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래의 최강시사] 1호 인권변호사가 문재인에게 ‘메리야스’ 건넨 이유
입력 2019.07.02 (10:02)
수정 2019.07.0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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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년 수감중 대학생 문재인 같은 층에 잡혀와.. 비축해둔 ‘메리야스’ 전달해 준 인연
- 원래의 장래희망들 좌절되고 생업 위해 사법시험 공부...의도치 않게 시국사건 변호사 됐어
- 74년 ‘민청학련 사건’ 잊을 수 없어...사법살인으로 사형당한 사람들 무죄판결난들 돌아올 수 있나?
- 사법농단, 피동적이 아니라 집권세력과 내통하며 판결 그르친 점 용서못해. ‘외풍’보다 ‘내풍’ 경계해야
- 세상은 ‘왔다갔다’하며 개선되는 것. 법조인들 개인의 입신 넘어 세상 위한 헌신까지 나아가길
■ 프로그램명 : 김경래의 최강시사
■ 코너명 : <최강 인터뷰1>
■ 방송시간 : 7월 2일(화) 7:35~7:57 KBS1R FM 97.3 MHz
■ 진행 : 김경래 (뉴스타파 탐사팀장)
■ 출연 : 한승헌 변호사
▷ 김경래 : 우리 시대의 인권변호사 1세대 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을 겁니다.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이런 여러 가지 사건들의 중심에 항상 서 계셨던 분입니다. 시대의 상처를 함께한 살아 있는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한승헌 : 안녕하세요?
▷ 김경래 : 건강은 어떠십니까? 지금 뵈니까 많이 마르신 거 빼고는 건강은 어떠세요?
▶ 한승헌 : 그렇죠.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서 말씀드릴 때 어디가 아프다고 엄살 떨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모신 것은 사실은 이번에 내신 책 있지 않습니까? 그 기회로 한번 원래 모시고 싶었지만 모셨습니다. 책 얘기 잠깐 해볼게요. 책 제목이 보니까 ‘그분을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 한승헌 : 그건 독자가 이 책을 사서 읽어보면 답이 나오는 거죠.
▷ 김경래 : 알겠습니다. 그분이 보니까 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 한승헌 : 물론이죠.
▷ 김경래 : 여러 분을 아마 쓰셨더라고요. 보니까 옛날분으로 보면 전봉준 장군, 녹두장군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 이어령 교수님 그리고 이응노 화백 다 여러분들이 아실 만한 분들입니다, 광주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조아라 선생님 등등. 이게 어떤 분들을 모은 겁니까?
▶ 한승헌 : 머리말에도 제가 잠깐 썼습니다만 한 시대를 걱정하면서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것으로 해서 나라의 어려움이라든가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 잡고자 애썼던 분들, 이름만 들어도 “아, 그분이라면, 그분이 아니었다면” 할 만한 분들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어떤 접점을 가지고 있거나 교분이 있거나 제가 모시고 또 배운 적이 있는 인연이 있는 분만 담았습니다. 그러면 전봉준 장군은 무슨 인연이 있느냐? 인연이 있죠. 그분이 아시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지도자 아닙니까? 바로 그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제가 10년을 했습니다.
▷ 김경래 : 여기에 수록된 그분 중에 문재인 대통령이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아마 선착순대로 해서 자리를 주신 것 같은데 문재인 대통령하고는 아까 인연이 있는 사람들만 수록을 했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인연이 있으십니까?
▶ 한승헌 : 1975년 봄에 제가 반공법으로 서울구치소에서 징역 살고 있을 때 경희대학생 문재인군이 시위하다가 잡혀와서 저하고 같은 층에 감방에 있었습니다.
▷ 김경래 : 그때 대학생이었어요?
▶ 한승헌 : 경희대학교 학생이었죠. 같이 징역 사는 몸이니까 달리 서로 돌봐주고 할 건 없고 한여름에 시위 현장에서 붙들려서 경찰 조사 거쳐왔으니까 얼마나 내의도 그렇고 몸이 엉망이죠. 그래서 제가 비축해놨던 메리야스 한 벌을 교도관한테 부탁해서 전달을 했는데 그러고 잊어버린 거예요.
▷ 김경래 : 그런데 개인적으로 잘 아는 학생은 아니었을 거 아니에요?
▶ 한승헌 : 모르죠, 그냥. 그냥 다만 시위하다 잡혀온 학생이다, 그러면 전부 내 아우고 아들이고 조카고 그러니까 그렇게 했는데 그러고 세월이 흘렀죠. 그런데 2012년이던가? 문재인 변호사가 ‘운명’이라고 하는 그런 자전적인 책을 낼 때 그 안에 보니까 그때 메리야스, 이걸 썼더라고요. 그뒤에 인사를 받았죠, 제가.
▷ 김경래 : 그 인연 덕분에 문재인 대통령은 이 책에 수록되는 영광을 가지게 되셨네요.
▶ 한승헌 : 그렇죠. 서울구치소의 그 인연이 아니면 대통령이라고 해서 여기 이 반열에 넣어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점은 맞습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얘기 잠깐 좀 여쭤볼게요. 우리나라의 1호 인권변호사 이런 건 많이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얘기 여쭤보겠습니다. 법조인, 그러니까 변호사 이건 어떻게 이 길로 가게 되신 거죠, 처음에 진로를 잡으실 때?
▶ 한승헌 : 법조인은 제 지망 1, 2, 3위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렵게 초등학교도 나오고 사범학교 들어가면 학비도 아주 저렴하고 또 졸업 후에 학교 선생님, 초등학교 선생님이 거의 보장된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범학교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어요. 그다음에 두 번째도 KBS 아나운서 시험.
▷ 김경래 : KBS 아나운서 시험을 치셨어요?
▶ 한승헌 : 그때 라디오 시대죠. 라디오 뉴스 공지를 듣고 아나운서 시험을 쳤습니다. 그런데 떨어졌죠. 그리고 세 번째는 언론인이 되고 싶었는데.
▷ 김경래 : 기자요?
▶ 한승헌 : 6.25 후에 아주 혼란하고 여러 가지로 피폐한 그런 환경 속에서 올바른 언론인 되기가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거의 포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총괄하면 1. 사범학교, 2. 아나운서, 3. 기자 다 뜻을 못 이루었으니까 야구로 말하면 삼진을 당한 거예요. 그런데 그뒤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생업을 책임져야 되니까 고등고시 사법 합격하면 취업 걱정은 면한다더라고 주위에서 그러기에 그래, 그럼 나도 한번 도전을 해볼까라고 고시 공부를 했어요. 그게 또 처음 응시할 때는 떨어졌습니다. 저는 보면 그냥 떨어져요. 그러다가 1년 후에 다시 도전했더니 그때 된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때는 됐나 알아보니까 용케도 됐더라고요. 그래서 그후에 군법무관, 검사 거쳐서 변호사가 된 거죠.
▷ 김경래 : 그런데 그때 사실은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하시려다가 떨어지고 변호사 길을 걸으셨을 때는 이게 어떤 생업으로서 선택을 하신 거잖아요.
▶ 한승헌 : 물론이죠.
▷ 김경래 : 그러면 남들이 하듯이 편안하게 돈 벌고 변호사 활동하고 이랬으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걸어가게 되신 겁니까?
