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독립선언 100주년, 中 교민들이 재조명
입력 2019.01.28 (06:22)
수정 2019.01.28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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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중국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9인이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한 지 올해로 100년이 됐습니다.
'육탄 혈전'을 강조한 최초의 독립선언이었는데 중국 교민 사회가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선양 김명주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리포트]
3.1 기미독립선언보다 한 달 앞선 1919년 2월 1일.
항일 투쟁 중심지였던 중국 만주에서 안창호, 이시영, 신채호 등 해외 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됐습니다.
100년이 흘러 중국 선양 교민들이 마련한 기념 행사에서 무오독립선언이 다시 울려퍼졌습니다.
["이 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2·8 독립선언이나 3·1 기미독립선언에서 볼 수 없었던 강경한 표현도 등장합니다.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 일절 사망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 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이번 행사에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참석해 교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군가를 불렀습니다.
무오독립선언은 그동안 3.1 운동의 그늘에 가려 국내에서 홀대를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학계에서도 제대로 된 고증 없이 발표 장소 등에 대해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 "(무오독립선언에서) '육탄 혈전'을 선언하면서 바로 1년 후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무장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던 무오독립선언.
그 역사적 의미가 중국 교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선양에서 KBS 뉴스 김명주입니다.
중국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9인이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한 지 올해로 100년이 됐습니다.
'육탄 혈전'을 강조한 최초의 독립선언이었는데 중국 교민 사회가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선양 김명주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리포트]
3.1 기미독립선언보다 한 달 앞선 1919년 2월 1일.
항일 투쟁 중심지였던 중국 만주에서 안창호, 이시영, 신채호 등 해외 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됐습니다.
100년이 흘러 중국 선양 교민들이 마련한 기념 행사에서 무오독립선언이 다시 울려퍼졌습니다.
["이 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2·8 독립선언이나 3·1 기미독립선언에서 볼 수 없었던 강경한 표현도 등장합니다.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 일절 사망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 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이번 행사에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참석해 교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군가를 불렀습니다.
무오독립선언은 그동안 3.1 운동의 그늘에 가려 국내에서 홀대를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학계에서도 제대로 된 고증 없이 발표 장소 등에 대해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 "(무오독립선언에서) '육탄 혈전'을 선언하면서 바로 1년 후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무장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던 무오독립선언.
그 역사적 의미가 중국 교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선양에서 KBS 뉴스 김명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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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9인이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한 지 올해로 100년이 됐습니다.
'육탄 혈전'을 강조한 최초의 독립선언이었는데 중국 교민 사회가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선양 김명주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리포트]
3.1 기미독립선언보다 한 달 앞선 1919년 2월 1일.
항일 투쟁 중심지였던 중국 만주에서 안창호, 이시영, 신채호 등 해외 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됐습니다.
100년이 흘러 중국 선양 교민들이 마련한 기념 행사에서 무오독립선언이 다시 울려퍼졌습니다.
["이 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2·8 독립선언이나 3·1 기미독립선언에서 볼 수 없었던 강경한 표현도 등장합니다.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 일절 사망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 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이번 행사에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참석해 교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군가를 불렀습니다.
무오독립선언은 그동안 3.1 운동의 그늘에 가려 국내에서 홀대를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학계에서도 제대로 된 고증 없이 발표 장소 등에 대해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 "(무오독립선언에서) '육탄 혈전'을 선언하면서 바로 1년 후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무장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던 무오독립선언.
그 역사적 의미가 중국 교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선양에서 KBS 뉴스 김명주입니다.
중국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9인이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한 지 올해로 100년이 됐습니다.
'육탄 혈전'을 강조한 최초의 독립선언이었는데 중국 교민 사회가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선양 김명주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리포트]
3.1 기미독립선언보다 한 달 앞선 1919년 2월 1일.
항일 투쟁 중심지였던 중국 만주에서 안창호, 이시영, 신채호 등 해외 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됐습니다.
100년이 흘러 중국 선양 교민들이 마련한 기념 행사에서 무오독립선언이 다시 울려퍼졌습니다.
["이 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2·8 독립선언이나 3·1 기미독립선언에서 볼 수 없었던 강경한 표현도 등장합니다.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 일절 사망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 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이번 행사에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참석해 교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군가를 불렀습니다.
무오독립선언은 그동안 3.1 운동의 그늘에 가려 국내에서 홀대를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학계에서도 제대로 된 고증 없이 발표 장소 등에 대해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 "(무오독립선언에서) '육탄 혈전'을 선언하면서 바로 1년 후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무장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던 무오독립선언.
그 역사적 의미가 중국 교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선양에서 KBS 뉴스 김명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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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주 기자 silk@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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