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건국설화 방울’…주인은 누구였을까?
입력 2019.04.08 (07:01)
수정 2019.04.0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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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설화 담은 방울…4살 아이를 순장했다고?
지난달 경북 고령의 대가야 고분군에서 가야 건국설화가 그려진 토제 방울이 발굴돼 관심을 끌었습니다. 가야뿐만 아니라 한반도 고대국가에는 대부분 건국설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이 아닌 유물에 설화가 기록된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내용이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어서 더 주목받았습니다. 토제 방울의 그림이 건국설화가 맞다면, 고대사 연구의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유물이 나온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토제 방울이 나온 무덤에서는 사람 뼈와 치아도 함께 발굴됐습니다. 치아의 상태를 분석한 결과 사망 당시 나이는 4~5살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아이는 왜 그리 빨리 세상을 떠났을까요?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대동문화재연구원의 배성혁 조사연구실장은 지난달 설명회에서 "함께 발굴된 토기 같은 부장품을 볼 때, 무덤 주인의 신분이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면서 "인근에 큰 무덤이 하나 있고, 토제 방울 무덤처럼 작은 무덤이 연달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순장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큰 무덤의 주인공이 죽었을 때 함께 묻었다는 것이고, 이 아이는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겨우 4살 된 아이를 순장했다는 말이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야를 포함한 고대국가에서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하인을 함께 묻는 순장은 일반적인 풍습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에 발굴된 대가야 무덤인 지산동 44호분에서는 최소한 37명이 함께 묻힌 흔적이 발견됐는데, 여기서는 8~10살 정도 된 여자아이의 인골도 나왔습니다. 누군가 지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어린아이를 포함해 30명 이상을 순장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 당시 대가야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잔인한' 풍습이 있었던 셈입니다.
동시에 조성된 4.7m 무덤 확인…가족묘일 개연성도
새로운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3일, 대동문화재연구원이 토제 방울 무덤의 순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인근의 큰 무덤에 대한 시험발굴을 진행했습니다. 정식 발굴을 하기 전 유적의 규모와 성격 등을 파악하기 위한 간이조사인데, 여기서 길이가 4.7m에 이르는 석곽이 확인됐습니다. 석곽은 돌로 만든 관으로 볼 수 있는데 토제방울 무덤의 석곽이 1.6m 길이인 것에 비해 꽤 큰 규모입니다.
배성혁 실장은 "새로 확인된 무덤과 토제 방울 무덤은 함께 조성된 것이며, 처음 추정한 대로 순장이거나 배장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배장(陪葬)은 친족이나 특별한 관계인 사람을 가까이 묻는 것입니다. 인근에 토제 방울 무덤과 비슷한 크기의 무덤이 하나 더 있으니 최소 3곳의 무덤이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배 실장은 "석곽의 규모로 볼 때 큰 무덤의 주인공은 왕보다는 낮은 계급의 관료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처음 추정대로 순장 관계일 수도 있고, 성인을 위한 큰 무덤 옆에 일찍 세상을 떠난 후손을 묻은 가족묘일 수도 있습니다.
토제 방울은 아이를 위한 장난감이나 교재였을 수도
발굴 소식이 전해진 뒤 토제 방울의 그림을 건국설화로 보는 것이 성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림이 아주 작고 단순한 데다, 하늘에서 알이 내려왔다는 설화는 고령 대가야가 아닌 김해 금관가야의 것이라 의문을 제기할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야사 권위자로 꼽히는 홍익대학교 김태식 교수는 해당 그림이 건국설화로 보인다면서 흥미로운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토제방울 무덤이 조성된 5세기 무렵은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대가야의 세력이 강해지던 시기입니다. 김 교수는 "당시 고구려의 침입 등을 피해 금관가야 사람들이 대가야 지역으로 이주했고, 이들이 철기 문화를 전해주면서 대가야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토제방울을 만든 사람은 금관가야의 이주민으로, 자신들의 건국설화를 잊지 않기 위해 그려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김 교수는 또 "무덤 주인이 아이인 것으로 볼 때 건국설화를 설명해주기 위한 수단이었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큰 무덤이 확인됐다는 소식과 김 교수의 설명을 종합해서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큰 무덤의 주인은 금관가야에서 이주한 고위 관료로 토제 방울은 일찍 세상을 떠난 자녀를 위해 만든 장난감이나 교재다! 가설이기는 하지만 대가야의 세력이 확장되는 역사적인 배경과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무엇보다 4살 아이의 원치 않는 죽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장보다는 가족묘였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시험발굴로 확인된 큰 무덤은 지자체와 협의를 거쳐 곧 정식 발굴을 진행할 계획이어서 무덤의 주인을 조만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위 관료였을 무덤 주인이 4살 아이를 순장시킨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기를 기대해봅니다.
