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약을?”…명의도용 9년, 아무도 몰랐다

입력 2021.01.0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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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내가 마약을?” 황당한 편지에 ‘화들짝’

충남 예산에 사는 이기수 씨는 지난달 중순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황당한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아내가 졸피뎀 성분의 향정신성 의약품인 ‘졸피드정’을 중복으로 처방받았으니, 오남용에 주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졸피드 정’은 환각과 같은 부작용 때문에 마약류로 분류돼 엄격히 관리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한류스타 ‘보아’의 해외 대리처방 논란을 접한 터라 막연히 위험한 약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아내가 그런 약을 처방받았다고 하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씨는 아내가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닌지,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면서도, 나 몰래 혼자 병원에 다녔다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 9년간 확인된 명의도용만 ‘230여 건’...“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씨는 아내에게 졸피뎀 처방 이력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이 씨의 아내 역시 황당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이 씨 부부는 건강보험공단에 처방 이력을 요구했고, 황당함은 곧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조회가 가능한 최근 9년간의 병원 처방 이력을 받아보니, 무려 233건의 명의도용 사례가 있었던 겁니다.

용의자를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처방 이력의 대부분은 서울에 있는 성형외과와 가정의학과 의원으로, 아내가 방문한 적이 전혀 없는 병원들이었습니다. 이따금 일반 진료내역도 있었지만 대부분 졸피뎀 등 향정신성 의약품 처방이었고, 며칠씩 연달아 처방받은 이력도 확인됐습니다.

처방 이력에서 확인되는 병·의원 몇 군데에 전화해 본인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점에 대해 따져 물었지만, 백이면 백 미안하다는 말 대신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명의를 도용한 사람이 본인이라고 하면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게 그들의 변이었습니다.

■ 의료계 반발에 ‘본인 확인 의무 규정’ 삭제..건강보험 재정은 줄줄 센다

본인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마약류 처방을 남발한 병·의원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20여 년 전 삭제 된 ‘본인 확인 의무 규정’안에 있었습니다.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의 부정수급을 막기 위해 지난 1995년 12월, 의료보험요양급여기준 고시를 통해 의료기관이 본인 확인 의무를 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의료계가 불필요한 규제가 될 수 있다며 반발하자, 3년 뒤인 1998년 9월 의무 규정을 슬그머니 삭제했습니다.

우려대로 타인의 건강보험증을 도용하거나 대여하는 사례가 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됐고, 지난 2007년에는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이 건강보험증 본인 확인을 하지 않은 의료기관에 5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다수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의료계의 반발을 번번이 넘지 못하면서 아직까지도 본인 확인도 없이 수많은 진료와 처방이 이루어지고, 건강보험의 재정은 줄줄 세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 건강보험공단도 식약처도 “방법이 없다”.. 과연?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보험 급여를 제공하는 건강보험공단도, 향정신성 의약품을 관리하는 식약처도 지금은 명의도용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법과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이유에 섭니다.
부정 처방이 발견될 경우 급여를 환수하거나 반복처방에 대해서는 의료기관에 경고조치를 하기도 하지만 모두 사후 관리시스템일 뿐, 명의도용 피해나 약물 오남용을 예방하는 조치는 아닙니다.

제주도에서 전남편을 무참히 살해한 고유정이 만약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려 ‘졸피뎀’을 처방받았다면, 역시 ‘졸피뎀’을 이용해 친구의 딸을 살해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이 명의를 도용했다면, 수사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오남용 사례가 계속 발생하는데도 국회 꽁무니만 보고 있는 관계기관의 태도, 이해가 가시나요?

■ 오남용 우려가 있는 약물 처방만큼은 철저하게 관리해야

최초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공감 가는 내용이 꽤나 많습니다. 신분증이 아니면 휴대전화 등을 이용해 신분 확인을 하자든지, 아예 마약류를 처방할 수 있는 병원을 따로 지정해 관리하자는 내용 등이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오남용 우려가 있는 약물 처방만큼은 신분증 확인을 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오남용 우려가 대두하는 만큼 의료계와 국민 모두에게 명분이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의료계와 국민 모두에게 어렵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은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보입니다.

