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봉오동서 일본군에 첫 승리 홍범도, 한때 스님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입력 2021.08.25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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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광복절 유해 송환 홍범도, 봉오동·청산리 전투서 일본군에 첫 승리
-봉오동·청산리 전적지 현장 접근 어려워...정부, 외교적 해법 찾아야
-고아 출신 홍범도 장군, 제지공장 직공과 스님 거쳐 독립군 영웅 활약
-홍범도 장군도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말년에 쓸쓸한 죽음 맞아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8월 25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UfgR9bysTgQ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 노성태: 광복절에 큰 선물이 하나 있었지요.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들어왔고 그리고 18일에 대전 현충원에 안장을 하면서 국민의 관심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간략하지만 홍범도가 어떤 분인지 그리고 봉오동 전투란 어떤 전투인지, 왜 유해가 카자흐스탄에 가 있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홍범도 장군하면 청산리대첩도 있고, 그런데 봉오동 전투가 가장 먼저 떠오르잖아요. 봉오동 전투 어떤 전투였습니까?

◆ 노성태: 1920년 6월 7일에 일본군을 격퇴했던, 그러니까 최초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싸워서 이겼던 전투인데요. 만주연해주 지역에 많은 독립군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서 국내 진공 작전을 펴게 되는데 함경도 강양동 초소를 얻어맞은 일본군들이 이번 기회에 독립군을 완전히 토벌하기 위해서 함경도 나남에 일본군 제19사단이 있었는데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해서 독립군을 추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홍범도, 최진동 등 연합 부대가 일본 월강추격대대를 봉오골로 유인해서, 아까 말씀드렸던 1920년 6월 7일 매복하고 있다가 공격을 해서 독립 군사상 최초로 큰 승리를 거뒀던 쾌거였지요.

◇ 지창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최초의 전투, 통쾌한 전투. 전과가 어땠습니까?

◆ 노성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당시 일본군 전사는 157명이고 중상을 200여명 입혔다. 우리 독립군은 전사 4명, 부상 2명이라고 발표했으니까 독립군의 압승이었고요. 지금 현장에 봉오골 반일 전적지라고 하는 기념비가 새겨져 있는데 제가 읽어보니까 일군 150명 사살, 10여명 부상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된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만 아무튼 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워서 이겼던 통쾌한 승리 전투지요.

◇ 지창환: 금방 말씀하신 봉오동 반일 전적지가 우리나라가 아니고 중국에 있잖아요. 현장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 노성태: 네.

◇ 지창환: 가보니까 어떻던가요?

◆ 노성태: 지금 봉오동 전적지 위치는 두만강 바로 옆에 중국 쪽에 도문이라고 하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도문에서 왕천 가는 길가에 있는데 굉장히 험준한 계곡이고요. 그런데 지금 가보니까 거기에 저수지 댐을 만들어서 물이 가득 차 있어서 현장까지 들어가기에는 쉽지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던 것처럼 봉오댐 바로 밑에 전적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것을 세운 날이 1993년 6월 7일. 그러니까 6월 7일 봉오동 전투가 일어난 날을 기념해서 세웠는데요. 제가 2년 전에 마지막으로 코로나19 발생 직전에 갔거든요. 갔더니 큰 규모로 바뀌어져 있었는데, 전적비를 다시 세웠는데 전부 글자를 지웠고 그다음에 갔더니 붉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 지창환: 왜 그랬을까요?

◆ 노성태: 아마 한국독립운동사에 대한 새로운 중국 공정은 아닌지 의심스럽고요. 동북항일연군 중심의 독립운동사를 쓰려는 중국 측의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봉오동 전투의 현장도 들어갈 수 없고 인근 청산리 전투 현장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현장은 군사기지라고 하는 명분을 내세워서 못 들어오게 하고요. 봉오동 전투의 현장은 거기가 댐이니 물을 관리해야 된다, 이런 이유를 대는데 아마 정부가 이 문제는 풀어서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갈 수 있는 현장으로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지창환: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현장은 우리 독립운동의 최초 최대 전적지인데 갈 수 없으니 안타깝네요. 금방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정부의 외교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네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으로도 알려져 있는 홍범도 장군, 어떤 분인지 속속들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잘 알려지지 않는 이유가 1921년 자유시 참변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소련땅으로 건너가고 소련군 장교가 되었기 때문인데요.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 우파로 출세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빛내기 위해서 홍범도의 과거를 덮었던 것도 홍범도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아무튼 홍범도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 전쟁 사상 가장 많이 싸웠고 가장 많이 이겼고 가장 오래 투쟁하고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독립 전쟁의 영웅이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홍범도가 어떤 분이냐 하면 평양에서 태어납니다. 1863년. 그래서 북한에서 계속 연고권을 주장했던 근거가 이것이고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셨고 15살에 평양진위대 나팔수, 그러니까 군인이 되었지만 장교들의 부정부패, 사병들에 대한 학대 때문에 탈영한 뒤에 황해도 제지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지만 임금 문제로 친일파였던 제지공장 주인을 살해한 뒤에 금강산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이순신 장군의 적손인 지담 대사라고 하는 스님의 상좌로 수행하면서 스님이 되는데 이때가 20살. 그러니까 글공부도 하고 항일의식을 전수받았던 시점이 아마 이 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 지창환: 군인도 됐다가 제지공장 직공도 했다가 결국 스님이 됐네요.

