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꿀벌과 함께…탈북민 ‘달콤한 인생’

입력 2019.05.18 (08:20) 수정 2019.05.18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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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입니다.

꽃이 피면서 벌들의 움직임도 바빠지는데요.

꿀을 채취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가 바로 지금 5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꿀 생산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네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데요.

오늘 통일로 미래로에선 이 어려운 양봉업에 도전장을 던진 한 탈북여성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벌써 6년 째 양봉업을 이어오고 있다는데요.

열 개로 시작한 벌통이 지금은 2백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끊임없는 노력과 주변의 도움이 더해진 결과라고 하는데요.

채유나 리포터와 함께 만나보시죠.

[리포트]

햇살이 따뜻한 5월의 주말,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모습입니다.

벌들의 날갯짓 소리로 가득한 이곳은 탈북민 국화 씨가 운영하고 있는 양봉장입니다.

5월은, 일 년 중 가장 바쁜 달이라는데요.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벌들이) 꿀을 물어오는 기간은 10일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 양봉가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죠. (지금이 그 황금 시기인가요?) 그렇죠."

올해 벌꿀 농사는 어떤지 궁금한데요.

[이학동/남편 : "올해는 꿀이 좀 많이 들어왔습니다. 작년에는 동해를 입어서 아카시아 꿀이 많이 들어오질 못했는데 올해는 기온이 좀 따라주니까 (꿀이 많습니다)."]

이곳은 올해로 6년째가 된 국화 씨의 양봉장입니다.

200여개의 벌통, 약 1400만 마리의 벌들이 부지런히 모여 꿀을 만드는 곳인데요.

꿀 수확인 한창인 5월, 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특별한 손님이 양봉장을 찾았습니다.

국화 씨의 양봉 스승인 영일 씨가 작업장을 방문한 건데요.

[손영일/양봉전문가/경력 27년 : "빨리빨리 잘하네. (아이고 이제 6년 됐는데 이만큼도 못하면 되나요.) 고수됐네, 고수 (그럼요) 뿌듯하다, 쳐다보기만 해도. (고맙습니다)."]

이제는 스승님도 인정할만한 실력이지만 사실 국화 씨가 8년 전 한국에서 처음 한 일은 양봉이 아니었습니다.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제가 톨게이트에서 근무했었는데요. 톨게이트에서는 3년밖에 근무를 못 한다고 그래서 3년 후에는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때까지도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어요."]

당장 구직에 나서야 하는 막막했던 순간, 국화 씨가 찾은 새로운 길은 바로 양봉이었습니다.

남편이 지인의 양봉 일을 돕고 품삯으로 받아온 열 개의 벌통이 새로운 도전이 된 건데요.

지역에서 터를 잡고 일해 왔던 전문가가 볼 때, 국화 씨 솜씨는 처음부터 남달라 기술 전수가 수월했다고 합니다.

[손영일/양봉전문가/경력 27년 : "열두 세 통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일 년 만에 우리도 상상도 못 하게 60통까지 불려버리더라고요. 또 2년째 되니까 120통 넘게 불리고 3년째 되니까 200통을 넘겨버리더라고요. 나도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굉장히 놀라웠어요."]

하지만 양봉 일을 제대로 된 사업으로 성장시키기까지, 겪어야했던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는데요.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이걸 들어서 옮길 때 엄청 무겁습니다. 이 안에 벌만 있는 게 아니고 꿀도 같이 들어있거든요. 그런 과정을 이백 통 넘게 하다 보니까 그럴 때는 정말 허리도 아프고 관절도 아프고..."]

노동도 고되지만 더욱 힘든 것은 낯선 땅에 정착해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그럴 때면 배달까지 직접하며 비슷한 처지의 탈북민을 찾아나서는데요.

은영 씨는 국화 씨 꿀만 먹는 최고의 고객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가공하지 않은 꿀을 먹어온 탈북민들에게 국화 씨 꿀은 고향의 맛입니다.