지난달 경북 고령의 대가야 고분군에서 가야 건국설화가 그려진 토제 방울이 발굴돼 관심을 끌었습니다. 가야뿐만 아니라 한반도 고대국가에는 대부분 건국설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이 아닌 유물에 설화가 기록된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내용이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어서 더 주목받았습니다. 토제 방울의 그림이 건국설화가 맞다면, 고대사 연구의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유물이 나온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무덤에서 출토된 4~5살 아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
토제 방울이 나온 무덤에서는 사람 뼈와 치아도 함께 발굴됐습니다. 치아의 상태를 분석한 결과 사망 당시 나이는 4~5살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아이는 왜 그리 빨리 세상을 떠났을까요?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대동문화재연구원의 배성혁 조사연구실장은 지난달 설명회에서 "함께 발굴된 토기 같은 부장품을 볼 때, 무덤 주인의 신분이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면서 "인근에 큰 무덤이 하나 있고, 토제 방울 무덤처럼 작은 무덤이 연달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순장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큰 무덤의 주인공이 죽었을 때 함께 묻었다는 것이고, 이 아이는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겨우 4살 된 아이를 순장했다는 말이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야를 포함한 고대국가에서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하인을 함께 묻는 순장은 일반적인 풍습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에 발굴된 대가야 무덤인 지산동 44호분에서는 최소한 37명이 함께 묻힌 흔적이 발견됐는데, 여기서는 8~10살 정도 된 여자아이의 인골도 나왔습니다. 누군가 지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어린아이를 포함해 30명 이상을 순장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 당시 대가야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잔인한' 풍습이 있었던 셈입니다.
동시에 조성된 4.7m 무덤 확인…가족묘일 개연성도
방울이 출토된 석곽 무덤과 뒤편으로 이어지는 봉분들
새로운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3일, 대동문화재연구원이 토제 방울 무덤의 순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인근의 큰 무덤에 대한 시험발굴을 진행했습니다. 정식 발굴을 하기 전 유적의 규모와 성격 등을 파악하기 위한 간이조사인데, 여기서 길이가 4.7m에 이르는 석곽이 확인됐습니다. 석곽은 돌로 만든 관으로 볼 수 있는데 토제방울 무덤의 석곽이 1.6m 길이인 것에 비해 꽤 큰 규모입니다.
배성혁 실장은 "새로 확인된 무덤과 토제 방울 무덤은 함께 조성된 것이며, 처음 추정한 대로 순장이거나 배장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배장(陪葬)은 친족이나 특별한 관계인 사람을 가까이 묻는 것입니다. 인근에 토제 방울 무덤과 비슷한 크기의 무덤이 하나 더 있으니 최소 3곳의 무덤이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배 실장은 "석곽의 규모로 볼 때 큰 무덤의 주인공은 왕보다는 낮은 계급의 관료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처음 추정대로 순장 관계일 수도 있고, 성인을 위한 큰 무덤 옆에 일찍 세상을 떠난 후손을 묻은 가족묘일 수도 있습니다.
토제 방울은 아이를 위한 장난감이나 교재였을 수도
방울 안쪽에서 확인되는 소리를 내기 위한 구슬이 보인다
발굴 소식이 전해진 뒤 토제 방울의 그림을 건국설화로 보는 것이 성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림이 아주 작고 단순한 데다, 하늘에서 알이 내려왔다는 설화는 고령 대가야가 아닌 김해 금관가야의 것이라 의문을 제기할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야사 권위자로 꼽히는 홍익대학교 김태식 교수는 해당 그림이 건국설화로 보인다면서 흥미로운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토제방울 무덤이 조성된 5세기 무렵은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대가야의 세력이 강해지던 시기입니다. 김 교수는 "당시 고구려의 침입 등을 피해 금관가야 사람들이 대가야 지역으로 이주했고, 이들이 철기 문화를 전해주면서 대가야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토제방울을 만든 사람은 금관가야의 이주민으로, 자신들의 건국설화를 잊지 않기 위해 그려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김 교수는 또 "무덤 주인이 아이인 것으로 볼 때 건국설화를 설명해주기 위한 수단이었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큰 무덤이 확인됐다는 소식과 김 교수의 설명을 종합해서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큰 무덤의 주인은 금관가야에서 이주한 고위 관료로 토제 방울은 일찍 세상을 떠난 자녀를 위해 만든 장난감이나 교재다! 가설이기는 하지만 대가야의 세력이 확장되는 역사적인 배경과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무엇보다 4살 아이의 원치 않는 죽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장보다는 가족묘였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시험발굴로 확인된 큰 무덤은 지자체와 협의를 거쳐 곧 정식 발굴을 진행할 계획이어서 무덤의 주인을 조만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위 관료였을 무덤 주인이 4살 아이를 순장시킨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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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04-08 07:01:30
- 수정2019-04-08 07:40:27
건국설화 담은 방울…4살 아이를 순장했다고?