◆ 노성태: 네. 스님 시절에 신계사라고 하는 절에 계셨는데 옆에 암자가 있었고 암자에 계셨던 비구니와 애틋한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그분이 나중에 첫 번째 부인 이옥녀라고 하시는 분이에요. 두 분이 금강산을 떠나서 처가가 있는 함경도 삼수, 삼수갑산 할 때 삼수 있잖아요. 여기 이옥녀의 고향으로 옮겨갔고 여기에서 산포수 생활을 하다가 1907년에 총포 금지법을 만들고 압박하자 의병을 일으키게 되면서 1908년까지. 아무튼 일본군과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홍범도는 함경도에서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그러면 원래 시신이 모셔졌던 곳이 카자흐스탄이잖아요. 왜 만주가 아닌 카자흐스탄에 묻혔을까요?

◆ 노성태: 아까도 조금 말씀드렸지만 청산리 대첩 이후에 소련 땅으로 부하 300여명을 이끌고 들어갔고. 이르쿠츠크 소련군 5군단 합동 민족 여단 대위로 편입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22년 1월 22일에 모스크바에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해서 레닌을 만나서 훈장과 권총을 받기도 했는데 최근에 그 영상이 유튜브에 떠돌더라고요.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했던 50대 홍범도의 모습. 이때가 1922년도고요. 그리고 홍범도는 조선인 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지만 1923년도에 군복을 벗고, 그리고 다시 찾아온 곳이 연해주 협동농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마 많은 분이 아실 것입니다. 1937년 소련이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를 시킨단 말이에요. 독립군 영웅 홍범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홍범도가 끌려간 곳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였고 그의 나이 69세였는데 그 유해가 크질오르다에 있는 이유지요.

◇ 지창환: 거기에서는 어떻게 사셨어요?

◆ 노성태: 연금 80루블을 받았는데 그것 가지고는 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크질오르다에 고려극장이 있었는데 태장춘이라고 하는 극작가의 도움으로 수위가 됩니다. 1941년 태장춘이라고 하는 극작가가 ‘홍범도’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하고, 그리고 홍범도 장군에게 물었답니다. “연극이 마음에 드십니까?” 그러니까 홍범도 장군이 “너무 띄웠네, 띄웠어. 아무리 연극을 잘 놀아도 백두산 포수의 백발뱅중 총재간이야 보여주지 못하지.” 그러니까 총은 자기가 더 잘 쏜다는 것이지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고 하는데 아무튼 동포들은 홍범도를 보면서 강제 이주의 설움을 달랬고, 그리고 극장 뒷좌석에 앉아서 홍범도가 이 연극을 관람했다고 하는데 그의 말년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 지창환: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정미공장 직공도 하셨다고요.

