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사진으로 이룬 이산가족 상봉
입력 2019.01.12 (08:19)
수정 2019.01.1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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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한반도가 분단된 지 올해로 74년이 되었는데요.
흐르는 세월이 누구보다 야속했을 이들이 있죠.
바로 북쪽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들입니다.
긴 세월을 헤어져 살아야 했던 이산가족들.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가족의 얼굴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 말하는데요.
그래서 이번 주 통일로 미래로에서는 조금 특별한 가족사진을 소개할까 합니다.
첨단 사진기술을 이용해 70여 년 전 가족의 모습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겁니다.
이산가족들에겐 정말 큰 선물이 되었겠네요.
사진으로나마 그리운 가족을 마주한 이산가족들, 정은지 리포터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임진강 너머로 북녘땅이 보이는 오두산 통일 전망대.
이곳에선 이산과 실향의 사연이 담긴 1만 5천여 점의 물품이 전시 중인데요.
고향을 그린 지도, 피란을 떠날 때 입던 옷,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과자상자는 포장도 뜯지 못한 채 그대로입니다.
[김춘희/경기도 의정부 : "슬픈 마음이 들었어요. (왜 슬펐어요?) 이산가족이 같이 사는데 전쟁이 나서 떨어지니까... 떨어져서 사니까 마음이 아팠어요."]
[한낭기/인천시 부평구 : "한사람이라도 더 빨리 생존해 계실 때, 그것도 지금 연세가 많잖아요, 한분이라도 더 만났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우리도 그걸 느끼지. 후세가 또 그런 걸 느끼고 보지."]
북녘의 가족들을 그리는 이산가족의 안타까운 사연들.
그간 20여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행사로 가족을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2천여 명에 불과한데요.
그 동안 이산가족으로 등록한 13만여 명 중 7만 6천여 명이 세상을 떠났고 남아있는 5만여 명 중에서도 60% 이상이 80세 이상의 고령입니다.
1.4후퇴 당시 9살이던 윤병국 할아버지는 큰형, 둘째형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어머니와 셋째 형은 북에 남았는데요.
[윤병국/이산가족 : "(이렇게 헤어질 거라곤) 전혀 꿈도 못 꿨죠. 어른들도 길면 몇 달 아니겠냐 그랬다고 그래. 다들."]
피란생활을 가장 힘들게 한 건 어머니의 품을 향한 사무친 그리움이었습니다.
[윤병국/이산가족 : "피난민은 정말 거지였어요. 그 어려움을 겪을 때 그 보호자 없는 애들 일찍 철이 들어요. 애들이 자라요. 일찍 철이 들어. 엄마가 없기 때문에…."]
윤 할아버지의 보물은 30년 전 지인으로부터 받았다는 낡은 가족사진 한 장.
인자한 인상의 어머니 품엔 윤 할아버지가 안겨있습니다.
[윤병국/이산가족 : "우리 어머니, 아버지 사진이 유일하게 이거 한 장이 남아 있어요. 한 장."]
서울 삼청동의 한 갤러리.
윤 할아버지의 가족사진이 벽에 걸렸습니다.
윤 할아버지와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주름진 얼굴의 어머니와 셋째형.
최근에 찍은 듯한 사진인데요.
헤어진 뒤 지금까지 북녘의 가족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할아버지인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2015년 여름, 국내의 한 광고회사와 함께 사진을 통한 이산가족 상봉을 시도한 변순철 작가.
2014년 개발된 3D 나이 변환 기술로 옛 가족사진 속 북녘 가족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을 입혔습니다.
[변순철/사진작가 : "한국 영상미디어 연구원에서 나이변환 프로그램으로 변환해서 오면 그걸 활용해서 최대한 근사치에 가깝게 해서 이분들이 만나고 싶은 혈육들의 사진을 다시 오버랩해서 시각화 한 거죠. 그걸 다시 얼굴을 합성해서…."]
사진으로나마 북녘 가족들과의 상봉을 이뤄드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도 담겼는데요.
[변순철/사진작가 :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는데도 쉽지는 않더라고요. 촬영하면서 이렇게 혀를 많이 깨물어본 적은 처음이에요. 왜냐하면 그 순간에 나도 울면 안 되기 때문에…."]
사진 너머로 전해지는 절절한 그리움.