지난달 경북 고령의 대가야 고분군에서 가야 건국설화가 그려진 토제 방울이 발굴돼 관심을 끌었습니다. 가야뿐만 아니라 한반도 고대국가에는 대부분 건국설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이 아닌 유물에 설화가 기록된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내용이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어서 더 주목받았습니다. 토제 방울의 그림이 건국설화가 맞다면, 고대사 연구의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유물이 나온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토제 방울이 나온 무덤에서는 사람 뼈와 치아도 함께 발굴됐습니다. 치아의 상태를 분석한 결과 사망 당시 나이는 4~5살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아이는 왜 그리 빨리 세상을 떠났을까요?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대동문화재연구원의 배성혁 조사연구실장은 지난달 설명회에서 "함께 발굴된 토기 같은 부장품을 볼 때, 무덤 주인의 신분이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면서 "인근에 큰 무덤이 하나 있고, 토제 방울 무덤처럼 작은 무덤이 연달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순장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큰 무덤의 주인공이 죽었을 때 함께 묻었다는 것이고, 이 아이는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겨우 4살 된 아이를 순장했다는 말이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야를 포함한 고대국가에서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하인을 함께 묻는 순장은 일반적인 풍습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에 발굴된 대가야 무덤인 지산동 44호분에서는 최소한 37명이 함께 묻힌 흔적이 발견됐는데, 여기서는 8~10살 정도 된 여자아이의 인골도 나왔습니다. 누군가 지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어린아이를 포함해 30명 이상을 순장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 당시 대가야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잔인한' 풍습이 있었던 셈입니다.
동시에 조성된 4.7m 무덤 확인…가족묘일 개연성도
새로운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3일, 대동문화재연구원이 토제 방울 무덤의 순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인근의 큰 무덤에 대한 시험발굴을 진행했습니다. 정식 발굴을 하기 전 유적의 규모와 성격 등을 파악하기 위한 간이조사인데, 여기서 길이가 4.7m에 이르는 석곽이 확인됐습니다. 석곽은 돌로 만든 관으로 볼 수 있는데 토제방울 무덤의 석곽이 1.6m 길이인 것에 비해 꽤 큰 규모입니다.
배성혁 실장은 "새로 확인된 무덤과 토제 방울 무덤은 함께 조성된 것이며, 처음 추정한 대로 순장이거나 배장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배장(陪葬)은 친족이나 특별한 관계인 사람을 가까이 묻는 것입니다. 인근에 토제 방울 무덤과 비슷한 크기의 무덤이 하나 더 있으니 최소 3곳의 무덤이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배 실장은 "석곽의 규모로 볼 때 큰 무덤의 주인공은 왕보다는 낮은 계급의 관료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처음 추정대로 순장 관계일 수도 있고, 성인을 위한 큰 무덤 옆에 일찍 세상을 떠난 후손을 묻은 가족묘일 수도 있습니다.
토제 방울은 아이를 위한 장난감이나 교재였을 수도
발굴 소식이 전해진 뒤 토제 방울의 그림을 건국설화로 보는 것이 성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림이 아주 작고 단순한 데다, 하늘에서 알이 내려왔다는 설화는 고령 대가야가 아닌 김해 금관가야의 것이라 의문을 제기할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야사 권위자로 꼽히는 홍익대학교 김태식 교수는 해당 그림이 건국설화로 보인다면서 흥미로운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토제방울 무덤이 조성된 5세기 무렵은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대가야의 세력이 강해지던 시기입니다. 김 교수는 "당시 고구려의 침입 등을 피해 금관가야 사람들이 대가야 지역으로 이주했고, 이들이 철기 문화를 전해주면서 대가야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토제방울을 만든 사람은 금관가야의 이주민으로, 자신들의 건국설화를 잊지 않기 위해 그려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김 교수는 또 "무덤 주인이 아이인 것으로 볼 때 건국설화를 설명해주기 위한 수단이었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큰 무덤이 확인됐다는 소식과 김 교수의 설명을 종합해서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큰 무덤의 주인은 금관가야에서 이주한 고위 관료로 토제 방울은 일찍 세상을 떠난 자녀를 위해 만든 장난감이나 교재다! 가설이기는 하지만 대가야의 세력이 확장되는 역사적인 배경과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무엇보다 4살 아이의 원치 않는 죽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장보다는 가족묘였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시험발굴로 확인된 큰 무덤은 지자체와 협의를 거쳐 곧 정식 발굴을 진행할 계획이어서 무덤의 주인을 조만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위 관료였을 무덤 주인이 4살 아이를 순장시킨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기를 기대해봅니다.