[송은영(가명)/2011년 탈북 : "(언니 꿀 맛있나요?) 당연히 맛있죠. 대한민국에서 최고죠. 북한에는 진짜 토종꿀이거든요. 여기처럼 가공할 수가 없어요. 진짜 꿀을 먹어 봤으니까 아는 거죠."]

늘 밝은 국화 씨지만 고향 얘기가 나올 때면 먹먹한 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난 진짜 씩씩하게 살았는데 중국에서.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눈물이 많아지고. 자꾸 엄마 말고 또 다른 사람들이 못 보고 돌아가시면... 형제도 있고 아빠 같은 삼촌도 (북한에) 계시고 하니까, 그게 제일 그렇네."]

국화 씨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이야기가 더욱 공감됩니다.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떠날 때는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떠나야 되니까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속이고 이렇게 왔잖아. 날 얼마나 원망 하겠노."]

힘든 몸과 마음을 다독여가며 벌꿀 상품화에 성공했지만 판로를 뚫는 것은 또 다른 고비였습니다.

한국에 기반이 없는 탈북민에게 꿀을 홍보하고 판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중국분이세요? 억양 때문에 그럴 때면 나도 한국 사람인데... 그런 시선들이 너무 속상할 때도 있었고..."]

하지만 국화 씨는 ‘주변의 믿음’을 자양분 삼아 한 단계씩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제가 한국 사람들을 (탈북 당시) 중국에서 접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신용. 신용이란 단어를 제일 많이 들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꿀을 시작하면서 신용 하나만큼은 우선이 되어야 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직접 발로 뛰며 고객을 찾아다닌 결과, 입소문이 퍼지면서 주문량이 늘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2년 전부터는 제법 수익도 나면서, 이제는 어엿한 사업가로 성장하고 있다는데요.

꿀벌과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시간.

막막했던 한국에서 모두가 손을 내밀어 도와준 덕분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 수 있었다는 국화 씨.

쉴 틈 없는 하루하루 일과 속에서도 어느덧 힘들었던 지난 날을 돌아보는 여유도 생기고 있다네요.

앞으로 국화 씨에게 꿀처럼 달콤한 일만 가득하길,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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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18 08:09:57
    • 수정2019-05-18 08:4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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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입니다.

꽃이 피면서 벌들의 움직임도 바빠지는데요.

꿀을 채취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가 바로 지금 5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꿀 생산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네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데요.

오늘 통일로 미래로에선 이 어려운 양봉업에 도전장을 던진 한 탈북여성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벌써 6년 째 양봉업을 이어오고 있다는데요.

열 개로 시작한 벌통이 지금은 2백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끊임없는 노력과 주변의 도움이 더해진 결과라고 하는데요.

채유나 리포터와 함께 만나보시죠.

[리포트]

햇살이 따뜻한 5월의 주말,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모습입니다.

벌들의 날갯짓 소리로 가득한 이곳은 탈북민 국화 씨가 운영하고 있는 양봉장입니다.

5월은, 일 년 중 가장 바쁜 달이라는데요.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벌들이) 꿀을 물어오는 기간은 10일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 양봉가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죠. (지금이 그 황금 시기인가요?) 그렇죠."

올해 벌꿀 농사는 어떤지 궁금한데요.

[이학동/남편 : "올해는 꿀이 좀 많이 들어왔습니다. 작년에는 동해를 입어서 아카시아 꿀이 많이 들어오질 못했는데 올해는 기온이 좀 따라주니까 (꿀이 많습니다)."]

이곳은 올해로 6년째가 된 국화 씨의 양봉장입니다.

200여개의 벌통, 약 1400만 마리의 벌들이 부지런히 모여 꿀을 만드는 곳인데요.

꿀 수확인 한창인 5월, 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특별한 손님이 양봉장을 찾았습니다.

국화 씨의 양봉 스승인 영일 씨가 작업장을 방문한 건데요.

[손영일/양봉전문가/경력 27년 : "빨리빨리 잘하네. (아이고 이제 6년 됐는데 이만큼도 못하면 되나요.) 고수됐네, 고수 (그럼요) 뿌듯하다, 쳐다보기만 해도. (고맙습니다)."]

