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계종 신임 총무원장에 수덕사 방장 설정스님이 당선됐다.
설정 스님은 오늘(12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실시된 제 35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참가 선거인 319명의 절반을 훌쩍 넘는 234표를 얻어 경쟁을 벌여온 안국선원장 수불스님을 누르고 새 총무원장으로 당선됐다.
신임 총무원장으로 당선된 설정스님은 열네 살 되던 해인 1954년 아버지의 생신 불공을 위해 수덕사에 들렀다가 바로 출가했다. 출가 전에는 다섯 살 때부터 주역의 대가인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1955년 혜원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1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를 지냈으며 1994년부터 1998년 기간에는 제11대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맡아 종단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이(理)와 사(事)에 두루 밝은 스님은 종회의장 재임시 개혁입법을 만들며 종단 개혁을 주도했다. 종단 정상화와 교육을 통한 승가의 질적 향상, 포교 활성화, 재정투명화라는 입법기조에 따라 총무원장 권한을 분산하고 제한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화하고, 직영사찰과 특별분담금 사찰을 지정해 종단이 안정적으로 예산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종회의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거 때마다 전국 선원에 방부를 들였다. 안으로는 문중과 계파를 떠나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데 힘썼고, 이를 통해 종도와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종단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2009년 덕숭총림 4대 방장으로 추대된 스님은 ‘무슨 일이든 정성스럽게 잘하면 된다.’는 가르침으로 후학들을 보듬었다. 덕분에 덕숭총림은 어느 총림보다 상하가 화합하면서 안정적이고 정연한 승가공동체라는 명성을 얻었다.

평소 자상함과 인자함으로 후학과 신도를 대하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언제나 올곧고 강단있게 맞섰다. 스님의 자서전 격인 ' 설정스님의 인생 법문, 어떻게 살것인가 '를 보면 스님은 1980년 10·27 법난 때 대전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서는 자술서를 쓰라는 강요와 협박에도 사흘 동안 단식 좌선으로 버텼다. 이후 신군부가 주도한 ‘관제’ 법회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국민 화합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니 십만 병력을 동원해서 스님들을 잡아넣고 불교를 탄압했다. 이게 과연 국민화합인가”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1995년 독일에서 열린 윤이상 작곡가 천도재에서 설정스님(가운데)이 추모의 예를 올리고 있다.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사상적으로 아직도 고까운 시선을 받고 있는 세계적인 작곡가 고(故) 윤이상 선생의 천도재를 지내준 일화는 여전히 종교인의 '종도 사랑의 귀감'으로 회자되고 있다. 스님은 1995년 독일에서 윤이상 선생의 49재 추모법회를 봉행했다. 천도재에는 북한에서 온 조문객들도 다수 참석했다. 49재를 진행하며 고인의 묘비에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흙탕 속에 피어나도 더러운 흙탕물에 묻히지 않는다)’이라는 경구도 써 주었다. 냉전시대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윤이상은 독실한 불자였다.
당시는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현안이어서 국가보안법의 위세가 대단했던 때라 다들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 낼 때 스님은 스스럼없이 고 윤이상 49재를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불교 의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유가족들의 간청을 저버릴 수 없었다”는 게 답변이었다.
1998년에는 췌장암 치료를 위해 하와이에 갔다. 전체 혈액의 절반 이상이 몸에서 빠져나갈 만큼 생명이 위독했다. 스님은 “내가 다시 산다면 결코 편하게 살지 않겠다.”며 참회와 정진으로 병을 극복했다고 한다.
설정스님이 방장으로 있는 덕숭산 수덕사는 우리나라 8대 총림의 하나로 한말에 우리나라 근대선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경허 스님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고, 경허 선사의 제자 혜월, 수월, 만공 스님 등이 뒤를 이은 선의 종갓집이다.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위원이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일치와종교간대화위원장 김희중 대주교가 25일 충남 예산군 수덕사를 방문해 덕숭총림 방장 설정 큰스님에게 교황청의 축하메시지를 직접 전달하고 있다. 2014.4.25
98년 종회의장 이후 조계종 중앙무대를 떠나 선의 종갓집으로 돌아간 설정 스님은 이후 수행과 정진으로 산중도인의 풍모를 갖춘 수행자로 거듭났다. 이 산중도인은 총무원장으로 다시 조계종 중앙무대로 등단한다. 불교계 전체에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다 선거 과정에도 개인적 비리 의혹이 폭로된 터여서 스님의 향후 행보에 불교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설정 스님은 오늘(12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실시된 제 35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참가 선거인 319명의 절반을 훌쩍 넘는 234표를 얻어 경쟁을 벌여온 안국선원장 수불스님을 누르고 새 총무원장으로 당선됐다.
신임 총무원장으로 당선된 설정스님은 열네 살 되던 해인 1954년 아버지의 생신 불공을 위해 수덕사에 들렀다가 바로 출가했다. 출가 전에는 다섯 살 때부터 주역의 대가인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1955년 혜원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1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를 지냈으며 1994년부터 1998년 기간에는 제11대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맡아 종단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이(理)와 사(事)에 두루 밝은 스님은 종회의장 재임시 개혁입법을 만들며 종단 개혁을 주도했다. 종단 정상화와 교육을 통한 승가의 질적 향상, 포교 활성화, 재정투명화라는 입법기조에 따라 총무원장 권한을 분산하고 제한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화하고, 직영사찰과 특별분담금 사찰을 지정해 종단이 안정적으로 예산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종회의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거 때마다 전국 선원에 방부를 들였다. 안으로는 문중과 계파를 떠나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데 힘썼고, 이를 통해 종도와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종단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2009년 덕숭총림 4대 방장으로 추대된 스님은 ‘무슨 일이든 정성스럽게 잘하면 된다.’는 가르침으로 후학들을 보듬었다. 덕분에 덕숭총림은 어느 총림보다 상하가 화합하면서 안정적이고 정연한 승가공동체라는 명성을 얻었다.

