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북한에선 국군포로 가족…탈북 후 꽃피운 사랑
입력 2021.01.09 (08:20)
수정 2021.01.0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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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북한에서 국군포로 가족은 이른바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차별과 감시 속에 살아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네, 북한에서 탄광 노동을 하면서 힙겹게 살다가 탈북한 국군포로 가족이 있습니다.
최효은 리포터가 만나봤죠?
[답변]
네. 충남 아산에서 미용사로 일하고 있는 이수진 씨 이야기인데요.
북한에서 워낙 감시를 받고 살다 보니까 한국 생활 정착도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앵커]
그런데 북한 탄광에서 같이 일했던 직장 동료를 한국에서 만났다고요?
[답변]
네. 운명적인 사랑으로 북한 생활 트라우마를 극복한 탈북민 부부의 특별한 사연, 지금부터 함께 만나보시죠.
[리포트]
아담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 이곳에 남다른 손길로 입소문이 난 미용사가 있습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2006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남한으로 온 이수진 씨입니다.
[이수진/탈북민 : "저 2016년도부턴가 했어요. 원래 만들고 이런 걸 좋아해요. 누군가의 머리 만져주고 이런 걸 되게 좋아하는데, 나도 이거 해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하고 한 거예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미용실을 개업했지만, 지금은 수진 씨만 찾는 단골손님이 많은데요.
[손미옥/손님 : "저희 만난 지 5년 좀 넘었어요. 굉장히 꼼꼼하고요. 세심하고 한분 한분한테 그 사람한테 맞게 물어봐 가면서 개성에 맞게 잘해주시는 거 같아요."]
수진 씨에게 머리 손질은 하나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드디어 완성된 머리를 확인하는 순간.
["잘 나왔네. (그죠.) 밑에만 해도 괜찮네. (제가 원하던 스타일로 잘 나온 거 같아요.)"]
쉬는 동안에도 미용사에게 필요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한국 생활 16년 차에 접어든 수진 씨.
개인 미용실을 운영할 정도로 안정적인 삶을 꾸렸지만 여전히 이방인 같은 기분은 지울 수 없다고 합니다.
수진 씨는 북한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국군포로의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수진/탈북민 : "할아버지가 국군 포로다 보니까 아버지도 많이 고생했고 엄마도 맘고생 많이 했고 온 집안이 모든 게 다 감시였거든요. 집에 오는 사람이 다 스파이였어요. (가족이) 다 감시 대상이었고 그렇게 살았어요."]
부산 출생인 할아버지는 19살의 나이로 6.25 전쟁에 국군으로 참전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포로로 붙잡히면서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했는데요.
가족들 역시 탄광으로 끌려가 고된 노동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할아버지 탄광에서 일했으니까 아빠도 똑같이 탄광에서 일했죠. 나도 탄광에서 일했고 북한에선 부모가 탄광이면 자녀도 탄광이에요."]
결국 2004년 할아버지가 일흔이 넘은 나이로 탈북을 했고 2년 뒤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도 한국으로 넘어왔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차별과 감시를 견뎌내야 했던 생활 습관 때문에 한국 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모든 사람을 다 믿지 못하고 그 사람이 말하는 거랑 행동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해요. 혼자 생각해서 나만의 드라마를 써서 벽을 치고 조금 저한테 어떤 거 같으면 공격하고 그런 것 때문에 한국 와서 7년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여보 나왔어. (어 왔어?)"]
힘들 때마다 묵묵히 옆을 지켜준 고마운 남편입니다.
[이광철/이수진씨 남편 : "작은 거라도 도와주려고 하다 보니까 바닥이라도 쓸어 주는 거거든요."]
사소한 일이라도 아내에게 도움이 되고픈 광철 씨!
그런 남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수진 씨가 솜씨를 발휘합니다.
["머리를 좀 길렀으면 좋겠는데. 내가 신랑 머리 파마해 주는 게 최대 목표다. 파마 한번 해보자. 길러서. (남편 분께서 사장님 소원 이뤄드릴 수 있을까요?)"]
영업을 마친 수진 씨 부부가 집으로 향합니다.
