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세상과 불화한 ‘자유주의자’ 故 마광수가 남긴 발자취

입력 2017.09.06 (18:47) 수정 2017.09.07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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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세상과 불화한 ‘자유주의자’ 故 마광수가 남긴 발자취

끝내 세상과 불화한 ‘자유주의자’ 故 마광수가 남긴 발자취

소설 『즐거운 사라』는 어제(5일) 별세한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가 쓴 장편 소설이다. 마 전 교수는 이 소설로 필화 사건에 휩싸이며, 우리 사회 성 윤리 논란의 중심에 서서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고 마광수 교수는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나왔다. 마 교수는 성에 대한 가감 없는 소설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문학 인생의 출발은 시였다.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7년 현대문학에 '배꼽에' 등 6편의 시가 추천되며 등단했다. 28세에 대학교수로 임용되면서 천재로도 불렸다.


고인은 1991년 소설 『즐거운 사라』를 펴내고 이듬해 10월 음란물 제작·반포 혐의로 구속되면서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즐거운 사라』는 여대생 '사라'가 성 경험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인은 성 문제를 음지에서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야 우리 사회의 위선적 성문화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즐거운 사라』가 변태적 성행위와 스승 · 제자의 성관계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음란물'이라는 혐의를 받으면서 사회적으로 예술과 외설의 구분, 창작과 표현의 자유문제로 논쟁이 확산됐다.


고인은 3년간 재판 끝에 1995년 6월 대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 선고받았다. 당시 법원은 "정상적인 성적 정서와 선량한 사회풍속을 침해하고 타락시키는 정도의 음란물까지 허용될 수 없다. 이 소설은 그 한계를 벗어난 것이 분명하다"며 『즐거운 사라』를 음란물로 판정했다.

대법원 확정판결 전에 고인이 구속되자 문학계뿐 아니라 미술·영화 등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구명운동을 벌였다. 당시 대다수 문화예술인은 고인에 대한 구속수감과 판결에 대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권력의 시대착오적 탄압으로 받아들였다.

고 마광수 전 교수는 대법원 확정판결로 해직된 이후 복직과 휴직을 반복하다가 지난해 8월 정년퇴임을 했다. 해직 경력 탓에 명예교수 직함도 얻지 못했고 필화 사건의 상처와 동료 교수들의 따돌림에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마 교수의 제자와 지인에 따르면 필화 사건 이후에도 작품 활동을 했지만, 자기검열 탓에 과거처럼 적극적이지 못했다. 소설 『광마일기』(1990)와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 에세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 등 필화 이전의 작품들이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그보다 10년 전 쓴 동명의 시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다.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 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부분)

그가 올 초 『광마집』(1980)부터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2012)까지 여섯 권의 시집에서 작품들을 골라 펴낸 『마광수 시선』이 그의 마지막 책이 되었다.

마 전 교수는 어제(5일) 낮 1시 50분쯤 자택인 서울 용산구 동부 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목을 매 숨진 채 이 아파트 다른 집에 사는 가족에 의해 발견됐다.

그의 자택에서는 유산을 자신의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넘긴다는 내용과 시신 처리를 그 가족에게 맡긴다는 내용을 담은 유언장이 발견됐다. A4용지 1장짜리 유언장은 지난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은 마 전 교수가 목을 맨 채 발견된 점으로 미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자세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마 전 교수의 시신은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졌으며, 빈소도 그 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유족은 7일 오전 11시 30분 영결식을 치르고 시신을 화장하기로 했다.

