 명예교수 안선재 씨입니다.

안 교수가 한국에 온 건 1980년 5월 초.

정국이 어지러운 시절이었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아주 복잡한 상태였죠. 학생들 길가에 나와서 데모하고.. 어떻게 될까, 다시 뭐 대통령 선거 할까...아무도 몰랐죠. 10일 후엔 5.18."

대학 강단에 섰던 안 씨는 당시 대학생을 보면서 한국의 힘을 느꼈다고 합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대학생들은 나라의 양심. 학생 데모하는 거 보고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었어요. 나라 위하여..."

한국 문학은 불안정한 시대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아름다운 시도 있고 그리고 나에게 아주 좀 인간적인 것, 인생에 대한 시, 그리고 어떤때는 옛날 한국 역사 속에 한국 사람들의 고통, 그 희망, 그 용기 이런 게 다 나오는 거야. 그래서 한국 시 보통 너무 어렵지도 않고 그리고 무슨 보편성이 있어요."

영문학 전공인 안 교수는 한국 문학을 번역해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로 나섰습니다.

고은 시인을 해외에 처음 알린 것도 안 교수였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91년 고은 선생 시집 처음 미국에서 출판했을 때, 그거 고은 선생 맨 처음으로 번역한것이었어요. 사람들 좋아했어요. 고은 선생 시 직접 낭송하면 막 힘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 '허억'(놀랐어요.)"

서정주, 구상, 신경림 등 그가 번역해 세계에 알려진 한국 시집과 소설은 40권에 이릅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한국말 어려워. 너무 어려워요. 나는 한국말 너무 약해요. 그걸 항상 걱정해요. 번역할 때 이거 제대로 이해하는 거."

안교수는 한국 문학에 서린 '한'이란 감정을 보편적 공감대를 끌어낼 강점으로 꼽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한이란, 삶의 체험이 어려운 삶 계속 참아야 하는 것인데 이거 세계적으로 있어요."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밥 딜런이 노래 불렀잖아요? 그리고 거기 It's a hard, hard, hard 그런 가사 있는데, 바로 그거 한이에요. 어휴 힘들게 살아도 그래도 살겠다고 살아야겠다고."

문학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자연과 음식에도 매료된 안교수는 1994년, 한국인으로 귀화했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조금 더 완전히 여기서 살고 싶어서...그리고 조금 더 깊게 한국 하고 하나 되고 싶고."

영국 이름 안토니에서 안선재로, 이름도 바꿨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그때 나는 고은 소설 화엄경 번역하고 있었어요. (소설 주인공에) 선재동자 있어서 그럼 선재 안선재. 선재동자. 어린 나그네. 세상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스승으로."

안 교수는 한국 전통 차를 즐겨 마십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선차라고 선, 침묵, 멈추고 물 끓이는 소리 듣고 아주 심플한 못짓, 손짓. 차 준비하고 멈추하고 이렇게 향, 색깔, 그 맛 이렇게. 그리고 물론 이렇게 갔다가 지나간 거에요. 지나가요. 이렇게 한 순간 삶 속에 멈추고 조용하게 자연하고 하나 되는 거야. 한국의 차도는 그래요."

이런 전통과 미학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아쉽다면서도 한국은 여전히 매력적인 곳이라고 안 교수는 말합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떠나면 어디 다른 나라 외국인 되는 거예요. 여기 문제 있다면 여기 머물고 여기있는 문제들 함께 해결해야죠. 극복해야죠. 떠나는 거, 도망가는 거 안돼요."

특히 우리 민족에게 뿌리깊게 자리한 '흥'이란 감정은 한국인의 특별한 자산이라고 안교수는 평가합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한 혼자 보면 안돼. 한 있어서 흥. 흥을 통하여 이 한을 표현하는 거예요. 절망 아니고 희망으로 가는. 나약함에서 희망으로, 생명으로 바꾸는 거예요. 흥이 있어요. 한국의 미학. 한, 흥. 한보다 흥이 중요할 거예요."

경남 김해의 한 시장통을 지나가다 보면 여러 국적의 가게들이 나타나고, 골목길 끝에 한 아시안 식료품점이 있습니다.

<녹취> "안녕하세요."