퇴근길에도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니 괜히 제가 다 샘이 났습니다.
수진 씨가 한국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옆에서 남편이 그 누구보다 큰 도움이 됐다는데요.
그런데 이 부부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함께 저녁을 준비하는 두 사람.
볶고, 조리고 하다 보니 맛깔나는 저녁상이 차려졌습니다.
[이광철/이수진씨 남편 : "북한에 있을 때 탄광 일할 때 만났는데 여잔데 몇십 킬로씩 등에다 지고 다니니까 그거 보고 뭔가 맘이 갔던 거 같아요."]
이들은 2001년 처음 북한 상화탄광에서 직장 동료로 만나 친해졌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광철 씨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없어지고 나서 옆에 없으니까 그때부터 생각나더라고요 찾게 되더라고요 아 이 사람 있었을 때 참 좋았었는데 이런 생각을 2년 가까이 한 거 같아요."]
수진 씨는 광철 씨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순 없었습니다.
나중에 탈북을 했다는 소문만 돌 뿐이었는데요.
그렇게 서서히 기억 속에서 잊혀가다가 두 사람은 고향 사람을 통해 한국에서 극적으로 재회합니다.
먼저 정착한 광철 씨의 아낌없는 도움을 받은 수진 씨!
북한에서 느끼지 못했던 애정의 감정을 갖게 됐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는데요.
[이수진/탈북민 : "나가서 스트레스받고 오면 이 사람한테 퍼붓고 해도 도망 안 가고 항상 옆에 붙어 있더라고요. 나는 그게 감사하다고 생각 안 했거든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성격이 안 좋다는 걸 느끼고 나서 그걸 받아 주고 산 사람이 정말 고맙더라고요."]
든든하게 함께 해주는 남편 때문일까요?
수진 씬 북한에서의 아픈 기억을 잊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행복한 가정을 가꿔가고 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둘 다 부모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산 사람들이라 우리 자녀들한테만큼은 부모의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 근데 그게 참 어려운 거 같아요. 내가 바라는 건 그거예요."]
코로나에, 한파에, 힘겨운 세상살이.
영화에서나 볼 법한 탈북민 부부의 운명적인 사랑에 코끝이 찡해지는 하루였습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 가족은 이른바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차별과 감시 속에 살아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네, 북한에서 탄광 노동을 하면서 힙겹게 살다가 탈북한 국군포로 가족이 있습니다.
최효은 리포터가 만나봤죠?
[답변]
네. 충남 아산에서 미용사로 일하고 있는 이수진 씨 이야기인데요.
북한에서 워낙 감시를 받고 살다 보니까 한국 생활 정착도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앵커]
그런데 북한 탄광에서 같이 일했던 직장 동료를 한국에서 만났다고요?
[답변]
네. 운명적인 사랑으로 북한 생활 트라우마를 극복한 탈북민 부부의 특별한 사연, 지금부터 함께 만나보시죠.
[리포트]
아담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 이곳에 남다른 손길로 입소문이 난 미용사가 있습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2006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남한으로 온 이수진 씨입니다.
[이수진/탈북민 : "저 2016년도부턴가 했어요. 원래 만들고 이런 걸 좋아해요. 누군가의 머리 만져주고 이런 걸 되게 좋아하는데, 나도 이거 해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하고 한 거예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미용실을 개업했지만, 지금은 수진 씨만 찾는 단골손님이 많은데요.
[손미옥/손님 : "저희 만난 지 5년 좀 넘었어요. 굉장히 꼼꼼하고요. 세심하고 한분 한분한테 그 사람한테 맞게 물어봐 가면서 개성에 맞게 잘해주시는 거 같아요."]
수진 씨에게 머리 손질은 하나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드디어 완성된 머리를 확인하는 순간.
["잘 나왔네. (그죠.) 밑에만 해도 괜찮네. (제가 원하던 스타일로 잘 나온 거 같아요.)"]
쉬는 동안에도 미용사에게 필요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한국 생활 16년 차에 접어든 수진 씨.
개인 미용실을 운영할 정도로 안정적인 삶을 꾸렸지만 여전히 이방인 같은 기분은 지울 수 없다고 합니다.