▶ 한승헌 : 지금 말씀한 대로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제가 검사를 할 때는 검사 월급이 적다, 많다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제약이 참 많은 직업입니다. 조심스럽고 조금 자유스럽게 살자, 그래서 사표를 던지고 변호사가 되고 또 변호사 되면 검사 월급보다는 수입도 많이 올려서 가족들 고생 안 시키고 이러고 싶죠. 그런 생각이 개입이 됐었는데 그때가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독재가 한창일 때 제가 그만둔 1965년 기준으로 말하면 월남 파병이라든가 국내에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있어서 반독재 저항운동이 아주 격화될 때입니다. 그러니까 주로 학원, 사회단체, 종교단체가 반정부운동을 하다가 거기에 대한 탄압으로 많이 잡혀 들어갔어요. 잡혀 들어갔는데 변호사가 있지 않은데 그런 정부가 눈을 부라리고 미워하는 사람은 잡혀갔는데도 변호사가 잘 변호에 나서려고 하지 않아요, 잘못하면 자기도 당하니까. 그래서 저는 변호사로 있으면서 변호를 잘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변호를 안 하면 적어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바로 잡자고 하자가 여러 가지 박해를 당하는데 그냥 두면 안 되겠다 해서 나라도 그냥 나서서 접견도 하고 또 법정에 가서 할 수 있는 일 있으면 변호하자,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된 겁니다. 그리고 그걸 10년, 20년 소위 말하는 시국사건 변호사, 인권변호사라고 모두 그러시는데 저는 그 표현은 찬성하지 않습니다만 시국사건 변호사로서 20년, 30년 이렇게 갈지를 모르고 한때 정부하고 격돌하다 보면 거기에서 수난을 겪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변화하면 또 석방되고 이렇게 끝나리라고 믿었는데 그게 의외로 장기화 되니까, 저도 예상하지 않았고 저도 원치 않았는데 시국사건에 제가 거의 모든 사건에 끌려가서 세상 사람들이 인권변호사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였죠.
▷ 김경래 : 지금까지 보면 시국사건을 한 100건 넘게 변호를 하신 것으로 보도에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분을 생각한다’의 인물들을 고르기도 굉장히 힘드셨겠지만 100건이 넘는 사건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고 할까요? 좀 들려주고 싶은 사건이 어떤 게 있습니까?
▶ 한승헌 : 1974년 봄에 있었던 대통령긴급조치 4호 소위 민청학련 사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긴급조치 1호, 4호는 뭐냐 하면 긴급조치 그러니까 국회 의결도 아닌 대통령 명령으로 긴급조치를 만들어서 유신헌법 개정하자하고 비판만 해도 징역 15년에 처하는, 그런 아주 잘못된 장치였죠. 그런 장치를 가지고 민청학련은 그러니까 학생을 중심으로 해서 교수님들, 지식인들을 그야말로 일망타진한 그런 사건입니다. 민청학련이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했는데 그 배후에는 인혁당이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까지 묶어서 재판을 할 때 결국 사형수가 8명이나 나왔습니다. 그중에는 제가 변호했던 분도 형 집행을 받고 저세상으로 갔죠. 그러니까 그 사건을 제일 잊을 수 없어요. 그리고 사법사일이라고 하는 세계적인 국제적인 기구에서 사법사일이라고 아주 딱 이름을 붙인 그런 만행을 박정희 정권이 했기 때문에 징역을 산다면 나오는 날도 있겠죠. 그러나 정말 처형이 돼서 저세상에 간 분들은 몇십 년 후에 재심해서 백번 무죄 판결이 난들 죽은 목숨이 살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애통하고 애절한 걸 다 말할 수가 없죠.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요즘 얘기도 한 가지 여쭤보려고 해요. 요즘 얘기는 뭐냐 하면 변호사님 모셨으니까 이건 여쭤봐야 될 것 같아요. 사법농단 관련된 얘기들이 한참 있고 지금 재판 중입니다. 재판 중에 있고 그 이후에 사법개혁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 가지 논의들이 우리 사회에 굉장히 진지하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잘 안 되고 있는 측면도 있고요. 쭉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그러니까 평생을 법조인으로 사셨고 대법원의 사법농단이라든가 그 이후에 진행된 어떤 사건들.
▶ 한승헌 : 사법은 그 사명이 신성하고 또 독립성을 유지하기가 참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도 사람이 하는 판결이니까 고의가 아니지만 오판이 나올 수도 있고 그래서 꾸준히 거기에 대한 감시, 비판을 받고 있는 거죠. 그런데 연전부터 문제가 되고 있는 사법농단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의 간섭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참 그 힘에 못 이겨서 정치권력에 끌려갔다. 이게 아니고 오히려 집권세력하고 내통을 해서 서로 상의해가면서 사법 판결을 그르쳤다는 점에서 용서할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그랬어요, 그전에도. 사법권 독립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나쁜 작용만 개입 안 하면 사법부 독립된다, 아니다, 그것보다도 위험한 것은 사법부 내에 이런저런 연고랄까, 요소로 해서 사법부 독립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스스로 짓밟는 외풍이 아닌 이른바 내풍이 참 중요하다. 재판 과정에서도 보면 그분들이 반성하는 것 같지는 않고 또 그렇다고 해서 그걸 이해할 수도 없는 거고. 그러면 그 많은 사법부의 법관들이 정말 법관으로서의 자부심이라든가 큰 사명감을 가지고 계속 사법을 끌어나가야 하는데 지금 뭐라고 할까? 좀 갈팡질팡하고 있거든요. 하루속히 수습이 되어야 되는데 참 걱정스럽습니다.
▷ 김경래 : 어떤 게 제일 부족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시점에서? 사법부 개혁이나 이런 부분들을 위해서는?
▶ 한승헌 : 사법부의 독립, 사법권의 독립 그러지만 사실은 사법부의 업무를 담당하는 법관 개개인이 독립입니다, 그게 중요하죠. 그러니까 법관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법부 내의 어떤 요인으로 인해서 판결을 그르쳐도 그건 사법권 독립 침해예요, 외부에서 꼭 쳐들어와서가 아니라. 그런데 지금 법원 내부에서 또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있잖아요. 그런 거 보면 생각보다는 훨씬 심각한 그런 증세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믿고 기대했던 한국의 사법부가 오늘날 대법원장이 구속되고 대법관들이 구속되는 이런 지경에 올 때까지 모두 뭐 했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떻게 이번 기회에 이른바 사법농단이 일소가 되고 또 책임질 사람 책임지고 그야말로 거듭나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 김경래 : 사법부는 그렇다 치고요. 사회 전반적으로 남북미 정상이 만나기도 했고 최근에 평생을 사실은 이 시대와 호흡하면서 살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사회가 앞으로 좀 나가고 있다고 보세요? 발전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걸 좀 여쭤보고 싶네요, 궁금해서요.
▶ 한승헌 : 저는 희망을 잃지 않고 어떤 기대를 하는 가운데 세상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 이후에 지금까지 참 말로 다할 수 없는 여러 곡절, 부조리, 부패 참 많았지만 그래도 뭔가를 계기해서 바로 잡히고 가령 4.19가 있고 5.16이 있었지만 또 5.16 세력을 이렇게 물리치고 어느 정도 민주화의 기틀을 잡는 그런 사건이 있잖아요. 그런 운동이 그런 이벤트가 생기고 또 그것이 제대로 먹혀들어가지 않는 어려움이 있을 때 또 새로운 세력이 나서서 그걸 또 바로 잡고 하는 것 반복이거든요. 그래서 무언가 그냥 스트레이트로 쭉 한번에 그냥 좋은 길만 나서버리면 좋지만 그건 아니고 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그러면서 개선이 되는 겁니다. 어떤 희망, 미래에 대한 기대를 우리가 놓치지 말고 정말 나라의 주인답게 모든 일에 같이 합심하고 또 노력한다면 우리나라는 분명히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김경래 : 법조인, 후배 법조인에게 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도 있고 아니면 국민들이죠, 국민들한테 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 뭐든지 괜찮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부분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 한승헌 : 법조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정도의 입지, 지위가 보장되는 그런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판검사, 변호사 그러면 출세했다고 그러잖아요. 저는 그 합격한 사람들, 가령 연수원이라든가 법대 로스쿨이라든가 그밖에 강의 때 여러분, 대단하다, 합격한 건 정말 소중한 자산이고 또 그것을 통해서 좋은 일할 수 있는 힘의 바탕을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보통 출세했다고 그러면 개인적인 입신을 말하는데 여러분, 입신 좋습니다. 그러나 입신을 넘어서 이익과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까지 우리가 좀 나갑시다. 우리 법조인들이 우선 지식으로나 또는 행운으로나 뭔가 하여튼 토정비결이 괜찮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자기 개인의 편안함, 개인의 영화로움을 거기서 멈추지 말고 정말 세상을 위해서 헌신합시다. 요즘은 “입신에 멈추지 말고 헌신합시다.”하는 것이 최근에 제가 강연에서 강조하는 말입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아마 사실 변호사님 앞에서 대놓고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뭐 하지만 아마 청취자분들이 그렇게 많이 느꼈을 겁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어른이 계시다는 게 참 다행스럽다, 우리는 행운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하고요.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 한승헌 : 고맙습니다.
