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끝나지 않은 싸움’ 우에무라의 최후변론
입력 2019.12.18 (08:00)
수정 2019.12.18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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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의 첫 증언자인 故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장 처음 보도한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씨. 그의 이야기를 KBS가 지난 14일 보도해드렸습니다,
[연관 기사] ‘위안부 최초 고발’ 우에무라의 투쟁…“역사의 진실 전하는 싸움” (2019.12.14. KBS1TV ‘뉴스9’)
우에무라 씨는 '위안부' 기사 이후 일본 우익 인사들의 공격이 계속되자 이에 대한 명예회복과 손해배상을 위해 소송을 냈습니다. 이 가운데 니시오카 쓰토무 전 도쿄기독교대학 교수와 주간지 '주간문춘'을 발행하는 '문예춘추'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도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1심에선 졌습니다.
어제(16일) 오후, 도쿄에서는 이 재판의 항소심 결심이 열렸습니다. 우에무라 씨는 방청객 70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최후 변론을 했습니다. 우에무라 씨가 KBS에 보내온 내용을 번역해 싣습니다.
[우에무라의 의견 진술서]
2014년 1월 31일의 사건
"'주간문춘'에 나온 기사로, '왜 이런 사람을 교수 시키냐'는 등 항의 전화가 옵니다. 이 건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 휴대폰으로 이런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부터 6년쯤 전인 2014년 1월 31일 저녁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사히신문 하코다테 지국장이었고, 취재처에 있었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그해 4월부터 제가 전직하기로 돼 있었던 고베쇼인여자대학대학원(고베쇼인)의 사무국장이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불안감이 퍼졌습니다. 올려다 본 하늘은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따끔따끔하게 마음이 아픕니다.
전날 발매된 '주간문춘'에 〈위안부 날조 기자가 아가씨 대학의 교수가 된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저는 1991년 8월 11일 자 아사히신문 오사카본사판에서 전 일본군 위안부가 증언을 시작했다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문춘의 기사는, 저의 기사를 '날조'라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사의 전문에서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戰場)에 연행돼"라고 썼습니다. 또, 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경위에 대해서는 "속아서"라고 썼습니다. 주간문춘 기사에 담화를 게재한 니시오카 씨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정신대는 군수 공장 등에 근로를 동원하는 조직으로 위안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 나선 여성은 부모가 자신을 팔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소장에 썼고, 한국 신문의 취재에도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우에무라 씨는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강제 연행이 있었던 것처럼 기사를 쓰고 있어, 날조 기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니시오카 씨는 제가 기사에서 "속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쓴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니시오카 씨의 말을 게재한 기사를 계기로, 격렬한 '우에무라 배싱(우에무라 때리기)'이 일어나, 고베쇼인에도 항의가 쇄도했습니다. 결국 대학 측이 공포에 떨어 저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전직처를 잃게 됐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예정대로 조기 퇴직했기 때문에, 남은 일은 삿포로의 호쿠세이학원대학(호쿠세이) 비상근 강사뿐이었습니다.
저는 표적이 됐습니다
'주간문춘'은 또한 2014년 8월 14일·21일호에서 〈위안부 주동자 아사히신문 기자, 아가씨 대학 해고돼 북쪽의 대지로〉라는 기사로, 제가 호쿠세이학원대학에서 비상근 강사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호쿠세이에도 전화나 메일 등으로 격렬한 항의가 잇따랐습니다. 협박장이 오기도 하고,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대학은 경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교직원들도 피폐해졌습니다.