수진 씨는 북한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국군포로의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수진/탈북민 : "할아버지가 국군 포로다 보니까 아버지도 많이 고생했고 엄마도 맘고생 많이 했고 온 집안이 모든 게 다 감시였거든요. 집에 오는 사람이 다 스파이였어요. (가족이) 다 감시 대상이었고 그렇게 살았어요."]
부산 출생인 할아버지는 19살의 나이로 6.25 전쟁에 국군으로 참전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포로로 붙잡히면서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했는데요.
가족들 역시 탄광으로 끌려가 고된 노동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할아버지 탄광에서 일했으니까 아빠도 똑같이 탄광에서 일했죠. 나도 탄광에서 일했고 북한에선 부모가 탄광이면 자녀도 탄광이에요."]
결국 2004년 할아버지가 일흔이 넘은 나이로 탈북을 했고 2년 뒤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도 한국으로 넘어왔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차별과 감시를 견뎌내야 했던 생활 습관 때문에 한국 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모든 사람을 다 믿지 못하고 그 사람이 말하는 거랑 행동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해요. 혼자 생각해서 나만의 드라마를 써서 벽을 치고 조금 저한테 어떤 거 같으면 공격하고 그런 것 때문에 한국 와서 7년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여보 나왔어. (어 왔어?)"]
힘들 때마다 묵묵히 옆을 지켜준 고마운 남편입니다.
[이광철/이수진씨 남편 : "작은 거라도 도와주려고 하다 보니까 바닥이라도 쓸어 주는 거거든요."]
사소한 일이라도 아내에게 도움이 되고픈 광철 씨!
그런 남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수진 씨가 솜씨를 발휘합니다.
["머리를 좀 길렀으면 좋겠는데. 내가 신랑 머리 파마해 주는 게 최대 목표다. 파마 한번 해보자. 길러서. (남편 분께서 사장님 소원 이뤄드릴 수 있을까요?)"]
영업을 마친 수진 씨 부부가 집으로 향합니다.
퇴근길에도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니 괜히 제가 다 샘이 났습니다.
수진 씨가 한국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옆에서 남편이 그 누구보다 큰 도움이 됐다는데요.
그런데 이 부부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함께 저녁을 준비하는 두 사람.
볶고, 조리고 하다 보니 맛깔나는 저녁상이 차려졌습니다.
[이광철/이수진씨 남편 : "북한에 있을 때 탄광 일할 때 만났는데 여잔데 몇십 킬로씩 등에다 지고 다니니까 그거 보고 뭔가 맘이 갔던 거 같아요."]
이들은 2001년 처음 북한 상화탄광에서 직장 동료로 만나 친해졌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광철 씨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없어지고 나서 옆에 없으니까 그때부터 생각나더라고요 찾게 되더라고요 아 이 사람 있었을 때 참 좋았었는데 이런 생각을 2년 가까이 한 거 같아요."]
수진 씨는 광철 씨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순 없었습니다.
나중에 탈북을 했다는 소문만 돌 뿐이었는데요.
그렇게 서서히 기억 속에서 잊혀가다가 두 사람은 고향 사람을 통해 한국에서 극적으로 재회합니다.
먼저 정착한 광철 씨의 아낌없는 도움을 받은 수진 씨!
북한에서 느끼지 못했던 애정의 감정을 갖게 됐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는데요.
[이수진/탈북민 : "나가서 스트레스받고 오면 이 사람한테 퍼붓고 해도 도망 안 가고 항상 옆에 붙어 있더라고요. 나는 그게 감사하다고 생각 안 했거든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성격이 안 좋다는 걸 느끼고 나서 그걸 받아 주고 산 사람이 정말 고맙더라고요."]
든든하게 함께 해주는 남편 때문일까요?
수진 씬 북한에서의 아픈 기억을 잊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행복한 가정을 가꿔가고 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둘 다 부모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산 사람들이라 우리 자녀들한테만큼은 부모의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 근데 그게 참 어려운 거 같아요. 내가 바라는 건 그거예요."]