방글라데시 출신 심동민 씨가 이 가게의 주인입니다.

심 씨는 1993년, 일자리를 구하러 한국에 왔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처음에는 소가죽 피혁 회사. 그 피혁 회사에 제가 오랫동안 거의 한 10년 동안 계속 일했었습니다. 10년 동안 일하다가 나중에 신발(산업) 자체가 안됐었어요. 그때 조선소로 빠졌어요. 지금 또 조선기술자들 쭉 내려갔잖아요. 안되니까 지금 (식료품)가게 한 게 한 2년 다 돼 가고 있습니다."

한국에 온지 4년만에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고, 다시 5년이 지나 한국인으로 귀화했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그 나라(방글라데시) 포기해야 여기서 국적(취득할 수 있어서) 그것 때문에 제가 갈등이 좀 있었어요. 제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아보니까 한국 생활이 제가 뿌듯하기 때문에..."

심동민이란 이름은 아내가 지어줬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우리 집사람이 어디 가서 심동민이 그 이름이 좋다고 그래서 개명을 했습니다. 심 글씨는 마음 심이니까 그렇게 제가 마음 심이니까 마음이 우리 집사람하고 (잘 통하라고)..."

이웃사촌이란 말이 무색해진 요즘.

심 씨에게는 이웃이 고향에 있는 아버지와 형, 누나를 대신하는 존재입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식사하셨습니까? (어 식사는 했어) 저도 밥 먹고."

<인터뷰> 신중근(시장 상인) : "사람이 좋아 마음이 맞고. 사람이 좋아서 동생처럼 지냅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떡집, 저기 만두집 다 친하고 뭐 가지고 올 때마다 우리 갖다줘요. 우리 먹으라고. 그게 정이죠."

최근 심 씨는 이웃 상점에 든 도둑을 잡아 용감한 시민상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귀금속 가게에서 그 강도가 (물건을) 훔치고 달아났어요. 도둑 잡아라라고 이야기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소리 듣고 바로 쫓아와가지고 여기서 한 300미터 뛰어가서 도둑을 잡았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겁나지 않으셨어요?) 처음엔 겁났죠. 근데 겁난 것보다 제가 중간에 그런 생각했어요. 내 가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그래서 일단 뛰어가니까 잡아야된다. 내가 다치더라도."

심 씨는 일주일에 두 번, 야간 자율 방범대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솔직히 좀 외국인에 대한 한국 사람들 인식이 안 좋은 게 많아요. 많았기 때문에 조금 힘들어도 여러나라 사람하고 같이 활동하고 순찰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좋게 생각하고..."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 심 씨가 늦은 밤까지 거리로 나서는 이유입니다.

신발 공장에서 조선소를 거쳐 자영업자가 되기까지 지난 15년간 한국의 서민 경제를 현장에서 체험한 심씨.

요즘 불황의 한파를 체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힘들었죠. 지금 현재 이야기 하면 돼요. 지금 현재도 경기가 거의 땅바닥 내려갔잖아요. 서민들이 많이 힘들죠. 외국인이나 내국인이나 다 똑같습니다."

제일 걱정되는 건 외국인 근로자들입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자기들이 일 없어도 먹는 건 먹어야 되잖아요. 먹는 건 먹으면 내 가게에서 가져가면 아 형님, 내가 조금 있다가 돈 줄게 뭐 며칠 있다가 돈 줄게."

의지할 데 없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심 씨는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호리둘 이슬람(방글라데시인 근로자) : "만약에 우리 노동부에서 많이 문제 있으니까 우리 한국말 잘 모르겠는데 우리 형님 가요. 통역해줘요. 그 다음에 우리 다른 데 사장님들 돈 안주면 어떻게 하고 그 다음에 형님 도와줘요."

일자리를 찾아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왔던 심 씨에게 현재 한국이 처한 경제적 위기는 어떻게 비쳐질까?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1950년대부터 쭉 힘들게 살았잖아요. 힘들게 생활하고 열심히 나라를 만들고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심 씨는 자신의 이름처럼 주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힘든 시대에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한국 사람들이)따뜻하니까 한국에서 제가 오랫동안 살고 아직까지도 그 뒤로 내가 보면 그 한국사람들 아직까지도 나하고 만나고, 밥 한그릇 먹고 가끔 이야기도 하고 따뜻한 마음때문에 그렇죠."