지난달 경북 고령의 대가야 고분군에서 가야 건국설화가 그려진 토제 방울이 발굴돼 관심을 끌었습니다. 가야뿐만 아니라 한반도 고대국가에는 대부분 건국설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이 아닌 유물에 설화가 기록된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내용이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어서 더 주목받았습니다. 토제 방울의 그림이 건국설화가 맞다면, 고대사 연구의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유물이 나온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토제 방울이 나온 무덤에서는 사람 뼈와 치아도 함께 발굴됐습니다. 치아의 상태를 분석한 결과 사망 당시 나이는 4~5살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아이는 왜 그리 빨리 세상을 떠났을까요?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대동문화재연구원의 배성혁 조사연구실장은 지난달 설명회에서 "함께 발굴된 토기 같은 부장품을 볼 때, 무덤 주인의 신분이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면서 "인근에 큰 무덤이 하나 있고, 토제 방울 무덤처럼 작은 무덤이 연달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순장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큰 무덤의 주인공이 죽었을 때 함께 묻었다는 것이고, 이 아이는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겨우 4살 된 아이를 순장했다는 말이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야를 포함한 고대국가에서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하인을 함께 묻는 순장은 일반적인 풍습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에 발굴된 대가야 무덤인 지산동 44호분에서는 최소한 37명이 함께 묻힌 흔적이 발견됐는데, 여기서는 8~10살 정도 된 여자아이의 인골도 나왔습니다. 누군가 지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어린아이를 포함해 30명 이상을 순장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 당시 대가야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잔인한' 풍습이 있었던 셈입니다.
동시에 조성된 4.7m 무덤 확인…가족묘일 개연성도
새로운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3일, 대동문화재연구원이 토제 방울 무덤의 순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인근의 큰 무덤에 대한 시험발굴을 진행했습니다. 정식 발굴을 하기 전 유적의 규모와 성격 등을 파악하기 위한 간이조사인데, 여기서 길이가 4.7m에 이르는 석곽이 확인됐습니다. 석곽은 돌로 만든 관으로 볼 수 있는데 토제방울 무덤의 석곽이 1.6m 길이인 것에 비해 꽤 큰 규모입니다.
배성혁 실장은 "새로 확인된 무덤과 토제 방울 무덤은 함께 조성된 것이며, 처음 추정한 대로 순장이거나 배장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배장(陪葬)은 친족이나 특별한 관계인 사람을 가까이 묻는 것입니다. 인근에 토제 방울 무덤과 비슷한 크기의 무덤이 하나 더 있으니 최소 3곳의 무덤이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배 실장은 "석곽의 규모로 볼 때 큰 무덤의 주인공은 왕보다는 낮은 계급의 관료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처음 추정대로 순장 관계일 수도 있고, 성인을 위한 큰 무덤 옆에 일찍 세상을 떠난 후손을 묻은 가족묘일 수도 있습니다.
토제 방울은 아이를 위한 장난감이나 교재였을 수도
발굴 소식이 전해진 뒤 토제 방울의 그림을 건국설화로 보는 것이 성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림이 아주 작고 단순한 데다, 하늘에서 알이 내려왔다는 설화는 고령 대가야가 아닌 김해 금관가야의 것이라 의문을 제기할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야사 권위자로 꼽히는 홍익대학교 김태식 교수는 해당 그림이 건국설화로 보인다면서 흥미로운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토제방울 무덤이 조성된 5세기 무렵은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대가야의 세력이 강해지던 시기입니다. 김 교수는 "당시 고구려의 침입 등을 피해 금관가야 사람들이 대가야 지역으로 이주했고, 이들이 철기 문화를 전해주면서 대가야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토제방울을 만든 사람은 금관가야의 이주민으로, 자신들의 건국설화를 잊지 않기 위해 그려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김 교수는 또 "무덤 주인이 아이인 것으로 볼 때 건국설화를 설명해주기 위한 수단이었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큰 무덤이 확인됐다는 소식과 김 교수의 설명을 종합해서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큰 무덤의 주인은 금관가야에서 이주한 고위 관료로 토제 방울은 일찍 세상을 떠난 자녀를 위해 만든 장난감이나 교재다! 가설이기는 하지만 대가야의 세력이 확장되는 역사적인 배경과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무엇보다 4살 아이의 원치 않는 죽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장보다는 가족묘였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시험발굴로 확인된 큰 무덤은 지자체와 협의를 거쳐 곧 정식 발굴을 진행할 계획이어서 무덤의 주인을 조만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위 관료였을 무덤 주인이 4살 아이를 순장시킨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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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엽 기자 imher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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