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성군’ 세종, 정말 형의 왕위를 넘봤나?

입력 2017.07.2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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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형제의 운명이 뒤바뀌었다.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맏아들로 세자에 책봉됐던 양녕대군(讓寧大君)과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그들이다.

훗날 양녕은 '조선 최초의 폐세자'로 기록됐고, 충녕은 조선 왕조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양녕 폐위의 도화선, ‘어리 스캔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된 중심에는 그의 애인, 어리가 있었다. 태종(太宗)의 극심한 반대에도 양녕대군은 관리의 첩이던 어리와 비밀 만남을 이어갔고, 결국 아이까지 갖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크게 분노했고, 결국 폐세자 사건의 도화선이 됐다.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첩 어리를 내친 것을 비난했다. (KBS ‘역사저널 그날’, 2014.02.09)양녕대군은 태종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첩 어리를 내친 것을 비난했다. (KBS ‘역사저널 그날’, 2014.02.09)

세자가 노하여 "어리의 일을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
-태종실록(태종 18년 5월)-

그런데 이때, 양녕대군은 자신과 어리 사이의 일을 아버지에게 고한 인물로 충녕대군을 의심했다. 충녕대군은 과연 형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양녕 대 충녕, 깊어진 갈등의 골

1402년, 양녕대군은 9살에 원자로 책봉돼 조선의 첫 번째 세자가 된다. 이후 그의 하루 는 오로지 학습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혹독한 세자 교육에 양녕대군은 엇나가기만 했고, 서연(書筵)에 나가지 않는 등 공부를 게을리했다. 반면, 동생 충녕대군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자가 일찍이 임금 앞에서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비록 용맹하지 못한 듯하나, 큰일에 임하여 대의(大疑)를 결단하는 데에는 당세에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다”
-태종실록(태종 16년 2월)-

어느덧 조정 대신들은 물론이고, 아버지 태종조차 세자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을 비교하기 시작한다. 잘난 동생 때문에 늘 스트레스가 심했던 양녕대군은 급기야 아버지 태종에게 충녕의 단점을 고하기에 이른다.

동생 충녕, 형의 왕위를 넘봤나?


1418년 6월 3일, 태종은 14년간 세자 자리를 지켰던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태종이 확고하게 신봉했던 적장자 승계 원칙에 따르면, 양녕대군의 첫째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어진 이를 골라야 한다'는 '택현(擇賢)'의 논리로 양녕이 아닌 동생 충녕이 세자가 된다.


운명이 엇갈린 두 형제는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양녕과 충녕의 자세한 이야기는 23일(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 방송된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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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의 성군’ 세종, 정말 형의 왕위를 넘봤나?
    • 입력 2017-07-21 14:13:37
    방송·연예
한순간에 형제의 운명이 뒤바뀌었다.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맏아들로 세자에 책봉됐던 양녕대군(讓寧大君)과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그들이다.

훗날 양녕은 '조선 최초의 폐세자'로 기록됐고, 충녕은 조선 왕조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양녕 폐위의 도화선, ‘어리 스캔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된 중심에는 그의 애인, 어리가 있었다. 태종(太宗)의 극심한 반대에도 양녕대군은 관리의 첩이던 어리와 비밀 만남을 이어갔고, 결국 아이까지 갖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크게 분노했고, 결국 폐세자 사건의 도화선이 됐다.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첩 어리를 내친 것을 비난했다. (KBS ‘역사저널 그날’, 2014.02.09)
세자가 노하여 "어리의 일을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
-태종실록(태종 18년 5월)-

그런데 이때, 양녕대군은 자신과 어리 사이의 일을 아버지에게 고한 인물로 충녕대군을 의심했다. 충녕대군은 과연 형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양녕 대 충녕, 깊어진 갈등의 골

1402년, 양녕대군은 9살에 원자로 책봉돼 조선의 첫 번째 세자가 된다. 이후 그의 하루 는 오로지 학습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혹독한 세자 교육에 양녕대군은 엇나가기만 했고, 서연(書筵)에 나가지 않는 등 공부를 게을리했다. 반면, 동생 충녕대군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자가 일찍이 임금 앞에서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비록 용맹하지 못한 듯하나, 큰일에 임하여 대의(大疑)를 결단하는 데에는 당세에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다”
-태종실록(태종 16년 2월)-

어느덧 조정 대신들은 물론이고, 아버지 태종조차 세자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을 비교하기 시작한다. 잘난 동생 때문에 늘 스트레스가 심했던 양녕대군은 급기야 아버지 태종에게 충녕의 단점을 고하기에 이른다.

동생 충녕, 형의 왕위를 넘봤나?


1418년 6월 3일, 태종은 14년간 세자 자리를 지켰던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태종이 확고하게 신봉했던 적장자 승계 원칙에 따르면, 양녕대군의 첫째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어진 이를 골라야 한다'는 '택현(擇賢)'의 논리로 양녕이 아닌 동생 충녕이 세자가 된다.


운명이 엇갈린 두 형제는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양녕과 충녕의 자세한 이야기는 23일(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 방송된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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