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심야심]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누가 더 ‘경알못’?

입력 2019.07.24 (17:48) 수정 2019.07.2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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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임시국회는 완전한 빈손이었습니다. 법안은 1건도 처리하지 못했죠. 그런데 국회가 계속 놀기만 한 건 아닙니다. '의외로' 많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러 상임위원회나 소위원회 등이 밀린 일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기획재정위도 8차례 열렸습니다. 국세청장 인사청문회를 했고,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등에서 업무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와중에 이색적인 일도 있었습니다. 여야 의원들이 통계 논쟁을 벌인 겁니다. 심지어 한 달 가까이 진행된 논쟁이었습니다.

국회의원이 막말 대신 통계로 싸웠다? 낯설면서도 궁금해졌습니다. 기획재정위 속기록과 해당 의원실을 취재했습니다.


최교일 "하위 20% 근로소득 ↓…'소주성' 실패 통계로 명확"

포문은 자유한국당 최교일 의원이 열었습니다. 6월 26일 국세청장 인사청문회. 최 의원은 소득주도성장이 참담하게 실패하고 있다며 근거로 통계를 제시했습니다. 바로 이 그래프입니다.


경제 통계는 항상 어렵지만, 최소한의 독해만 해볼까요. 1분위는 소득이 낮은 최하위 20%입니다. 5분위는 소득이 높은 최상위 20%입니다. 이걸 염두에 두고 그래프를 차분히 보겠습니다.

1분위, 그러니까 가장 못 사는 20%의 근로소득은 증가보다 감소가 훨씬 두드러지죠. 특히, 지난해와 올해는 내리 급감입니다. 최상위 20%, 가장 잘 사는 이들의 근로소득은 정반대죠. 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근로소득의 빈부격차만 키웠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김경협 "하위 20% 근로소득 ↑…'소주성' 더 열심히 해야"

최교일 의원이 제시한 통계만 보면, 최저임금 인상 등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완벽한 실패'에 가깝습니다. 여당이 반격을 안 할 수가 없죠. 총대를 멘 이는 같은 기재위 소속의 김경협 의원이었습니다.

7월 18일 기재위 전체회의. 최 의원이 통계를 공개한 지 20일 넘게 지난 시점입니다. 김 의원은 최 의원이 '엉뚱한' 통계를 제시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제대로 된 통계를 보면, 소주성 정책의 효과는 명확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반격의 근거가 된 통계, 바로 이 그래프입니다.


비교군은 1분위와 5분위로 같았고, 근로소득을 비교한 점도 동일합니다. 기간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 통계는 최교일 의원이 제시한 것과 정반대입니다. 가장 못 사는 1분위의 근로소득이 계속 늘고 있고, 가장 잘 사는 5분위의 근로소득은 최근 들어 저조합니다.

"존경하는 의원님, '경알못' 이십니다!" 격했던 논쟁

같은 기간, 같은 정보를 비교했는데, 180도 다른 결론이 나오는 셈입니다. 통계의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요. 서로 다른 기초 자료(raw data)를 동원한 것도 아닙니다. 두 의원 모두 통계청이 분기마다 내놓는 「가계동향조사」에 기초해 각자 약간의 가공을 했을 뿐입니다.

마법의 비밀은 모집단에 있습니다. 두 통계 그래프의 제목을 다시 한 번 볼까요. 최교일 의원은 '총가구' 통계이고, 김경협 의원은 '근로자가구' 통계입니다. 무슨 차이냐고요? 그림으로 보면, 알기 쉽습니다.


최교일 의원은 전국의 전체 가구를 본 겁니다. 전체 가구가 벌어들이는 여러 소득, 근로·사업·재산·이전소득 중 근로소득만 따로 추려서 통계를 가공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봤을까요? 최교일 의원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그러면 김경협 의원은 왜 전체 가구가 아닌 근로자 가구만 봤을까요. 소득주도성장의 대표적인 정책인 최저임금 인상 정책의 효과를 정확하기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최 의원이 제시한 통계는 최저임금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노인 빈곤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지표라는 해석도 덧붙였습니다. 전체 가구의 최하위 20%는 65세 이상 노인이 매우 많고, 취업률이 25%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두 의원은 어제(23일) 열린 기재위 전체회의에서도 또 논쟁을 벌였습니다. 서로가 통계를 잘 못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상대방이 '경알못' (경제를 알지 못하는 사람) 수준의 주장을 한다는 식의 격한 언쟁도 벌였습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두 의원이 제시한 통계를 검증한 결과, 통계 왜곡이나 조작은 없었습니다. 각 의원실이 제시한 방법으로 분석하면, 누구나 같은 값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분석 자체는 객관적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 데이터 중 왜 그 데이터를, 여러 기준 중 왜 그 기준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달랐던 겁니다. 그 차이는 소득주도성장을 바라보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수렴합니다. 본인이 원하는 정책적 결론에 유리한 통계를 제각기 취사선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 혐오만 불러일으키는 '막말' '억지' 보다 이런 통계 논쟁은 훨씬 생산적입니다. 결국, 정책에 대한 토론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통계가 진실이다.' 강변만 할 것이 아니라, 해당 통계를 사용하는 정치적 입장과 관점도 함께 설명했다면 더 수준 높은 논쟁이었을 겁니다.

