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끝내자는 것 아니다”…새로운 위안부 운동 어떻게?

입력 2020.06.07 (08:03) 수정 2020.06.16 (11:1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247명, 그리고…

서울 남산 '기억의 터'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피해자들을 잊지 말자며 여러 단체와 개인들이 참여해 서울시가 2016년 조성했습니다. 피해자 명단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정리했는데, 모두 247명입니다.

이 중에는 위안부 운동의 최전선에 나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있는가 하면, 개인적인 이유로 가명을 쓰거나 추후에 지워진 이름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예 이름이 빠진 피해자도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故 심미자 할머니입니다. 1992년, 결연한 표정으로 일본 법정에서 "부대 안에서 감금당한 위안부로서 (..) 성 공동변소(위안소) 생활을 해야 했던 심미자입니다."라고 말했던 할머니는 일본 법정에서 최초로 위안부로 인정받았습니다.

심미자 할머니의 1992년 일본 법정 증언 모습심미자 할머니의 1992년 일본 법정 증언 모습

그런데 할머니는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을 두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갈등했습니다. 당시 기금이 법적 배상이 아닌 위로금 형식이라며 반대한 정대협 측과, 이 기금을 받고자 했던 일부 할머니 측의 갈등입니다. 이 때문에 '기억의 터'에 심 할머니 이름이 빠진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 "대의와 요구 충돌"

심 할머니가 주도했던 2004년 성명문을 보면 당시 갈등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보입니다. 할머니는 정대협을 "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들"이라고 규정하며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은 7명의 위안부 할머니가 정부 보상금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며 비판합니다.

1997년 언론 보도를 보면 윤정옥 당시 정대협 대표도 "배상금이 아닌 동정금을 받게 하려는 제안을 뿌리치는 것"을 앞으로의 운동 계획이라며, "동정금을 받는다는 것은 피해자가 자원해서 공창이 되는 것이므로 곧 일본은 죄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3·1절 78주년 특집]「정신대」운동 관련 세미나 종합, 가톨릭신문, 1997. 3. 9. )

비슷한 시기 (1997~2002년) 정대협 사무총장으로 재임했던 양미강 박사는 '치열한 상황'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양 전 사무총장은 당시 이 기금의 성격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며, "사실 피해자들이 그 연세에 생각하면 내가 죽기 전에 이 돈 받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고, 이런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위안부 운동이 재정적으로나 인력적으로나 상당히 제한된 상황 속에서 일할 수밖에 없어서 한분 한분 세심하게 챙겼다고 이야기하긴 쉽지 않았다"며, 30년이 지난 지금부터는 큰 틀에서의 동의를 넘어 아주 세세한 부분에까지 소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피해자로만 남지 않도록

일본의 사죄와 배상이라는 '대의'와 싸우기 위해, 지난 30년 동안 피해자들은 위안부 운동의 최전선에 나서 피해를 끊임없이 증언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위안부 지원 단체 '나눔의집'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대월 학예실장에 따르면 나눔의집 할머니들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피곤한 날에도 나가 피해를 증언해야 했습니다.

김 학예실장은 "할머니들은 항상 우울해야 하고, 화가 나야 하고, 일본 정부에 아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사과를 요구해야 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죽을 때까지 피해자로 대상화된다는 건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아예 송두리째 빼앗는 것"이라며 할머니 한 분 한 분의 요구와 이야기에 귀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양 전 사무총장도 "할머니들의 증언을 보면 피해 경험이나 정도는 굉장히 다양하다"며 "정형화된 피해자로서의 인간이 아니고, 피해를 넘어서서 한 인간으로 개별화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피해의) 원상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피해자 중심주의라고 해서 피해자의 수요 하나하나를 챙기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김창록 초대 일본군위안부 문제연구소장은 "30년간 이어져 온 할머니들의 증언과 강연, 활동가들과 주고받은 이야기, 수요 시위 등 활동을 통해 할머니들과 전 세계 시민들이 함께 세운 공감대와 원칙을 종합적으로 보면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중심에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위안부 운동에 존재감 적은 정부

위안부 운동에서 정부의 모습을 찾긴 어려웠습니다. 자료 조사부터 외교적 노력까지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지만, 정부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아베 일본 총리의 2015년 미 의회 연설에 맞춰 항의 시위를 주도한 이정실 미국 워싱턴 정대위(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회장은 위안부 운동에서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돈은 '0달러'라고 강조했습니다.