◆ 노성태: 1941년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요. 고려극장 위치를 크질오르다에서 우슈토베로 옮겨가자 연금도 중단되고 직장도 잃게 되잖아요. 그래서 마지막 선택했던 것이 정미공장 직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지금 마지막 직업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고 어떤 백과사전에는 찾아보니까 시베리아에서 방황하다 사망했다고까지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홍범도 사후 100주년을 기념해서 특집으로 실은 1968년도 8월 27일자 <레닌기치>를 보니까 ‘정미공장 일꾼 일동’ 명의로 실린 홍범도의 부고가 실려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셨는데 부고가 실린 것이지요. 마지막 직업이 정미공장 직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지창환: 카자흐스탄에 아직도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홍범도 장군 유해의 국내 송환에 대해 서운해 하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 노성태: 많이 서운해 하겠지요. 그분들의 정신적 지주였는데, 아무튼 그 현장도 잘 정비해서 대전 현충원이나 크질오르다 무덤이나 둘 다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장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 지창환: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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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의 아침] 봉오동서 일본군에 첫 승리 홍범도, 한때 스님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 입력 2021-08-25 12:23:19
    광주
-광복절 유해 송환 홍범도, 봉오동·청산리 전투서 일본군에 첫 승리<br />-봉오동·청산리 전적지 현장 접근 어려워...정부, 외교적 해법 찾아야<br />-고아 출신 홍범도 장군, 제지공장 직공과 스님 거쳐 독립군 영웅 활약<br />-홍범도 장군도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말년에 쓸쓸한 죽음 맞아<br />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8월 25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UfgR9bysTgQ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 노성태: 광복절에 큰 선물이 하나 있었지요.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들어왔고 그리고 18일에 대전 현충원에 안장을 하면서 국민의 관심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간략하지만 홍범도가 어떤 분인지 그리고 봉오동 전투란 어떤 전투인지, 왜 유해가 카자흐스탄에 가 있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홍범도 장군하면 청산리대첩도 있고, 그런데 봉오동 전투가 가장 먼저 떠오르잖아요. 봉오동 전투 어떤 전투였습니까?

◆ 노성태: 1920년 6월 7일에 일본군을 격퇴했던, 그러니까 최초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싸워서 이겼던 전투인데요. 만주연해주 지역에 많은 독립군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서 국내 진공 작전을 펴게 되는데 함경도 강양동 초소를 얻어맞은 일본군들이 이번 기회에 독립군을 완전히 토벌하기 위해서 함경도 나남에 일본군 제19사단이 있었는데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해서 독립군을 추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홍범도, 최진동 등 연합 부대가 일본 월강추격대대를 봉오골로 유인해서, 아까 말씀드렸던 1920년 6월 7일 매복하고 있다가 공격을 해서 독립 군사상 최초로 큰 승리를 거뒀던 쾌거였지요.

◇ 지창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최초의 전투, 통쾌한 전투. 전과가 어땠습니까?

◆ 노성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당시 일본군 전사는 157명이고 중상을 200여명 입혔다. 우리 독립군은 전사 4명, 부상 2명이라고 발표했으니까 독립군의 압승이었고요. 지금 현장에 봉오골 반일 전적지라고 하는 기념비가 새겨져 있는데 제가 읽어보니까 일군 150명 사살, 10여명 부상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된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만 아무튼 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워서 이겼던 통쾌한 승리 전투지요.

◇ 지창환: 금방 말씀하신 봉오동 반일 전적지가 우리나라가 아니고 중국에 있잖아요. 현장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 노성태: 네.

◇ 지창환: 가보니까 어떻던가요?

◆ 노성태: 지금 봉오동 전적지 위치는 두만강 바로 옆에 중국 쪽에 도문이라고 하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도문에서 왕천 가는 길가에 있는데 굉장히 험준한 계곡이고요. 그런데 지금 가보니까 거기에 저수지 댐을 만들어서 물이 가득 차 있어서 현장까지 들어가기에는 쉽지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던 것처럼 봉오댐 바로 밑에 전적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것을 세운 날이 1993년 6월 7일. 그러니까 6월 7일 봉오동 전투가 일어난 날을 기념해서 세웠는데요. 제가 2년 전에 마지막으로 코로나19 발생 직전에 갔거든요. 갔더니 큰 규모로 바뀌어져 있었는데, 전적비를 다시 세웠는데 전부 글자를 지웠고 그다음에 갔더니 붉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 지창환: 왜 그랬을까요?

◆ 노성태: 아마 한국독립운동사에 대한 새로운 중국 공정은 아닌지 의심스럽고요. 동북항일연군 중심의 독립운동사를 쓰려는 중국 측의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봉오동 전투의 현장도 들어갈 수 없고 인근 청산리 전투 현장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현장은 군사기지라고 하는 명분을 내세워서 못 들어오게 하고요. 봉오동 전투의 현장은 거기가 댐이니 물을 관리해야 된다, 이런 이유를 대는데 아마 정부가 이 문제는 풀어서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갈 수 있는 현장으로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지창환: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현장은 우리 독립운동의 최초 최대 전적지인데 갈 수 없으니 안타깝네요. 금방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정부의 외교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네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으로도 알려져 있는 홍범도 장군, 어떤 분인지 속속들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잘 알려지지 않는 이유가 1921년 자유시 참변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소련땅으로 건너가고 소련군 장교가 되었기 때문인데요.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 우파로 출세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빛내기 위해서 홍범도의 과거를 덮었던 것도 홍범도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아무튼 홍범도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 전쟁 사상 가장 많이 싸웠고 가장 많이 이겼고 가장 오래 투쟁하고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독립 전쟁의 영웅이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홍범도가 어떤 분이냐 하면 평양에서 태어납니다. 1863년. 그래서 북한에서 계속 연고권을 주장했던 근거가 이것이고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셨고 15살에 평양진위대 나팔수, 그러니까 군인이 되었지만 장교들의 부정부패, 사병들에 대한 학대 때문에 탈영한 뒤에 황해도 제지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지만 임금 문제로 친일파였던 제지공장 주인을 살해한 뒤에 금강산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이순신 장군의 적손인 지담 대사라고 하는 스님의 상좌로 수행하면서 스님이 되는데 이때가 20살. 그러니까 글공부도 하고 항일의식을 전수받았던 시점이 아마 이 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 지창환: 군인도 됐다가 제지공장 직공도 했다가 결국 스님이 됐네요.