▷ 김경래 : 지금까지 한승헌 변호사님이었습니다.
- 원래의 장래희망들 좌절되고 생업 위해 사법시험 공부...의도치 않게 시국사건 변호사 됐어
- 74년 ‘민청학련 사건’ 잊을 수 없어...사법살인으로 사형당한 사람들 무죄판결난들 돌아올 수 있나?
- 사법농단, 피동적이 아니라 집권세력과 내통하며 판결 그르친 점 용서못해. ‘외풍’보다 ‘내풍’ 경계해야
- 세상은 ‘왔다갔다’하며 개선되는 것. 법조인들 개인의 입신 넘어 세상 위한 헌신까지 나아가길
■ 프로그램명 : 김경래의 최강시사
■ 코너명 : <최강 인터뷰1>
■ 방송시간 : 7월 2일(화) 7:35~7:57 KBS1R FM 97.3 MHz
■ 진행 : 김경래 (뉴스타파 탐사팀장)
■ 출연 : 한승헌 변호사
▷ 김경래 : 우리 시대의 인권변호사 1세대 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을 겁니다.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이런 여러 가지 사건들의 중심에 항상 서 계셨던 분입니다. 시대의 상처를 함께한 살아 있는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한승헌 : 안녕하세요?
▷ 김경래 : 건강은 어떠십니까? 지금 뵈니까 많이 마르신 거 빼고는 건강은 어떠세요?
▶ 한승헌 : 그렇죠.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서 말씀드릴 때 어디가 아프다고 엄살 떨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모신 것은 사실은 이번에 내신 책 있지 않습니까? 그 기회로 한번 원래 모시고 싶었지만 모셨습니다. 책 얘기 잠깐 해볼게요. 책 제목이 보니까 ‘그분을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 한승헌 : 그건 독자가 이 책을 사서 읽어보면 답이 나오는 거죠.
▷ 김경래 : 알겠습니다. 그분이 보니까 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 한승헌 : 물론이죠.
▷ 김경래 : 여러 분을 아마 쓰셨더라고요. 보니까 옛날분으로 보면 전봉준 장군, 녹두장군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 이어령 교수님 그리고 이응노 화백 다 여러분들이 아실 만한 분들입니다, 광주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조아라 선생님 등등. 이게 어떤 분들을 모은 겁니까?
▶ 한승헌 : 머리말에도 제가 잠깐 썼습니다만 한 시대를 걱정하면서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것으로 해서 나라의 어려움이라든가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 잡고자 애썼던 분들, 이름만 들어도 “아, 그분이라면, 그분이 아니었다면” 할 만한 분들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어떤 접점을 가지고 있거나 교분이 있거나 제가 모시고 또 배운 적이 있는 인연이 있는 분만 담았습니다. 그러면 전봉준 장군은 무슨 인연이 있느냐? 인연이 있죠. 그분이 아시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지도자 아닙니까? 바로 그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제가 10년을 했습니다.
▷ 김경래 : 여기에 수록된 그분 중에 문재인 대통령이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아마 선착순대로 해서 자리를 주신 것 같은데 문재인 대통령하고는 아까 인연이 있는 사람들만 수록을 했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인연이 있으십니까?
▶ 한승헌 : 1975년 봄에 제가 반공법으로 서울구치소에서 징역 살고 있을 때 경희대학생 문재인군이 시위하다가 잡혀와서 저하고 같은 층에 감방에 있었습니다.
▷ 김경래 : 그때 대학생이었어요?
▶ 한승헌 : 경희대학교 학생이었죠. 같이 징역 사는 몸이니까 달리 서로 돌봐주고 할 건 없고 한여름에 시위 현장에서 붙들려서 경찰 조사 거쳐왔으니까 얼마나 내의도 그렇고 몸이 엉망이죠. 그래서 제가 비축해놨던 메리야스 한 벌을 교도관한테 부탁해서 전달을 했는데 그러고 잊어버린 거예요.
▷ 김경래 : 그런데 개인적으로 잘 아는 학생은 아니었을 거 아니에요?
▶ 한승헌 : 모르죠, 그냥. 그냥 다만 시위하다 잡혀온 학생이다, 그러면 전부 내 아우고 아들이고 조카고 그러니까 그렇게 했는데 그러고 세월이 흘렀죠. 그런데 2012년이던가? 문재인 변호사가 ‘운명’이라고 하는 그런 자전적인 책을 낼 때 그 안에 보니까 그때 메리야스, 이걸 썼더라고요. 그뒤에 인사를 받았죠, 제가.
▷ 김경래 : 그 인연 덕분에 문재인 대통령은 이 책에 수록되는 영광을 가지게 되셨네요.
▶ 한승헌 : 그렇죠. 서울구치소의 그 인연이 아니면 대통령이라고 해서 여기 이 반열에 넣어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점은 맞습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얘기 잠깐 좀 여쭤볼게요. 우리나라의 1호 인권변호사 이런 건 많이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얘기 여쭤보겠습니다. 법조인, 그러니까 변호사 이건 어떻게 이 길로 가게 되신 거죠, 처음에 진로를 잡으실 때?
▶ 한승헌 : 법조인은 제 지망 1, 2, 3위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렵게 초등학교도 나오고 사범학교 들어가면 학비도 아주 저렴하고 또 졸업 후에 학교 선생님, 초등학교 선생님이 거의 보장된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범학교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어요. 그다음에 두 번째도 KBS 아나운서 시험.
▷ 김경래 : KBS 아나운서 시험을 치셨어요?
▶ 한승헌 : 그때 라디오 시대죠. 라디오 뉴스 공지를 듣고 아나운서 시험을 쳤습니다. 그런데 떨어졌죠. 그리고 세 번째는 언론인이 되고 싶었는데.
▷ 김경래 : 기자요?
▶ 한승헌 : 6.25 후에 아주 혼란하고 여러 가지로 피폐한 그런 환경 속에서 올바른 언론인 되기가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거의 포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총괄하면 1. 사범학교, 2. 아나운서, 3. 기자 다 뜻을 못 이루었으니까 야구로 말하면 삼진을 당한 거예요. 그런데 그뒤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생업을 책임져야 되니까 고등고시 사법 합격하면 취업 걱정은 면한다더라고 주위에서 그러기에 그래, 그럼 나도 한번 도전을 해볼까라고 고시 공부를 했어요. 그게 또 처음 응시할 때는 떨어졌습니다. 저는 보면 그냥 떨어져요. 그러다가 1년 후에 다시 도전했더니 그때 된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때는 됐나 알아보니까 용케도 됐더라고요. 그래서 그후에 군법무관, 검사 거쳐서 변호사가 된 거죠.
▷ 김경래 : 그런데 그때 사실은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하시려다가 떨어지고 변호사 길을 걸으셨을 때는 이게 어떤 생업으로서 선택을 하신 거잖아요.
▶ 한승헌 : 물론이죠.
▷ 김경래 : 그러면 남들이 하듯이 편안하게 돈 벌고 변호사 활동하고 이랬으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걸어가게 되신 겁니까?
▶ 한승헌 : 지금 말씀한 대로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제가 검사를 할 때는 검사 월급이 적다, 많다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제약이 참 많은 직업입니다. 조심스럽고 조금 자유스럽게 살자, 그래서 사표를 던지고 변호사가 되고 또 변호사 되면 검사 월급보다는 수입도 많이 올려서 가족들 고생 안 시키고 이러고 싶죠. 그런 생각이 개입이 됐었는데 그때가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독재가 한창일 때 제가 그만둔 1965년 기준으로 말하면 월남 파병이라든가 국내에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있어서 반독재 저항운동이 아주 격화될 때입니다. 그러니까 주로 학원, 사회단체, 종교단체가 반정부운동을 하다가 거기에 대한 탄압으로 많이 잡혀 들어갔어요. 잡혀 들어갔는데 변호사가 있지 않은데 그런 정부가 눈을 부라리고 미워하는 사람은 잡혀갔는데도 변호사가 잘 변호에 나서려고 하지 않아요, 잘못하면 자기도 당하니까. 그래서 저는 변호사로 있으면서 변호를 잘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변호를 안 하면 적어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바로 잡자고 하자가 여러 가지 박해를 당하는데 그냥 두면 안 되겠다 해서 나라도 그냥 나서서 접견도 하고 또 법정에 가서 할 수 있는 일 있으면 변호하자,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된 겁니다. 그리고 그걸 10년, 20년 소위 말하는 시국사건 변호사, 인권변호사라고 모두 그러시는데 저는 그 표현은 찬성하지 않습니다만 시국사건 변호사로서 20년, 30년 이렇게 갈지를 모르고 한때 정부하고 격돌하다 보면 거기에서 수난을 겪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변화하면 또 석방되고 이렇게 끝나리라고 믿었는데 그게 의외로 장기화 되니까, 저도 예상하지 않았고 저도 원치 않았는데 시국사건에 제가 거의 모든 사건에 끌려가서 세상 사람들이 인권변호사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였죠.
