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백범 김구 선생이 녹차골 보성 쇠실 마을을 두 번 찾은 이유는?

입력 2021.09.01 (13:10) 수정 2021.09.0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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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치하포 사건으로 사형당하기 하루 전 고종 전화로 사형집행 면해
-탈옥 후 보성 쇠실 마을에 은신, 이후 공주 마곡사 등에서 은거
-해방 후 48년 만에 쇠실 마을 보은의 답방…주민들에 감사 표시
-마을 떠날 때 선물 받은 필낭 고이 간직…백범의 인간미 느껴져
-‘백범과의 아름다운 인연’ 쇠실 마을에 김구 은거 기념관 들어서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9월 1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aVrlyjglxqo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남도의 역사를 재밌게 들어보는 시간이지요.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 노성태: 대한민국 수도는 서울, 다 아는 것이잖아요. 우주 항공의 수도가 어딘지 아십니까?

◇ 지창환: 고흥 아닌가요.

◆ 노성태: 잘 아시네요. 아무튼 우주발사대가 있는 고흥이고요. 한국 녹차 수도는 녹차로 유명한 보성입니다. 그런데 그 보성군 득량면 쇠실 마을이라고 아주 오지 마을인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하면 김구 선생님 모르시는 분이 없는데 두 번이나 다녀갑니다. 그러니까 왜 산골 오지인 쇠실 마을에 백범 선생님이 두 번이나 찾았는지 어떤 인연이 있는지 따뜻한 인연 이야기를 오늘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백범 김구 선생이 보성의 산골짜기 마을, 쇠실 마을을 두 번이나 찾았다. 고향이 남도는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 노성태: 황해도 출신이지요?

◇ 지창환: 무엇인가 질긴 인연이 있어 보이는데요. 어떤 인연입니까?

◆ 노성태: 그렇습니다. 김구선생과 보성 쇠실 마을과의 인연을 알기 위해서는 2017년인가요? 대장 김창수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때 김창수가 김구 선생인데요. 소재가 되었던 것이 치하포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치하포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1896년 3월 8일, 그때 20살 청년이었던 김구 선생이, 그때 이름이 김창수였지요. 황해도 치하포의 한 여관에서 일본인 중위 스치다 조스케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상인으로 변장하고 있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을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단정하고 살해했던 사건, 이 사건이 치하포 사건이었던 것이지요.

◇ 지창환: 일본군 장교를 죽였군요.

◆ 노성태: 네.

◇ 지창환: 후폭풍이 상당했을 것 같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김구는 굉장히 당당하셨던 분이잖아요. 내가 이 사람을 죽였다 나는 어디 사는 누구다는 포고문을 딱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러고 나서 후에 체포가 되고. 그리고 체포된 후에 인천감옥에 투옥됩니다. 그때 일본 영사 하기와라 슈이치라고 하는 사람이 살인죄로 김구 선생을 참형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했지만 법부에서는 형을 연기하라고 하는 전보를 인천 감리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10월 23일 김구에 대한 교형을 법부가 국왕에게 건의했는데 이때 고종이 이를 재가하지 않아서 김구가 미결수로 옥중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고종이 전화로 김구 선생을 살렸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 노성태: 승낙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가 막히게 목숨을 살리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가 1896년 당시 고종이 머물렀던 경운궁에 가설이 되는데요. 그 해에 아까 말씀드렸던 김구 선생이 치하포에서 일본 장교를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간주하고 때려 죽였잖아요. 일본의 압박으로 사형이 선고된 김구 선생의 죄목은 국모보수. 그러니까 나라의 어머니 원수를 갚는다는 거였잖아요. 사형 집행 하루 전에 승정원의 승지가 이를 고종에게 보고하자 고종이 직접 인천 감리였던 이재정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형 집행을 하지 말 것을 명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서울-인천 간 전화 개통은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 사흘 전에 이루어졌고, 그리고 고종이 이재정에게 사형 집행하지 마라, 전화를 건 날은 김구 선생 사형 집행 하루 전이었다고 합니다. 전화가 살린 셈이지요.

◇ 지창환: 전화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김구 선생을 못 봤을 것 같습니다. 고종이 극적으로 목숨을 구해줬는데 이후 어떻게 됩니까?