앞치마를 두르고 김치를 써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사람.

이탈리아 출신 김하종 신부입니다.

<녹취> "(오늘 메뉴는 뭐에요?) 오늘 김치찌개. 꽁치조림 또 호박, 호박 볶음. 우리집 맛있어요. 유명해요."

김 신부는 노숙인 급식소와 가출 청소년 쉼터인 '안나의 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녹취> "김치찌개 한번 하면 김치 10킬로그램, 고기 50근, 두부 6판 맛있게 만들어요. 조리사님 양념 넣고, 저는 사랑 많이 넣어요."

매일 500명 남짓한 노숙인들이 이곳을 찾습니다.

<녹취> "맛있게 드세요."

노숙인과 함께 한 지 20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맨처음에는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저한테 손가락질 하면서 너 때문에 노숙인이 더 많이 생긴다(했어요.) [얼굴로]그러면 저는 그 분들한테 그렇다면 장애인 시설 있기 때문에 장애인 생깁니까? 아니요. 장애인 있어서 사회복지시설 생깁니다. 마찬가지에요."

동양철학을 전공했던 김 신부가 한국에 온 건 지난 1990년.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실망했습니다. 저는 한국에 대한 아는 것 책을 통해서. 책 보면서 사진 보면서 한국 알게 되었고, 책 보면 한국 사람 한옥집에 서 살고 있다 봤는데 한옥집 본 적이 없었어요. 시멘트만. 한국 사람 한복 입는다.(했는데) 한복 입은 사람 없고..."

그런데 책에는 나오지 않는 더 큰 가치를 실제 한국인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처음 왔을 때 '우리'라는 문화 봤습니다. 우리 동네, 우리 공동체, 우리나라, 우리 가정...나 생각하기 전에 남들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동네를 위해서 생각했습니다. 제가 놀란 건 일요일 아침 동네사람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사람들 다 빗자루 가지고 가서 동네 같이 청소했습니다. 너무 신기하고 너무 아름다웠어요."

김 신부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열정적이고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한국 사람들은 열정 굉장히 강해요. 열정적이고, 따뜻하고 사랑한다면 따뜻한 사랑으로 사랑해주시고, 잘 도와주시고."

김 신부가 귀화를 결심한 이유입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기억합니다. 오자마자 비행기 나오면서 이렇게 나오면서 바람 맞으면서 아 내 나라다, 내 민족이다. 그런 순간부터 이런 마음으로 대한민국 첫 번째 걸음 했습니다. 바로 귀화하지 못하고 10년 기다렸는데 10년 지난 다음에 신청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2015년에야 비로소 귀화에 성공했습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한국과) 사랑에 빠져서 오고 싶어서 오자마자 드디어, 드디어 제 꿈 이뤘습니다. (처음 한국에 온) 그날 1990년 5월 12일 제 꿈, 오랫동안 기다렸던 시간, 꿈 이뤘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어디 가세요?) 지금 아지트 가고 있습니다. 아지트. 아이들을 지키는 트럭. 일주일 네 번, 밤에 나가서 가출 청소년들 길에서 만나고 상담하고 먹을 거 주고."

아이들을 지키는 트럭이란 뜻의 '아지트'는 가출 청소년을 위한 이동 쉼터입니다.

<녹취> "노숙인 만나러 밤에 나가서 애들 만나게 됐습니다. '너 왜 여기 있어? 가출했습니다. 왜 가출했어?' 이야기하고.. '그럼 지금 밥 어떻게 먹어요? 못 먹어요 그러면 와라.가자.'"

90년대 초 저소득층을 위한 공부방에서 시작한 청소년 지원 활동은 가출 청소년을 위한 쉼터를 거쳐 이제 찾아가는 '아지트' 활동으로 변했습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요즘 아이들)쉼터 입소하지않고 애들끼리 살고 싶어해요. 가출 패밀리. 가출팸이 많습니다. 애들 오지 않아서 가자. 하면서 우리도 많이 배웠고, 장소 여러번 바뀌었습니다. 아이들 거기 있습니다. 거기 갔어요. 없어? 그러면 움직입시다."