관객들의 마음까지 움직입니다.
[고화인/미국 캘리포니아주 : "세월이나 이념이나 각자 사는 그런 사회는 다르고 또 유한할 수 있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 이런 것들은 정말 끊어지지 않고 무한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고…."]
사진 속 북녘의 언니들이라도 만나기 위해 남동생과 함께 전시장을 찾은 임화숙 할머니.
결혼을 해서 남으로 넘어올 수 없었던 언니와의 생이별이 72년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결혼한 여자들은 (위안부에) 못 데려갔어요. 그러니까 결혼을 일찍 다 시켰죠. 위안부 안 보내려고. 그러니까 일찍 결혼했기 때문에 (피란 때)같이 못 왔죠."]
유난히 사이좋던 남매들.
옛 가족사진으로만 그리워한지 너무 오래인데요.
[임화숙/이산가족 : "나한테 옷도 잘 만들어줬어. 재주가 있어가지고 나한테 원피스도 여름에 만들어주고 겨울에는 뜨개질해서 모자도 짜주고 스웨터도 짜주고."]
이제는 나이 든 언니, 누나의 얼굴.
사진이라도 바라보고 옆에 서 보며 먹먹한 그리움을 달래 봅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그냥 (보고 싶죠) 너무너무 그냥 이렇게 실제라면 얼마나 진짜 꿈같을까 싶은 게 이렇게라도 만나 보니까..."]
북녘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포기하려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인데요.
새로 찍은 가족사진이 이산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주었으면 합니다.
사진으로 만난 가족 이젠 얼굴을 마주한 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화순 언니, 화영 언니, 화엽 언니. 세 언니 지금도 살아 계세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언니들 꼭 한번 보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그랬는데 어머니는 그 원을 못 이루고 돌아가셨어요. 언니들 제발 좀 살아계셔서 우리 한번 얼굴 봤으면 좋겠어요."]
[윤병국/이산가족 : "제가 생전에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 처음으로 불러봅니다. 어머니 이제 이 막내 곁을 떠나세요. 그리고 양지바른 그곳에 가서 영원히 영면 하십시오. 제가 통일되면 꼭 가서 어머니 산소 가볼게요."]
이들의 소원이 하루라도 빨리 실현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 올해로 74년이 되었는데요.
흐르는 세월이 누구보다 야속했을 이들이 있죠.
바로 북쪽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들입니다.
긴 세월을 헤어져 살아야 했던 이산가족들.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가족의 얼굴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 말하는데요.
그래서 이번 주 통일로 미래로에서는 조금 특별한 가족사진을 소개할까 합니다.
첨단 사진기술을 이용해 70여 년 전 가족의 모습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겁니다.
이산가족들에겐 정말 큰 선물이 되었겠네요.
사진으로나마 그리운 가족을 마주한 이산가족들, 정은지 리포터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임진강 너머로 북녘땅이 보이는 오두산 통일 전망대.
이곳에선 이산과 실향의 사연이 담긴 1만 5천여 점의 물품이 전시 중인데요.
고향을 그린 지도, 피란을 떠날 때 입던 옷,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과자상자는 포장도 뜯지 못한 채 그대로입니다.
[김춘희/경기도 의정부 : "슬픈 마음이 들었어요. (왜 슬펐어요?) 이산가족이 같이 사는데 전쟁이 나서 떨어지니까... 떨어져서 사니까 마음이 아팠어요."]
[한낭기/인천시 부평구 : "한사람이라도 더 빨리 생존해 계실 때, 그것도 지금 연세가 많잖아요, 한분이라도 더 만났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우리도 그걸 느끼지. 후세가 또 그런 걸 느끼고 보지."]
북녘의 가족들을 그리는 이산가족의 안타까운 사연들.
그간 20여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행사로 가족을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2천여 명에 불과한데요.
그 동안 이산가족으로 등록한 13만여 명 중 7만 6천여 명이 세상을 떠났고 남아있는 5만여 명 중에서도 60% 이상이 80세 이상의 고령입니다.
1.4후퇴 당시 9살이던 윤병국 할아버지는 큰형, 둘째형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어머니와 셋째 형은 북에 남았는데요.
[윤병국/이산가족 : "(이렇게 헤어질 거라곤) 전혀 꿈도 못 꿨죠. 어른들도 길면 몇 달 아니겠냐 그랬다고 그래. 다들."]