◆ 노성태: 인천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시다가 2년 뒤인 1898년도 3월 19일에 탈옥을 감행해서 성공합니다. 이곳저곳 백범 선생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가 5월 하순경에 찾아온 곳이 지금 아까 계속 말씀드린 보성 득량의 쇠실 마을이었고 쇠실 마을과 김구 선생이 첫 인연을 맺게 됐던 이유가 되는 곳입니다.

◇ 지창환: 쇠실 마을에는 얼마나 계셨습니까?

◆ 노성태: 백범일지에 보면 5월 하순경에 들어와서 달포간 머물렀다. 달포라는 말은 잘 안 씁니다만 한 달이 조금 넘은 기간을 보통 달포라고 하니까 40여일 정도 머물렀다고 보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그런데 쇠실마을에 찾아왔던 이유가 소개받고 찾아왔는데요. 김구 선생이 안동 김씨입니다. 여기 안동 김씨 집성촌이었거든요. 일가 마을을 찾아온 것이지요. 아무튼 김구는 쇠실마을에 김광언이라고 하는 분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또 김광언의 집에 머무르게 되는데 아무튼 안동 김씨 일가였다고는 해도 김광언 등 동네 사람들이 김구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따뜻하게 맞아줬다고 하는 것은 22세 청년 김구가 당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을 아마 동네 사람들이나 김광언이 알았던 것 같습니다.


◇ 지창환: 따뜻하게 맞아줬다고 하셨는데 거기 머무르면서 정이 많이 들었겠네요. 떠날 때도...

◆ 노성태: 아쉬웠겠지요. 달포 간 머무르다 떠나자 마을에 사는 선정국 씨 어머니 안씨 부인이 자수를 새긴 필낭이라고 하는 필기구 주머니를 선물로 주었고 백범 선생은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던 동국사기라고 하는 역사책에 이별난(離別難)이라고 하는 시를 쓰고 김두호라고 하는 사인을 한 뒤에 40여일간 보살펴주었던 집주인 김광언에게 주고 떠나게 됩니다.

◇ 지창환: 집주인 김광언에게 선물로 이별난이라는 제목의 한시를 남겼다.

◆ 노성태: 난은 어렵다는 이런 뜻이잖아요. 이별이 어렵구나 이런 제목의 시인데. 제가 한번 읽어볼까요? 이별은 어렵고도 어려워라. 이별은 힘들어도 꽃은 피었네. 꽃가지 하나 꺾어서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종가에 남기고 반은 가지고 떠나리. 이 세상 사노라면 언젠가는 만나련만 이 강산을 버리고 가려니 이 또한 어렵구나. 네 친구와 더불어 한 달 남짓 노닐다가 석별의 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저 떠나네. 굉장히 와 닿는 한시인 것 같습니다.


◇ 지창환: 자신을 숨겨준 마을 주민들에 대한 애틋한 정이 담겨 있는 것 같네요. 대단합니다.

◆ 노성태: 이별난을 남기고 떠나면서 내가 죽지 않으면 연락을 하겠다 이런 말씀까지 남기고 떠나셨다고 합니다.

◇ 지창환: 그런데 백범 김구 선생 해방 이후에 이 마을을 다시 찾은 적이 있다면서요?

◆ 노성태: 네. 해방 직전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그리고 금의환향 했잖아요. 백범이 쇠실마을에 잠시 머문 지 48년이 지난 뒤입니다. 반세기. 고마움을 잊지 못해서 다시 찾겠다 하는 편지를 그때 당시 김광언의 손자에게 보내게 됩니다. 백범이 다시 보성에 온다고 하니까 보성 군민이 난리가 났지요. 보성역에서 쇠실마을까지 빨간 카펫 대신에 깨끗한 황토를 깔았고요. 솔가지를 세워서 독립문 같은 것을 세워서 환영을 하게 됩니다. 1946년 2월 아까 말씀드린 대로 48년 만에 두 번째 답방. 어찌 보면 보은의 답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날 40일 동안 도와주었던. 백범이 김광언의 집 마루에 앉아서 50여년 전을 회상하면서 당시 따뜻했던 마을 사람들의 정에 감사를 표했고요. 그리고 아까 선정국 씨 모친이 떠날 때 선물로 준 필기구 주머니를 내보이는데, 김구 선생이 그 필낭을 40년 동안이나 간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성역으로 이사 갔던 선정국의 어머니를 거기에서 만나면서 필낭을 내보이면서 따뜻함을 전했는데 제가 볼 때는 정말 백범의 따뜻한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벅찬 감동적인 만남이 보성에서 이루어진 것이지요.