매일 밤 찾아오는 청소년만 50명 정도.

무겁게 닫힌 아이들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고 있습니다.

<녹취> 가출 청소년(음성변조) :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가출했어요.)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해요?) 네, 집보다 더 편한 거 같아요. 소통이 되고 그러니까 집에 있으면 잘 소통이 안돼서."

<녹취> 가출 경험 청소년(음성변조) : "여기가 오히려 의지할 수 있고 여기가 뭔가 큰 문이 있어서 거길 들어가서 편하게 있다가..."

김 신부가 유독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저는 장애, 난독증 장애 가지고 있습니다. 열등감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런 고통 덕분에 저는 이런 사람이 됐습니다. 고통, 벌 아니고 기회입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지금의 고통 또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김 신부는 말합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한국 사회 이런 위기를 통해서 그런 기회 이루면 참 좋겠습니다. 같이 노력하면 아플 때 혼자서 못합니다. 서로 서로 손 잡고 가자, 가자, 가자,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요즘 촛불집회 하는 것처럼."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한국을 선택한 이들, 현재의 상황이 밝지만은 않지만 이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희망의 땅이고 한국인은 저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97년에 IMF도 겪었는데 지금 그것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그래도 지금도 회사 살아 남아있고, 자기 장사들이 좀 잘 안되지만 그나마도 먹고 살 수 있잖아요. 그건 뭐 한국 사람들이 화이팅 하죠."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어두운 세상 속에 그 사랑과 삶의 아름다움 찾고 나누고 실천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고."

<녹취> "천상병 귀천 마지막 절,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있잖아.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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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은 왜 한국을 택했나
    • 입력 2017-01-08 22:56:15
    • 수정2017-01-09 00:01:54
    취재파일K
정치 혼란과 어려운 경제 상황에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시작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희망을 찾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대한민국을 제2의 조국으로 선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한국은 어떤 사회이고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한국에서 어떤 희망을 찾은 희망을 찾은 걸까요?

노신사가 서울 인사동 골목길을 걸어갑니다.

발걸음을 멈춘 곳은 시인 천상병의 흔적이 가득한 카페.

귀천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녹취>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인터뷰> "내가 유일하게 외울 수 있는, 읊을 수 있는 시예요. 아주 좋아. 아름답고 심플하고 인간적이고."

영국인으로 태어나 지금은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서강대 명예교수 안선재 씨입니다.

안 교수가 한국에 온 건 1980년 5월 초.

정국이 어지러운 시절이었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아주 복잡한 상태였죠. 학생들 길가에 나와서 데모하고.. 어떻게 될까, 다시 뭐 대통령 선거 할까...아무도 몰랐죠. 10일 후엔 5.18."

대학 강단에 섰던 안 씨는 당시 대학생을 보면서 한국의 힘을 느꼈다고 합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대학생들은 나라의 양심. 학생 데모하는 거 보고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었어요. 나라 위하여..."

한국 문학은 불안정한 시대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아름다운 시도 있고 그리고 나에게 아주 좀 인간적인 것, 인생에 대한 시, 그리고 어떤때는 옛날 한국 역사 속에 한국 사람들의 고통, 그 희망, 그 용기 이런 게 다 나오는 거야. 그래서 한국 시 보통 너무 어렵지도 않고 그리고 무슨 보편성이 있어요."

영문학 전공인 안 교수는 한국 문학을 번역해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로 나섰습니다.

고은 시인을 해외에 처음 알린 것도 안 교수였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91년 고은 선생 시집 처음 미국에서 출판했을 때, 그거 고은 선생 맨 처음으로 번역한것이었어요. 사람들 좋아했어요. 고은 선생 시 직접 낭송하면 막 힘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 '허억'(놀랐어요.)"

서정주, 구상, 신경림 등 그가 번역해 세계에 알려진 한국 시집과 소설은 40권에 이릅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한국말 어려워. 너무 어려워요. 나는 한국말 너무 약해요. 그걸 항상 걱정해요. 번역할 때 이거 제대로 이해하는 거."