평소 자상함과 인자함으로 후학과 신도를 대하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언제나 올곧고 강단있게 맞섰다. 스님의 자서전 격인 ' 설정스님의 인생 법문, 어떻게 살것인가 '를 보면 스님은 1980년 10·27 법난 때 대전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서는 자술서를 쓰라는 강요와 협박에도 사흘 동안 단식 좌선으로 버텼다. 이후 신군부가 주도한 ‘관제’ 법회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국민 화합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니 십만 병력을 동원해서 스님들을 잡아넣고 불교를 탄압했다. 이게 과연 국민화합인가”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사상적으로 아직도 고까운 시선을 받고 있는 세계적인 작곡가 고(故) 윤이상 선생의 천도재를 지내준 일화는 여전히 종교인의 '종도 사랑의 귀감'으로 회자되고 있다. 스님은 1995년 독일에서 윤이상 선생의 49재 추모법회를 봉행했다. 천도재에는 북한에서 온 조문객들도 다수 참석했다. 49재를 진행하며 고인의 묘비에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흙탕 속에 피어나도 더러운 흙탕물에 묻히지 않는다)’이라는 경구도 써 주었다. 냉전시대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윤이상은 독실한 불자였다.
당시는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현안이어서 국가보안법의 위세가 대단했던 때라 다들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 낼 때 스님은 스스럼없이 고 윤이상 49재를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불교 의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유가족들의 간청을 저버릴 수 없었다”는 게 답변이었다.
1998년에는 췌장암 치료를 위해 하와이에 갔다. 전체 혈액의 절반 이상이 몸에서 빠져나갈 만큼 생명이 위독했다. 스님은 “내가 다시 산다면 결코 편하게 살지 않겠다.”며 참회와 정진으로 병을 극복했다고 한다.
설정스님이 방장으로 있는 덕숭산 수덕사는 우리나라 8대 총림의 하나로 한말에 우리나라 근대선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경허 스님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고, 경허 선사의 제자 혜월, 수월, 만공 스님 등이 뒤를 이은 선의 종갓집이다.