마 전 교수의 제자와 지인들은 고인에 대해 '한국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며 자유주의자였고, 방식의 차이 때문에 공격을 받으면서도 위선을 비판한 작가'라고 했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이후 문학계는 고인을 사실상 외면했다. 책을 낼 출판사를 찾기도 어려웠다. 특히 올해 초 그의 마지막 책 '마광수 시선'을 출간할 때는 해설을 써 줄 문학평론가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다들 눈치를 본 때문이며, 이런 점에서 고인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그의 제자와 지인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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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내 세상과 불화한 ‘자유주의자’ 故 마광수가 남긴 발자취
    • 입력 2017-09-06 18:47:38
    • 수정2017-09-07 09:29:07
    취재K
소설 『즐거운 사라』는 어제(5일) 별세한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가 쓴 장편 소설이다. 마 전 교수는 이 소설로 필화 사건에 휩싸이며, 우리 사회 성 윤리 논란의 중심에 서서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고 마광수 교수는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나왔다. 마 교수는 성에 대한 가감 없는 소설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문학 인생의 출발은 시였다.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7년 현대문학에 '배꼽에' 등 6편의 시가 추천되며 등단했다. 28세에 대학교수로 임용되면서 천재로도 불렸다.


고인은 1991년 소설 『즐거운 사라』를 펴내고 이듬해 10월 음란물 제작·반포 혐의로 구속되면서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즐거운 사라』는 여대생 '사라'가 성 경험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인은 성 문제를 음지에서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야 우리 사회의 위선적 성문화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즐거운 사라』가 변태적 성행위와 스승 · 제자의 성관계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음란물'이라는 혐의를 받으면서 사회적으로 예술과 외설의 구분, 창작과 표현의 자유문제로 논쟁이 확산됐다.


고인은 3년간 재판 끝에 1995년 6월 대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 선고받았다. 당시 법원은 "정상적인 성적 정서와 선량한 사회풍속을 침해하고 타락시키는 정도의 음란물까지 허용될 수 없다. 이 소설은 그 한계를 벗어난 것이 분명하다"며 『즐거운 사라』를 음란물로 판정했다.

대법원 확정판결 전에 고인이 구속되자 문학계뿐 아니라 미술·영화 등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구명운동을 벌였다. 당시 대다수 문화예술인은 고인에 대한 구속수감과 판결에 대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권력의 시대착오적 탄압으로 받아들였다.

고 마광수 전 교수는 대법원 확정판결로 해직된 이후 복직과 휴직을 반복하다가 지난해 8월 정년퇴임을 했다. 해직 경력 탓에 명예교수 직함도 얻지 못했고 필화 사건의 상처와 동료 교수들의 따돌림에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마 교수의 제자와 지인에 따르면 필화 사건 이후에도 작품 활동을 했지만, 자기검열 탓에 과거처럼 적극적이지 못했다. 소설 『광마일기』(1990)와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 에세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 등 필화 이전의 작품들이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그보다 10년 전 쓴 동명의 시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다.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 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부분)

그가 올 초 『광마집』(1980)부터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2012)까지 여섯 권의 시집에서 작품들을 골라 펴낸 『마광수 시선』이 그의 마지막 책이 되었다.

마 전 교수는 어제(5일) 낮 1시 50분쯤 자택인 서울 용산구 동부 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목을 매 숨진 채 이 아파트 다른 집에 사는 가족에 의해 발견됐다.

그의 자택에서는 유산을 자신의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넘긴다는 내용과 시신 처리를 그 가족에게 맡긴다는 내용을 담은 유언장이 발견됐다. A4용지 1장짜리 유언장은 지난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은 마 전 교수가 목을 맨 채 발견된 점으로 미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자세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마 전 교수의 시신은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졌으며, 빈소도 그 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유족은 7일 오전 11시 30분 영결식을 치르고 시신을 화장하기로 했다.

마 전 교수의 제자와 지인들은 고인에 대해 '한국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며 자유주의자였고, 방식의 차이 때문에 공격을 받으면서도 위선을 비판한 작가'라고 했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이후 문학계는 고인을 사실상 외면했다. 책을 낼 출판사를 찾기도 어려웠다. 특히 올해 초 그의 마지막 책 '마광수 시선'을 출간할 때는 해설을 써 줄 문학평론가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다들 눈치를 본 때문이며, 이런 점에서 고인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그의 제자와 지인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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