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110년, 잊혀진 ‘숨은 주역들’

입력 2021.06.11 (21:46) 수정 2021.06.11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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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운동가 수천 명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가 설립 110주년을 맞았습니다.

KBS 9시뉴스에서는 최근 발굴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독립투사들의 산실,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마련했는데요,

오늘(11일)은, 학교 설립에 기여하고 헌신한 주역들을 선재희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척박한 망명지, 만주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사진 자료라곤 흑백 사진 단 1장이 남아, 독립을 향한 전사들의 의지를 가늠케 합니다.

그로부터 110년, 그들이 남긴 구국의 혼은 후손들을 통해 면면히 내려오고 있습니다.

부지 매입 등 초기 설립 자금의 대부분은 알려진대로 이회영과 이석영 등 6형제가 전 재산을 처분해 마련했습니다.

[이종찬/우당 이회영 선생 후손 : "남산 자락은 이회영 6형제 분들이 태어난 장소입니다. 여기가 바로 항일 구국 운동의 기반이었습니다."]

안동 유림 출신의 이상룡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

1913년 학교장을 맡기도 한 이상룡은 10대, 20대가 대부분인 젊은 생도들에게 역사 교육을 전담하며 민족혼을 일깨웠습니다.

[이창수/석주 이상룡 선생 후손 : "교육의 중요성을 먼저 알고 계셨어요, 신식 교육요. 그래서 만주로 가시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게 '교육이다, 우리 역사를 가르쳐야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상룡과 김대락, 김동삼 등 경북 세력, 초대 교장을 지낸 이동녕 등 충청 세력, 윤기섭, 임면수 등 경기 세력, 황해도 세력 등이 학교 설립과 운영에 함께 했습니다.

거의 전국에 걸친 독립 운동가들이 힘을 보태 이뤄낸 결과물인 셈입니다.

[박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그 망명한 세력들이 집안의 재산을 다 털어서 신흥무관학교의 재정과 운영에 큰 기여를 한 것 또한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입니다."]

보성학교 수석 졸업생 출신의 윤기섭도 역할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습니다.

20대 어린 나이에 학감으로 합류해, 우리말로 된 훈련 용어를 처음 만드는 등 군사 학교의 면모를 갖추는 데 일조합니다.

[박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차렷' '열중쉬어' 이런 구령 같은 것 있죠. 이런 걸 윤기섭이 호칭이라든가 이런 걸 만든 장본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10년을 버텨내며, 3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들은 일제 강점기 항일 무장 투쟁의 뿌리가 됐습니다.

KBS 뉴스 선재희입니다.

촬영기자:조정석/영상편집:김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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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흥무관학교 110년, 잊혀진 ‘숨은 주역들’
    • 입력 2021-06-11 21:46:44
    • 수정2021-06-11 21:57:52
    뉴스 9
[앵커]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운동가 수천 명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가 설립 110주년을 맞았습니다.

KBS 9시뉴스에서는 최근 발굴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독립투사들의 산실,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마련했는데요,

오늘(11일)은, 학교 설립에 기여하고 헌신한 주역들을 선재희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척박한 망명지, 만주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사진 자료라곤 흑백 사진 단 1장이 남아, 독립을 향한 전사들의 의지를 가늠케 합니다.

그로부터 110년, 그들이 남긴 구국의 혼은 후손들을 통해 면면히 내려오고 있습니다.

부지 매입 등 초기 설립 자금의 대부분은 알려진대로 이회영과 이석영 등 6형제가 전 재산을 처분해 마련했습니다.

[이종찬/우당 이회영 선생 후손 : "남산 자락은 이회영 6형제 분들이 태어난 장소입니다. 여기가 바로 항일 구국 운동의 기반이었습니다."]

안동 유림 출신의 이상룡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

1913년 학교장을 맡기도 한 이상룡은 10대, 20대가 대부분인 젊은 생도들에게 역사 교육을 전담하며 민족혼을 일깨웠습니다.

[이창수/석주 이상룡 선생 후손 : "교육의 중요성을 먼저 알고 계셨어요, 신식 교육요. 그래서 만주로 가시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게 '교육이다, 우리 역사를 가르쳐야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상룡과 김대락, 김동삼 등 경북 세력, 초대 교장을 지낸 이동녕 등 충청 세력, 윤기섭, 임면수 등 경기 세력, 황해도 세력 등이 학교 설립과 운영에 함께 했습니다.

거의 전국에 걸친 독립 운동가들이 힘을 보태 이뤄낸 결과물인 셈입니다.

[박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그 망명한 세력들이 집안의 재산을 다 털어서 신흥무관학교의 재정과 운영에 큰 기여를 한 것 또한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입니다."]

보성학교 수석 졸업생 출신의 윤기섭도 역할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습니다.

20대 어린 나이에 학감으로 합류해, 우리말로 된 훈련 용어를 처음 만드는 등 군사 학교의 면모를 갖추는 데 일조합니다.

[박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차렷' '열중쉬어' 이런 구령 같은 것 있죠. 이런 걸 윤기섭이 호칭이라든가 이런 걸 만든 장본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10년을 버텨내며, 3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들은 일제 강점기 항일 무장 투쟁의 뿌리가 됐습니다.

KBS 뉴스 선재희입니다.

촬영기자:조정석/영상편집:김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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