▷ 김경래 : 지금까지 보면 시국사건을 한 100건 넘게 변호를 하신 것으로 보도에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분을 생각한다’의 인물들을 고르기도 굉장히 힘드셨겠지만 100건이 넘는 사건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고 할까요? 좀 들려주고 싶은 사건이 어떤 게 있습니까?
▶ 한승헌 : 1974년 봄에 있었던 대통령긴급조치 4호 소위 민청학련 사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긴급조치 1호, 4호는 뭐냐 하면 긴급조치 그러니까 국회 의결도 아닌 대통령 명령으로 긴급조치를 만들어서 유신헌법 개정하자하고 비판만 해도 징역 15년에 처하는, 그런 아주 잘못된 장치였죠. 그런 장치를 가지고 민청학련은 그러니까 학생을 중심으로 해서 교수님들, 지식인들을 그야말로 일망타진한 그런 사건입니다. 민청학련이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했는데 그 배후에는 인혁당이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까지 묶어서 재판을 할 때 결국 사형수가 8명이나 나왔습니다. 그중에는 제가 변호했던 분도 형 집행을 받고 저세상으로 갔죠. 그러니까 그 사건을 제일 잊을 수 없어요. 그리고 사법사일이라고 하는 세계적인 국제적인 기구에서 사법사일이라고 아주 딱 이름을 붙인 그런 만행을 박정희 정권이 했기 때문에 징역을 산다면 나오는 날도 있겠죠. 그러나 정말 처형이 돼서 저세상에 간 분들은 몇십 년 후에 재심해서 백번 무죄 판결이 난들 죽은 목숨이 살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애통하고 애절한 걸 다 말할 수가 없죠.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요즘 얘기도 한 가지 여쭤보려고 해요. 요즘 얘기는 뭐냐 하면 변호사님 모셨으니까 이건 여쭤봐야 될 것 같아요. 사법농단 관련된 얘기들이 한참 있고 지금 재판 중입니다. 재판 중에 있고 그 이후에 사법개혁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 가지 논의들이 우리 사회에 굉장히 진지하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잘 안 되고 있는 측면도 있고요. 쭉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그러니까 평생을 법조인으로 사셨고 대법원의 사법농단이라든가 그 이후에 진행된 어떤 사건들.
▶ 한승헌 : 사법은 그 사명이 신성하고 또 독립성을 유지하기가 참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도 사람이 하는 판결이니까 고의가 아니지만 오판이 나올 수도 있고 그래서 꾸준히 거기에 대한 감시, 비판을 받고 있는 거죠. 그런데 연전부터 문제가 되고 있는 사법농단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의 간섭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참 그 힘에 못 이겨서 정치권력에 끌려갔다. 이게 아니고 오히려 집권세력하고 내통을 해서 서로 상의해가면서 사법 판결을 그르쳤다는 점에서 용서할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그랬어요, 그전에도. 사법권 독립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나쁜 작용만 개입 안 하면 사법부 독립된다, 아니다, 그것보다도 위험한 것은 사법부 내에 이런저런 연고랄까, 요소로 해서 사법부 독립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스스로 짓밟는 외풍이 아닌 이른바 내풍이 참 중요하다. 재판 과정에서도 보면 그분들이 반성하는 것 같지는 않고 또 그렇다고 해서 그걸 이해할 수도 없는 거고. 그러면 그 많은 사법부의 법관들이 정말 법관으로서의 자부심이라든가 큰 사명감을 가지고 계속 사법을 끌어나가야 하는데 지금 뭐라고 할까? 좀 갈팡질팡하고 있거든요. 하루속히 수습이 되어야 되는데 참 걱정스럽습니다.
▷ 김경래 : 어떤 게 제일 부족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시점에서? 사법부 개혁이나 이런 부분들을 위해서는?
▶ 한승헌 : 사법부의 독립, 사법권의 독립 그러지만 사실은 사법부의 업무를 담당하는 법관 개개인이 독립입니다, 그게 중요하죠. 그러니까 법관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법부 내의 어떤 요인으로 인해서 판결을 그르쳐도 그건 사법권 독립 침해예요, 외부에서 꼭 쳐들어와서가 아니라. 그런데 지금 법원 내부에서 또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있잖아요. 그런 거 보면 생각보다는 훨씬 심각한 그런 증세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믿고 기대했던 한국의 사법부가 오늘날 대법원장이 구속되고 대법관들이 구속되는 이런 지경에 올 때까지 모두 뭐 했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떻게 이번 기회에 이른바 사법농단이 일소가 되고 또 책임질 사람 책임지고 그야말로 거듭나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 김경래 : 사법부는 그렇다 치고요. 사회 전반적으로 남북미 정상이 만나기도 했고 최근에 평생을 사실은 이 시대와 호흡하면서 살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사회가 앞으로 좀 나가고 있다고 보세요? 발전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걸 좀 여쭤보고 싶네요, 궁금해서요.
▶ 한승헌 : 저는 희망을 잃지 않고 어떤 기대를 하는 가운데 세상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 이후에 지금까지 참 말로 다할 수 없는 여러 곡절, 부조리, 부패 참 많았지만 그래도 뭔가를 계기해서 바로 잡히고 가령 4.19가 있고 5.16이 있었지만 또 5.16 세력을 이렇게 물리치고 어느 정도 민주화의 기틀을 잡는 그런 사건이 있잖아요. 그런 운동이 그런 이벤트가 생기고 또 그것이 제대로 먹혀들어가지 않는 어려움이 있을 때 또 새로운 세력이 나서서 그걸 또 바로 잡고 하는 것 반복이거든요. 그래서 무언가 그냥 스트레이트로 쭉 한번에 그냥 좋은 길만 나서버리면 좋지만 그건 아니고 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그러면서 개선이 되는 겁니다. 어떤 희망, 미래에 대한 기대를 우리가 놓치지 말고 정말 나라의 주인답게 모든 일에 같이 합심하고 또 노력한다면 우리나라는 분명히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김경래 : 법조인, 후배 법조인에게 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도 있고 아니면 국민들이죠, 국민들한테 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 뭐든지 괜찮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부분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 한승헌 : 법조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정도의 입지, 지위가 보장되는 그런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판검사, 변호사 그러면 출세했다고 그러잖아요. 저는 그 합격한 사람들, 가령 연수원이라든가 법대 로스쿨이라든가 그밖에 강의 때 여러분, 대단하다, 합격한 건 정말 소중한 자산이고 또 그것을 통해서 좋은 일할 수 있는 힘의 바탕을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보통 출세했다고 그러면 개인적인 입신을 말하는데 여러분, 입신 좋습니다. 그러나 입신을 넘어서 이익과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까지 우리가 좀 나갑시다. 우리 법조인들이 우선 지식으로나 또는 행운으로나 뭔가 하여튼 토정비결이 괜찮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자기 개인의 편안함, 개인의 영화로움을 거기서 멈추지 말고 정말 세상을 위해서 헌신합시다. 요즘은 “입신에 멈추지 말고 헌신합시다.”하는 것이 최근에 제가 강연에서 강조하는 말입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아마 사실 변호사님 앞에서 대놓고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뭐 하지만 아마 청취자분들이 그렇게 많이 느꼈을 겁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어른이 계시다는 게 참 다행스럽다, 우리는 행운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하고요.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 한승헌 : 고맙습니다.