2015년 미국 워싱턴DC 의사당 앞 집회에 참석한 이용수 할머니2015년 미국 워싱턴DC 의사당 앞 집회에 참석한 이용수 할머니

이정실 회장은 "2015년에 이용수 할머니의 생활비, 용돈은 저희가 다 알아서 했다. 당시 총영사가 멀리서 시위를 보면서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라면서 전화해주셨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한국 정부로부터 도움받는 건 포기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에게 생활비 지원은 했지만, 더 나아가진 못했습니다. 보다 못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2011년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노력하지 않았다며 '위헌' 판결을 했습니다.

■겨우 '연구소'는 세웠지만…

헌재의 '위헌' 판결 후 7년이 지나서야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연구소를 세웠습니다. 자료조사부터 역사 교육까지 위안부 문제의 체계적인 지원과 연구가 목표이지만, 연구소는 운영에도 버거운 상황입니다. 법적 근거가 없어 1년 단위로 예산을 따로 받고, 10명 안팎의 직원도 모두 1년 단위 계약직입니다.

김소라 일본군위안부 문제연구소 소장은 "팀원이 다 계약해지를 하게 되는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사업을 하기 어렵다. 또 기간제 직원이다 보니 사람을 뽑을 때 적격자가 없어 채용이 제때 이뤄지지 않는다."라고 밝혔습니다. 연구소장 자리도 김창록 초대 연구소장이 2018년 사퇴한 이후 올해 3월까지 1년 넘게 공석이었습니다.

지난달 끝난 20대 국회에서 더욱 체계적인 기관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민주당 남인순·정춘숙 의원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연구소'와 '여성인권평화재단' 설립 등을 골자로 하는 위안부피해자법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법안은 국회에서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했고 자동 폐기됐습니다.

■생존자는 단 17명!

위안부 문제는 해결할 과제가 다양하고 많지만, 30년간 정부 대신 몇몇 단체와 위안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높여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도 이 운동의 대의에 공감하며 지지해왔습니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의 문제제기로 피해자와 시민단체의 갈등 양상으로까지 비치는 상황입니다. 이용수 할머니도 "끝내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만큼 이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이미 "피해자가 고령이라 더는 시간을 지체하면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하는 게 불가능해질 수 있다."라고 사안이 절박하다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현재 살아있는 위안부 피해자는 17명. 생존자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아 피해자가 주도하는 운동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입니다. 바로 지금, 국가의 역할과 책임은 무엇일까요?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취재후] “끝내자는 것 아니다”…새로운 위안부 운동 어떻게?
    • 입력 2020-06-07 08:03:03
    • 수정2020-06-16 11:12:15
    취재후·사건후
■ 247명, 그리고…

서울 남산 '기억의 터'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피해자들을 잊지 말자며 여러 단체와 개인들이 참여해 서울시가 2016년 조성했습니다. 피해자 명단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정리했는데, 모두 247명입니다.

이 중에는 위안부 운동의 최전선에 나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있는가 하면, 개인적인 이유로 가명을 쓰거나 추후에 지워진 이름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예 이름이 빠진 피해자도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故 심미자 할머니입니다. 1992년, 결연한 표정으로 일본 법정에서 "부대 안에서 감금당한 위안부로서 (..) 성 공동변소(위안소) 생활을 해야 했던 심미자입니다."라고 말했던 할머니는 일본 법정에서 최초로 위안부로 인정받았습니다.

심미자 할머니의 1992년 일본 법정 증언 모습
그런데 할머니는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을 두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갈등했습니다. 당시 기금이 법적 배상이 아닌 위로금 형식이라며 반대한 정대협 측과, 이 기금을 받고자 했던 일부 할머니 측의 갈등입니다. 이 때문에 '기억의 터'에 심 할머니 이름이 빠진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 "대의와 요구 충돌"

심 할머니가 주도했던 2004년 성명문을 보면 당시 갈등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보입니다. 할머니는 정대협을 "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들"이라고 규정하며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은 7명의 위안부 할머니가 정부 보상금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며 비판합니다.

