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스페셜] 中 조선족 시조 ‘번시 朴씨’…400년 혈통 족보 공개
입력 2018.12.01 (21:59)
수정 2018.12.0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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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중국에는 무려 400년 동안 족보를 대물림하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우리말 우리글은 잊어버렸지만 항렬을 중시하며 어른을 깍듯이 모시고 김치를 담가먹는 등 민족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400년 혈통을 이어온 조선족의 시조, '번시 박 씨' 가문 얘기인데요.
김명주 특파원이 '번시 박 씨' 집성촌을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웅장한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진 시골 마을.
물가엔 오리떼가 떠다니고 한쪽에선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평온하고 넉넉한 마을입니다.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엔 '피아오푸'라고 쓰여 있습니다.
박 씨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곳이 바로 한민족의 후예들이 400년 혈통을 지켜온 번시 박씨 집성촌 '박가보촌'입니다.
아직도 이 마을엔 한 집 건너 한 집은 번시 박씨들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의 여느 농촌과 다름 없이 자식들은 다 떠나고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2백여 명의 번시 박씨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1대손인 박문만 선생은 가장 항렬이 높은 어르신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여기에는 감자랑 채소를 심고 저쪽에는 옥수수를 심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을 많이 못해요."]
세 자녀는 각자 도시에서 가정을 꾸려 살다보니 한족 아내와 둘 만 남았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가족들 사진을 꺼내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가족들 모두 조선족인가요?) 그럼요. 제가 조선족이니까 우리 가족 전부 조선족이죠."]
박문만 선생은 자신의 신분증까지 자랑스럽게 보여줬습니다.
1943년 11월 29일생 조선족입니다.
400년 혈통이 기록된 번시 박씨 족보는 이 집의 가보와도 같습니다.
가문 대표들이 집집마다 전해 내려오던 족보들을 모아 5년 간의 혈통 조사를 거쳐 지난 2015년 새 족보를 펴냈습니다.
이 마을에는 박문만 선생 조카도 만주족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
[박명구/번시 박씨 12대손 : "제가 71살이고 삼촌은 74살이라 3살 차이인데 큰 삼촌이라고 불러요. 삼촌을 정말 존경합니다. 만약에 삼촌이 10대라고 해도 작은 삼촌이라고 불러야 해요."]
번시 박씨는 지난 400년 동안 통혼을 금지하고, 자식을 낳으면 돌림자로 이름을 지어왔습니다.
30개나 되는 돌림자를 줄줄 외울 정도로 항렬을 중요시합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응천대중국, 자덕김부옥, 문명희승세, 준위진태창, 시서기홍업, 공유강무량 이렇게 돌림자가 있습니다."]
번시 박씨 선조는 1619년 강홍립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건넌 것으로 청나라 사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연합 작전을 펼치던 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패하자 전쟁 포로로 남게 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박명옥/번시 박씨 12대손 : "청나라 사기에는 포로라고 기록돼 있는데 전쟁터에서 투항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어요. 저는 투항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 번시 박 씨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한족으로 편입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인구 조사 때 집단 청원을 거쳐 조선족 신분을 되찾았습니다.
박가보촌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번시현 시내.
번시 박씨가 운영하는 한 식품점을 찾아가 봤습니다.
가게 간판에 주인 이름이 눈에 띕니다.
박희근,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중국 한족 중에는 박 씨가 없기 때문에 간판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단골 손님은 전부 조선족이죠. 와서 간판을 보고 주인이 박 씨라는 걸 알고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말하는 손님들이 꽤 많아요."]
박희근 씨는 가게에 족보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박가보촌을 떠난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 누구 못지 않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예전 족보는 노란색 종이로 돼 있었는데 썩을까봐 새로 족보를 제작하게 됐어요. 집집마다 4~5천 위안(한화 70만 원)씩 기부해 족보를 만들었어요."]
번시현 시내에선 박 씨 성을 내건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오리고기 판매점 주인도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27살 젊은 나이에도 족보와 항렬이 자신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할아버지 성함이 박문현인데 11대손입니다. 할머니는 손 씨고요. 아버지 성함은 박문예인데 12대손이고요. 어머니는 동 씨입니다."]
박 씨도 통혼을 금지하는 가문 풍습에 따라 한족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앞으로 2세가 생기면 반드시 한국어를 가르칠 계획입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조선족이니까 반드시 한국어를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부모님도 저도 한국어는 할 줄 몰랐거든요."]
번시 박씨 후손들은 요즘 흔한 SNS 채팅방을 통해서도 교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내년엔 중국 이민 400주년을 맞아 번시현에 모여 대규모 기념 행사도 가질 계획입니다.
