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메이데이 컬러화]① 학살의 서막 ‘오라리 방화사건’

입력 2021.04.02 (09:51) 수정 2021.04.0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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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KBS가 4·3 73주년을 맞아 준비한 기획뉴스 전해드리겠습니다.

제주 4·3 사건 초기에 발생한 오라리 방화 사건은 '제주도의 메이데이'라는 이름으로 드물게 영상 자료가 남아있는데요.

KBS가 흑백의 '메이데이 영상'을 최초로 컬러 복원했습니다.

복원 영상을 보여드리기에 앞서 이 영상에 담긴 오라리 방화 사건이 무엇인지, 민소영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오라리 방화 사건은 제주 4·3 당시 있었던 큰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1948년 5월 1일, 미합중국 육군은 이날 사건을 '제주도 메이데이' 라는 이름의 기록영상물로 제작해 보관했습니다.

그날, 이 마을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초가집 여러 채가 불에 타고, 마을이 화염과 뿌연 연기로 뒤덮입니다.

당시 우익 청년단체들이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집을 불태운 이른바 오라리 방화 사건입니다.

앞서 한라산 무장대가 오라리 마을을 습격해 대동청년단 간부와 그 가족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보복하기 위해 불을 지른 겁니다.

[김순혜/4·3 후유장애인/당시 오라리 주민 : "(산에 갔다고) 지목한 사람 집만 불붙여버렸는데, 오라리는 살았어요. 오라2동은. 연미마을까지 불붙였어요."]

4·3사건 발발 20여 일 뒤, 김익렬 당시 국방경비대 9연대장은 무장대 총책 김달삼을 만나 '평화협상'을 체결합니다.

즉각 무장을 해제하고 하산하면 주모자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고,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흘 뒤, 오라리 방화 사건이 터지고 협상은 결렬됩니다.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에 나서 우익 청년단체들이 경찰의 후원 아래 자행한 방화라고 판단해 이를 미 군정에 보고했지만, 묵살당합니다.

이후 미 군정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김창주/당시 오라리 주민 :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오늘은 죽이지 않겠다. 산으로 가든 밑으로 가든 오늘은 죽이지 않을 테니까, 내일부터 동네 어지르지 마라. 내일부터는 빨갱이로 인정해서 쏴 죽여버리겠다(라고)."]

그런데 이 방화사건이 평화협상이 깨진 원인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5·10 총선거를 앞두고 미 군정은 '공산주의 척결'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고, 협상 과정에서 무장대 아지트를 확인한 뒤, 곧바로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박찬식/전 4·3 연구소장 : "무장대를 확실하게 진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미 군정 당국의 강경 진압 정책이 메이데이 필름에 들어있다고 봅니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이후 7년여 동안 이어진 학살의 서막이었습니다.

KBS 뉴스 민소영입니다.

촬영기자:강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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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메이데이 컬러화]① 학살의 서막 ‘오라리 방화사건’
    • 입력 2021-04-02 09:51:26
    • 수정2021-04-02 10:18:15
    930뉴스(제주)
[앵커]

KBS가 4·3 73주년을 맞아 준비한 기획뉴스 전해드리겠습니다.

제주 4·3 사건 초기에 발생한 오라리 방화 사건은 '제주도의 메이데이'라는 이름으로 드물게 영상 자료가 남아있는데요.

KBS가 흑백의 '메이데이 영상'을 최초로 컬러 복원했습니다.

복원 영상을 보여드리기에 앞서 이 영상에 담긴 오라리 방화 사건이 무엇인지, 민소영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오라리 방화 사건은 제주 4·3 당시 있었던 큰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1948년 5월 1일, 미합중국 육군은 이날 사건을 '제주도 메이데이' 라는 이름의 기록영상물로 제작해 보관했습니다.

그날, 이 마을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초가집 여러 채가 불에 타고, 마을이 화염과 뿌연 연기로 뒤덮입니다.

당시 우익 청년단체들이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집을 불태운 이른바 오라리 방화 사건입니다.

앞서 한라산 무장대가 오라리 마을을 습격해 대동청년단 간부와 그 가족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보복하기 위해 불을 지른 겁니다.

[김순혜/4·3 후유장애인/당시 오라리 주민 : "(산에 갔다고) 지목한 사람 집만 불붙여버렸는데, 오라리는 살았어요. 오라2동은. 연미마을까지 불붙였어요."]

4·3사건 발발 20여 일 뒤, 김익렬 당시 국방경비대 9연대장은 무장대 총책 김달삼을 만나 '평화협상'을 체결합니다.

즉각 무장을 해제하고 하산하면 주모자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고,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흘 뒤, 오라리 방화 사건이 터지고 협상은 결렬됩니다.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에 나서 우익 청년단체들이 경찰의 후원 아래 자행한 방화라고 판단해 이를 미 군정에 보고했지만, 묵살당합니다.

이후 미 군정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김창주/당시 오라리 주민 :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오늘은 죽이지 않겠다. 산으로 가든 밑으로 가든 오늘은 죽이지 않을 테니까, 내일부터 동네 어지르지 마라. 내일부터는 빨갱이로 인정해서 쏴 죽여버리겠다(라고)."]

그런데 이 방화사건이 평화협상이 깨진 원인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5·10 총선거를 앞두고 미 군정은 '공산주의 척결'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고, 협상 과정에서 무장대 아지트를 확인한 뒤, 곧바로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박찬식/전 4·3 연구소장 : "무장대를 확실하게 진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미 군정 당국의 강경 진압 정책이 메이데이 필름에 들어있다고 봅니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이후 7년여 동안 이어진 학살의 서막이었습니다.

KBS 뉴스 민소영입니다.

촬영기자:강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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