코로나에, 한파에, 힘겨운 세상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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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북한에서 국군포로 가족은 이른바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차별과 감시 속에 살아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네, 북한에서 탄광 노동을 하면서 힙겹게 살다가 탈북한 국군포로 가족이 있습니다.
최효은 리포터가 만나봤죠?
[답변]
네. 충남 아산에서 미용사로 일하고 있는 이수진 씨 이야기인데요.
북한에서 워낙 감시를 받고 살다 보니까 한국 생활 정착도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앵커]
그런데 북한 탄광에서 같이 일했던 직장 동료를 한국에서 만났다고요?
[답변]
네. 운명적인 사랑으로 북한 생활 트라우마를 극복한 탈북민 부부의 특별한 사연, 지금부터 함께 만나보시죠.
[리포트]
아담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 이곳에 남다른 손길로 입소문이 난 미용사가 있습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2006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남한으로 온 이수진 씨입니다.
[이수진/탈북민 : "저 2016년도부턴가 했어요. 원래 만들고 이런 걸 좋아해요. 누군가의 머리 만져주고 이런 걸 되게 좋아하는데, 나도 이거 해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하고 한 거예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미용실을 개업했지만, 지금은 수진 씨만 찾는 단골손님이 많은데요.
[손미옥/손님 : "저희 만난 지 5년 좀 넘었어요. 굉장히 꼼꼼하고요. 세심하고 한분 한분한테 그 사람한테 맞게 물어봐 가면서 개성에 맞게 잘해주시는 거 같아요."]
수진 씨에게 머리 손질은 하나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드디어 완성된 머리를 확인하는 순간.
["잘 나왔네. (그죠.) 밑에만 해도 괜찮네. (제가 원하던 스타일로 잘 나온 거 같아요.)"]
쉬는 동안에도 미용사에게 필요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한국 생활 16년 차에 접어든 수진 씨.
개인 미용실을 운영할 정도로 안정적인 삶을 꾸렸지만 여전히 이방인 같은 기분은 지울 수 없다고 합니다.
수진 씨는 북한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국군포로의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수진/탈북민 : "할아버지가 국군 포로다 보니까 아버지도 많이 고생했고 엄마도 맘고생 많이 했고 온 집안이 모든 게 다 감시였거든요. 집에 오는 사람이 다 스파이였어요. (가족이) 다 감시 대상이었고 그렇게 살았어요."]
부산 출생인 할아버지는 19살의 나이로 6.25 전쟁에 국군으로 참전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포로로 붙잡히면서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했는데요.
가족들 역시 탄광으로 끌려가 고된 노동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할아버지 탄광에서 일했으니까 아빠도 똑같이 탄광에서 일했죠. 나도 탄광에서 일했고 북한에선 부모가 탄광이면 자녀도 탄광이에요."]
결국 2004년 할아버지가 일흔이 넘은 나이로 탈북을 했고 2년 뒤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도 한국으로 넘어왔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차별과 감시를 견뎌내야 했던 생활 습관 때문에 한국 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모든 사람을 다 믿지 못하고 그 사람이 말하는 거랑 행동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해요. 혼자 생각해서 나만의 드라마를 써서 벽을 치고 조금 저한테 어떤 거 같으면 공격하고 그런 것 때문에 한국 와서 7년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여보 나왔어. (어 왔어?)"]
힘들 때마다 묵묵히 옆을 지켜준 고마운 남편입니다.
[이광철/이수진씨 남편 : "작은 거라도 도와주려고 하다 보니까 바닥이라도 쓸어 주는 거거든요."]
사소한 일이라도 아내에게 도움이 되고픈 광철 씨!
그런 남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수진 씨가 솜씨를 발휘합니다.
["머리를 좀 길렀으면 좋겠는데. 내가 신랑 머리 파마해 주는 게 최대 목표다. 파마 한번 해보자. 길러서. (남편 분께서 사장님 소원 이뤄드릴 수 있을까요?)"]
영업을 마친 수진 씨 부부가 집으로 향합니다.
퇴근길에도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니 괜히 제가 다 샘이 났습니다.
수진 씨가 한국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옆에서 남편이 그 누구보다 큰 도움이 됐다는데요.
