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석재상 방치 비석 알고 보니 안중근 의사 숭모비…농민이 신문광고 보고 발견

입력 2021.10.20 (11:55) 수정 2021.10.2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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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토 저격’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최초의 비석이 왜 하필 광주에 세워졌나?
-안 의사 숭모비 1961년 광주에 처음 세워…전남 유림이 나서고 전국서 호응
-1995년 자취 감춘 숭모비, 나주 석재상에 방치…농민이 구입 광주시에 기증
-죽산 안씨 문중서 장흥에 안중근 의사(순흥 안씨) 첫 사당 세우고 제사 봉행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10월 20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5_pIdYceJ5I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이지요.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은 어떤 이야기입니까?

◆ 노성태: 저번 시간에 인터넷 압도적 검색어 1위, 가장 사랑받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말씀드렸는데요. 오늘 2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지역에 안중근 의사 관련 기념 시설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데요. 그 이야기 말씀을 드리고 왜 광주 전남에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런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지창환: 궁금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황해도 해주 출생이라고 하셨잖아요. 황해도 분인데 왜 우리 고장에 안중근 의사 기념물이 많은가 궁금합니다.

◆ 노성태: 전국적으로 1971년도에 서울 남산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비롯해서 많은 기념 시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 지역에 많이 남아있거든요. 최초의 아마 유일한 안중근 의사를 모신 사당이 해동사인데 1955년 장흥에 건립이 되고요. 그리고 아마 최초의 안중근 의사 숭모비가 1961년 광주 공원에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아까 안중근 의사 동상이 전국에 15개 정도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중에 5개나 우리 고장에 있는 것이지요.

◇ 지창환: 안중근 의사 최초의 사당도 장흥에 있고 최초의 숭모비도 광주에 있고. 그다음에 동상이 여러 개 있는데 그중에 3분의 1이 광주, 전남에 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그러면 남도에 남아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 시설물 하나씩 살펴보겠는데요. 사당이 해동사라고 하셨잖아요. 언제 건립됐습니까?


◆ 노성태: 보성 장흥 일대에 죽산 안씨들이 많이 삽니다. 1952년도에 장흥군 장동면에 죽산안씨들이 자기들 조상인 고려 말 유학자인 안향, 이분을 모시는 사당 만수사를 건립하게 되는데 이것을 건립하고 같은 안 씨잖아요. 안중근 의사는. 순흥 안 씨예요.

◇ 지창환: 본관이 다르네요.

◆ 노성태: 그래서 후손들이 없어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안홍천이라고 하는 분이 중심이 되어서 안중근 의사 사당 건립에 뛰어들게 되자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됐고. 그래서 1955년 만수사 사당 바로 옆인데 서로 처마가 이렇게 마주보더라고요. 아주 작은 한 칸짜리 사당을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해동사예요. 그런데 제가 사당을 많이 봤잖아요. 한 칸짜리 가장 적은 아담한 사당이 이렇게 세워지게 됩니다.

◇ 지창환: 죽산 안씨 사당 옆에 순흥 안씨인 안중근 의사 사당이 세워졌군요.

◆ 노성태: 오히려 죽산 안씨 사당 만수사는 조금 크고요. 안중근 의사 사당은 한 칸짜리 사당을 옆에 세우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제사조차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웠다고 하는데 안중근 의사 후손들이 있지 않습니까?

◆ 노성태: 있지만 아들이 보통 사당을 짓는 것은 아니고요. 주변에서 이렇게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이 힘을 보태야 되는데요.

◇ 지창환: 그러면 안중근 의사 사당이 해동사라고 했는데요. 해동이 우리나라를 뜻하는 것 같기는 한데 어떤 의미를 품고 있습니까?

◆ 노성태: 그렇습니다. 이 사당이 만들어지자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잖아요. 이승만 대통령이 해동명월이라고 하는 글씨를 써서 내려 보냅니다. 앵커님이 말씀하셨지만 해동은 바다 건너 동쪽, 중국에서 봤을 때. 그래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고요. 그래서 옛날 해동 역사라든가 이런 것이 우리나라 역사인 것입니다. 아무튼 해동은 우리나라이고 명월은 밝은 달이잖아요. 그러니까 대한민국을 밝게 비춘다, 이런 뜻이니까 비쳤던 분이 누구라는 것이에요? 안중근 의사라는 것이지요. 1955년 사당이 준공되던 해이고, 그해 10월 27일인데 이때 안 이사 위패 봉안식이 열립니다. 위패 봉안식은 당시 장안의 화젯거리가 돼요. 그래서 장흥, 강진, 보성 군민뿐만 아니라 멀리 경상도 진주에서도 전국에서 1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고요.

◇ 지창환: 농촌에서 1만 명이면 엄청난 것인데요.

◆ 노성태: 안중근 의사의 큰딸이 현생이에요. 딸 한 분인데 이분이 안 의사 영정을 들었고 또 5촌 조카였던 안춘생이 안 의사 위패를 안고 오셨는데 그때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 지창환: 사당은 그렇고요. 안중근 의사 동상이 우리 지역에 많다고 했잖아요. 5개나.

