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화 20년사 외 2건

입력 1991.12.12 (21:00) 수정 2024.02.2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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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석 앵커 :

남북이 평화공존의 가장 기본이 되는 틀을 만들기 까지 정말 오랜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번에는 70년대 초부터 20여년간 계속된 남북간의 대화일지를 정창훈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정창훈 기자 :

71년 8월 12일 당시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최두성씨가 제의한 남북 적십자회담을 시초로 남북 간의 접촉이 시작됐습니다.

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됨으로서 본격적인 남북대화의 길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남북적십자 1차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리고 이어 11월에는 남북조절위원회가 설치됐습니다.

73년 박정희 대통령의 6.23선언이 발표돼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할 것을 제의했으나 이에 맞서 북한은 고려연방제 통일안을 내세웠습니다.

74년 1월 우리 측은 남북한 상호 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으며 78년 6월에는 남북 경제협력을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남북대화는 남과 북이 서로 통일방안에 있어 이견을 보여 제자리걸음만을 계속했습니다.

81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이 남북한 최고책임자 회담을 제안했고 82년에는 민주화합 민주통일방안을 제안했으나 북한은 계속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고집해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습니다.

남북대화의 답보상태에서도 84년 9월 적십자회담이 재개됐고 84년 11월에는 남북 경제회담도 시작됐습니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85년 7월 체육 회담이 열렸고 85년 9월에는 역사적인 이산가족 방문과 예술 공연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려 1천만 이산가족들의 마을을 설레게 했습니다.

88년 7월,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은 남북대화 교류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에 따라 88년 12월 28일 강영훈 총리의 남북 고위당직자회담 제의가 있었고 몇 차례 예비접촉을 거쳐 마침내 지난 9월 서울에서 첫 남북 고위급회담이 열렸습니다.

그 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모두 5차례의 회담을 가진 끝에 오늘 합의서 채택에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박대석 앵커 :

워싱턴에서 로이터 연합통신 보도입니다.

게이츠 미국 중앙 정보국장은 북한이 핵무기급 물질생산을 시작할 수 있는 원심분리기의 제조직전까지 와 있다고 밝혔습니다.

게이츠 국장은 이란과 시리아, 리비아 등도 핵폭탄 제조시설을 개발하고 있으나 북한의 핵개발 수준에는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오늘 낮에 청와대에서 한국라이온스의 장기용 의장을 비롯한 총제단 180여명을 접견하고 라이온스가 그동안 어려운 이웃을 돕고 나라와 사회발전을 위해서 많은 봉사를 하는데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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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대화 20년사 외 2건
    • 입력 1991-12-12 21:00:00
    • 수정2024-02-26 16:37:46
    뉴스 9

박대석 앵커 :

남북이 평화공존의 가장 기본이 되는 틀을 만들기 까지 정말 오랜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번에는 70년대 초부터 20여년간 계속된 남북간의 대화일지를 정창훈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정창훈 기자 :

71년 8월 12일 당시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최두성씨가 제의한 남북 적십자회담을 시초로 남북 간의 접촉이 시작됐습니다.

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됨으로서 본격적인 남북대화의 길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남북적십자 1차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리고 이어 11월에는 남북조절위원회가 설치됐습니다.

73년 박정희 대통령의 6.23선언이 발표돼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할 것을 제의했으나 이에 맞서 북한은 고려연방제 통일안을 내세웠습니다.

74년 1월 우리 측은 남북한 상호 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으며 78년 6월에는 남북 경제협력을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남북대화는 남과 북이 서로 통일방안에 있어 이견을 보여 제자리걸음만을 계속했습니다.

81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이 남북한 최고책임자 회담을 제안했고 82년에는 민주화합 민주통일방안을 제안했으나 북한은 계속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고집해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습니다.

남북대화의 답보상태에서도 84년 9월 적십자회담이 재개됐고 84년 11월에는 남북 경제회담도 시작됐습니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85년 7월 체육 회담이 열렸고 85년 9월에는 역사적인 이산가족 방문과 예술 공연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려 1천만 이산가족들의 마을을 설레게 했습니다.

88년 7월,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은 남북대화 교류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에 따라 88년 12월 28일 강영훈 총리의 남북 고위당직자회담 제의가 있었고 몇 차례 예비접촉을 거쳐 마침내 지난 9월 서울에서 첫 남북 고위급회담이 열렸습니다.

그 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모두 5차례의 회담을 가진 끝에 오늘 합의서 채택에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박대석 앵커 :

워싱턴에서 로이터 연합통신 보도입니다.

게이츠 미국 중앙 정보국장은 북한이 핵무기급 물질생산을 시작할 수 있는 원심분리기의 제조직전까지 와 있다고 밝혔습니다.

게이츠 국장은 이란과 시리아, 리비아 등도 핵폭탄 제조시설을 개발하고 있으나 북한의 핵개발 수준에는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오늘 낮에 청와대에서 한국라이온스의 장기용 의장을 비롯한 총제단 180여명을 접견하고 라이온스가 그동안 어려운 이웃을 돕고 나라와 사회발전을 위해서 많은 봉사를 하는데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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