그런데 이 부부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함께 저녁을 준비하는 두 사람.
볶고, 조리고 하다 보니 맛깔나는 저녁상이 차려졌습니다.
[이광철/이수진씨 남편 : "북한에 있을 때 탄광 일할 때 만났는데 여잔데 몇십 킬로씩 등에다 지고 다니니까 그거 보고 뭔가 맘이 갔던 거 같아요."]
이들은 2001년 처음 북한 상화탄광에서 직장 동료로 만나 친해졌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광철 씨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없어지고 나서 옆에 없으니까 그때부터 생각나더라고요 찾게 되더라고요 아 이 사람 있었을 때 참 좋았었는데 이런 생각을 2년 가까이 한 거 같아요."]
수진 씨는 광철 씨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순 없었습니다.
나중에 탈북을 했다는 소문만 돌 뿐이었는데요.
그렇게 서서히 기억 속에서 잊혀가다가 두 사람은 고향 사람을 통해 한국에서 극적으로 재회합니다.
먼저 정착한 광철 씨의 아낌없는 도움을 받은 수진 씨!
북한에서 느끼지 못했던 애정의 감정을 갖게 됐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는데요.
[이수진/탈북민 : "나가서 스트레스받고 오면 이 사람한테 퍼붓고 해도 도망 안 가고 항상 옆에 붙어 있더라고요. 나는 그게 감사하다고 생각 안 했거든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성격이 안 좋다는 걸 느끼고 나서 그걸 받아 주고 산 사람이 정말 고맙더라고요."]
든든하게 함께 해주는 남편 때문일까요?
수진 씬 북한에서의 아픈 기억을 잊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행복한 가정을 가꿔가고 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둘 다 부모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산 사람들이라 우리 자녀들한테만큼은 부모의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 근데 그게 참 어려운 거 같아요. 내가 바라는 건 그거예요."]
코로나에, 한파에, 힘겨운 세상살이.
영화에서나 볼 법한 탈북민 부부의 운명적인 사랑에 코끝이 찡해지는 하루였습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 가족은 이른바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차별과 감시 속에 살아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네, 북한에서 탄광 노동을 하면서 힙겹게 살다가 탈북한 국군포로 가족이 있습니다.
최효은 리포터가 만나봤죠?
[답변]
네. 충남 아산에서 미용사로 일하고 있는 이수진 씨 이야기인데요.
북한에서 워낙 감시를 받고 살다 보니까 한국 생활 정착도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앵커]
그런데 북한 탄광에서 같이 일했던 직장 동료를 한국에서 만났다고요?
[답변]
네. 운명적인 사랑으로 북한 생활 트라우마를 극복한 탈북민 부부의 특별한 사연, 지금부터 함께 만나보시죠.
[리포트]
아담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 이곳에 남다른 손길로 입소문이 난 미용사가 있습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2006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남한으로 온 이수진 씨입니다.
[이수진/탈북민 : "저 2016년도부턴가 했어요. 원래 만들고 이런 걸 좋아해요. 누군가의 머리 만져주고 이런 걸 되게 좋아하는데, 나도 이거 해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하고 한 거예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미용실을 개업했지만, 지금은 수진 씨만 찾는 단골손님이 많은데요.
[손미옥/손님 : "저희 만난 지 5년 좀 넘었어요. 굉장히 꼼꼼하고요. 세심하고 한분 한분한테 그 사람한테 맞게 물어봐 가면서 개성에 맞게 잘해주시는 거 같아요."]
수진 씨에게 머리 손질은 하나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드디어 완성된 머리를 확인하는 순간.
["잘 나왔네. (그죠.) 밑에만 해도 괜찮네. (제가 원하던 스타일로 잘 나온 거 같아요.)"]
쉬는 동안에도 미용사에게 필요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한국 생활 16년 차에 접어든 수진 씨.
개인 미용실을 운영할 정도로 안정적인 삶을 꾸렸지만 여전히 이방인 같은 기분은 지울 수 없다고 합니다.