◇ 지창환: 필통인 필낭을 독립운동하면서 숨어도 다니고 도망도 다니고 여러 가지 다양한 사건도 많은 분인데 어떻게 가지고 다녔을까요?

◆ 노성태: 그것이 굉장히 본인에게 정표로 남은 것 같습니다. 늘 필기구 넣어서 다니셨겠지요. 백범일지도 그 필낭에서 필기구 꺼내서 쓰지 않았을까요?

◇ 지창환: 그러니까요. 그러면 지금 쇠실 마을에 남아 있는 백범 김구 선생 흔적이 있습니까?

◆ 노성태: 네. 제가 몇 번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니까 백범 선생이 김광언 집에 앉아서 찍었던 사진이 지금 남아 있고요. 2006년도에 그 김광언 집 옆에 아주 작고 아담한 김구 은거 기념관이 건립되어서 그 아름다운 인연, 만남을 간직하고 있고요. 그리고 이보다 앞선 1990년대 건립된 백범 김구 선생 은거 추모비, 이별난을 새겼던 시비가 기념관 앞 마당에 위치하고 있고. 늘 백범 선생이 뒷산에서 운동하고 몸을 씻었다는 샘도 지금 있는데 옆에 김구 선생 초상화가 딱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녹차 수도 보성 찾아가시는 분들 김구 선생 은거지 쇠실 마을을 한번 들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지창환: 보성에는 김구 선생 은거지도 있고 서재필기념관도 있지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우리 지역이 최대 항일 독립운동지 중 하나인데 독립운동 서훈을 받으신 분 중에 가장 높은 것이 대한민국장인데 이것 받으신 유일한 분이 서재필 박사지요. 덤으로 서재필 박사 기념공원도 둘러보면 좋겠습니다.

◇ 지창환: 녹차 수도 보성을 가면 녹차만 볼 것이 아니고 서재필 기념공원, 그리고 김구 선생 은거 마을도 한번 가보면 좋겠네요. 저도 꼭 한번 가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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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의 아침] 백범 김구 선생이 녹차골 보성 쇠실 마을을 두 번 찾은 이유는?
    • 입력 2021-09-01 13:10:25
    • 수정2021-09-01 15:16:28
    광주
-치하포 사건으로 사형당하기 하루 전 고종 전화로 사형집행 면해<br />-탈옥 후 보성 쇠실 마을에 은신, 이후 공주 마곡사 등에서 은거<br />-해방 후 48년 만에 쇠실 마을 보은의 답방…주민들에 감사 표시<br />-마을 떠날 때 선물 받은 필낭 고이 간직…백범의 인간미 느껴져<br />-‘백범과의 아름다운 인연’ 쇠실 마을에 김구 은거 기념관 들어서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9월 1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aVrlyjglxqo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남도의 역사를 재밌게 들어보는 시간이지요.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 노성태: 대한민국 수도는 서울, 다 아는 것이잖아요. 우주 항공의 수도가 어딘지 아십니까?

◇ 지창환: 고흥 아닌가요.

◆ 노성태: 잘 아시네요. 아무튼 우주발사대가 있는 고흥이고요. 한국 녹차 수도는 녹차로 유명한 보성입니다. 그런데 그 보성군 득량면 쇠실 마을이라고 아주 오지 마을인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하면 김구 선생님 모르시는 분이 없는데 두 번이나 다녀갑니다. 그러니까 왜 산골 오지인 쇠실 마을에 백범 선생님이 두 번이나 찾았는지 어떤 인연이 있는지 따뜻한 인연 이야기를 오늘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백범 김구 선생이 보성의 산골짜기 마을, 쇠실 마을을 두 번이나 찾았다. 고향이 남도는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 노성태: 황해도 출신이지요?

◇ 지창환: 무엇인가 질긴 인연이 있어 보이는데요. 어떤 인연입니까?

◆ 노성태: 그렇습니다. 김구선생과 보성 쇠실 마을과의 인연을 알기 위해서는 2017년인가요? 대장 김창수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때 김창수가 김구 선생인데요. 소재가 되었던 것이 치하포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치하포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1896년 3월 8일, 그때 20살 청년이었던 김구 선생이, 그때 이름이 김창수였지요. 황해도 치하포의 한 여관에서 일본인 중위 스치다 조스케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상인으로 변장하고 있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을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단정하고 살해했던 사건, 이 사건이 치하포 사건이었던 것이지요.