▷ 김경래 : 지금까지 한승헌 변호사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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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래의 최강시사] 1호 인권변호사가 문재인에게 ‘메리야스’ 건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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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07-02 10:02:13
- 수정2019-07-02 15:24:57

- 75년 수감중 대학생 문재인 같은 층에 잡혀와.. 비축해둔 ‘메리야스’ 전달해 준 인연
- 원래의 장래희망들 좌절되고 생업 위해 사법시험 공부...의도치 않게 시국사건 변호사 됐어
- 74년 ‘민청학련 사건’ 잊을 수 없어...사법살인으로 사형당한 사람들 무죄판결난들 돌아올 수 있나?
- 사법농단, 피동적이 아니라 집권세력과 내통하며 판결 그르친 점 용서못해. ‘외풍’보다 ‘내풍’ 경계해야
- 세상은 ‘왔다갔다’하며 개선되는 것. 법조인들 개인의 입신 넘어 세상 위한 헌신까지 나아가길
■ 프로그램명 : 김경래의 최강시사
■ 코너명 : <최강 인터뷰1>
■ 방송시간 : 7월 2일(화) 7:35~7:57 KBS1R FM 97.3 MHz
■ 진행 : 김경래 (뉴스타파 탐사팀장)
■ 출연 : 한승헌 변호사
▷ 김경래 : 우리 시대의 인권변호사 1세대 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을 겁니다.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이런 여러 가지 사건들의 중심에 항상 서 계셨던 분입니다. 시대의 상처를 함께한 살아 있는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한승헌 : 안녕하세요?
▷ 김경래 : 건강은 어떠십니까? 지금 뵈니까 많이 마르신 거 빼고는 건강은 어떠세요?
▶ 한승헌 : 그렇죠.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서 말씀드릴 때 어디가 아프다고 엄살 떨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모신 것은 사실은 이번에 내신 책 있지 않습니까? 그 기회로 한번 원래 모시고 싶었지만 모셨습니다. 책 얘기 잠깐 해볼게요. 책 제목이 보니까 ‘그분을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 한승헌 : 그건 독자가 이 책을 사서 읽어보면 답이 나오는 거죠.
▷ 김경래 : 알겠습니다. 그분이 보니까 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 한승헌 : 물론이죠.
▷ 김경래 : 여러 분을 아마 쓰셨더라고요. 보니까 옛날분으로 보면 전봉준 장군, 녹두장군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 이어령 교수님 그리고 이응노 화백 다 여러분들이 아실 만한 분들입니다, 광주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조아라 선생님 등등. 이게 어떤 분들을 모은 겁니까?
▶ 한승헌 : 머리말에도 제가 잠깐 썼습니다만 한 시대를 걱정하면서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것으로 해서 나라의 어려움이라든가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 잡고자 애썼던 분들, 이름만 들어도 “아, 그분이라면, 그분이 아니었다면” 할 만한 분들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어떤 접점을 가지고 있거나 교분이 있거나 제가 모시고 또 배운 적이 있는 인연이 있는 분만 담았습니다. 그러면 전봉준 장군은 무슨 인연이 있느냐? 인연이 있죠. 그분이 아시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지도자 아닙니까? 바로 그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제가 10년을 했습니다.
▷ 김경래 : 여기에 수록된 그분 중에 문재인 대통령이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아마 선착순대로 해서 자리를 주신 것 같은데 문재인 대통령하고는 아까 인연이 있는 사람들만 수록을 했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인연이 있으십니까?
▶ 한승헌 : 1975년 봄에 제가 반공법으로 서울구치소에서 징역 살고 있을 때 경희대학생 문재인군이 시위하다가 잡혀와서 저하고 같은 층에 감방에 있었습니다.
▷ 김경래 : 그때 대학생이었어요?
▶ 한승헌 : 경희대학교 학생이었죠. 같이 징역 사는 몸이니까 달리 서로 돌봐주고 할 건 없고 한여름에 시위 현장에서 붙들려서 경찰 조사 거쳐왔으니까 얼마나 내의도 그렇고 몸이 엉망이죠. 그래서 제가 비축해놨던 메리야스 한 벌을 교도관한테 부탁해서 전달을 했는데 그러고 잊어버린 거예요.
▷ 김경래 : 그런데 개인적으로 잘 아는 학생은 아니었을 거 아니에요?
▶ 한승헌 : 모르죠, 그냥. 그냥 다만 시위하다 잡혀온 학생이다, 그러면 전부 내 아우고 아들이고 조카고 그러니까 그렇게 했는데 그러고 세월이 흘렀죠. 그런데 2012년이던가? 문재인 변호사가 ‘운명’이라고 하는 그런 자전적인 책을 낼 때 그 안에 보니까 그때 메리야스, 이걸 썼더라고요. 그뒤에 인사를 받았죠, 제가.
▷ 김경래 : 그 인연 덕분에 문재인 대통령은 이 책에 수록되는 영광을 가지게 되셨네요.
▶ 한승헌 : 그렇죠. 서울구치소의 그 인연이 아니면 대통령이라고 해서 여기 이 반열에 넣어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점은 맞습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얘기 잠깐 좀 여쭤볼게요. 우리나라의 1호 인권변호사 이런 건 많이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얘기 여쭤보겠습니다. 법조인, 그러니까 변호사 이건 어떻게 이 길로 가게 되신 거죠, 처음에 진로를 잡으실 때?
▶ 한승헌 : 법조인은 제 지망 1, 2, 3위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렵게 초등학교도 나오고 사범학교 들어가면 학비도 아주 저렴하고 또 졸업 후에 학교 선생님, 초등학교 선생님이 거의 보장된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범학교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어요. 그다음에 두 번째도 KBS 아나운서 시험.
▷ 김경래 : KBS 아나운서 시험을 치셨어요?
▶ 한승헌 : 그때 라디오 시대죠. 라디오 뉴스 공지를 듣고 아나운서 시험을 쳤습니다. 그런데 떨어졌죠. 그리고 세 번째는 언론인이 되고 싶었는데.
▷ 김경래 : 기자요?
▶ 한승헌 : 6.25 후에 아주 혼란하고 여러 가지로 피폐한 그런 환경 속에서 올바른 언론인 되기가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거의 포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총괄하면 1. 사범학교, 2. 아나운서, 3. 기자 다 뜻을 못 이루었으니까 야구로 말하면 삼진을 당한 거예요. 그런데 그뒤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생업을 책임져야 되니까 고등고시 사법 합격하면 취업 걱정은 면한다더라고 주위에서 그러기에 그래, 그럼 나도 한번 도전을 해볼까라고 고시 공부를 했어요. 그게 또 처음 응시할 때는 떨어졌습니다. 저는 보면 그냥 떨어져요. 그러다가 1년 후에 다시 도전했더니 그때 된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때는 됐나 알아보니까 용케도 됐더라고요. 그래서 그후에 군법무관, 검사 거쳐서 변호사가 된 거죠.
▷ 김경래 : 그런데 그때 사실은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하시려다가 떨어지고 변호사 길을 걸으셨을 때는 이게 어떤 생업으로서 선택을 하신 거잖아요.
▶ 한승헌 : 물론이죠.
▷ 김경래 : 그러면 남들이 하듯이 편안하게 돈 벌고 변호사 활동하고 이랬으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걸어가게 되신 겁니까?