졸피뎀의 약물 의존성과 오남용 위험을 경고하면서도, 정작 누가 어디서 얼마나 처방받는지는 모르는 게 우리 건강보험공단의 현실... 명의만 빌리면 될 걸 굳이 해외에서 처방받아 탈이 났다는 어느 ‘보아’씨 팬의 한숨이 괜히 하는 말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연관기사][단독]“내가 마약을?”...명의도용 9년, 아무도 몰랐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87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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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마약을?”…명의도용 9년, 아무도 몰랐다
    • 입력 2021-01-06 18:07:12
    취재K

■ “내 아내가 마약을?” 황당한 편지에 ‘화들짝’

충남 예산에 사는 이기수 씨는 지난달 중순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황당한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아내가 졸피뎀 성분의 향정신성 의약품인 ‘졸피드정’을 중복으로 처방받았으니, 오남용에 주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졸피드 정’은 환각과 같은 부작용 때문에 마약류로 분류돼 엄격히 관리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한류스타 ‘보아’의 해외 대리처방 논란을 접한 터라 막연히 위험한 약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아내가 그런 약을 처방받았다고 하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씨는 아내가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닌지,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면서도, 나 몰래 혼자 병원에 다녔다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 9년간 확인된 명의도용만 ‘230여 건’...“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씨는 아내에게 졸피뎀 처방 이력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이 씨의 아내 역시 황당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이 씨 부부는 건강보험공단에 처방 이력을 요구했고, 황당함은 곧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조회가 가능한 최근 9년간의 병원 처방 이력을 받아보니, 무려 233건의 명의도용 사례가 있었던 겁니다.

용의자를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처방 이력의 대부분은 서울에 있는 성형외과와 가정의학과 의원으로, 아내가 방문한 적이 전혀 없는 병원들이었습니다. 이따금 일반 진료내역도 있었지만 대부분 졸피뎀 등 향정신성 의약품 처방이었고, 며칠씩 연달아 처방받은 이력도 확인됐습니다.

처방 이력에서 확인되는 병·의원 몇 군데에 전화해 본인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점에 대해 따져 물었지만, 백이면 백 미안하다는 말 대신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명의를 도용한 사람이 본인이라고 하면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게 그들의 변이었습니다.

■ 의료계 반발에 ‘본인 확인 의무 규정’ 삭제..건강보험 재정은 줄줄 센다

본인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마약류 처방을 남발한 병·의원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20여 년 전 삭제 된 ‘본인 확인 의무 규정’안에 있었습니다.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의 부정수급을 막기 위해 지난 1995년 12월, 의료보험요양급여기준 고시를 통해 의료기관이 본인 확인 의무를 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의료계가 불필요한 규제가 될 수 있다며 반발하자, 3년 뒤인 1998년 9월 의무 규정을 슬그머니 삭제했습니다.

우려대로 타인의 건강보험증을 도용하거나 대여하는 사례가 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됐고, 지난 2007년에는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이 건강보험증 본인 확인을 하지 않은 의료기관에 5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다수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의료계의 반발을 번번이 넘지 못하면서 아직까지도 본인 확인도 없이 수많은 진료와 처방이 이루어지고, 건강보험의 재정은 줄줄 세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 건강보험공단도 식약처도 “방법이 없다”.. 과연?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보험 급여를 제공하는 건강보험공단도, 향정신성 의약품을 관리하는 식약처도 지금은 명의도용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법과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이유에 섭니다.
부정 처방이 발견될 경우 급여를 환수하거나 반복처방에 대해서는 의료기관에 경고조치를 하기도 하지만 모두 사후 관리시스템일 뿐, 명의도용 피해나 약물 오남용을 예방하는 조치는 아닙니다.

제주도에서 전남편을 무참히 살해한 고유정이 만약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려 ‘졸피뎀’을 처방받았다면, 역시 ‘졸피뎀’을 이용해 친구의 딸을 살해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이 명의를 도용했다면, 수사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오남용 사례가 계속 발생하는데도 국회 꽁무니만 보고 있는 관계기관의 태도, 이해가 가시나요?

■ 오남용 우려가 있는 약물 처방만큼은 철저하게 관리해야

최초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공감 가는 내용이 꽤나 많습니다. 신분증이 아니면 휴대전화 등을 이용해 신분 확인을 하자든지, 아예 마약류를 처방할 수 있는 병원을 따로 지정해 관리하자는 내용 등이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오남용 우려가 있는 약물 처방만큼은 신분증 확인을 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오남용 우려가 대두하는 만큼 의료계와 국민 모두에게 명분이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의료계와 국민 모두에게 어렵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은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보입니다.

졸피뎀의 약물 의존성과 오남용 위험을 경고하면서도, 정작 누가 어디서 얼마나 처방받는지는 모르는 게 우리 건강보험공단의 현실... 명의만 빌리면 될 걸 굳이 해외에서 처방받아 탈이 났다는 어느 ‘보아’씨 팬의 한숨이 괜히 하는 말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연관기사][단독]“내가 마약을?”...명의도용 9년, 아무도 몰랐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87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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