◇ 지창환: 일본군 장교를 죽였군요.

◆ 노성태: 네.

◇ 지창환: 후폭풍이 상당했을 것 같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김구는 굉장히 당당하셨던 분이잖아요. 내가 이 사람을 죽였다 나는 어디 사는 누구다는 포고문을 딱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러고 나서 후에 체포가 되고. 그리고 체포된 후에 인천감옥에 투옥됩니다. 그때 일본 영사 하기와라 슈이치라고 하는 사람이 살인죄로 김구 선생을 참형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했지만 법부에서는 형을 연기하라고 하는 전보를 인천 감리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10월 23일 김구에 대한 교형을 법부가 국왕에게 건의했는데 이때 고종이 이를 재가하지 않아서 김구가 미결수로 옥중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고종이 전화로 김구 선생을 살렸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 노성태: 승낙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가 막히게 목숨을 살리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가 1896년 당시 고종이 머물렀던 경운궁에 가설이 되는데요. 그 해에 아까 말씀드렸던 김구 선생이 치하포에서 일본 장교를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간주하고 때려 죽였잖아요. 일본의 압박으로 사형이 선고된 김구 선생의 죄목은 국모보수. 그러니까 나라의 어머니 원수를 갚는다는 거였잖아요. 사형 집행 하루 전에 승정원의 승지가 이를 고종에게 보고하자 고종이 직접 인천 감리였던 이재정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형 집행을 하지 말 것을 명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서울-인천 간 전화 개통은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 사흘 전에 이루어졌고, 그리고 고종이 이재정에게 사형 집행하지 마라, 전화를 건 날은 김구 선생 사형 집행 하루 전이었다고 합니다. 전화가 살린 셈이지요.

◇ 지창환: 전화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김구 선생을 못 봤을 것 같습니다. 고종이 극적으로 목숨을 구해줬는데 이후 어떻게 됩니까?

◆ 노성태: 인천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시다가 2년 뒤인 1898년도 3월 19일에 탈옥을 감행해서 성공합니다. 이곳저곳 백범 선생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가 5월 하순경에 찾아온 곳이 지금 아까 계속 말씀드린 보성 득량의 쇠실 마을이었고 쇠실 마을과 김구 선생이 첫 인연을 맺게 됐던 이유가 되는 곳입니다.

◇ 지창환: 쇠실 마을에는 얼마나 계셨습니까?

◆ 노성태: 백범일지에 보면 5월 하순경에 들어와서 달포간 머물렀다. 달포라는 말은 잘 안 씁니다만 한 달이 조금 넘은 기간을 보통 달포라고 하니까 40여일 정도 머물렀다고 보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그런데 쇠실마을에 찾아왔던 이유가 소개받고 찾아왔는데요. 김구 선생이 안동 김씨입니다. 여기 안동 김씨 집성촌이었거든요. 일가 마을을 찾아온 것이지요. 아무튼 김구는 쇠실마을에 김광언이라고 하는 분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또 김광언의 집에 머무르게 되는데 아무튼 안동 김씨 일가였다고는 해도 김광언 등 동네 사람들이 김구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따뜻하게 맞아줬다고 하는 것은 22세 청년 김구가 당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을 아마 동네 사람들이나 김광언이 알았던 것 같습니다.


◇ 지창환: 따뜻하게 맞아줬다고 하셨는데 거기 머무르면서 정이 많이 들었겠네요. 떠날 때도...

◆ 노성태: 아쉬웠겠지요. 달포 간 머무르다 떠나자 마을에 사는 선정국 씨 어머니 안씨 부인이 자수를 새긴 필낭이라고 하는 필기구 주머니를 선물로 주었고 백범 선생은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던 동국사기라고 하는 역사책에 이별난(離別難)이라고 하는 시를 쓰고 김두호라고 하는 사인을 한 뒤에 40여일간 보살펴주었던 집주인 김광언에게 주고 떠나게 됩니다.

◇ 지창환: 집주인 김광언에게 선물로 이별난이라는 제목의 한시를 남겼다.