이제는 스승님도 인정할만한 실력이지만 사실 국화 씨가 8년 전 한국에서 처음 한 일은 양봉이 아니었습니다.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제가 톨게이트에서 근무했었는데요. 톨게이트에서는 3년밖에 근무를 못 한다고 그래서 3년 후에는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때까지도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어요."]

당장 구직에 나서야 하는 막막했던 순간, 국화 씨가 찾은 새로운 길은 바로 양봉이었습니다.

남편이 지인의 양봉 일을 돕고 품삯으로 받아온 열 개의 벌통이 새로운 도전이 된 건데요.

지역에서 터를 잡고 일해 왔던 전문가가 볼 때, 국화 씨 솜씨는 처음부터 남달라 기술 전수가 수월했다고 합니다.

[손영일/양봉전문가/경력 27년 : "열두 세 통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일 년 만에 우리도 상상도 못 하게 60통까지 불려버리더라고요. 또 2년째 되니까 120통 넘게 불리고 3년째 되니까 200통을 넘겨버리더라고요. 나도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굉장히 놀라웠어요."]

하지만 양봉 일을 제대로 된 사업으로 성장시키기까지, 겪어야했던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는데요.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이걸 들어서 옮길 때 엄청 무겁습니다. 이 안에 벌만 있는 게 아니고 꿀도 같이 들어있거든요. 그런 과정을 이백 통 넘게 하다 보니까 그럴 때는 정말 허리도 아프고 관절도 아프고..."]

노동도 고되지만 더욱 힘든 것은 낯선 땅에 정착해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그럴 때면 배달까지 직접하며 비슷한 처지의 탈북민을 찾아나서는데요.

은영 씨는 국화 씨 꿀만 먹는 최고의 고객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가공하지 않은 꿀을 먹어온 탈북민들에게 국화 씨 꿀은 고향의 맛입니다.

[송은영(가명)/2011년 탈북 : "(언니 꿀 맛있나요?) 당연히 맛있죠. 대한민국에서 최고죠. 북한에는 진짜 토종꿀이거든요. 여기처럼 가공할 수가 없어요. 진짜 꿀을 먹어 봤으니까 아는 거죠."]

늘 밝은 국화 씨지만 고향 얘기가 나올 때면 먹먹한 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난 진짜 씩씩하게 살았는데 중국에서.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눈물이 많아지고. 자꾸 엄마 말고 또 다른 사람들이 못 보고 돌아가시면... 형제도 있고 아빠 같은 삼촌도 (북한에) 계시고 하니까, 그게 제일 그렇네."]

국화 씨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이야기가 더욱 공감됩니다.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떠날 때는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떠나야 되니까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속이고 이렇게 왔잖아. 날 얼마나 원망 하겠노."]

힘든 몸과 마음을 다독여가며 벌꿀 상품화에 성공했지만 판로를 뚫는 것은 또 다른 고비였습니다.

한국에 기반이 없는 탈북민에게 꿀을 홍보하고 판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중국분이세요? 억양 때문에 그럴 때면 나도 한국 사람인데... 그런 시선들이 너무 속상할 때도 있었고..."]

하지만 국화 씨는 ‘주변의 믿음’을 자양분 삼아 한 단계씩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이국화/양봉사업가·탈북민 : "제가 한국 사람들을 (탈북 당시) 중국에서 접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신용. 신용이란 단어를 제일 많이 들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꿀을 시작하면서 신용 하나만큼은 우선이 되어야 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직접 발로 뛰며 고객을 찾아다닌 결과, 입소문이 퍼지면서 주문량이 늘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2년 전부터는 제법 수익도 나면서, 이제는 어엿한 사업가로 성장하고 있다는데요.

꿀벌과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시간.

막막했던 한국에서 모두가 손을 내밀어 도와준 덕분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 수 있었다는 국화 씨.

쉴 틈 없는 하루하루 일과 속에서도 어느덧 힘들었던 지난 날을 돌아보는 여유도 생기고 있다네요.

앞으로 국화 씨에게 꿀처럼 달콤한 일만 가득하길,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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