안교수는 한국 문학에 서린 '한'이란 감정을 보편적 공감대를 끌어낼 강점으로 꼽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한이란, 삶의 체험이 어려운 삶 계속 참아야 하는 것인데 이거 세계적으로 있어요."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밥 딜런이 노래 불렀잖아요? 그리고 거기 It's a hard, hard, hard 그런 가사 있는데, 바로 그거 한이에요. 어휴 힘들게 살아도 그래도 살겠다고 살아야겠다고."

문학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자연과 음식에도 매료된 안교수는 1994년, 한국인으로 귀화했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조금 더 완전히 여기서 살고 싶어서...그리고 조금 더 깊게 한국 하고 하나 되고 싶고."

영국 이름 안토니에서 안선재로, 이름도 바꿨습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그때 나는 고은 소설 화엄경 번역하고 있었어요. (소설 주인공에) 선재동자 있어서 그럼 선재 안선재. 선재동자. 어린 나그네. 세상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스승으로."

안 교수는 한국 전통 차를 즐겨 마십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선차라고 선, 침묵, 멈추고 물 끓이는 소리 듣고 아주 심플한 못짓, 손짓. 차 준비하고 멈추하고 이렇게 향, 색깔, 그 맛 이렇게. 그리고 물론 이렇게 갔다가 지나간 거에요. 지나가요. 이렇게 한 순간 삶 속에 멈추고 조용하게 자연하고 하나 되는 거야. 한국의 차도는 그래요."

이런 전통과 미학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아쉽다면서도 한국은 여전히 매력적인 곳이라고 안 교수는 말합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떠나면 어디 다른 나라 외국인 되는 거예요. 여기 문제 있다면 여기 머물고 여기있는 문제들 함께 해결해야죠. 극복해야죠. 떠나는 거, 도망가는 거 안돼요."

특히 우리 민족에게 뿌리깊게 자리한 '흥'이란 감정은 한국인의 특별한 자산이라고 안교수는 평가합니다.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한 혼자 보면 안돼. 한 있어서 흥. 흥을 통하여 이 한을 표현하는 거예요. 절망 아니고 희망으로 가는. 나약함에서 희망으로, 생명으로 바꾸는 거예요. 흥이 있어요. 한국의 미학. 한, 흥. 한보다 흥이 중요할 거예요."

경남 김해의 한 시장통을 지나가다 보면 여러 국적의 가게들이 나타나고, 골목길 끝에 한 아시안 식료품점이 있습니다.

<녹취> "안녕하세요."

방글라데시 출신 심동민 씨가 이 가게의 주인입니다.

심 씨는 1993년, 일자리를 구하러 한국에 왔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처음에는 소가죽 피혁 회사. 그 피혁 회사에 제가 오랫동안 거의 한 10년 동안 계속 일했었습니다. 10년 동안 일하다가 나중에 신발(산업) 자체가 안됐었어요. 그때 조선소로 빠졌어요. 지금 또 조선기술자들 쭉 내려갔잖아요. 안되니까 지금 (식료품)가게 한 게 한 2년 다 돼 가고 있습니다."

한국에 온지 4년만에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고, 다시 5년이 지나 한국인으로 귀화했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그 나라(방글라데시) 포기해야 여기서 국적(취득할 수 있어서) 그것 때문에 제가 갈등이 좀 있었어요. 제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아보니까 한국 생활이 제가 뿌듯하기 때문에..."

심동민이란 이름은 아내가 지어줬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우리 집사람이 어디 가서 심동민이 그 이름이 좋다고 그래서 개명을 했습니다. 심 글씨는 마음 심이니까 그렇게 제가 마음 심이니까 마음이 우리 집사람하고 (잘 통하라고)..."

이웃사촌이란 말이 무색해진 요즘.

심 씨에게는 이웃이 고향에 있는 아버지와 형, 누나를 대신하는 존재입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식사하셨습니까? (어 식사는 했어) 저도 밥 먹고."

<인터뷰> 신중근(시장 상인) : "사람이 좋아 마음이 맞고. 사람이 좋아서 동생처럼 지냅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떡집, 저기 만두집 다 친하고 뭐 가지고 올 때마다 우리 갖다줘요. 우리 먹으라고. 그게 정이죠."

