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여친 가장해 성폭행 유도…죗값은 고작 200만 원?
입력 2021.01.28 (09:00)
수정 2021.01.2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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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남자로부터 날아온 불길한 문자메시지
"야, 딴 건 모르겠는데, 사과는 하고 가라. 연락 끊어도 좋은데 예의는 있어야지."
새벽 3시, 밤을 뒤척이던 A 씨에게 낯선 사람의 불길한 문자메시지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두려운 마음에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그가 이어 던진 말은 무시하기엔 너무나도 충격이었습니다.
자신이 20대 여성인 A 씨와 랜덤채팅방에서 성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A 씨가 대화 중 갑자기 사라져 화가 났다는 말이었습니다.
채팅은커녕 해당 랜덤채팅앱을 내려받은 적도, 본적도 없는 A 씨는 용기 내 낯선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었고, 그가 자신을 사칭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범인은 6년 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불특정 남성에 신체적 특징까지 공개
사건을 경찰에 신고한 A 씨. 놀랍게도 A 씨를 사칭한 범인은 6년 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 B 씨였습니다.
B 씨는 랜덤채팅방에서 A 씨 행세를 하며, 사진과 연락처는 물론이고 신체적 특징까지 공개했습니다.
"나를 성폭행하고 싶지 않으냐", "이쪽으로 오고 있느냐"는 등의 구체적인 표현들로 성폭행을 부추기기도 하고, A 씨가 근무하고 있는 위치를 알려, 실제 일부 남성이 인근 10분 거리까지 접근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저속한 표현으로, 세 시간 넘게 한 남성과 성관계를 묘사하는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A 씨는 이 일로 한동안 거주지에서 대피하고, 일하는 곳을 옮기는 등의 물리적, 정신적 피해를 봤습니다.
달빛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에도 '섬뜩' 놀라는 게 일상이 돼버렸습니다.
■ 적용 가능한 혐의가 없다? 전 남자친구 B 씨, '모욕죄' 그쳐
성폭력 처벌을 원했던 A 씨,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B 씨가 A 씨를 사칭해 불특정 남성들과 나눈 대화는 그 내용이 피해자인 A 씨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폭력처벌법상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멋대로 얼굴 사진을 공개한 사실 역시, 얼굴이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5월 신설된 형법 제32장 제305조의 3, 강간 예비죄 역시,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배제됐습니다.
경찰은 B 씨를 단순 '모욕죄'로 송치했고, 검찰은 최근 벌금 200만 원에 약식기소했습니다.
■ 법조계 일각 "소극적 해석" 평가…더욱 우려되는 건 '추가 범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데, 이를 적용하지 않고 가볍게 넘겼다는 것은 수사기관에서 실행의 착수, 또는 강간 범행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법률사무소 희승의 전희정 변호사는 경찰과 검찰이 이 법령을 다소 소극적으로 해석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대화의 농도나 의도성 등을 봤을 때 강간을 예비하거나 음모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없다는 판단입니다.
'법 감정'이라는 걸 잠시 따져보면, 전 변호사의 판단이 더욱 상식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정식재판이 벌어지지 않을 경우, 범행 의도나 목적을 모르는 상황에서 사건이 종결되는 것도 걱정입니다.
아직 형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A 씨는 벌써 '보복범죄'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벌금형이 확정된다면 이를 가벼이 여긴 B 씨가 추가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게 A 씨의 생각입니다.
"진짜 성폭행이라도 당해야 제대로 된 처벌이 가능할까요?" 집으로 돌아가는 A 씨가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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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여친 가장해 성폭행 유도…죗값은 고작 20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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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1-28 09:00:20
- 수정2021-01-28 16:47:10
■ 낯선 남자로부터 날아온 불길한 문자메시지
"야, 딴 건 모르겠는데, 사과는 하고 가라. 연락 끊어도 좋은데 예의는 있어야지."
새벽 3시, 밤을 뒤척이던 A 씨에게 낯선 사람의 불길한 문자메시지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두려운 마음에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그가 이어 던진 말은 무시하기엔 너무나도 충격이었습니다.
자신이 20대 여성인 A 씨와 랜덤채팅방에서 성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A 씨가 대화 중 갑자기 사라져 화가 났다는 말이었습니다.
채팅은커녕 해당 랜덤채팅앱을 내려받은 적도, 본적도 없는 A 씨는 용기 내 낯선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었고, 그가 자신을 사칭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범인은 6년 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불특정 남성에 신체적 특징까지 공개
사건을 경찰에 신고한 A 씨. 놀랍게도 A 씨를 사칭한 범인은 6년 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 B 씨였습니다.
B 씨는 랜덤채팅방에서 A 씨 행세를 하며, 사진과 연락처는 물론이고 신체적 특징까지 공개했습니다.
"나를 성폭행하고 싶지 않으냐", "이쪽으로 오고 있느냐"는 등의 구체적인 표현들로 성폭행을 부추기기도 하고, A 씨가 근무하고 있는 위치를 알려, 실제 일부 남성이 인근 10분 거리까지 접근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저속한 표현으로, 세 시간 넘게 한 남성과 성관계를 묘사하는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A 씨는 이 일로 한동안 거주지에서 대피하고, 일하는 곳을 옮기는 등의 물리적, 정신적 피해를 봤습니다.
달빛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에도 '섬뜩' 놀라는 게 일상이 돼버렸습니다.
■ 적용 가능한 혐의가 없다? 전 남자친구 B 씨, '모욕죄' 그쳐
성폭력 처벌을 원했던 A 씨,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B 씨가 A 씨를 사칭해 불특정 남성들과 나눈 대화는 그 내용이 피해자인 A 씨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폭력처벌법상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멋대로 얼굴 사진을 공개한 사실 역시, 얼굴이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5월 신설된 형법 제32장 제305조의 3, 강간 예비죄 역시,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배제됐습니다.
경찰은 B 씨를 단순 '모욕죄'로 송치했고, 검찰은 최근 벌금 200만 원에 약식기소했습니다.
■ 법조계 일각 "소극적 해석" 평가…더욱 우려되는 건 '추가 범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데, 이를 적용하지 않고 가볍게 넘겼다는 것은 수사기관에서 실행의 착수, 또는 강간 범행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법률사무소 희승의 전희정 변호사는 경찰과 검찰이 이 법령을 다소 소극적으로 해석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대화의 농도나 의도성 등을 봤을 때 강간을 예비하거나 음모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없다는 판단입니다.
'법 감정'이라는 걸 잠시 따져보면, 전 변호사의 판단이 더욱 상식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정식재판이 벌어지지 않을 경우, 범행 의도나 목적을 모르는 상황에서 사건이 종결되는 것도 걱정입니다.
아직 형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A 씨는 벌써 '보복범죄'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벌금형이 확정된다면 이를 가벼이 여긴 B 씨가 추가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게 A 씨의 생각입니다.
"진짜 성폭행이라도 당해야 제대로 된 처벌이 가능할까요?" 집으로 돌아가는 A 씨가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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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선 기자 zio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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