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벙커의 재탄생…전쟁·분단 상처를 교육 현장으로

입력 2021.03.20 (22:24) 수정 2021.03.20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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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전쟁과 분단을 거친 독일엔 당시 역사를 보여 주는 지하 벙커들이 아직도 다수 남아 있는데요.

이 벙커들을 개조해 살아 있는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현장을 베를린 유광석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이 영상은 지난해 3월 초 촬영했지만 취재 직후 독일에 코로나19가 본격 확산되면서 방송이 미뤄진 데 대해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리포트]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마을.

관람객들이 안내를 받아 쓰러진 집들을 살펴봅니다.

710kg의 강철로 만든 출입문에 나무를 덧대는 등 가정집처럼 위장한 군사시설입니다.

[보르쉐르트/벙커 운영사 대표 : "히틀러가 나치군의 벙커를 베를린, 즉 제국 수도의 근교에 둘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 때문에 육군 최고사령부의 주둔지로 이 곳이 선정됐습니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하 요새가 펼쳐집니다.

육군 최고사령부가 주둔한 마이바흐 벙커에서 출정 전략을 짜면, 통로로 연결된 통신사령부 체펠린 벙커에서 이 명령을 유럽의 각 전선으로 내려보냈습니다.

1941년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도 여기서 수립됐습니다.

1939년부터 군인들이 주둔했고, 2차대전이 끝날 무렵엔 그 수가 8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벙커 안내인 : "당시 인터넷이 없었지만 각종 정보나 검토해야 할 서류, 서명 받아야 할 서류를 압축 공기를 이용해 운송했습니다. 이 관에 서류를 넣으면 됐습니다."]

벙커 전체 면적은 55헥타르.

화물차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작전 공간은 지하 18미터 깊이까지 구축됐습니다.

벙커를 지탱하는 벽의 두께는 보시는 것처럼 1미터 이상으로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때문에 웬만한 폭격에도 벙커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국도도 우회시키고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 '금지된 도시'라 불린 이 지역은 이제 안보 관광지로 변신했습니다.

[보르쉐르트/벙커 운영사 대표 : "저희는 이 시멘트가 평화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일을 다시는 하지 마라,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마라, 다시는 수많은 돈을 이런 허튼 곳에 쓰지 마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호소입니다."]

베를린 시내 북쪽의 지하철역.

1940년 첫 베를린 공습 이후 대피소가 대거 필요했던 나치는 지하철역 기계실을 벙커로 개조했습니다.

1,300명 규모였지만 실제 공습시에는 최대 5천 명 이상이 대피했습니다.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응급실도 갖췄습니다.

폭격으로 전기가 나간 상황에서도 대피로를 찾을 수 있도록 벽에는 야광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하펠/벙커 안내인 : "플래시로 벽을 비추면 잔광이 남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페인트는 불이 켜져 있는 동안 빛을 저장하고 불이 꺼지면 저장된 빛을 발합니다."]

대피소 감독자는 벙커 안의 질서를 유지했고, 외부와의 통신도 구비됐습니다.

[하펠/벙커 안내인 : "야전 전화로 대피소보다 한 단계 높은 지휘소로부터 공습 경보가 끝났는지, 아니면 대피소에 더 머물러야 하는지 등의 정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99년 보존 기념물로 지정된 이 벙커는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습니다.

분단시절 동서 베를린을 가로지른 장벽이 지났던 곳.

지하엔 동베를린의 가족을 서베를린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판 터널이 있습니다.

서베를린에서 지하 7미터 깊이로 장벽을 지나 동쪽으로 120미터를 오로지 삽으로만 파고 들어갔습니다.

[아놀트/터널 안내인 :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13,000가족이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그래서 서베를린에서 남편들이 힘을 모아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터널을 팠습니다."]

현재는 관람을 위해 터널 높이를 2미터로 높였지만, 당시엔 1미터도 채 안 돼 흙탕길을 기어가야 했습니다.

터널을 파는 과정에서 나오는 흙의 양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터널의 높이를 가급적 낮게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놀트/터널 안내인 : "(슈타지가) 2~3미터 길이의 창을 땅에 꽂은 후 헤드폰을 끼고 매복했습니다. 창 끝에는 고성능 마이크가 설치됐습니다."]

75개의 터널 계획 중 19개가 성공해 동독에서 300여 명이 탈출했습니다.

[슈테판/관람객 : "터널을 통한 탈동은 감동을 줍니다. 가족이 떨어져 있었고 이런 곳이 있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밖에도 핵벙커와 수술벙커 등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벙커들.