최근 심 씨는 이웃 상점에 든 도둑을 잡아 용감한 시민상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귀금속 가게에서 그 강도가 (물건을) 훔치고 달아났어요. 도둑 잡아라라고 이야기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소리 듣고 바로 쫓아와가지고 여기서 한 300미터 뛰어가서 도둑을 잡았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겁나지 않으셨어요?) 처음엔 겁났죠. 근데 겁난 것보다 제가 중간에 그런 생각했어요. 내 가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그래서 일단 뛰어가니까 잡아야된다. 내가 다치더라도."

심 씨는 일주일에 두 번, 야간 자율 방범대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솔직히 좀 외국인에 대한 한국 사람들 인식이 안 좋은 게 많아요. 많았기 때문에 조금 힘들어도 여러나라 사람하고 같이 활동하고 순찰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좋게 생각하고..."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 심 씨가 늦은 밤까지 거리로 나서는 이유입니다.

신발 공장에서 조선소를 거쳐 자영업자가 되기까지 지난 15년간 한국의 서민 경제를 현장에서 체험한 심씨.

요즘 불황의 한파를 체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힘들었죠. 지금 현재 이야기 하면 돼요. 지금 현재도 경기가 거의 땅바닥 내려갔잖아요. 서민들이 많이 힘들죠. 외국인이나 내국인이나 다 똑같습니다."

제일 걱정되는 건 외국인 근로자들입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자기들이 일 없어도 먹는 건 먹어야 되잖아요. 먹는 건 먹으면 내 가게에서 가져가면 아 형님, 내가 조금 있다가 돈 줄게 뭐 며칠 있다가 돈 줄게."

의지할 데 없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심 씨는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호리둘 이슬람(방글라데시인 근로자) : "만약에 우리 노동부에서 많이 문제 있으니까 우리 한국말 잘 모르겠는데 우리 형님 가요. 통역해줘요. 그 다음에 우리 다른 데 사장님들 돈 안주면 어떻게 하고 그 다음에 형님 도와줘요."

일자리를 찾아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왔던 심 씨에게 현재 한국이 처한 경제적 위기는 어떻게 비쳐질까?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1950년대부터 쭉 힘들게 살았잖아요. 힘들게 생활하고 열심히 나라를 만들고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심 씨는 자신의 이름처럼 주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힘든 시대에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한국 사람들이)따뜻하니까 한국에서 제가 오랫동안 살고 아직까지도 그 뒤로 내가 보면 그 한국사람들 아직까지도 나하고 만나고, 밥 한그릇 먹고 가끔 이야기도 하고 따뜻한 마음때문에 그렇죠."

앞치마를 두르고 김치를 써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사람.

이탈리아 출신 김하종 신부입니다.

<녹취> "(오늘 메뉴는 뭐에요?) 오늘 김치찌개. 꽁치조림 또 호박, 호박 볶음. 우리집 맛있어요. 유명해요."

김 신부는 노숙인 급식소와 가출 청소년 쉼터인 '안나의 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녹취> "김치찌개 한번 하면 김치 10킬로그램, 고기 50근, 두부 6판 맛있게 만들어요. 조리사님 양념 넣고, 저는 사랑 많이 넣어요."

매일 500명 남짓한 노숙인들이 이곳을 찾습니다.

<녹취> "맛있게 드세요."

노숙인과 함께 한 지 20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맨처음에는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저한테 손가락질 하면서 너 때문에 노숙인이 더 많이 생긴다(했어요.) [얼굴로]그러면 저는 그 분들한테 그렇다면 장애인 시설 있기 때문에 장애인 생깁니까? 아니요. 장애인 있어서 사회복지시설 생깁니다. 마찬가지에요."

동양철학을 전공했던 김 신부가 한국에 온 건 지난 1990년.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실망했습니다. 저는 한국에 대한 아는 것 책을 통해서. 책 보면서 사진 보면서 한국 알게 되었고, 책 보면 한국 사람 한옥집에 서 살고 있다 봤는데 한옥집 본 적이 없었어요. 시멘트만. 한국 사람 한복 입는다.(했는데) 한복 입은 사람 없고..."