98년 종회의장 이후 조계종 중앙무대를 떠나 선의 종갓집으로 돌아간 설정 스님은 이후 수행과 정진으로 산중도인의 풍모를 갖춘 수행자로 거듭났다. 이 산중도인은 총무원장으로 다시 조계종 중앙무대로 등단한다. 불교계 전체에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다 선거 과정에도 개인적 비리 의혹이 폭로된 터여서 스님의 향후 행보에 불교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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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정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당선…수행과 구도 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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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7-10-12 16:51:21

조계종 신임 총무원장에 수덕사 방장 설정스님이 당선됐다.
설정 스님은 오늘(12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실시된 제 35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참가 선거인 319명의 절반을 훌쩍 넘는 234표를 얻어 경쟁을 벌여온 안국선원장 수불스님을 누르고 새 총무원장으로 당선됐다.
신임 총무원장으로 당선된 설정스님은 열네 살 되던 해인 1954년 아버지의 생신 불공을 위해 수덕사에 들렀다가 바로 출가했다. 출가 전에는 다섯 살 때부터 주역의 대가인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1955년 혜원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1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를 지냈으며 1994년부터 1998년 기간에는 제11대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맡아 종단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이(理)와 사(事)에 두루 밝은 스님은 종회의장 재임시 개혁입법을 만들며 종단 개혁을 주도했다. 종단 정상화와 교육을 통한 승가의 질적 향상, 포교 활성화, 재정투명화라는 입법기조에 따라 총무원장 권한을 분산하고 제한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화하고, 직영사찰과 특별분담금 사찰을 지정해 종단이 안정적으로 예산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종회의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거 때마다 전국 선원에 방부를 들였다. 안으로는 문중과 계파를 떠나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데 힘썼고, 이를 통해 종도와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종단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2009년 덕숭총림 4대 방장으로 추대된 스님은 ‘무슨 일이든 정성스럽게 잘하면 된다.’는 가르침으로 후학들을 보듬었다. 덕분에 덕숭총림은 어느 총림보다 상하가 화합하면서 안정적이고 정연한 승가공동체라는 명성을 얻었다.

평소 자상함과 인자함으로 후학과 신도를 대하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언제나 올곧고 강단있게 맞섰다. 스님의 자서전 격인 ' 설정스님의 인생 법문, 어떻게 살것인가 '를 보면 스님은 1980년 10·27 법난 때 대전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서는 자술서를 쓰라는 강요와 협박에도 사흘 동안 단식 좌선으로 버텼다. 이후 신군부가 주도한 ‘관제’ 법회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국민 화합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니 십만 병력을 동원해서 스님들을 잡아넣고 불교를 탄압했다. 이게 과연 국민화합인가”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사상적으로 아직도 고까운 시선을 받고 있는 세계적인 작곡가 고(故) 윤이상 선생의 천도재를 지내준 일화는 여전히 종교인의 '종도 사랑의 귀감'으로 회자되고 있다. 스님은 1995년 독일에서 윤이상 선생의 49재 추모법회를 봉행했다. 천도재에는 북한에서 온 조문객들도 다수 참석했다. 49재를 진행하며 고인의 묘비에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흙탕 속에 피어나도 더러운 흙탕물에 묻히지 않는다)’이라는 경구도 써 주었다. 냉전시대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윤이상은 독실한 불자였다.
당시는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현안이어서 국가보안법의 위세가 대단했던 때라 다들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 낼 때 스님은 스스럼없이 고 윤이상 49재를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불교 의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유가족들의 간청을 저버릴 수 없었다”는 게 답변이었다.
1998년에는 췌장암 치료를 위해 하와이에 갔다. 전체 혈액의 절반 이상이 몸에서 빠져나갈 만큼 생명이 위독했다. 스님은 “내가 다시 산다면 결코 편하게 살지 않겠다.”며 참회와 정진으로 병을 극복했다고 한다.
설정스님이 방장으로 있는 덕숭산 수덕사는 우리나라 8대 총림의 하나로 한말에 우리나라 근대선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경허 스님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고, 경허 선사의 제자 혜월, 수월, 만공 스님 등이 뒤를 이은 선의 종갓집이다.