호쿠세이에 대한 공격에 대응해, 시민들이 만든 〈지지마 호쿠세이! 모임〉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저를 계속 고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교원도 여러명 나왔습니다. 2015년도 고용은 계속하기로 돼 있었지만, "다음 연도의 고용은 없다"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호쿠세이의 자매학교였던 한국의 가톨릭대학교가 저를 객원교수로 초청해 2016년 봄부터 한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일본의 대학 교원 공모에 응모하고 있습니다만, 서류 심사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제 기사에서 사용한 '정신대'라는 표현은 당시 한국에서 위안부의 의미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제 기사가 나온 3일 뒤, 이 전 위안부 여성은 '김학순'이라는 실명을 밝히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 때 김 씨는 자신을 '정신대'라고 불렀습니다. 회견을 보도한 한국 신문의 기사나, 김 씨를 단독 회견한 홋카이도신문 기사에도 김 씨 본인이 말한 '정신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기자회견에서 김 씨는 "16살이 조금 넘어 (나를) 끌고 가고(연행해). 강제로"라고 말했습니다. 김학순 씨는 자신이 강제 연행됐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산케이신문은 적어도 두 번에 걸쳐, 김 씨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됐다고 전했습니다. 이런 당시 각 신문의 보도 상황을 보면 제 기사는 지극히 보통의 기사입니다. 그런데도 저만이 니시오카 씨와 '주간문춘'의 '표적'이 된 것입니다.
재판관 여러분께
'주간문춘' 기사로 제 인생은 꼬였습니다. '날조'라는 건 저널리스트에게는 사형 선고와도 같습니다. 이 기사 때문에, 일본의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다는 제 꿈은 빼앗겨버렸습니다. 그리고 딸을 살해하겠다는 협박장까지 받았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국적(國賊)' 우에무라 다카시의 딸인 000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 기한은 두지 않는다. 몇 년이 걸려도 죽인다. 땅끝까지 추적해 죽일 것이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딸을 생각하면 지금도 불안에 휩싸입니다.
저는 제 명예뿐 아니라,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재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판관 여러분, 이런 사정을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저는 '날조 기자'가 아닙니다. 재판소는 인권을 지키는 사법 기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법에 의한 구제가 반드시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증거나 새로운 증거를 제대로 검토해주시면, 진실은 제 편에 있다는 사실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날조 기자'라는 저에 대한 오명을 풀어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
항소심 선고 삿포로 2월·도쿄 3월..."역전승리 증거냈다"
지난 10일, 재판을 앞두고 경기도 부천 가톨릭대에서 만난 우에무라 씨는 "역전 승리를 위해서 새로운 증거도 냈다"며 "정의 실현을 위해 (일본의) 사법기관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쿄 재판 항소심 선고는 내년 3월 3일 이뤄집니다. 우익 인사 사쿠라이 요시코 씨를 상대로 한 삿포로 소송 항소심 선고일은 오는 2월 6일입니다.
[연관 기사] ‘위안부 최초 고발’ 우에무라의 투쟁…“역사의 진실 전하는 싸움” (2019.12.14. KBS1TV ‘뉴스9’)
우에무라 씨는 '위안부' 기사 이후 일본 우익 인사들의 공격이 계속되자 이에 대한 명예회복과 손해배상을 위해 소송을 냈습니다. 이 가운데 니시오카 쓰토무 전 도쿄기독교대학 교수와 주간지 '주간문춘'을 발행하는 '문예춘추'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도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1심에선 졌습니다.
어제(16일) 오후, 도쿄에서는 이 재판의 항소심 결심이 열렸습니다. 우에무라 씨는 방청객 70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최후 변론을 했습니다. 우에무라 씨가 KBS에 보내온 내용을 번역해 싣습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씨가 어제(16일) 도쿄고등재판소에서 밝힌 진술서입니다.
[우에무라의 의견 진술서]
2014년 1월 31일의 사건
"'주간문춘'에 나온 기사로, '왜 이런 사람을 교수 시키냐'는 등 항의 전화가 옵니다. 이 건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 휴대폰으로 이런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부터 6년쯤 전인 2014년 1월 31일 저녁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사히신문 하코다테 지국장이었고, 취재처에 있었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그해 4월부터 제가 전직하기로 돼 있었던 고베쇼인여자대학대학원(고베쇼인)의 사무국장이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불안감이 퍼졌습니다. 올려다 본 하늘은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따끔따끔하게 마음이 아픕니다.