그런데 책에는 나오지 않는 더 큰 가치를 실제 한국인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처음 왔을 때 '우리'라는 문화 봤습니다. 우리 동네, 우리 공동체, 우리나라, 우리 가정...나 생각하기 전에 남들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동네를 위해서 생각했습니다. 제가 놀란 건 일요일 아침 동네사람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사람들 다 빗자루 가지고 가서 동네 같이 청소했습니다. 너무 신기하고 너무 아름다웠어요."

김 신부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열정적이고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한국 사람들은 열정 굉장히 강해요. 열정적이고, 따뜻하고 사랑한다면 따뜻한 사랑으로 사랑해주시고, 잘 도와주시고."

김 신부가 귀화를 결심한 이유입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기억합니다. 오자마자 비행기 나오면서 이렇게 나오면서 바람 맞으면서 아 내 나라다, 내 민족이다. 그런 순간부터 이런 마음으로 대한민국 첫 번째 걸음 했습니다. 바로 귀화하지 못하고 10년 기다렸는데 10년 지난 다음에 신청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2015년에야 비로소 귀화에 성공했습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한국과) 사랑에 빠져서 오고 싶어서 오자마자 드디어, 드디어 제 꿈 이뤘습니다. (처음 한국에 온) 그날 1990년 5월 12일 제 꿈, 오랫동안 기다렸던 시간, 꿈 이뤘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어디 가세요?) 지금 아지트 가고 있습니다. 아지트. 아이들을 지키는 트럭. 일주일 네 번, 밤에 나가서 가출 청소년들 길에서 만나고 상담하고 먹을 거 주고."

아이들을 지키는 트럭이란 뜻의 '아지트'는 가출 청소년을 위한 이동 쉼터입니다.

<녹취> "노숙인 만나러 밤에 나가서 애들 만나게 됐습니다. '너 왜 여기 있어? 가출했습니다. 왜 가출했어?' 이야기하고.. '그럼 지금 밥 어떻게 먹어요? 못 먹어요 그러면 와라.가자.'"

90년대 초 저소득층을 위한 공부방에서 시작한 청소년 지원 활동은 가출 청소년을 위한 쉼터를 거쳐 이제 찾아가는 '아지트' 활동으로 변했습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요즘 아이들)쉼터 입소하지않고 애들끼리 살고 싶어해요. 가출 패밀리. 가출팸이 많습니다. 애들 오지 않아서 가자. 하면서 우리도 많이 배웠고, 장소 여러번 바뀌었습니다. 아이들 거기 있습니다. 거기 갔어요. 없어? 그러면 움직입시다."

매일 밤 찾아오는 청소년만 50명 정도.

무겁게 닫힌 아이들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고 있습니다.

<녹취> 가출 청소년(음성변조) :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가출했어요.)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해요?) 네, 집보다 더 편한 거 같아요. 소통이 되고 그러니까 집에 있으면 잘 소통이 안돼서."

<녹취> 가출 경험 청소년(음성변조) : "여기가 오히려 의지할 수 있고 여기가 뭔가 큰 문이 있어서 거길 들어가서 편하게 있다가..."

김 신부가 유독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저는 장애, 난독증 장애 가지고 있습니다. 열등감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런 고통 덕분에 저는 이런 사람이 됐습니다. 고통, 벌 아니고 기회입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지금의 고통 또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김 신부는 말합니다.

<인터뷰> 김하종(안나의집 신부) : "한국 사회 이런 위기를 통해서 그런 기회 이루면 참 좋겠습니다. 같이 노력하면 아플 때 혼자서 못합니다. 서로 서로 손 잡고 가자, 가자, 가자,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요즘 촛불집회 하는 것처럼."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한국을 선택한 이들, 현재의 상황이 밝지만은 않지만 이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희망의 땅이고 한국인은 저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인터뷰> 심동민(자영업/2002년 귀화) : "97년에 IMF도 겪었는데 지금 그것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그래도 지금도 회사 살아 남아있고, 자기 장사들이 좀 잘 안되지만 그나마도 먹고 살 수 있잖아요. 그건 뭐 한국 사람들이 화이팅 하죠."

<인터뷰> 안선재(서강대 명예교수) : "어두운 세상 속에 그 사랑과 삶의 아름다움 찾고 나누고 실천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고."

<녹취> "천상병 귀천 마지막 절,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있잖아.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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