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식민지 한국’ 일본과 동일시?…30년 전 논문 찾아 보니
입력 2021.02.25 (15:54)
수정 2021.02.25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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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인이 된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알리면서 공개 증언을 하고 있다. 이때를 시작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존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논문 파문이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계약 관계에 기초한 매춘부'라고 주장한 그의 얼토당토 않은 논문에 우리나라와 미국 한인 사회는 물론 미국 정계·학계까지 들끓고 있습니다. 그의 교수 이력이나 학문적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보도가 나왔지만 도대체 그는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갖게 됐을까요. 그가 30대 시절에 쓴 논문 1편을 찾아 읽게 됐습니다.
■ 30년 전 논문 읽어보니…
1954년생인 램지어는 미국 UCLA에 재직하던 1991년 옥스포드대가 발간하는 '법 경제 저널(Journal of Law, Economics, & Organization , Spring, 1991, Vol. 7, No. 1, pp. 89-116)에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계약 매춘:상업적 성 산업에서의 신뢰 약속 (Indentured Prostitution in Imperial Japan: Credible Commitments in the Commercial Sex Industry)'이란 제목의 논문을 투고합니다.
제목 그대로 20세기 초 일본 내에서 성(性) 산업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경제적 계약 관점에서 분석한 논문인데요. 여기서 'Credible Commitments'은 우리 말로 '신뢰할 만한 서약' 쯤으로 번역될 수도 있겠지만, 경제학에서 다루는 게임이론에서 나온 용어로서 '계약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안전 장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논문은 연구 대상을 20세기 초 일본으로 한정합니다. 요약하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유곽에 들어갔고, 초반에 포주로부터 거액을 먼저 받은 후 차차 갚아나갔으며, 이는 특수한 형태의 계약으로 보호 받았다'는 내용이 될 듯 합니다.
그런데 이런 틀과 주요 내용이, 최근 문제가 된 논문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를 테면 '돈이 없으면 부모들은 딸을 팔았다'거나 '포주와 정상적으로 계약을 체결했다'든가, '성매매를 통해 버는 돈이 다른 직업에서 버는 수입보다 훨씬 많아서 그 분야로 투신했다' 등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최근 문제가 된 2021년 논문의 기본 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매매에 뛰어든 건 경제적인 어려움이 배경이고, 포주와는 자율적인 계약을 맺어서 강제성이 없었다는 건데요. 여기서 포주를 (일본 정부, 일본군이 아닌) '민간업자'로만 살짝 바꾸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일본 우익세력의 주장이 됩니다. 억지 논리인 셈이지요.
■ 30년 간 뭘 듣고 뭘 봤나
'일본의 20세기 초 매춘 시장'에 한정해 경제적 계약 관계로 분석한 1991년 논문의 기본 아이디어를, 2021년 논문의 '식민지 한국'에 무리하게 들이대면서 한국을 일본과 거의 동일시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2021년 논문에서도 위안부 피해자들이 마치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계약을 맺고 자발적으로 일을 했으며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는 것처럼 서술했으니까요.
일반인의 상식으로도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헌모 일본 중앙학원대 법학부 교수는 "일본은 지배하는 입장이고 한국은 피지배, 즉 지배를 받는 입장이었는데 그런 상황이라든가 환경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상황을 동일시 한다는 자체가 대단히 모순되지 않았나"라고 지적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1991년 논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논리를 30년이나 지나서 2021년 논문에도 차용했다면 그건 양심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뭔가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할까요.
1993년 고노 요헤이 당시 일본 관방장관이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과 관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 이른바 ‘고노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논문이 나오던 1991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제기됐던 해입니다. 1993년 일본 정부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 담화를 통해 일본군이 위안소 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인정하고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습니다.
1995년에도 현직 총리로서 처음으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당시 총리가 식민 지배와 전쟁 범죄에 대한 첫 사죄를 했습니다.
2000년 12월 도쿄에선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묻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이 열려,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법정은 히로히토 일왕과 일본 정부에 유죄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차고 넘치는 기록과 연구를 학자로서 어떻게 외면할 수 있는 것인지 30년 세월이 되레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단순 실패·불법 넘어섰다"
'저자가 같은 사람이니 그 때 논문이나 지금 논문이나 크게 다를 수 있겠냐'는 생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신이 고수하고 있는 이론과 연구가 있더라도 새로운 현상이나 사실이 나타나면 그 것을 반영하고 수정하고, 때로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것도 감수해야 합니다. 양심적인 학자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정서를 반영하듯 학계에서도 램지어 비판은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인 2세로 미국 UCLA
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마이클 최 교수는 학계에 이 논문 사태가 불거지면서 램지어 비판 연판장을 돌리고 있는데요. 최 교수는 램지어 논문에 대해 "학문적 준거와 성실성, 윤리를 위반하는 데서 단순한 학문적 실패나 불법 행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이 연판장엔 게임이론의 한 분야인 '구조설계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에릭 매스킨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도 서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법학을 전공한 램지어가 일본군 위안부 계약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한 것이 게임이론인데, 게임이론의 권위자마저도 램지어 비판에 합류하면서 램지어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모양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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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2-25 15:54:45
- 수정2021-02-25 22:16:23
존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논문 파문이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계약 관계에 기초한 매춘부'라고 주장한 그의 얼토당토 않은 논문에 우리나라와 미국 한인 사회는 물론 미국 정계·학계까지 들끓고 있습니다. 그의 교수 이력이나 학문적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보도가 나왔지만 도대체 그는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갖게 됐을까요. 그가 30대 시절에 쓴 논문 1편을 찾아 읽게 됐습니다.