▶ 한승헌 : 지금 말씀한 대로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제가 검사를 할 때는 검사 월급이 적다, 많다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제약이 참 많은 직업입니다. 조심스럽고 조금 자유스럽게 살자, 그래서 사표를 던지고 변호사가 되고 또 변호사 되면 검사 월급보다는 수입도 많이 올려서 가족들 고생 안 시키고 이러고 싶죠. 그런 생각이 개입이 됐었는데 그때가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독재가 한창일 때 제가 그만둔 1965년 기준으로 말하면 월남 파병이라든가 국내에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있어서 반독재 저항운동이 아주 격화될 때입니다. 그러니까 주로 학원, 사회단체, 종교단체가 반정부운동을 하다가 거기에 대한 탄압으로 많이 잡혀 들어갔어요. 잡혀 들어갔는데 변호사가 있지 않은데 그런 정부가 눈을 부라리고 미워하는 사람은 잡혀갔는데도 변호사가 잘 변호에 나서려고 하지 않아요, 잘못하면 자기도 당하니까. 그래서 저는 변호사로 있으면서 변호를 잘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변호를 안 하면 적어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바로 잡자고 하자가 여러 가지 박해를 당하는데 그냥 두면 안 되겠다 해서 나라도 그냥 나서서 접견도 하고 또 법정에 가서 할 수 있는 일 있으면 변호하자,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된 겁니다. 그리고 그걸 10년, 20년 소위 말하는 시국사건 변호사, 인권변호사라고 모두 그러시는데 저는 그 표현은 찬성하지 않습니다만 시국사건 변호사로서 20년, 30년 이렇게 갈지를 모르고 한때 정부하고 격돌하다 보면 거기에서 수난을 겪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변화하면 또 석방되고 이렇게 끝나리라고 믿었는데 그게 의외로 장기화 되니까, 저도 예상하지 않았고 저도 원치 않았는데 시국사건에 제가 거의 모든 사건에 끌려가서 세상 사람들이 인권변호사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였죠.
▷ 김경래 : 지금까지 보면 시국사건을 한 100건 넘게 변호를 하신 것으로 보도에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분을 생각한다’의 인물들을 고르기도 굉장히 힘드셨겠지만 100건이 넘는 사건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고 할까요? 좀 들려주고 싶은 사건이 어떤 게 있습니까?
▶ 한승헌 : 1974년 봄에 있었던 대통령긴급조치 4호 소위 민청학련 사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긴급조치 1호, 4호는 뭐냐 하면 긴급조치 그러니까 국회 의결도 아닌 대통령 명령으로 긴급조치를 만들어서 유신헌법 개정하자하고 비판만 해도 징역 15년에 처하는, 그런 아주 잘못된 장치였죠. 그런 장치를 가지고 민청학련은 그러니까 학생을 중심으로 해서 교수님들, 지식인들을 그야말로 일망타진한 그런 사건입니다. 민청학련이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했는데 그 배후에는 인혁당이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까지 묶어서 재판을 할 때 결국 사형수가 8명이나 나왔습니다. 그중에는 제가 변호했던 분도 형 집행을 받고 저세상으로 갔죠. 그러니까 그 사건을 제일 잊을 수 없어요. 그리고 사법사일이라고 하는 세계적인 국제적인 기구에서 사법사일이라고 아주 딱 이름을 붙인 그런 만행을 박정희 정권이 했기 때문에 징역을 산다면 나오는 날도 있겠죠. 그러나 정말 처형이 돼서 저세상에 간 분들은 몇십 년 후에 재심해서 백번 무죄 판결이 난들 죽은 목숨이 살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애통하고 애절한 걸 다 말할 수가 없죠.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요즘 얘기도 한 가지 여쭤보려고 해요. 요즘 얘기는 뭐냐 하면 변호사님 모셨으니까 이건 여쭤봐야 될 것 같아요. 사법농단 관련된 얘기들이 한참 있고 지금 재판 중입니다. 재판 중에 있고 그 이후에 사법개혁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 가지 논의들이 우리 사회에 굉장히 진지하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잘 안 되고 있는 측면도 있고요. 쭉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그러니까 평생을 법조인으로 사셨고 대법원의 사법농단이라든가 그 이후에 진행된 어떤 사건들.
▶ 한승헌 : 사법은 그 사명이 신성하고 또 독립성을 유지하기가 참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도 사람이 하는 판결이니까 고의가 아니지만 오판이 나올 수도 있고 그래서 꾸준히 거기에 대한 감시, 비판을 받고 있는 거죠. 그런데 연전부터 문제가 되고 있는 사법농단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의 간섭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참 그 힘에 못 이겨서 정치권력에 끌려갔다. 이게 아니고 오히려 집권세력하고 내통을 해서 서로 상의해가면서 사법 판결을 그르쳤다는 점에서 용서할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그랬어요, 그전에도. 사법권 독립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나쁜 작용만 개입 안 하면 사법부 독립된다, 아니다, 그것보다도 위험한 것은 사법부 내에 이런저런 연고랄까, 요소로 해서 사법부 독립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스스로 짓밟는 외풍이 아닌 이른바 내풍이 참 중요하다. 재판 과정에서도 보면 그분들이 반성하는 것 같지는 않고 또 그렇다고 해서 그걸 이해할 수도 없는 거고. 그러면 그 많은 사법부의 법관들이 정말 법관으로서의 자부심이라든가 큰 사명감을 가지고 계속 사법을 끌어나가야 하는데 지금 뭐라고 할까? 좀 갈팡질팡하고 있거든요. 하루속히 수습이 되어야 되는데 참 걱정스럽습니다.
▷ 김경래 : 어떤 게 제일 부족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시점에서? 사법부 개혁이나 이런 부분들을 위해서는?
▶ 한승헌 : 사법부의 독립, 사법권의 독립 그러지만 사실은 사법부의 업무를 담당하는 법관 개개인이 독립입니다, 그게 중요하죠. 그러니까 법관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법부 내의 어떤 요인으로 인해서 판결을 그르쳐도 그건 사법권 독립 침해예요, 외부에서 꼭 쳐들어와서가 아니라. 그런데 지금 법원 내부에서 또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있잖아요. 그런 거 보면 생각보다는 훨씬 심각한 그런 증세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믿고 기대했던 한국의 사법부가 오늘날 대법원장이 구속되고 대법관들이 구속되는 이런 지경에 올 때까지 모두 뭐 했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떻게 이번 기회에 이른바 사법농단이 일소가 되고 또 책임질 사람 책임지고 그야말로 거듭나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 김경래 : 사법부는 그렇다 치고요. 사회 전반적으로 남북미 정상이 만나기도 했고 최근에 평생을 사실은 이 시대와 호흡하면서 살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사회가 앞으로 좀 나가고 있다고 보세요? 발전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걸 좀 여쭤보고 싶네요, 궁금해서요.
▶ 한승헌 : 저는 희망을 잃지 않고 어떤 기대를 하는 가운데 세상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 이후에 지금까지 참 말로 다할 수 없는 여러 곡절, 부조리, 부패 참 많았지만 그래도 뭔가를 계기해서 바로 잡히고 가령 4.19가 있고 5.16이 있었지만 또 5.16 세력을 이렇게 물리치고 어느 정도 민주화의 기틀을 잡는 그런 사건이 있잖아요. 그런 운동이 그런 이벤트가 생기고 또 그것이 제대로 먹혀들어가지 않는 어려움이 있을 때 또 새로운 세력이 나서서 그걸 또 바로 잡고 하는 것 반복이거든요. 그래서 무언가 그냥 스트레이트로 쭉 한번에 그냥 좋은 길만 나서버리면 좋지만 그건 아니고 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그러면서 개선이 되는 겁니다. 어떤 희망, 미래에 대한 기대를 우리가 놓치지 말고 정말 나라의 주인답게 모든 일에 같이 합심하고 또 노력한다면 우리나라는 분명히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김경래 : 법조인, 후배 법조인에게 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도 있고 아니면 국민들이죠, 국민들한테 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 뭐든지 괜찮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부분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 한승헌 : 법조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정도의 입지, 지위가 보장되는 그런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판검사, 변호사 그러면 출세했다고 그러잖아요. 저는 그 합격한 사람들, 가령 연수원이라든가 법대 로스쿨이라든가 그밖에 강의 때 여러분, 대단하다, 합격한 건 정말 소중한 자산이고 또 그것을 통해서 좋은 일할 수 있는 힘의 바탕을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보통 출세했다고 그러면 개인적인 입신을 말하는데 여러분, 입신 좋습니다. 그러나 입신을 넘어서 이익과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까지 우리가 좀 나갑시다. 우리 법조인들이 우선 지식으로나 또는 행운으로나 뭔가 하여튼 토정비결이 괜찮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자기 개인의 편안함, 개인의 영화로움을 거기서 멈추지 말고 정말 세상을 위해서 헌신합시다. 요즘은 “입신에 멈추지 말고 헌신합시다.”하는 것이 최근에 제가 강연에서 강조하는 말입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아마 사실 변호사님 앞에서 대놓고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뭐 하지만 아마 청취자분들이 그렇게 많이 느꼈을 겁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어른이 계시다는 게 참 다행스럽다, 우리는 행운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하고요.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 한승헌 : 고맙습니다.