전날 발매된 '주간문춘'에 〈위안부 날조 기자가 아가씨 대학의 교수가 된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저는 1991년 8월 11일 자 아사히신문 오사카본사판에서 전 일본군 위안부가 증언을 시작했다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문춘의 기사는, 저의 기사를 '날조'라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사의 전문에서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戰場)에 연행돼"라고 썼습니다. 또, 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경위에 대해서는 "속아서"라고 썼습니다. 주간문춘 기사에 담화를 게재한 니시오카 씨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정신대는 군수 공장 등에 근로를 동원하는 조직으로 위안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 나선 여성은 부모가 자신을 팔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소장에 썼고, 한국 신문의 취재에도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우에무라 씨는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강제 연행이 있었던 것처럼 기사를 쓰고 있어, 날조 기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니시오카 씨는 제가 기사에서 "속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쓴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니시오카 씨의 말을 게재한 기사를 계기로, 격렬한 '우에무라 배싱(우에무라 때리기)'이 일어나, 고베쇼인에도 항의가 쇄도했습니다. 결국 대학 측이 공포에 떨어 저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전직처를 잃게 됐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예정대로 조기 퇴직했기 때문에, 남은 일은 삿포로의 호쿠세이학원대학(호쿠세이) 비상근 강사뿐이었습니다.
저는 표적이 됐습니다
'주간문춘'은 또한 2014년 8월 14일·21일호에서 〈위안부 주동자 아사히신문 기자, 아가씨 대학 해고돼 북쪽의 대지로〉라는 기사로, 제가 호쿠세이학원대학에서 비상근 강사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호쿠세이에도 전화나 메일 등으로 격렬한 항의가 잇따랐습니다. 협박장이 오기도 하고,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대학은 경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교직원들도 피폐해졌습니다.
호쿠세이에 대한 공격에 대응해, 시민들이 만든 〈지지마 호쿠세이! 모임〉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저를 계속 고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교원도 여러명 나왔습니다. 2015년도 고용은 계속하기로 돼 있었지만, "다음 연도의 고용은 없다"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호쿠세이의 자매학교였던 한국의 가톨릭대학교가 저를 객원교수로 초청해 2016년 봄부터 한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일본의 대학 교원 공모에 응모하고 있습니다만, 서류 심사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제 기사에서 사용한 '정신대'라는 표현은 당시 한국에서 위안부의 의미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제 기사가 나온 3일 뒤, 이 전 위안부 여성은 '김학순'이라는 실명을 밝히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 때 김 씨는 자신을 '정신대'라고 불렀습니다. 회견을 보도한 한국 신문의 기사나, 김 씨를 단독 회견한 홋카이도신문 기사에도 김 씨 본인이 말한 '정신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기자회견에서 김 씨는 "16살이 조금 넘어 (나를) 끌고 가고(연행해). 강제로"라고 말했습니다. 김학순 씨는 자신이 강제 연행됐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산케이신문은 적어도 두 번에 걸쳐, 김 씨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됐다고 전했습니다. 이런 당시 각 신문의 보도 상황을 보면 제 기사는 지극히 보통의 기사입니다. 그런데도 저만이 니시오카 씨와 '주간문춘'의 '표적'이 된 것입니다.
재판관 여러분께
'주간문춘' 기사로 제 인생은 꼬였습니다. '날조'라는 건 저널리스트에게는 사형 선고와도 같습니다. 이 기사 때문에, 일본의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다는 제 꿈은 빼앗겨버렸습니다. 그리고 딸을 살해하겠다는 협박장까지 받았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국적(國賊)' 우에무라 다카시의 딸인 000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 기한은 두지 않는다. 몇 년이 걸려도 죽인다. 땅끝까지 추적해 죽일 것이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딸을 생각하면 지금도 불안에 휩싸입니다.
저는 제 명예뿐 아니라,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재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판관 여러분, 이런 사정을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저는 '날조 기자'가 아닙니다. 재판소는 인권을 지키는 사법 기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법에 의한 구제가 반드시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증거나 새로운 증거를 제대로 검토해주시면, 진실은 제 편에 있다는 사실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날조 기자'라는 저에 대한 오명을 풀어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
항소심 선고 삿포로 2월·도쿄 3월..."역전승리 증거냈다"
지난 10일, 재판을 앞두고 경기도 부천 가톨릭대에서 만난 우에무라 씨는 "역전 승리를 위해서 새로운 증거도 냈다"며 "정의 실현을 위해 (일본의) 사법기관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쿄 재판 항소심 선고는 내년 3월 3일 이뤄집니다. 우익 인사 사쿠라이 요시코 씨를 상대로 한 삿포로 소송 항소심 선고일은 오는 2월 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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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후] ‘끝나지 않은 싸움’ 우에무라의 최후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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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12-18 08:00:35
- 수정2019-12-18 08:06:15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의 첫 증언자인 故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장 처음 보도한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씨. 그의 이야기를 KBS가 지난 14일 보도해드렸습니다,
[연관 기사] ‘위안부 최초 고발’ 우에무라의 투쟁…“역사의 진실 전하는 싸움” (2019.12.14. KBS1TV ‘뉴스9’)
우에무라 씨는 '위안부' 기사 이후 일본 우익 인사들의 공격이 계속되자 이에 대한 명예회복과 손해배상을 위해 소송을 냈습니다. 이 가운데 니시오카 쓰토무 전 도쿄기독교대학 교수와 주간지 '주간문춘'을 발행하는 '문예춘추'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도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1심에선 졌습니다.