98년 종회의장 이후 조계종 중앙무대를 떠나 선의 종갓집으로 돌아간 설정 스님은 이후 수행과 정진으로 산중도인의 풍모를 갖춘 수행자로 거듭났다. 이 산중도인은 총무원장으로 다시 조계종 중앙무대로 등단한다. 불교계 전체에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다 선거 과정에도 개인적 비리 의혹이 폭로된 터여서 스님의 향후 행보에 불교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설정 스님은 오늘(12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실시된 제 35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참가 선거인 319명의 절반을 훌쩍 넘는 234표를 얻어 경쟁을 벌여온 안국선원장 수불스님을 누르고 새 총무원장으로 당선됐다.
신임 총무원장으로 당선된 설정스님은 열네 살 되던 해인 1954년 아버지의 생신 불공을 위해 수덕사에 들렀다가 바로 출가했다. 출가 전에는 다섯 살 때부터 주역의 대가인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1955년 혜원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1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를 지냈으며 1994년부터 1998년 기간에는 제11대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맡아 종단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이(理)와 사(事)에 두루 밝은 스님은 종회의장 재임시 개혁입법을 만들며 종단 개혁을 주도했다. 종단 정상화와 교육을 통한 승가의 질적 향상, 포교 활성화, 재정투명화라는 입법기조에 따라 총무원장 권한을 분산하고 제한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화하고, 직영사찰과 특별분담금 사찰을 지정해 종단이 안정적으로 예산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종회의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거 때마다 전국 선원에 방부를 들였다. 안으로는 문중과 계파를 떠나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데 힘썼고, 이를 통해 종도와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종단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2009년 덕숭총림 4대 방장으로 추대된 스님은 ‘무슨 일이든 정성스럽게 잘하면 된다.’는 가르침으로 후학들을 보듬었다. 덕분에 덕숭총림은 어느 총림보다 상하가 화합하면서 안정적이고 정연한 승가공동체라는 명성을 얻었다.

평소 자상함과 인자함으로 후학과 신도를 대하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언제나 올곧고 강단있게 맞섰다. 스님의 자서전 격인 ' 설정스님의 인생 법문, 어떻게 살것인가 '를 보면 스님은 1980년 10·27 법난 때 대전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서는 자술서를 쓰라는 강요와 협박에도 사흘 동안 단식 좌선으로 버텼다. 이후 신군부가 주도한 ‘관제’ 법회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국민 화합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니 십만 병력을 동원해서 스님들을 잡아넣고 불교를 탄압했다. 이게 과연 국민화합인가”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사상적으로 아직도 고까운 시선을 받고 있는 세계적인 작곡가 고(故) 윤이상 선생의 천도재를 지내준 일화는 여전히 종교인의 '종도 사랑의 귀감'으로 회자되고 있다. 스님은 1995년 독일에서 윤이상 선생의 49재 추모법회를 봉행했다. 천도재에는 북한에서 온 조문객들도 다수 참석했다. 49재를 진행하며 고인의 묘비에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흙탕 속에 피어나도 더러운 흙탕물에 묻히지 않는다)’이라는 경구도 써 주었다. 냉전시대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윤이상은 독실한 불자였다.
당시는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현안이어서 국가보안법의 위세가 대단했던 때라 다들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 낼 때 스님은 스스럼없이 고 윤이상 49재를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불교 의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유가족들의 간청을 저버릴 수 없었다”는 게 답변이었다.
1998년에는 췌장암 치료를 위해 하와이에 갔다. 전체 혈액의 절반 이상이 몸에서 빠져나갈 만큼 생명이 위독했다. 스님은 “내가 다시 산다면 결코 편하게 살지 않겠다.”며 참회와 정진으로 병을 극복했다고 한다.
설정스님이 방장으로 있는 덕숭산 수덕사는 우리나라 8대 총림의 하나로 한말에 우리나라 근대선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경허 스님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고, 경허 선사의 제자 혜월, 수월, 만공 스님 등이 뒤를 이은 선의 종갓집이다.

98년 종회의장 이후 조계종 중앙무대를 떠나 선의 종갓집으로 돌아간 설정 스님은 이후 수행과 정진으로 산중도인의 풍모를 갖춘 수행자로 거듭났다. 이 산중도인은 총무원장으로 다시 조계종 중앙무대로 등단한다. 불교계 전체에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다 선거 과정에도 개인적 비리 의혹이 폭로된 터여서 스님의 향후 행보에 불교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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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태 기자 jimi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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