◆ 노성태: 난은 어렵다는 이런 뜻이잖아요. 이별이 어렵구나 이런 제목의 시인데. 제가 한번 읽어볼까요? 이별은 어렵고도 어려워라. 이별은 힘들어도 꽃은 피었네. 꽃가지 하나 꺾어서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종가에 남기고 반은 가지고 떠나리. 이 세상 사노라면 언젠가는 만나련만 이 강산을 버리고 가려니 이 또한 어렵구나. 네 친구와 더불어 한 달 남짓 노닐다가 석별의 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저 떠나네. 굉장히 와 닿는 한시인 것 같습니다.


◇ 지창환: 자신을 숨겨준 마을 주민들에 대한 애틋한 정이 담겨 있는 것 같네요. 대단합니다.

◆ 노성태: 이별난을 남기고 떠나면서 내가 죽지 않으면 연락을 하겠다 이런 말씀까지 남기고 떠나셨다고 합니다.

◇ 지창환: 그런데 백범 김구 선생 해방 이후에 이 마을을 다시 찾은 적이 있다면서요?

◆ 노성태: 네. 해방 직전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그리고 금의환향 했잖아요. 백범이 쇠실마을에 잠시 머문 지 48년이 지난 뒤입니다. 반세기. 고마움을 잊지 못해서 다시 찾겠다 하는 편지를 그때 당시 김광언의 손자에게 보내게 됩니다. 백범이 다시 보성에 온다고 하니까 보성 군민이 난리가 났지요. 보성역에서 쇠실마을까지 빨간 카펫 대신에 깨끗한 황토를 깔았고요. 솔가지를 세워서 독립문 같은 것을 세워서 환영을 하게 됩니다. 1946년 2월 아까 말씀드린 대로 48년 만에 두 번째 답방. 어찌 보면 보은의 답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날 40일 동안 도와주었던. 백범이 김광언의 집 마루에 앉아서 50여년 전을 회상하면서 당시 따뜻했던 마을 사람들의 정에 감사를 표했고요. 그리고 아까 선정국 씨 모친이 떠날 때 선물로 준 필기구 주머니를 내보이는데, 김구 선생이 그 필낭을 40년 동안이나 간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성역으로 이사 갔던 선정국의 어머니를 거기에서 만나면서 필낭을 내보이면서 따뜻함을 전했는데 제가 볼 때는 정말 백범의 따뜻한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벅찬 감동적인 만남이 보성에서 이루어진 것이지요.

◇ 지창환: 필통인 필낭을 독립운동하면서 숨어도 다니고 도망도 다니고 여러 가지 다양한 사건도 많은 분인데 어떻게 가지고 다녔을까요?

◆ 노성태: 그것이 굉장히 본인에게 정표로 남은 것 같습니다. 늘 필기구 넣어서 다니셨겠지요. 백범일지도 그 필낭에서 필기구 꺼내서 쓰지 않았을까요?

◇ 지창환: 그러니까요. 그러면 지금 쇠실 마을에 남아 있는 백범 김구 선생 흔적이 있습니까?

◆ 노성태: 네. 제가 몇 번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니까 백범 선생이 김광언 집에 앉아서 찍었던 사진이 지금 남아 있고요. 2006년도에 그 김광언 집 옆에 아주 작고 아담한 김구 은거 기념관이 건립되어서 그 아름다운 인연, 만남을 간직하고 있고요. 그리고 이보다 앞선 1990년대 건립된 백범 김구 선생 은거 추모비, 이별난을 새겼던 시비가 기념관 앞 마당에 위치하고 있고. 늘 백범 선생이 뒷산에서 운동하고 몸을 씻었다는 샘도 지금 있는데 옆에 김구 선생 초상화가 딱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녹차 수도 보성 찾아가시는 분들 김구 선생 은거지 쇠실 마을을 한번 들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지창환: 보성에는 김구 선생 은거지도 있고 서재필기념관도 있지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우리 지역이 최대 항일 독립운동지 중 하나인데 독립운동 서훈을 받으신 분 중에 가장 높은 것이 대한민국장인데 이것 받으신 유일한 분이 서재필 박사지요. 덤으로 서재필 박사 기념공원도 둘러보면 좋겠습니다.

◇ 지창환: 녹차 수도 보성을 가면 녹차만 볼 것이 아니고 서재필 기념공원, 그리고 김구 선생 은거 마을도 한번 가보면 좋겠네요. 저도 꼭 한번 가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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