피란생활을 가장 힘들게 한 건 어머니의 품을 향한 사무친 그리움이었습니다.
[윤병국/이산가족 : "피난민은 정말 거지였어요. 그 어려움을 겪을 때 그 보호자 없는 애들 일찍 철이 들어요. 애들이 자라요. 일찍 철이 들어. 엄마가 없기 때문에…."]
윤 할아버지의 보물은 30년 전 지인으로부터 받았다는 낡은 가족사진 한 장.
인자한 인상의 어머니 품엔 윤 할아버지가 안겨있습니다.
[윤병국/이산가족 : "우리 어머니, 아버지 사진이 유일하게 이거 한 장이 남아 있어요. 한 장."]
서울 삼청동의 한 갤러리.
윤 할아버지의 가족사진이 벽에 걸렸습니다.
윤 할아버지와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주름진 얼굴의 어머니와 셋째형.
최근에 찍은 듯한 사진인데요.
헤어진 뒤 지금까지 북녘의 가족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할아버지인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2015년 여름, 국내의 한 광고회사와 함께 사진을 통한 이산가족 상봉을 시도한 변순철 작가.
2014년 개발된 3D 나이 변환 기술로 옛 가족사진 속 북녘 가족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을 입혔습니다.
[변순철/사진작가 : "한국 영상미디어 연구원에서 나이변환 프로그램으로 변환해서 오면 그걸 활용해서 최대한 근사치에 가깝게 해서 이분들이 만나고 싶은 혈육들의 사진을 다시 오버랩해서 시각화 한 거죠. 그걸 다시 얼굴을 합성해서…."]
사진으로나마 북녘 가족들과의 상봉을 이뤄드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도 담겼는데요.
[변순철/사진작가 :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는데도 쉽지는 않더라고요. 촬영하면서 이렇게 혀를 많이 깨물어본 적은 처음이에요. 왜냐하면 그 순간에 나도 울면 안 되기 때문에…."]
사진 너머로 전해지는 절절한 그리움.
관객들의 마음까지 움직입니다.
[고화인/미국 캘리포니아주 : "세월이나 이념이나 각자 사는 그런 사회는 다르고 또 유한할 수 있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 이런 것들은 정말 끊어지지 않고 무한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고…."]
사진 속 북녘의 언니들이라도 만나기 위해 남동생과 함께 전시장을 찾은 임화숙 할머니.
결혼을 해서 남으로 넘어올 수 없었던 언니와의 생이별이 72년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결혼한 여자들은 (위안부에) 못 데려갔어요. 그러니까 결혼을 일찍 다 시켰죠. 위안부 안 보내려고. 그러니까 일찍 결혼했기 때문에 (피란 때)같이 못 왔죠."]
유난히 사이좋던 남매들.
옛 가족사진으로만 그리워한지 너무 오래인데요.
[임화숙/이산가족 : "나한테 옷도 잘 만들어줬어. 재주가 있어가지고 나한테 원피스도 여름에 만들어주고 겨울에는 뜨개질해서 모자도 짜주고 스웨터도 짜주고."]
이제는 나이 든 언니, 누나의 얼굴.
사진이라도 바라보고 옆에 서 보며 먹먹한 그리움을 달래 봅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그냥 (보고 싶죠) 너무너무 그냥 이렇게 실제라면 얼마나 진짜 꿈같을까 싶은 게 이렇게라도 만나 보니까..."]
북녘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포기하려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인데요.
새로 찍은 가족사진이 이산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주었으면 합니다.
사진으로 만난 가족 이젠 얼굴을 마주한 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화순 언니, 화영 언니, 화엽 언니. 세 언니 지금도 살아 계세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언니들 꼭 한번 보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그랬는데 어머니는 그 원을 못 이루고 돌아가셨어요. 언니들 제발 좀 살아계셔서 우리 한번 얼굴 봤으면 좋겠어요."]
[윤병국/이산가족 : "제가 생전에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 처음으로 불러봅니다. 어머니 이제 이 막내 곁을 떠나세요. 그리고 양지바른 그곳에 가서 영원히 영면 하십시오. 제가 통일되면 꼭 가서 어머니 산소 가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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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01-12 08:28:40
- 수정2019-01-12 10:40:08
[앵커]
한반도가 분단된 지 올해로 74년이 되었는데요.