어제(16일) 오후, 도쿄에서는 이 재판의 항소심 결심이 열렸습니다. 우에무라 씨는 방청객 70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최후 변론을 했습니다. 우에무라 씨가 KBS에 보내온 내용을 번역해 싣습니다.
[우에무라의 의견 진술서]
2014년 1월 31일의 사건
"'주간문춘'에 나온 기사로, '왜 이런 사람을 교수 시키냐'는 등 항의 전화가 옵니다. 이 건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 휴대폰으로 이런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부터 6년쯤 전인 2014년 1월 31일 저녁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사히신문 하코다테 지국장이었고, 취재처에 있었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그해 4월부터 제가 전직하기로 돼 있었던 고베쇼인여자대학대학원(고베쇼인)의 사무국장이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불안감이 퍼졌습니다. 올려다 본 하늘은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따끔따끔하게 마음이 아픕니다.
전날 발매된 '주간문춘'에 〈위안부 날조 기자가 아가씨 대학의 교수가 된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저는 1991년 8월 11일 자 아사히신문 오사카본사판에서 전 일본군 위안부가 증언을 시작했다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문춘의 기사는, 저의 기사를 '날조'라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사의 전문에서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戰場)에 연행돼"라고 썼습니다. 또, 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경위에 대해서는 "속아서"라고 썼습니다. 주간문춘 기사에 담화를 게재한 니시오카 씨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정신대는 군수 공장 등에 근로를 동원하는 조직으로 위안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 나선 여성은 부모가 자신을 팔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소장에 썼고, 한국 신문의 취재에도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우에무라 씨는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강제 연행이 있었던 것처럼 기사를 쓰고 있어, 날조 기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니시오카 씨는 제가 기사에서 "속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쓴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니시오카 씨의 말을 게재한 기사를 계기로, 격렬한 '우에무라 배싱(우에무라 때리기)'이 일어나, 고베쇼인에도 항의가 쇄도했습니다. 결국 대학 측이 공포에 떨어 저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전직처를 잃게 됐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예정대로 조기 퇴직했기 때문에, 남은 일은 삿포로의 호쿠세이학원대학(호쿠세이) 비상근 강사뿐이었습니다.
저는 표적이 됐습니다
'주간문춘'은 또한 2014년 8월 14일·21일호에서 〈위안부 주동자 아사히신문 기자, 아가씨 대학 해고돼 북쪽의 대지로〉라는 기사로, 제가 호쿠세이학원대학에서 비상근 강사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호쿠세이에도 전화나 메일 등으로 격렬한 항의가 잇따랐습니다. 협박장이 오기도 하고,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대학은 경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교직원들도 피폐해졌습니다.