번시 박 씨 가문의 뿌리를 찾는 노력이 족보 구경하기 힘든 요즘 세상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랴오닝성 번시현에서 김명주입니다.
중국에는 무려 400년 동안 족보를 대물림하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우리말 우리글은 잊어버렸지만 항렬을 중시하며 어른을 깍듯이 모시고 김치를 담가먹는 등 민족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400년 혈통을 이어온 조선족의 시조, '번시 박 씨' 가문 얘기인데요.
김명주 특파원이 '번시 박 씨' 집성촌을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웅장한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진 시골 마을.
물가엔 오리떼가 떠다니고 한쪽에선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평온하고 넉넉한 마을입니다.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엔 '피아오푸'라고 쓰여 있습니다.
박 씨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곳이 바로 한민족의 후예들이 400년 혈통을 지켜온 번시 박씨 집성촌 '박가보촌'입니다.
아직도 이 마을엔 한 집 건너 한 집은 번시 박씨들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의 여느 농촌과 다름 없이 자식들은 다 떠나고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2백여 명의 번시 박씨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1대손인 박문만 선생은 가장 항렬이 높은 어르신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여기에는 감자랑 채소를 심고 저쪽에는 옥수수를 심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을 많이 못해요."]
세 자녀는 각자 도시에서 가정을 꾸려 살다보니 한족 아내와 둘 만 남았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가족들 사진을 꺼내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가족들 모두 조선족인가요?) 그럼요. 제가 조선족이니까 우리 가족 전부 조선족이죠."]
박문만 선생은 자신의 신분증까지 자랑스럽게 보여줬습니다.
1943년 11월 29일생 조선족입니다.
400년 혈통이 기록된 번시 박씨 족보는 이 집의 가보와도 같습니다.
가문 대표들이 집집마다 전해 내려오던 족보들을 모아 5년 간의 혈통 조사를 거쳐 지난 2015년 새 족보를 펴냈습니다.
이 마을에는 박문만 선생 조카도 만주족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
[박명구/번시 박씨 12대손 : "제가 71살이고 삼촌은 74살이라 3살 차이인데 큰 삼촌이라고 불러요. 삼촌을 정말 존경합니다. 만약에 삼촌이 10대라고 해도 작은 삼촌이라고 불러야 해요."]
번시 박씨는 지난 400년 동안 통혼을 금지하고, 자식을 낳으면 돌림자로 이름을 지어왔습니다.
30개나 되는 돌림자를 줄줄 외울 정도로 항렬을 중요시합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응천대중국, 자덕김부옥, 문명희승세, 준위진태창, 시서기홍업, 공유강무량 이렇게 돌림자가 있습니다."]
번시 박씨 선조는 1619년 강홍립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건넌 것으로 청나라 사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연합 작전을 펼치던 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패하자 전쟁 포로로 남게 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박명옥/번시 박씨 12대손 : "청나라 사기에는 포로라고 기록돼 있는데 전쟁터에서 투항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어요. 저는 투항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 번시 박 씨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한족으로 편입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인구 조사 때 집단 청원을 거쳐 조선족 신분을 되찾았습니다.
박가보촌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번시현 시내.
번시 박씨가 운영하는 한 식품점을 찾아가 봤습니다.
가게 간판에 주인 이름이 눈에 띕니다.
박희근,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중국 한족 중에는 박 씨가 없기 때문에 간판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단골 손님은 전부 조선족이죠. 와서 간판을 보고 주인이 박 씨라는 걸 알고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말하는 손님들이 꽤 많아요."]
박희근 씨는 가게에 족보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박가보촌을 떠난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 누구 못지 않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예전 족보는 노란색 종이로 돼 있었는데 썩을까봐 새로 족보를 제작하게 됐어요. 집집마다 4~5천 위안(한화 70만 원)씩 기부해 족보를 만들었어요."]
번시현 시내에선 박 씨 성을 내건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오리고기 판매점 주인도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27살 젊은 나이에도 족보와 항렬이 자신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할아버지 성함이 박문현인데 11대손입니다. 할머니는 손 씨고요. 아버지 성함은 박문예인데 12대손이고요. 어머니는 동 씨입니다."]
박 씨도 통혼을 금지하는 가문 풍습에 따라 한족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앞으로 2세가 생기면 반드시 한국어를 가르칠 계획입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조선족이니까 반드시 한국어를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부모님도 저도 한국어는 할 줄 몰랐거든요."]