수진 씨는 북한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국군포로의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수진/탈북민 : "할아버지가 국군 포로다 보니까 아버지도 많이 고생했고 엄마도 맘고생 많이 했고 온 집안이 모든 게 다 감시였거든요. 집에 오는 사람이 다 스파이였어요. (가족이) 다 감시 대상이었고 그렇게 살았어요."]
부산 출생인 할아버지는 19살의 나이로 6.25 전쟁에 국군으로 참전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포로로 붙잡히면서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했는데요.
가족들 역시 탄광으로 끌려가 고된 노동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할아버지 탄광에서 일했으니까 아빠도 똑같이 탄광에서 일했죠. 나도 탄광에서 일했고 북한에선 부모가 탄광이면 자녀도 탄광이에요."]
결국 2004년 할아버지가 일흔이 넘은 나이로 탈북을 했고 2년 뒤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도 한국으로 넘어왔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차별과 감시를 견뎌내야 했던 생활 습관 때문에 한국 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모든 사람을 다 믿지 못하고 그 사람이 말하는 거랑 행동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해요. 혼자 생각해서 나만의 드라마를 써서 벽을 치고 조금 저한테 어떤 거 같으면 공격하고 그런 것 때문에 한국 와서 7년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여보 나왔어. (어 왔어?)"]
힘들 때마다 묵묵히 옆을 지켜준 고마운 남편입니다.
[이광철/이수진씨 남편 : "작은 거라도 도와주려고 하다 보니까 바닥이라도 쓸어 주는 거거든요."]
사소한 일이라도 아내에게 도움이 되고픈 광철 씨!
그런 남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수진 씨가 솜씨를 발휘합니다.
["머리를 좀 길렀으면 좋겠는데. 내가 신랑 머리 파마해 주는 게 최대 목표다. 파마 한번 해보자. 길러서. (남편 분께서 사장님 소원 이뤄드릴 수 있을까요?)"]
영업을 마친 수진 씨 부부가 집으로 향합니다.
퇴근길에도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니 괜히 제가 다 샘이 났습니다.
수진 씨가 한국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옆에서 남편이 그 누구보다 큰 도움이 됐다는데요.
그런데 이 부부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함께 저녁을 준비하는 두 사람.
볶고, 조리고 하다 보니 맛깔나는 저녁상이 차려졌습니다.
[이광철/이수진씨 남편 : "북한에 있을 때 탄광 일할 때 만났는데 여잔데 몇십 킬로씩 등에다 지고 다니니까 그거 보고 뭔가 맘이 갔던 거 같아요."]
이들은 2001년 처음 북한 상화탄광에서 직장 동료로 만나 친해졌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광철 씨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없어지고 나서 옆에 없으니까 그때부터 생각나더라고요 찾게 되더라고요 아 이 사람 있었을 때 참 좋았었는데 이런 생각을 2년 가까이 한 거 같아요."]
수진 씨는 광철 씨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순 없었습니다.
나중에 탈북을 했다는 소문만 돌 뿐이었는데요.
그렇게 서서히 기억 속에서 잊혀가다가 두 사람은 고향 사람을 통해 한국에서 극적으로 재회합니다.
먼저 정착한 광철 씨의 아낌없는 도움을 받은 수진 씨!
북한에서 느끼지 못했던 애정의 감정을 갖게 됐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는데요.
[이수진/탈북민 : "나가서 스트레스받고 오면 이 사람한테 퍼붓고 해도 도망 안 가고 항상 옆에 붙어 있더라고요. 나는 그게 감사하다고 생각 안 했거든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성격이 안 좋다는 걸 느끼고 나서 그걸 받아 주고 산 사람이 정말 고맙더라고요."]
든든하게 함께 해주는 남편 때문일까요?
수진 씬 북한에서의 아픈 기억을 잊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행복한 가정을 가꿔가고 있습니다.
[이수진/탈북민 : "둘 다 부모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산 사람들이라 우리 자녀들한테만큼은 부모의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 근데 그게 참 어려운 거 같아요. 내가 바라는 건 그거예요."]
코로나에, 한파에, 힘겨운 세상살이.
영화에서나 볼 법한 탈북민 부부의 운명적인 사랑에 코끝이 찡해지는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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