호쿠세이에 대한 공격에 대응해, 시민들이 만든 〈지지마 호쿠세이! 모임〉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저를 계속 고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교원도 여러명 나왔습니다. 2015년도 고용은 계속하기로 돼 있었지만, "다음 연도의 고용은 없다"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호쿠세이의 자매학교였던 한국의 가톨릭대학교가 저를 객원교수로 초청해 2016년 봄부터 한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일본의 대학 교원 공모에 응모하고 있습니다만, 서류 심사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제 기사에서 사용한 '정신대'라는 표현은 당시 한국에서 위안부의 의미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제 기사가 나온 3일 뒤, 이 전 위안부 여성은 '김학순'이라는 실명을 밝히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 때 김 씨는 자신을 '정신대'라고 불렀습니다. 회견을 보도한 한국 신문의 기사나, 김 씨를 단독 회견한 홋카이도신문 기사에도 김 씨 본인이 말한 '정신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기자회견에서 김 씨는 "16살이 조금 넘어 (나를) 끌고 가고(연행해). 강제로"라고 말했습니다. 김학순 씨는 자신이 강제 연행됐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산케이신문은 적어도 두 번에 걸쳐, 김 씨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됐다고 전했습니다. 이런 당시 각 신문의 보도 상황을 보면 제 기사는 지극히 보통의 기사입니다. 그런데도 저만이 니시오카 씨와 '주간문춘'의 '표적'이 된 것입니다.
재판관 여러분께
'주간문춘' 기사로 제 인생은 꼬였습니다. '날조'라는 건 저널리스트에게는 사형 선고와도 같습니다. 이 기사 때문에, 일본의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다는 제 꿈은 빼앗겨버렸습니다. 그리고 딸을 살해하겠다는 협박장까지 받았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국적(國賊)' 우에무라 다카시의 딸인 000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 기한은 두지 않는다. 몇 년이 걸려도 죽인다. 땅끝까지 추적해 죽일 것이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딸을 생각하면 지금도 불안에 휩싸입니다.
저는 제 명예뿐 아니라,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재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판관 여러분, 이런 사정을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저는 '날조 기자'가 아닙니다. 재판소는 인권을 지키는 사법 기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법에 의한 구제가 반드시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증거나 새로운 증거를 제대로 검토해주시면, 진실은 제 편에 있다는 사실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날조 기자'라는 저에 대한 오명을 풀어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
항소심 선고 삿포로 2월·도쿄 3월..."역전승리 증거냈다"
지난 10일, 재판을 앞두고 경기도 부천 가톨릭대에서 만난 우에무라 씨는 "역전 승리를 위해서 새로운 증거도 냈다"며 "정의 실현을 위해 (일본의) 사법기관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쿄 재판 항소심 선고는 내년 3월 3일 이뤄집니다. 우익 인사 사쿠라이 요시코 씨를 상대로 한 삿포로 소송 항소심 선고일은 오는 2월 6일입니다.
[연관 기사] ‘위안부 최초 고발’ 우에무라의 투쟁…“역사의 진실 전하는 싸움” (2019.12.14. KBS1TV ‘뉴스9’)
우에무라 씨는 '위안부' 기사 이후 일본 우익 인사들의 공격이 계속되자 이에 대한 명예회복과 손해배상을 위해 소송을 냈습니다. 이 가운데 니시오카 쓰토무 전 도쿄기독교대학 교수와 주간지 '주간문춘'을 발행하는 '문예춘추'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도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1심에선 졌습니다.
어제(16일) 오후, 도쿄에서는 이 재판의 항소심 결심이 열렸습니다. 우에무라 씨는 방청객 70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최후 변론을 했습니다. 우에무라 씨가 KBS에 보내온 내용을 번역해 싣습니다.
[우에무라의 의견 진술서]
2014년 1월 31일의 사건
"'주간문춘'에 나온 기사로, '왜 이런 사람을 교수 시키냐'는 등 항의 전화가 옵니다. 이 건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 휴대폰으로 이런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부터 6년쯤 전인 2014년 1월 31일 저녁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사히신문 하코다테 지국장이었고, 취재처에 있었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그해 4월부터 제가 전직하기로 돼 있었던 고베쇼인여자대학대학원(고베쇼인)의 사무국장이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불안감이 퍼졌습니다. 올려다 본 하늘은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따끔따끔하게 마음이 아픕니다.