흐르는 세월이 누구보다 야속했을 이들이 있죠.
바로 북쪽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들입니다.
긴 세월을 헤어져 살아야 했던 이산가족들.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가족의 얼굴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 말하는데요.
그래서 이번 주 통일로 미래로에서는 조금 특별한 가족사진을 소개할까 합니다.
첨단 사진기술을 이용해 70여 년 전 가족의 모습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겁니다.
이산가족들에겐 정말 큰 선물이 되었겠네요.
사진으로나마 그리운 가족을 마주한 이산가족들, 정은지 리포터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임진강 너머로 북녘땅이 보이는 오두산 통일 전망대.
이곳에선 이산과 실향의 사연이 담긴 1만 5천여 점의 물품이 전시 중인데요.
고향을 그린 지도, 피란을 떠날 때 입던 옷,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과자상자는 포장도 뜯지 못한 채 그대로입니다.
[김춘희/경기도 의정부 : "슬픈 마음이 들었어요. (왜 슬펐어요?) 이산가족이 같이 사는데 전쟁이 나서 떨어지니까... 떨어져서 사니까 마음이 아팠어요."]
[한낭기/인천시 부평구 : "한사람이라도 더 빨리 생존해 계실 때, 그것도 지금 연세가 많잖아요, 한분이라도 더 만났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우리도 그걸 느끼지. 후세가 또 그런 걸 느끼고 보지."]
북녘의 가족들을 그리는 이산가족의 안타까운 사연들.
그간 20여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행사로 가족을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2천여 명에 불과한데요.
그 동안 이산가족으로 등록한 13만여 명 중 7만 6천여 명이 세상을 떠났고 남아있는 5만여 명 중에서도 60% 이상이 80세 이상의 고령입니다.
1.4후퇴 당시 9살이던 윤병국 할아버지는 큰형, 둘째형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어머니와 셋째 형은 북에 남았는데요.
[윤병국/이산가족 : "(이렇게 헤어질 거라곤) 전혀 꿈도 못 꿨죠. 어른들도 길면 몇 달 아니겠냐 그랬다고 그래. 다들."]
피란생활을 가장 힘들게 한 건 어머니의 품을 향한 사무친 그리움이었습니다.
[윤병국/이산가족 : "피난민은 정말 거지였어요. 그 어려움을 겪을 때 그 보호자 없는 애들 일찍 철이 들어요. 애들이 자라요. 일찍 철이 들어. 엄마가 없기 때문에…."]
윤 할아버지의 보물은 30년 전 지인으로부터 받았다는 낡은 가족사진 한 장.
인자한 인상의 어머니 품엔 윤 할아버지가 안겨있습니다.
[윤병국/이산가족 : "우리 어머니, 아버지 사진이 유일하게 이거 한 장이 남아 있어요. 한 장."]
서울 삼청동의 한 갤러리.
윤 할아버지의 가족사진이 벽에 걸렸습니다.
윤 할아버지와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주름진 얼굴의 어머니와 셋째형.
최근에 찍은 듯한 사진인데요.
헤어진 뒤 지금까지 북녘의 가족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할아버지인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2015년 여름, 국내의 한 광고회사와 함께 사진을 통한 이산가족 상봉을 시도한 변순철 작가.
2014년 개발된 3D 나이 변환 기술로 옛 가족사진 속 북녘 가족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을 입혔습니다.
[변순철/사진작가 : "한국 영상미디어 연구원에서 나이변환 프로그램으로 변환해서 오면 그걸 활용해서 최대한 근사치에 가깝게 해서 이분들이 만나고 싶은 혈육들의 사진을 다시 오버랩해서 시각화 한 거죠. 그걸 다시 얼굴을 합성해서…."]
사진으로나마 북녘 가족들과의 상봉을 이뤄드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도 담겼는데요.
[변순철/사진작가 :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는데도 쉽지는 않더라고요. 촬영하면서 이렇게 혀를 많이 깨물어본 적은 처음이에요. 왜냐하면 그 순간에 나도 울면 안 되기 때문에…."]
사진 너머로 전해지는 절절한 그리움.
관객들의 마음까지 움직입니다.