번시 박씨 후손들은 요즘 흔한 SNS 채팅방을 통해서도 교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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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시 박 씨 가문의 뿌리를 찾는 노력이 족보 구경하기 힘든 요즘 세상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랴오닝성 번시현에서 김명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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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8-12-01 22:24:20
- 수정2018-12-01 22:38:01
[앵커]
중국에는 무려 400년 동안 족보를 대물림하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우리말 우리글은 잊어버렸지만 항렬을 중시하며 어른을 깍듯이 모시고 김치를 담가먹는 등 민족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400년 혈통을 이어온 조선족의 시조, '번시 박 씨' 가문 얘기인데요.
김명주 특파원이 '번시 박 씨' 집성촌을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웅장한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진 시골 마을.
물가엔 오리떼가 떠다니고 한쪽에선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평온하고 넉넉한 마을입니다.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엔 '피아오푸'라고 쓰여 있습니다.
박 씨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곳이 바로 한민족의 후예들이 400년 혈통을 지켜온 번시 박씨 집성촌 '박가보촌'입니다.
아직도 이 마을엔 한 집 건너 한 집은 번시 박씨들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의 여느 농촌과 다름 없이 자식들은 다 떠나고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2백여 명의 번시 박씨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1대손인 박문만 선생은 가장 항렬이 높은 어르신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여기에는 감자랑 채소를 심고 저쪽에는 옥수수를 심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을 많이 못해요."]
세 자녀는 각자 도시에서 가정을 꾸려 살다보니 한족 아내와 둘 만 남았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가족들 사진을 꺼내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가족들 모두 조선족인가요?) 그럼요. 제가 조선족이니까 우리 가족 전부 조선족이죠."]
박문만 선생은 자신의 신분증까지 자랑스럽게 보여줬습니다.
1943년 11월 29일생 조선족입니다.
400년 혈통이 기록된 번시 박씨 족보는 이 집의 가보와도 같습니다.
가문 대표들이 집집마다 전해 내려오던 족보들을 모아 5년 간의 혈통 조사를 거쳐 지난 2015년 새 족보를 펴냈습니다.
이 마을에는 박문만 선생 조카도 만주족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
[박명구/번시 박씨 12대손 : "제가 71살이고 삼촌은 74살이라 3살 차이인데 큰 삼촌이라고 불러요. 삼촌을 정말 존경합니다. 만약에 삼촌이 10대라고 해도 작은 삼촌이라고 불러야 해요."]
번시 박씨는 지난 400년 동안 통혼을 금지하고, 자식을 낳으면 돌림자로 이름을 지어왔습니다.
30개나 되는 돌림자를 줄줄 외울 정도로 항렬을 중요시합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응천대중국, 자덕김부옥, 문명희승세, 준위진태창, 시서기홍업, 공유강무량 이렇게 돌림자가 있습니다."]
번시 박씨 선조는 1619년 강홍립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건넌 것으로 청나라 사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연합 작전을 펼치던 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패하자 전쟁 포로로 남게 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박명옥/번시 박씨 12대손 : "청나라 사기에는 포로라고 기록돼 있는데 전쟁터에서 투항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어요. 저는 투항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 번시 박 씨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한족으로 편입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인구 조사 때 집단 청원을 거쳐 조선족 신분을 되찾았습니다.
박가보촌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번시현 시내.
번시 박씨가 운영하는 한 식품점을 찾아가 봤습니다.
가게 간판에 주인 이름이 눈에 띕니다.
박희근,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중국 한족 중에는 박 씨가 없기 때문에 간판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단골 손님은 전부 조선족이죠. 와서 간판을 보고 주인이 박 씨라는 걸 알고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말하는 손님들이 꽤 많아요."]
박희근 씨는 가게에 족보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박가보촌을 떠난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 누구 못지 않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예전 족보는 노란색 종이로 돼 있었는데 썩을까봐 새로 족보를 제작하게 됐어요. 집집마다 4~5천 위안(한화 70만 원)씩 기부해 족보를 만들었어요."]
번시현 시내에선 박 씨 성을 내건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오리고기 판매점 주인도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27살 젊은 나이에도 족보와 항렬이 자신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할아버지 성함이 박문현인데 11대손입니다. 할머니는 손 씨고요. 아버지 성함은 박문예인데 12대손이고요. 어머니는 동 씨입니다."]
박 씨도 통혼을 금지하는 가문 풍습에 따라 한족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앞으로 2세가 생기면 반드시 한국어를 가르칠 계획입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조선족이니까 반드시 한국어를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부모님도 저도 한국어는 할 줄 몰랐거든요."]
번시 박씨 후손들은 요즘 흔한 SNS 채팅방을 통해서도 교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내년엔 중국 이민 400주년을 맞아 번시현에 모여 대규모 기념 행사도 가질 계획입니다.