하루빨리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고 다시 관람객을 맞이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유광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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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치 벙커의 재탄생…전쟁·분단 상처를 교육 현장으로
    • 입력 2021-03-20 22:24:50
    • 수정2021-03-20 22: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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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전쟁과 분단을 거친 독일엔 당시 역사를 보여 주는 지하 벙커들이 아직도 다수 남아 있는데요.

이 벙커들을 개조해 살아 있는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현장을 베를린 유광석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이 영상은 지난해 3월 초 촬영했지만 취재 직후 독일에 코로나19가 본격 확산되면서 방송이 미뤄진 데 대해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리포트]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마을.

관람객들이 안내를 받아 쓰러진 집들을 살펴봅니다.

710kg의 강철로 만든 출입문에 나무를 덧대는 등 가정집처럼 위장한 군사시설입니다.

[보르쉐르트/벙커 운영사 대표 : "히틀러가 나치군의 벙커를 베를린, 즉 제국 수도의 근교에 둘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 때문에 육군 최고사령부의 주둔지로 이 곳이 선정됐습니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하 요새가 펼쳐집니다.

육군 최고사령부가 주둔한 마이바흐 벙커에서 출정 전략을 짜면, 통로로 연결된 통신사령부 체펠린 벙커에서 이 명령을 유럽의 각 전선으로 내려보냈습니다.

1941년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도 여기서 수립됐습니다.

1939년부터 군인들이 주둔했고, 2차대전이 끝날 무렵엔 그 수가 8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벙커 안내인 : "당시 인터넷이 없었지만 각종 정보나 검토해야 할 서류, 서명 받아야 할 서류를 압축 공기를 이용해 운송했습니다. 이 관에 서류를 넣으면 됐습니다."]

벙커 전체 면적은 55헥타르.

화물차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작전 공간은 지하 18미터 깊이까지 구축됐습니다.

벙커를 지탱하는 벽의 두께는 보시는 것처럼 1미터 이상으로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때문에 웬만한 폭격에도 벙커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국도도 우회시키고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 '금지된 도시'라 불린 이 지역은 이제 안보 관광지로 변신했습니다.

[보르쉐르트/벙커 운영사 대표 : "저희는 이 시멘트가 평화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일을 다시는 하지 마라,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마라, 다시는 수많은 돈을 이런 허튼 곳에 쓰지 마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호소입니다."]

베를린 시내 북쪽의 지하철역.

1940년 첫 베를린 공습 이후 대피소가 대거 필요했던 나치는 지하철역 기계실을 벙커로 개조했습니다.

1,300명 규모였지만 실제 공습시에는 최대 5천 명 이상이 대피했습니다.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응급실도 갖췄습니다.

폭격으로 전기가 나간 상황에서도 대피로를 찾을 수 있도록 벽에는 야광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하펠/벙커 안내인 : "플래시로 벽을 비추면 잔광이 남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페인트는 불이 켜져 있는 동안 빛을 저장하고 불이 꺼지면 저장된 빛을 발합니다."]

대피소 감독자는 벙커 안의 질서를 유지했고, 외부와의 통신도 구비됐습니다.

[하펠/벙커 안내인 : "야전 전화로 대피소보다 한 단계 높은 지휘소로부터 공습 경보가 끝났는지, 아니면 대피소에 더 머물러야 하는지 등의 정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99년 보존 기념물로 지정된 이 벙커는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습니다.

분단시절 동서 베를린을 가로지른 장벽이 지났던 곳.

지하엔 동베를린의 가족을 서베를린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판 터널이 있습니다.

서베를린에서 지하 7미터 깊이로 장벽을 지나 동쪽으로 120미터를 오로지 삽으로만 파고 들어갔습니다.

[아놀트/터널 안내인 :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13,000가족이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그래서 서베를린에서 남편들이 힘을 모아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터널을 팠습니다."]

현재는 관람을 위해 터널 높이를 2미터로 높였지만, 당시엔 1미터도 채 안 돼 흙탕길을 기어가야 했습니다.

터널을 파는 과정에서 나오는 흙의 양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터널의 높이를 가급적 낮게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놀트/터널 안내인 : "(슈타지가) 2~3미터 길이의 창을 땅에 꽂은 후 헤드폰을 끼고 매복했습니다. 창 끝에는 고성능 마이크가 설치됐습니다."]

75개의 터널 계획 중 19개가 성공해 동독에서 300여 명이 탈출했습니다.

[슈테판/관람객 : "터널을 통한 탈동은 감동을 줍니다. 가족이 떨어져 있었고 이런 곳이 있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밖에도 핵벙커와 수술벙커 등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벙커들.

하루빨리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고 다시 관람객을 맞이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유광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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