1997년 언론 보도를 보면 윤정옥 당시 정대협 대표도 "배상금이 아닌 동정금을 받게 하려는 제안을 뿌리치는 것"을 앞으로의 운동 계획이라며, "동정금을 받는다는 것은 피해자가 자원해서 공창이 되는 것이므로 곧 일본은 죄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3·1절 78주년 특집]「정신대」운동 관련 세미나 종합, 가톨릭신문, 1997. 3. 9. )

비슷한 시기 (1997~2002년) 정대협 사무총장으로 재임했던 양미강 박사는 '치열한 상황'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양 전 사무총장은 당시 이 기금의 성격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며, "사실 피해자들이 그 연세에 생각하면 내가 죽기 전에 이 돈 받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고, 이런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위안부 운동이 재정적으로나 인력적으로나 상당히 제한된 상황 속에서 일할 수밖에 없어서 한분 한분 세심하게 챙겼다고 이야기하긴 쉽지 않았다"며, 30년이 지난 지금부터는 큰 틀에서의 동의를 넘어 아주 세세한 부분에까지 소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피해자로만 남지 않도록

일본의 사죄와 배상이라는 '대의'와 싸우기 위해, 지난 30년 동안 피해자들은 위안부 운동의 최전선에 나서 피해를 끊임없이 증언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위안부 지원 단체 '나눔의집'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대월 학예실장에 따르면 나눔의집 할머니들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피곤한 날에도 나가 피해를 증언해야 했습니다.

김 학예실장은 "할머니들은 항상 우울해야 하고, 화가 나야 하고, 일본 정부에 아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사과를 요구해야 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죽을 때까지 피해자로 대상화된다는 건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아예 송두리째 빼앗는 것"이라며 할머니 한 분 한 분의 요구와 이야기에 귀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양 전 사무총장도 "할머니들의 증언을 보면 피해 경험이나 정도는 굉장히 다양하다"며 "정형화된 피해자로서의 인간이 아니고, 피해를 넘어서서 한 인간으로 개별화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피해의) 원상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피해자 중심주의라고 해서 피해자의 수요 하나하나를 챙기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김창록 초대 일본군위안부 문제연구소장은 "30년간 이어져 온 할머니들의 증언과 강연, 활동가들과 주고받은 이야기, 수요 시위 등 활동을 통해 할머니들과 전 세계 시민들이 함께 세운 공감대와 원칙을 종합적으로 보면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중심에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위안부 운동에 존재감 적은 정부

위안부 운동에서 정부의 모습을 찾긴 어려웠습니다. 자료 조사부터 외교적 노력까지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지만, 정부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아베 일본 총리의 2015년 미 의회 연설에 맞춰 항의 시위를 주도한 이정실 미국 워싱턴 정대위(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회장은 위안부 운동에서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돈은 '0달러'라고 강조했습니다.

2015년 미국 워싱턴DC 의사당 앞 집회에 참석한 이용수 할머니
이정실 회장은 "2015년에 이용수 할머니의 생활비, 용돈은 저희가 다 알아서 했다. 당시 총영사가 멀리서 시위를 보면서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라면서 전화해주셨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한국 정부로부터 도움받는 건 포기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에게 생활비 지원은 했지만, 더 나아가진 못했습니다. 보다 못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2011년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노력하지 않았다며 '위헌' 판결을 했습니다.

■겨우 '연구소'는 세웠지만…

헌재의 '위헌' 판결 후 7년이 지나서야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연구소를 세웠습니다. 자료조사부터 역사 교육까지 위안부 문제의 체계적인 지원과 연구가 목표이지만, 연구소는 운영에도 버거운 상황입니다. 법적 근거가 없어 1년 단위로 예산을 따로 받고, 10명 안팎의 직원도 모두 1년 단위 계약직입니다.

김소라 일본군위안부 문제연구소 소장은 "팀원이 다 계약해지를 하게 되는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사업을 하기 어렵다. 또 기간제 직원이다 보니 사람을 뽑을 때 적격자가 없어 채용이 제때 이뤄지지 않는다."라고 밝혔습니다. 연구소장 자리도 김창록 초대 연구소장이 2018년 사퇴한 이후 올해 3월까지 1년 넘게 공석이었습니다.

지난달 끝난 20대 국회에서 더욱 체계적인 기관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민주당 남인순·정춘숙 의원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연구소'와 '여성인권평화재단' 설립 등을 골자로 하는 위안부피해자법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법안은 국회에서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했고 자동 폐기됐습니다.

■생존자는 단 17명!

위안부 문제는 해결할 과제가 다양하고 많지만, 30년간 정부 대신 몇몇 단체와 위안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높여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도 이 운동의 대의에 공감하며 지지해왔습니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의 문제제기로 피해자와 시민단체의 갈등 양상으로까지 비치는 상황입니다. 이용수 할머니도 "끝내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만큼 이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이미 "피해자가 고령이라 더는 시간을 지체하면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하는 게 불가능해질 수 있다."라고 사안이 절박하다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현재 살아있는 위안부 피해자는 17명. 생존자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아 피해자가 주도하는 운동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입니다. 바로 지금, 국가의 역할과 책임은 무엇일까요?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