번시 박 씨 가문의 뿌리를 찾는 노력이 족보 구경하기 힘든 요즘 세상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랴오닝성 번시현에서 김명주입니다.
중국에는 무려 400년 동안 족보를 대물림하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우리말 우리글은 잊어버렸지만 항렬을 중시하며 어른을 깍듯이 모시고 김치를 담가먹는 등 민족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400년 혈통을 이어온 조선족의 시조, '번시 박 씨' 가문 얘기인데요.
김명주 특파원이 '번시 박 씨' 집성촌을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웅장한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진 시골 마을.
물가엔 오리떼가 떠다니고 한쪽에선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평온하고 넉넉한 마을입니다.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엔 '피아오푸'라고 쓰여 있습니다.
박 씨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곳이 바로 한민족의 후예들이 400년 혈통을 지켜온 번시 박씨 집성촌 '박가보촌'입니다.
아직도 이 마을엔 한 집 건너 한 집은 번시 박씨들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의 여느 농촌과 다름 없이 자식들은 다 떠나고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2백여 명의 번시 박씨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1대손인 박문만 선생은 가장 항렬이 높은 어르신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여기에는 감자랑 채소를 심고 저쪽에는 옥수수를 심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을 많이 못해요."]
세 자녀는 각자 도시에서 가정을 꾸려 살다보니 한족 아내와 둘 만 남았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가족들 사진을 꺼내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가족들 모두 조선족인가요?) 그럼요. 제가 조선족이니까 우리 가족 전부 조선족이죠."]
박문만 선생은 자신의 신분증까지 자랑스럽게 보여줬습니다.
1943년 11월 29일생 조선족입니다.
400년 혈통이 기록된 번시 박씨 족보는 이 집의 가보와도 같습니다.
가문 대표들이 집집마다 전해 내려오던 족보들을 모아 5년 간의 혈통 조사를 거쳐 지난 2015년 새 족보를 펴냈습니다.
이 마을에는 박문만 선생 조카도 만주족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
[박명구/번시 박씨 12대손 : "제가 71살이고 삼촌은 74살이라 3살 차이인데 큰 삼촌이라고 불러요. 삼촌을 정말 존경합니다. 만약에 삼촌이 10대라고 해도 작은 삼촌이라고 불러야 해요."]
번시 박씨는 지난 400년 동안 통혼을 금지하고, 자식을 낳으면 돌림자로 이름을 지어왔습니다.
30개나 되는 돌림자를 줄줄 외울 정도로 항렬을 중요시합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응천대중국, 자덕김부옥, 문명희승세, 준위진태창, 시서기홍업, 공유강무량 이렇게 돌림자가 있습니다."]
번시 박씨 선조는 1619년 강홍립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건넌 것으로 청나라 사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연합 작전을 펼치던 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패하자 전쟁 포로로 남게 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박명옥/번시 박씨 12대손 : "청나라 사기에는 포로라고 기록돼 있는데 전쟁터에서 투항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어요. 저는 투항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 번시 박 씨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한족으로 편입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인구 조사 때 집단 청원을 거쳐 조선족 신분을 되찾았습니다.
박가보촌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번시현 시내.
번시 박씨가 운영하는 한 식품점을 찾아가 봤습니다.
가게 간판에 주인 이름이 눈에 띕니다.
박희근,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중국 한족 중에는 박 씨가 없기 때문에 간판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단골 손님은 전부 조선족이죠. 와서 간판을 보고 주인이 박 씨라는 걸 알고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말하는 손님들이 꽤 많아요."]
박희근 씨는 가게에 족보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박가보촌을 떠난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 누구 못지 않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예전 족보는 노란색 종이로 돼 있었는데 썩을까봐 새로 족보를 제작하게 됐어요. 집집마다 4~5천 위안(한화 70만 원)씩 기부해 족보를 만들었어요."]
번시현 시내에선 박 씨 성을 내건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오리고기 판매점 주인도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27살 젊은 나이에도 족보와 항렬이 자신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할아버지 성함이 박문현인데 11대손입니다. 할머니는 손 씨고요. 아버지 성함은 박문예인데 12대손이고요. 어머니는 동 씨입니다."]
박 씨도 통혼을 금지하는 가문 풍습에 따라 한족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앞으로 2세가 생기면 반드시 한국어를 가르칠 계획입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조선족이니까 반드시 한국어를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부모님도 저도 한국어는 할 줄 몰랐거든요."]
번시 박씨 후손들은 요즘 흔한 SNS 채팅방을 통해서도 교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내년엔 중국 이민 400주년을 맞아 번시현에 모여 대규모 기념 행사도 가질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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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주 기자 silk@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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