▷ 김경래 : 지금까지 한승헌 변호사님이었습니다.
- 원래의 장래희망들 좌절되고 생업 위해 사법시험 공부...의도치 않게 시국사건 변호사 됐어
- 74년 ‘민청학련 사건’ 잊을 수 없어...사법살인으로 사형당한 사람들 무죄판결난들 돌아올 수 있나?
- 사법농단, 피동적이 아니라 집권세력과 내통하며 판결 그르친 점 용서못해. ‘외풍’보다 ‘내풍’ 경계해야
- 세상은 ‘왔다갔다’하며 개선되는 것. 법조인들 개인의 입신 넘어 세상 위한 헌신까지 나아가길
■ 프로그램명 : 김경래의 최강시사
■ 코너명 : <최강 인터뷰1>
■ 방송시간 : 7월 2일(화) 7:35~7:57 KBS1R FM 97.3 MHz
■ 진행 : 김경래 (뉴스타파 탐사팀장)
■ 출연 : 한승헌 변호사
▷ 김경래 : 우리 시대의 인권변호사 1세대 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을 겁니다.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이런 여러 가지 사건들의 중심에 항상 서 계셨던 분입니다. 시대의 상처를 함께한 살아 있는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한승헌 : 안녕하세요?
▷ 김경래 : 건강은 어떠십니까? 지금 뵈니까 많이 마르신 거 빼고는 건강은 어떠세요?
▶ 한승헌 : 그렇죠.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서 말씀드릴 때 어디가 아프다고 엄살 떨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모신 것은 사실은 이번에 내신 책 있지 않습니까? 그 기회로 한번 원래 모시고 싶었지만 모셨습니다. 책 얘기 잠깐 해볼게요. 책 제목이 보니까 ‘그분을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 한승헌 : 그건 독자가 이 책을 사서 읽어보면 답이 나오는 거죠.
▷ 김경래 : 알겠습니다. 그분이 보니까 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 한승헌 : 물론이죠.
▷ 김경래 : 여러 분을 아마 쓰셨더라고요. 보니까 옛날분으로 보면 전봉준 장군, 녹두장군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 이어령 교수님 그리고 이응노 화백 다 여러분들이 아실 만한 분들입니다, 광주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조아라 선생님 등등. 이게 어떤 분들을 모은 겁니까?
▶ 한승헌 : 머리말에도 제가 잠깐 썼습니다만 한 시대를 걱정하면서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것으로 해서 나라의 어려움이라든가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 잡고자 애썼던 분들, 이름만 들어도 “아, 그분이라면, 그분이 아니었다면” 할 만한 분들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어떤 접점을 가지고 있거나 교분이 있거나 제가 모시고 또 배운 적이 있는 인연이 있는 분만 담았습니다. 그러면 전봉준 장군은 무슨 인연이 있느냐? 인연이 있죠. 그분이 아시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지도자 아닙니까? 바로 그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제가 10년을 했습니다.
▷ 김경래 : 여기에 수록된 그분 중에 문재인 대통령이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아마 선착순대로 해서 자리를 주신 것 같은데 문재인 대통령하고는 아까 인연이 있는 사람들만 수록을 했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인연이 있으십니까?
▶ 한승헌 : 1975년 봄에 제가 반공법으로 서울구치소에서 징역 살고 있을 때 경희대학생 문재인군이 시위하다가 잡혀와서 저하고 같은 층에 감방에 있었습니다.
▷ 김경래 : 그때 대학생이었어요?
▶ 한승헌 : 경희대학교 학생이었죠. 같이 징역 사는 몸이니까 달리 서로 돌봐주고 할 건 없고 한여름에 시위 현장에서 붙들려서 경찰 조사 거쳐왔으니까 얼마나 내의도 그렇고 몸이 엉망이죠. 그래서 제가 비축해놨던 메리야스 한 벌을 교도관한테 부탁해서 전달을 했는데 그러고 잊어버린 거예요.
▷ 김경래 : 그런데 개인적으로 잘 아는 학생은 아니었을 거 아니에요?
▶ 한승헌 : 모르죠, 그냥. 그냥 다만 시위하다 잡혀온 학생이다, 그러면 전부 내 아우고 아들이고 조카고 그러니까 그렇게 했는데 그러고 세월이 흘렀죠. 그런데 2012년이던가? 문재인 변호사가 ‘운명’이라고 하는 그런 자전적인 책을 낼 때 그 안에 보니까 그때 메리야스, 이걸 썼더라고요. 그뒤에 인사를 받았죠, 제가.
▷ 김경래 : 그 인연 덕분에 문재인 대통령은 이 책에 수록되는 영광을 가지게 되셨네요.
▶ 한승헌 : 그렇죠. 서울구치소의 그 인연이 아니면 대통령이라고 해서 여기 이 반열에 넣어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점은 맞습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얘기 잠깐 좀 여쭤볼게요. 우리나라의 1호 인권변호사 이런 건 많이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얘기 여쭤보겠습니다. 법조인, 그러니까 변호사 이건 어떻게 이 길로 가게 되신 거죠, 처음에 진로를 잡으실 때?
▶ 한승헌 : 법조인은 제 지망 1, 2, 3위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렵게 초등학교도 나오고 사범학교 들어가면 학비도 아주 저렴하고 또 졸업 후에 학교 선생님, 초등학교 선생님이 거의 보장된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범학교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어요. 그다음에 두 번째도 KBS 아나운서 시험.
▷ 김경래 : KBS 아나운서 시험을 치셨어요?
▶ 한승헌 : 그때 라디오 시대죠. 라디오 뉴스 공지를 듣고 아나운서 시험을 쳤습니다. 그런데 떨어졌죠. 그리고 세 번째는 언론인이 되고 싶었는데.
▷ 김경래 : 기자요?
▶ 한승헌 : 6.25 후에 아주 혼란하고 여러 가지로 피폐한 그런 환경 속에서 올바른 언론인 되기가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거의 포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총괄하면 1. 사범학교, 2. 아나운서, 3. 기자 다 뜻을 못 이루었으니까 야구로 말하면 삼진을 당한 거예요. 그런데 그뒤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생업을 책임져야 되니까 고등고시 사법 합격하면 취업 걱정은 면한다더라고 주위에서 그러기에 그래, 그럼 나도 한번 도전을 해볼까라고 고시 공부를 했어요. 그게 또 처음 응시할 때는 떨어졌습니다. 저는 보면 그냥 떨어져요. 그러다가 1년 후에 다시 도전했더니 그때 된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때는 됐나 알아보니까 용케도 됐더라고요. 그래서 그후에 군법무관, 검사 거쳐서 변호사가 된 거죠.
▷ 김경래 : 그런데 그때 사실은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하시려다가 떨어지고 변호사 길을 걸으셨을 때는 이게 어떤 생업으로서 선택을 하신 거잖아요.
▶ 한승헌 : 물론이죠.
▷ 김경래 : 그러면 남들이 하듯이 편안하게 돈 벌고 변호사 활동하고 이랬으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걸어가게 되신 겁니까?
▶ 한승헌 : 지금 말씀한 대로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제가 검사를 할 때는 검사 월급이 적다, 많다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제약이 참 많은 직업입니다. 조심스럽고 조금 자유스럽게 살자, 그래서 사표를 던지고 변호사가 되고 또 변호사 되면 검사 월급보다는 수입도 많이 올려서 가족들 고생 안 시키고 이러고 싶죠. 그런 생각이 개입이 됐었는데 그때가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독재가 한창일 때 제가 그만둔 1965년 기준으로 말하면 월남 파병이라든가 국내에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있어서 반독재 저항운동이 아주 격화될 때입니다. 그러니까 주로 학원, 사회단체, 종교단체가 반정부운동을 하다가 거기에 대한 탄압으로 많이 잡혀 들어갔어요. 잡혀 들어갔는데 변호사가 있지 않은데 그런 정부가 눈을 부라리고 미워하는 사람은 잡혀갔는데도 변호사가 잘 변호에 나서려고 하지 않아요, 잘못하면 자기도 당하니까. 그래서 저는 변호사로 있으면서 변호를 잘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변호를 안 하면 적어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바로 잡자고 하자가 여러 가지 박해를 당하는데 그냥 두면 안 되겠다 해서 나라도 그냥 나서서 접견도 하고 또 법정에 가서 할 수 있는 일 있으면 변호하자,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된 겁니다. 그리고 그걸 10년, 20년 소위 말하는 시국사건 변호사, 인권변호사라고 모두 그러시는데 저는 그 표현은 찬성하지 않습니다만 시국사건 변호사로서 20년, 30년 이렇게 갈지를 모르고 한때 정부하고 격돌하다 보면 거기에서 수난을 겪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변화하면 또 석방되고 이렇게 끝나리라고 믿었는데 그게 의외로 장기화 되니까, 저도 예상하지 않았고 저도 원치 않았는데 시국사건에 제가 거의 모든 사건에 끌려가서 세상 사람들이 인권변호사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였죠.