[고화인/미국 캘리포니아주 : "세월이나 이념이나 각자 사는 그런 사회는 다르고 또 유한할 수 있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 이런 것들은 정말 끊어지지 않고 무한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고…."]
사진 속 북녘의 언니들이라도 만나기 위해 남동생과 함께 전시장을 찾은 임화숙 할머니.
결혼을 해서 남으로 넘어올 수 없었던 언니와의 생이별이 72년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결혼한 여자들은 (위안부에) 못 데려갔어요. 그러니까 결혼을 일찍 다 시켰죠. 위안부 안 보내려고. 그러니까 일찍 결혼했기 때문에 (피란 때)같이 못 왔죠."]
유난히 사이좋던 남매들.
옛 가족사진으로만 그리워한지 너무 오래인데요.
[임화숙/이산가족 : "나한테 옷도 잘 만들어줬어. 재주가 있어가지고 나한테 원피스도 여름에 만들어주고 겨울에는 뜨개질해서 모자도 짜주고 스웨터도 짜주고."]
이제는 나이 든 언니, 누나의 얼굴.
사진이라도 바라보고 옆에 서 보며 먹먹한 그리움을 달래 봅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그냥 (보고 싶죠) 너무너무 그냥 이렇게 실제라면 얼마나 진짜 꿈같을까 싶은 게 이렇게라도 만나 보니까..."]
북녘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포기하려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인데요.
새로 찍은 가족사진이 이산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주었으면 합니다.
사진으로 만난 가족 이젠 얼굴을 마주한 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화순 언니, 화영 언니, 화엽 언니. 세 언니 지금도 살아 계세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언니들 꼭 한번 보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그랬는데 어머니는 그 원을 못 이루고 돌아가셨어요. 언니들 제발 좀 살아계셔서 우리 한번 얼굴 봤으면 좋겠어요."]
[윤병국/이산가족 : "제가 생전에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 처음으로 불러봅니다. 어머니 이제 이 막내 곁을 떠나세요. 그리고 양지바른 그곳에 가서 영원히 영면 하십시오. 제가 통일되면 꼭 가서 어머니 산소 가볼게요."]
이들의 소원이 하루라도 빨리 실현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 올해로 74년이 되었는데요.
흐르는 세월이 누구보다 야속했을 이들이 있죠.
바로 북쪽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들입니다.
긴 세월을 헤어져 살아야 했던 이산가족들.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가족의 얼굴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 말하는데요.
그래서 이번 주 통일로 미래로에서는 조금 특별한 가족사진을 소개할까 합니다.
첨단 사진기술을 이용해 70여 년 전 가족의 모습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겁니다.
이산가족들에겐 정말 큰 선물이 되었겠네요.
사진으로나마 그리운 가족을 마주한 이산가족들, 정은지 리포터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임진강 너머로 북녘땅이 보이는 오두산 통일 전망대.
이곳에선 이산과 실향의 사연이 담긴 1만 5천여 점의 물품이 전시 중인데요.
고향을 그린 지도, 피란을 떠날 때 입던 옷,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과자상자는 포장도 뜯지 못한 채 그대로입니다.
[김춘희/경기도 의정부 : "슬픈 마음이 들었어요. (왜 슬펐어요?) 이산가족이 같이 사는데 전쟁이 나서 떨어지니까... 떨어져서 사니까 마음이 아팠어요."]
[한낭기/인천시 부평구 : "한사람이라도 더 빨리 생존해 계실 때, 그것도 지금 연세가 많잖아요, 한분이라도 더 만났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우리도 그걸 느끼지. 후세가 또 그런 걸 느끼고 보지."]
북녘의 가족들을 그리는 이산가족의 안타까운 사연들.
그간 20여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행사로 가족을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2천여 명에 불과한데요.
그 동안 이산가족으로 등록한 13만여 명 중 7만 6천여 명이 세상을 떠났고 남아있는 5만여 명 중에서도 60% 이상이 80세 이상의 고령입니다.
1.4후퇴 당시 9살이던 윤병국 할아버지는 큰형, 둘째형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어머니와 셋째 형은 북에 남았는데요.
[윤병국/이산가족 : "(이렇게 헤어질 거라곤) 전혀 꿈도 못 꿨죠. 어른들도 길면 몇 달 아니겠냐 그랬다고 그래. 다들."]