"거짓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 벤저민 디스레일" 통계학에는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훈련된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일반 시민은 통계를 쉽게 믿습니다. 정치인이 더 신중하고, 더 친절하게, 통계를 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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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심야심]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누가 더 ‘경알못’?
    • 입력 2019-07-24 17:48:53
    • 수정2019-07-25 16:07:54
    여심야심
6월 임시국회는 완전한 빈손이었습니다. 법안은 1건도 처리하지 못했죠. 그런데 국회가 계속 놀기만 한 건 아닙니다. '의외로' 많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러 상임위원회나 소위원회 등이 밀린 일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기획재정위도 8차례 열렸습니다. 국세청장 인사청문회를 했고,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등에서 업무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와중에 이색적인 일도 있었습니다. 여야 의원들이 통계 논쟁을 벌인 겁니다. 심지어 한 달 가까이 진행된 논쟁이었습니다.

국회의원이 막말 대신 통계로 싸웠다? 낯설면서도 궁금해졌습니다. 기획재정위 속기록과 해당 의원실을 취재했습니다.


최교일 "하위 20% 근로소득 ↓…'소주성' 실패 통계로 명확"

포문은 자유한국당 최교일 의원이 열었습니다. 6월 26일 국세청장 인사청문회. 최 의원은 소득주도성장이 참담하게 실패하고 있다며 근거로 통계를 제시했습니다. 바로 이 그래프입니다.


경제 통계는 항상 어렵지만, 최소한의 독해만 해볼까요. 1분위는 소득이 낮은 최하위 20%입니다. 5분위는 소득이 높은 최상위 20%입니다. 이걸 염두에 두고 그래프를 차분히 보겠습니다.

1분위, 그러니까 가장 못 사는 20%의 근로소득은 증가보다 감소가 훨씬 두드러지죠. 특히, 지난해와 올해는 내리 급감입니다. 최상위 20%, 가장 잘 사는 이들의 근로소득은 정반대죠. 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근로소득의 빈부격차만 키웠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김경협 "하위 20% 근로소득 ↑…'소주성' 더 열심히 해야"

최교일 의원이 제시한 통계만 보면, 최저임금 인상 등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완벽한 실패'에 가깝습니다. 여당이 반격을 안 할 수가 없죠. 총대를 멘 이는 같은 기재위 소속의 김경협 의원이었습니다.

7월 18일 기재위 전체회의. 최 의원이 통계를 공개한 지 20일 넘게 지난 시점입니다. 김 의원은 최 의원이 '엉뚱한' 통계를 제시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제대로 된 통계를 보면, 소주성 정책의 효과는 명확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반격의 근거가 된 통계, 바로 이 그래프입니다.


비교군은 1분위와 5분위로 같았고, 근로소득을 비교한 점도 동일합니다. 기간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 통계는 최교일 의원이 제시한 것과 정반대입니다. 가장 못 사는 1분위의 근로소득이 계속 늘고 있고, 가장 잘 사는 5분위의 근로소득은 최근 들어 저조합니다.

"존경하는 의원님, '경알못' 이십니다!" 격했던 논쟁

같은 기간, 같은 정보를 비교했는데, 180도 다른 결론이 나오는 셈입니다. 통계의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요. 서로 다른 기초 자료(raw data)를 동원한 것도 아닙니다. 두 의원 모두 통계청이 분기마다 내놓는 「가계동향조사」에 기초해 각자 약간의 가공을 했을 뿐입니다.

마법의 비밀은 모집단에 있습니다. 두 통계 그래프의 제목을 다시 한 번 볼까요. 최교일 의원은 '총가구' 통계이고, 김경협 의원은 '근로자가구' 통계입니다. 무슨 차이냐고요? 그림으로 보면, 알기 쉽습니다.


최교일 의원은 전국의 전체 가구를 본 겁니다. 전체 가구가 벌어들이는 여러 소득, 근로·사업·재산·이전소득 중 근로소득만 따로 추려서 통계를 가공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봤을까요? 최교일 의원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그러면 김경협 의원은 왜 전체 가구가 아닌 근로자 가구만 봤을까요. 소득주도성장의 대표적인 정책인 최저임금 인상 정책의 효과를 정확하기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최 의원이 제시한 통계는 최저임금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노인 빈곤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지표라는 해석도 덧붙였습니다. 전체 가구의 최하위 20%는 65세 이상 노인이 매우 많고, 취업률이 25%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두 의원은 어제(23일) 열린 기재위 전체회의에서도 또 논쟁을 벌였습니다. 서로가 통계를 잘 못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상대방이 '경알못' (경제를 알지 못하는 사람) 수준의 주장을 한다는 식의 격한 언쟁도 벌였습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두 의원이 제시한 통계를 검증한 결과, 통계 왜곡이나 조작은 없었습니다. 각 의원실이 제시한 방법으로 분석하면, 누구나 같은 값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분석 자체는 객관적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 데이터 중 왜 그 데이터를, 여러 기준 중 왜 그 기준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달랐던 겁니다. 그 차이는 소득주도성장을 바라보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수렴합니다. 본인이 원하는 정책적 결론에 유리한 통계를 제각기 취사선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 혐오만 불러일으키는 '막말' '억지' 보다 이런 통계 논쟁은 훨씬 생산적입니다. 결국, 정책에 대한 토론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통계가 진실이다.' 강변만 할 것이 아니라, 해당 통계를 사용하는 정치적 입장과 관점도 함께 설명했다면 더 수준 높은 논쟁이었을 겁니다.

"거짓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 벤저민 디스레일" 통계학에는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훈련된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일반 시민은 통계를 쉽게 믿습니다. 정치인이 더 신중하고, 더 친절하게, 통계를 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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