■ 30년 전 논문 읽어보니…
1954년생인 램지어는 미국 UCLA에 재직하던 1991년 옥스포드대가 발간하는 '법 경제 저널(Journal of Law, Economics, & Organization , Spring, 1991, Vol. 7, No. 1, pp. 89-116)에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계약 매춘:상업적 성 산업에서의 신뢰 약속 (Indentured Prostitution in Imperial Japan: Credible Commitments in the Commercial Sex Industry)'이란 제목의 논문을 투고합니다.
제목 그대로 20세기 초 일본 내에서 성(性) 산업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경제적 계약 관점에서 분석한 논문인데요. 여기서 'Credible Commitments'은 우리 말로 '신뢰할 만한 서약' 쯤으로 번역될 수도 있겠지만, 경제학에서 다루는 게임이론에서 나온 용어로서 '계약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안전 장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논문은 연구 대상을 20세기 초 일본으로 한정합니다. 요약하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유곽에 들어갔고, 초반에 포주로부터 거액을 먼저 받은 후 차차 갚아나갔으며, 이는 특수한 형태의 계약으로 보호 받았다'는 내용이 될 듯 합니다.
그런데 이런 틀과 주요 내용이, 최근 문제가 된 논문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를 테면 '돈이 없으면 부모들은 딸을 팔았다'거나 '포주와 정상적으로 계약을 체결했다'든가, '성매매를 통해 버는 돈이 다른 직업에서 버는 수입보다 훨씬 많아서 그 분야로 투신했다' 등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최근 문제가 된 2021년 논문의 기본 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매매에 뛰어든 건 경제적인 어려움이 배경이고, 포주와는 자율적인 계약을 맺어서 강제성이 없었다는 건데요. 여기서 포주를 (일본 정부, 일본군이 아닌) '민간업자'로만 살짝 바꾸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일본 우익세력의 주장이 됩니다. 억지 논리인 셈이지요.
■ 30년 간 뭘 듣고 뭘 봤나
'일본의 20세기 초 매춘 시장'에 한정해 경제적 계약 관계로 분석한 1991년 논문의 기본 아이디어를, 2021년 논문의 '식민지 한국'에 무리하게 들이대면서 한국을 일본과 거의 동일시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2021년 논문에서도 위안부 피해자들이 마치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계약을 맺고 자발적으로 일을 했으며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는 것처럼 서술했으니까요.
일반인의 상식으로도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헌모 일본 중앙학원대 법학부 교수는 "일본은 지배하는 입장이고 한국은 피지배, 즉 지배를 받는 입장이었는데 그런 상황이라든가 환경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상황을 동일시 한다는 자체가 대단히 모순되지 않았나"라고 지적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1991년 논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논리를 30년이나 지나서 2021년 논문에도 차용했다면 그건 양심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뭔가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할까요.
논문이 나오던 1991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제기됐던 해입니다. 1993년 일본 정부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 담화를 통해 일본군이 위안소 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인정하고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습니다.
1995년에도 현직 총리로서 처음으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당시 총리가 식민 지배와 전쟁 범죄에 대한 첫 사죄를 했습니다.
2000년 12월 도쿄에선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묻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이 열려,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법정은 히로히토 일왕과 일본 정부에 유죄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차고 넘치는 기록과 연구를 학자로서 어떻게 외면할 수 있는 것인지 30년 세월이 되레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단순 실패·불법 넘어섰다"
'저자가 같은 사람이니 그 때 논문이나 지금 논문이나 크게 다를 수 있겠냐'는 생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신이 고수하고 있는 이론과 연구가 있더라도 새로운 현상이나 사실이 나타나면 그 것을 반영하고 수정하고, 때로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것도 감수해야 합니다. 양심적인 학자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정서를 반영하듯 학계에서도 램지어 비판은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인 2세로 미국 UCLA
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마이클 최 교수는 학계에 이 논문 사태가 불거지면서 램지어 비판 연판장을 돌리고 있는데요. 최 교수는 램지어 논문에 대해 "학문적 준거와 성실성, 윤리를 위반하는 데서 단순한 학문적 실패나 불법 행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이 연판장엔 게임이론의 한 분야인 '구조설계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에릭 매스킨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도 서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법학을 전공한 램지어가 일본군 위안부 계약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한 것이 게임이론인데, 게임이론의 권위자마저도 램지어 비판에 합류하면서 램지어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모양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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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기 기자 remembe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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