▷ 김경래 : 지금까지 보면 시국사건을 한 100건 넘게 변호를 하신 것으로 보도에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분을 생각한다’의 인물들을 고르기도 굉장히 힘드셨겠지만 100건이 넘는 사건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고 할까요? 좀 들려주고 싶은 사건이 어떤 게 있습니까?
▶ 한승헌 : 1974년 봄에 있었던 대통령긴급조치 4호 소위 민청학련 사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긴급조치 1호, 4호는 뭐냐 하면 긴급조치 그러니까 국회 의결도 아닌 대통령 명령으로 긴급조치를 만들어서 유신헌법 개정하자하고 비판만 해도 징역 15년에 처하는, 그런 아주 잘못된 장치였죠. 그런 장치를 가지고 민청학련은 그러니까 학생을 중심으로 해서 교수님들, 지식인들을 그야말로 일망타진한 그런 사건입니다. 민청학련이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했는데 그 배후에는 인혁당이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까지 묶어서 재판을 할 때 결국 사형수가 8명이나 나왔습니다. 그중에는 제가 변호했던 분도 형 집행을 받고 저세상으로 갔죠. 그러니까 그 사건을 제일 잊을 수 없어요. 그리고 사법사일이라고 하는 세계적인 국제적인 기구에서 사법사일이라고 아주 딱 이름을 붙인 그런 만행을 박정희 정권이 했기 때문에 징역을 산다면 나오는 날도 있겠죠. 그러나 정말 처형이 돼서 저세상에 간 분들은 몇십 년 후에 재심해서 백번 무죄 판결이 난들 죽은 목숨이 살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애통하고 애절한 걸 다 말할 수가 없죠.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요즘 얘기도 한 가지 여쭤보려고 해요. 요즘 얘기는 뭐냐 하면 변호사님 모셨으니까 이건 여쭤봐야 될 것 같아요. 사법농단 관련된 얘기들이 한참 있고 지금 재판 중입니다. 재판 중에 있고 그 이후에 사법개혁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 가지 논의들이 우리 사회에 굉장히 진지하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잘 안 되고 있는 측면도 있고요. 쭉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그러니까 평생을 법조인으로 사셨고 대법원의 사법농단이라든가 그 이후에 진행된 어떤 사건들.
▶ 한승헌 : 사법은 그 사명이 신성하고 또 독립성을 유지하기가 참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도 사람이 하는 판결이니까 고의가 아니지만 오판이 나올 수도 있고 그래서 꾸준히 거기에 대한 감시, 비판을 받고 있는 거죠. 그런데 연전부터 문제가 되고 있는 사법농단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의 간섭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참 그 힘에 못 이겨서 정치권력에 끌려갔다. 이게 아니고 오히려 집권세력하고 내통을 해서 서로 상의해가면서 사법 판결을 그르쳤다는 점에서 용서할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그랬어요, 그전에도. 사법권 독립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나쁜 작용만 개입 안 하면 사법부 독립된다, 아니다, 그것보다도 위험한 것은 사법부 내에 이런저런 연고랄까, 요소로 해서 사법부 독립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스스로 짓밟는 외풍이 아닌 이른바 내풍이 참 중요하다. 재판 과정에서도 보면 그분들이 반성하는 것 같지는 않고 또 그렇다고 해서 그걸 이해할 수도 없는 거고. 그러면 그 많은 사법부의 법관들이 정말 법관으로서의 자부심이라든가 큰 사명감을 가지고 계속 사법을 끌어나가야 하는데 지금 뭐라고 할까? 좀 갈팡질팡하고 있거든요. 하루속히 수습이 되어야 되는데 참 걱정스럽습니다.
▷ 김경래 : 어떤 게 제일 부족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시점에서? 사법부 개혁이나 이런 부분들을 위해서는?
▶ 한승헌 : 사법부의 독립, 사법권의 독립 그러지만 사실은 사법부의 업무를 담당하는 법관 개개인이 독립입니다, 그게 중요하죠. 그러니까 법관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법부 내의 어떤 요인으로 인해서 판결을 그르쳐도 그건 사법권 독립 침해예요, 외부에서 꼭 쳐들어와서가 아니라. 그런데 지금 법원 내부에서 또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있잖아요. 그런 거 보면 생각보다는 훨씬 심각한 그런 증세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믿고 기대했던 한국의 사법부가 오늘날 대법원장이 구속되고 대법관들이 구속되는 이런 지경에 올 때까지 모두 뭐 했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떻게 이번 기회에 이른바 사법농단이 일소가 되고 또 책임질 사람 책임지고 그야말로 거듭나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 김경래 : 사법부는 그렇다 치고요. 사회 전반적으로 남북미 정상이 만나기도 했고 최근에 평생을 사실은 이 시대와 호흡하면서 살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사회가 앞으로 좀 나가고 있다고 보세요? 발전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걸 좀 여쭤보고 싶네요, 궁금해서요.
▶ 한승헌 : 저는 희망을 잃지 않고 어떤 기대를 하는 가운데 세상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 이후에 지금까지 참 말로 다할 수 없는 여러 곡절, 부조리, 부패 참 많았지만 그래도 뭔가를 계기해서 바로 잡히고 가령 4.19가 있고 5.16이 있었지만 또 5.16 세력을 이렇게 물리치고 어느 정도 민주화의 기틀을 잡는 그런 사건이 있잖아요. 그런 운동이 그런 이벤트가 생기고 또 그것이 제대로 먹혀들어가지 않는 어려움이 있을 때 또 새로운 세력이 나서서 그걸 또 바로 잡고 하는 것 반복이거든요. 그래서 무언가 그냥 스트레이트로 쭉 한번에 그냥 좋은 길만 나서버리면 좋지만 그건 아니고 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그러면서 개선이 되는 겁니다. 어떤 희망, 미래에 대한 기대를 우리가 놓치지 말고 정말 나라의 주인답게 모든 일에 같이 합심하고 또 노력한다면 우리나라는 분명히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김경래 : 법조인, 후배 법조인에게 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도 있고 아니면 국민들이죠, 국민들한테 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 뭐든지 괜찮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부분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 한승헌 : 법조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정도의 입지, 지위가 보장되는 그런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판검사, 변호사 그러면 출세했다고 그러잖아요. 저는 그 합격한 사람들, 가령 연수원이라든가 법대 로스쿨이라든가 그밖에 강의 때 여러분, 대단하다, 합격한 건 정말 소중한 자산이고 또 그것을 통해서 좋은 일할 수 있는 힘의 바탕을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보통 출세했다고 그러면 개인적인 입신을 말하는데 여러분, 입신 좋습니다. 그러나 입신을 넘어서 이익과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까지 우리가 좀 나갑시다. 우리 법조인들이 우선 지식으로나 또는 행운으로나 뭔가 하여튼 토정비결이 괜찮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자기 개인의 편안함, 개인의 영화로움을 거기서 멈추지 말고 정말 세상을 위해서 헌신합시다. 요즘은 “입신에 멈추지 말고 헌신합시다.”하는 것이 최근에 제가 강연에서 강조하는 말입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아마 사실 변호사님 앞에서 대놓고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뭐 하지만 아마 청취자분들이 그렇게 많이 느꼈을 겁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어른이 계시다는 게 참 다행스럽다, 우리는 행운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하고요.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 한승헌 : 고맙습니다.
▷ 김경래 : 지금까지 한승헌 변호사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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