전날 발매된 '주간문춘'에 〈위안부 날조 기자가 아가씨 대학의 교수가 된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저는 1991년 8월 11일 자 아사히신문 오사카본사판에서 전 일본군 위안부가 증언을 시작했다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문춘의 기사는, 저의 기사를 '날조'라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사의 전문에서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戰場)에 연행돼"라고 썼습니다. 또, 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경위에 대해서는 "속아서"라고 썼습니다. 주간문춘 기사에 담화를 게재한 니시오카 씨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정신대는 군수 공장 등에 근로를 동원하는 조직으로 위안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 나선 여성은 부모가 자신을 팔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소장에 썼고, 한국 신문의 취재에도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우에무라 씨는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강제 연행이 있었던 것처럼 기사를 쓰고 있어, 날조 기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니시오카 씨는 제가 기사에서 "속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쓴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니시오카 씨의 말을 게재한 기사를 계기로, 격렬한 '우에무라 배싱(우에무라 때리기)'이 일어나, 고베쇼인에도 항의가 쇄도했습니다. 결국 대학 측이 공포에 떨어 저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전직처를 잃게 됐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예정대로 조기 퇴직했기 때문에, 남은 일은 삿포로의 호쿠세이학원대학(호쿠세이) 비상근 강사뿐이었습니다.
저는 표적이 됐습니다
'주간문춘'은 또한 2014년 8월 14일·21일호에서 〈위안부 주동자 아사히신문 기자, 아가씨 대학 해고돼 북쪽의 대지로〉라는 기사로, 제가 호쿠세이학원대학에서 비상근 강사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호쿠세이에도 전화나 메일 등으로 격렬한 항의가 잇따랐습니다. 협박장이 오기도 하고,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대학은 경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교직원들도 피폐해졌습니다.
호쿠세이에 대한 공격에 대응해, 시민들이 만든 〈지지마 호쿠세이! 모임〉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저를 계속 고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교원도 여러명 나왔습니다. 2015년도 고용은 계속하기로 돼 있었지만, "다음 연도의 고용은 없다"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호쿠세이의 자매학교였던 한국의 가톨릭대학교가 저를 객원교수로 초청해 2016년 봄부터 한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일본의 대학 교원 공모에 응모하고 있습니다만, 서류 심사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제 기사에서 사용한 '정신대'라는 표현은 당시 한국에서 위안부의 의미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제 기사가 나온 3일 뒤, 이 전 위안부 여성은 '김학순'이라는 실명을 밝히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 때 김 씨는 자신을 '정신대'라고 불렀습니다. 회견을 보도한 한국 신문의 기사나, 김 씨를 단독 회견한 홋카이도신문 기사에도 김 씨 본인이 말한 '정신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기자회견에서 김 씨는 "16살이 조금 넘어 (나를) 끌고 가고(연행해). 강제로"라고 말했습니다. 김학순 씨는 자신이 강제 연행됐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산케이신문은 적어도 두 번에 걸쳐, 김 씨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됐다고 전했습니다. 이런 당시 각 신문의 보도 상황을 보면 제 기사는 지극히 보통의 기사입니다. 그런데도 저만이 니시오카 씨와 '주간문춘'의 '표적'이 된 것입니다.
재판관 여러분께
'주간문춘' 기사로 제 인생은 꼬였습니다. '날조'라는 건 저널리스트에게는 사형 선고와도 같습니다. 이 기사 때문에, 일본의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다는 제 꿈은 빼앗겨버렸습니다. 그리고 딸을 살해하겠다는 협박장까지 받았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국적(國賊)' 우에무라 다카시의 딸인 000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 기한은 두지 않는다. 몇 년이 걸려도 죽인다. 땅끝까지 추적해 죽일 것이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딸을 생각하면 지금도 불안에 휩싸입니다.
저는 제 명예뿐 아니라,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재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판관 여러분, 이런 사정을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저는 '날조 기자'가 아닙니다. 재판소는 인권을 지키는 사법 기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법에 의한 구제가 반드시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증거나 새로운 증거를 제대로 검토해주시면, 진실은 제 편에 있다는 사실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날조 기자'라는 저에 대한 오명을 풀어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
항소심 선고 삿포로 2월·도쿄 3월..."역전승리 증거냈다"
지난 10일, 재판을 앞두고 경기도 부천 가톨릭대에서 만난 우에무라 씨는 "역전 승리를 위해서 새로운 증거도 냈다"며 "정의 실현을 위해 (일본의) 사법기관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쿄 재판 항소심 선고는 내년 3월 3일 이뤄집니다. 우익 인사 사쿠라이 요시코 씨를 상대로 한 삿포로 소송 항소심 선고일은 오는 2월 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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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기자 vox@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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