◆ 노성태: 네. 스님 시절에 신계사라고 하는 절에 계셨는데 옆에 암자가 있었고 암자에 계셨던 비구니와 애틋한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그분이 나중에 첫 번째 부인 이옥녀라고 하시는 분이에요. 두 분이 금강산을 떠나서 처가가 있는 함경도 삼수, 삼수갑산 할 때 삼수 있잖아요. 여기 이옥녀의 고향으로 옮겨갔고 여기에서 산포수 생활을 하다가 1907년에 총포 금지법을 만들고 압박하자 의병을 일으키게 되면서 1908년까지. 아무튼 일본군과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홍범도는 함경도에서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그러면 원래 시신이 모셔졌던 곳이 카자흐스탄이잖아요. 왜 만주가 아닌 카자흐스탄에 묻혔을까요?

◆ 노성태: 아까도 조금 말씀드렸지만 청산리 대첩 이후에 소련 땅으로 부하 300여명을 이끌고 들어갔고. 이르쿠츠크 소련군 5군단 합동 민족 여단 대위로 편입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22년 1월 22일에 모스크바에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해서 레닌을 만나서 훈장과 권총을 받기도 했는데 최근에 그 영상이 유튜브에 떠돌더라고요.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했던 50대 홍범도의 모습. 이때가 1922년도고요. 그리고 홍범도는 조선인 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지만 1923년도에 군복을 벗고, 그리고 다시 찾아온 곳이 연해주 협동농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마 많은 분이 아실 것입니다. 1937년 소련이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를 시킨단 말이에요. 독립군 영웅 홍범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홍범도가 끌려간 곳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였고 그의 나이 69세였는데 그 유해가 크질오르다에 있는 이유지요.

◇ 지창환: 거기에서는 어떻게 사셨어요?

◆ 노성태: 연금 80루블을 받았는데 그것 가지고는 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크질오르다에 고려극장이 있었는데 태장춘이라고 하는 극작가의 도움으로 수위가 됩니다. 1941년 태장춘이라고 하는 극작가가 ‘홍범도’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하고, 그리고 홍범도 장군에게 물었답니다. “연극이 마음에 드십니까?” 그러니까 홍범도 장군이 “너무 띄웠네, 띄웠어. 아무리 연극을 잘 놀아도 백두산 포수의 백발뱅중 총재간이야 보여주지 못하지.” 그러니까 총은 자기가 더 잘 쏜다는 것이지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고 하는데 아무튼 동포들은 홍범도를 보면서 강제 이주의 설움을 달랬고, 그리고 극장 뒷좌석에 앉아서 홍범도가 이 연극을 관람했다고 하는데 그의 말년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 지창환: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정미공장 직공도 하셨다고요.

◆ 노성태: 1941년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요. 고려극장 위치를 크질오르다에서 우슈토베로 옮겨가자 연금도 중단되고 직장도 잃게 되잖아요. 그래서 마지막 선택했던 것이 정미공장 직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지금 마지막 직업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고 어떤 백과사전에는 찾아보니까 시베리아에서 방황하다 사망했다고까지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홍범도 사후 100주년을 기념해서 특집으로 실은 1968년도 8월 27일자 <레닌기치>를 보니까 ‘정미공장 일꾼 일동’ 명의로 실린 홍범도의 부고가 실려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셨는데 부고가 실린 것이지요. 마지막 직업이 정미공장 직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지창환: 카자흐스탄에 아직도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홍범도 장군 유해의 국내 송환에 대해 서운해 하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 노성태: 많이 서운해 하겠지요. 그분들의 정신적 지주였는데, 아무튼 그 현장도 잘 정비해서 대전 현충원이나 크질오르다 무덤이나 둘 다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장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 지창환: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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