피란생활을 가장 힘들게 한 건 어머니의 품을 향한 사무친 그리움이었습니다.
[윤병국/이산가족 : "피난민은 정말 거지였어요. 그 어려움을 겪을 때 그 보호자 없는 애들 일찍 철이 들어요. 애들이 자라요. 일찍 철이 들어. 엄마가 없기 때문에…."]
윤 할아버지의 보물은 30년 전 지인으로부터 받았다는 낡은 가족사진 한 장.
인자한 인상의 어머니 품엔 윤 할아버지가 안겨있습니다.
[윤병국/이산가족 : "우리 어머니, 아버지 사진이 유일하게 이거 한 장이 남아 있어요. 한 장."]
서울 삼청동의 한 갤러리.
윤 할아버지의 가족사진이 벽에 걸렸습니다.
윤 할아버지와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주름진 얼굴의 어머니와 셋째형.
최근에 찍은 듯한 사진인데요.
헤어진 뒤 지금까지 북녘의 가족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할아버지인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2015년 여름, 국내의 한 광고회사와 함께 사진을 통한 이산가족 상봉을 시도한 변순철 작가.
2014년 개발된 3D 나이 변환 기술로 옛 가족사진 속 북녘 가족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을 입혔습니다.
[변순철/사진작가 : "한국 영상미디어 연구원에서 나이변환 프로그램으로 변환해서 오면 그걸 활용해서 최대한 근사치에 가깝게 해서 이분들이 만나고 싶은 혈육들의 사진을 다시 오버랩해서 시각화 한 거죠. 그걸 다시 얼굴을 합성해서…."]
사진으로나마 북녘 가족들과의 상봉을 이뤄드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도 담겼는데요.
[변순철/사진작가 :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는데도 쉽지는 않더라고요. 촬영하면서 이렇게 혀를 많이 깨물어본 적은 처음이에요. 왜냐하면 그 순간에 나도 울면 안 되기 때문에…."]
사진 너머로 전해지는 절절한 그리움.
관객들의 마음까지 움직입니다.
[고화인/미국 캘리포니아주 : "세월이나 이념이나 각자 사는 그런 사회는 다르고 또 유한할 수 있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 이런 것들은 정말 끊어지지 않고 무한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고…."]
사진 속 북녘의 언니들이라도 만나기 위해 남동생과 함께 전시장을 찾은 임화숙 할머니.
결혼을 해서 남으로 넘어올 수 없었던 언니와의 생이별이 72년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결혼한 여자들은 (위안부에) 못 데려갔어요. 그러니까 결혼을 일찍 다 시켰죠. 위안부 안 보내려고. 그러니까 일찍 결혼했기 때문에 (피란 때)같이 못 왔죠."]
유난히 사이좋던 남매들.
옛 가족사진으로만 그리워한지 너무 오래인데요.
[임화숙/이산가족 : "나한테 옷도 잘 만들어줬어. 재주가 있어가지고 나한테 원피스도 여름에 만들어주고 겨울에는 뜨개질해서 모자도 짜주고 스웨터도 짜주고."]
이제는 나이 든 언니, 누나의 얼굴.
사진이라도 바라보고 옆에 서 보며 먹먹한 그리움을 달래 봅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그냥 (보고 싶죠) 너무너무 그냥 이렇게 실제라면 얼마나 진짜 꿈같을까 싶은 게 이렇게라도 만나 보니까..."]
북녘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포기하려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인데요.
새로 찍은 가족사진이 이산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주었으면 합니다.
사진으로 만난 가족 이젠 얼굴을 마주한 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화순 언니, 화영 언니, 화엽 언니. 세 언니 지금도 살아 계세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언니들 꼭 한번 보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그랬는데 어머니는 그 원을 못 이루고 돌아가셨어요. 언니들 제발 좀 살아계셔서 우리 한번 얼굴 봤으면 좋겠어요."]
[윤병국/이산가족 : "제가 생전에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 처음으로 불러봅니다. 어머니 이제 이 막내 곁을 떠나세요. 그리고 양지바른 그곳에 가서 영원히 영면 하십시오. 제가 통일되면 꼭 가서 어머니 산소 가볼게요."]
이들의 소원이 하루라도 빨리 실현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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