◆ 노성태: 제가 전국에 확인해보니까 15개 정도 되더라고요. 그 중에 5개가 우리 지역에 있는데 최초의 안중근 동상이 서울 남산에 세워졌다가 그것이 광주 상무대로 옮겨지게 돼요. 상무대가 다시 장성으로 갔잖아요. 현재 장성 상무대 안에 최초의 안중근 동상이 있다. 상무대는 한국 장교들을 길러내는 요람이니까. 안중근 의사가 썼던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은 어찌 보면 한국 장교들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고요. 그리고 우리 지역 인물 중 임시정부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벌였던 분이 함평 출신 김철 선생이신데요. 이분 생가가 있는 신광면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은 2010년도에 안중근 장군이라고 하는 이름을 단 동상이 건립됐고요. 그리고 해동사가 있는 장흥 땅 정남진 있잖아요. 정남진 땅끝에도 안중근 의사 동상이 서 있는데 의거지였던 하얼빈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 지창환: 광주에도 안중근 의사 동상 있잖아요.

◆ 노성태: 2개가 있습니다. 95년도가 광복 50주년을 맞았던 해잖아요. 그래서 광주에 보면 중외공원,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 있고 비엔날레 전시관 있는 데 있잖아요. 중외공원에 권총을 든 안 의사 동상이 건립됩니다. 그리고 2017년도에는 상무시민공원에 또 건립이 되는데 상무시민공원 동상은 남도에 있었던 5개 동상 중에 가장 안중근 의사의 얼굴과 잘 닯았다 이런 평을 받고 있는 동상입니다.

◇ 지창환: 안 의사 숭모비, 전국에서 가장 먼저 광주에 건립됐다고 하셨잖아요. 그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 노성태: 1961년 12월 3일인데요. 안중근 기념사업회 회장이 당시 독립운동가였고 또 성균관대학을 건립했던 심산 김창숙 선생인데 이분이 비문을 쓰고 그리고 소전 손재형이라고 하는 유명한 서예가가 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라고 해서 전국 최초의 안 의사 추모비가 광주 공원에 세워졌다가 이것이 광주공원 성거사지 오층석탑 이쪽으로 옮겨진 뒤에 87년 중외공원으로 다시 옮겨집니다. 그러다가 95년 갑자기 숭모비가 내려지고 거기에 아까 권총을 든 동상이 세워지면서 숭모비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2019년 2년 전이지요. 24년 만에 극적으로 나주 석재상에서 숭모비가 발견되었고 그래서 다시 그해 10월 25일에 중외공원에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 지창환: 극적으로 발견돼서 다시 세워진 것 조금 이따 이야기 듣기로 하고 그러면 1961년도에 광주공원에 세워진 것이잖아요. 광주공원에 처음 들어선 경위가 궁금한데요.

◆ 노성태: 해방이 되고 8월 15일 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독립운동가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잖아요. 이승만 친일파들이 권력을 거머쥐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여기저기에서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현창사업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을 드린 것처럼 유림의 대표였고 독립운동가였고 성균관대학을 세웠던 심산 김창숙 선생이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를 구성해서 그리고 전국 유림이라든가 국민의 성금을 받아서 숭모비를 세웠는데 그 장소가 서울도 아니고 광주였고 광주공원이었던 것이지요.

◇ 지창환: 김창숙 선생 고향이 이쪽인가요?

◆ 노성태: 아닙니다.

◇ 지창환: 안 의사 숭모비가 광주공원에 건립되었다가 중간에 다시 중외공원으로 옮겨져서 그런 이후에 사라졌다고 했잖아요. 설명을 좀 들어야 될 것 같습니다.

◆ 노성태: 61년 12월 3일에 광주공원에 세워졌다가 중외공원으로 옮겨졌다는 말씀을 드렸고요. 95년도는 우리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잖아요. 그래서 의미 있는 해이기도 합니다. 김영삼 정부가 일본 조선 총독부 폭파했던 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숭모비를 내리고 동상을 올렸다고 하는데 95년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2019년 나주 석재상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것이지요.

◇ 지창환: 그러면 나주 석재상에서 발견되고 최근 재건립이 됐는데 노 원장님도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 노성태: 조금 힘을 보탠 것 같습니다. 제가 사라진 안 의사 숭모비의 존재를 안 것은 10여년 전이었고요. 2019년은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그래서 제가 모 신문사에 제안을 했지요. 안 의사 숭모비 찾자. 그리고 2월 그 신문사에서는 1면에 대문짝 만하게 안 의사 숭모비를 찾는다는 광고를 싣게 됩니다.

◇ 지창환: 신문사에서 노 원장님 말씀에 공감을 했군요.


◆ 노성태: 찾으려고 그랬는지 나주에 사는 농민 이근준이라고 하는 분이 평상시에는 집에서 점심을 드시는데 그날따라 식당 밥이 먹고 싶어서 식당을 찾았고 식당에 가서 신문을 봤는데 그런데 5년 전에 본인이 집을 짓고 돌을 구하기 위해서 석재상에 갔는데 넘어진 돌에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안중근이라고 쓰인 기억이 나서 바로 석재상에 달려갔던 것이지요. 5년 뒤에도 그대로 있었어요. 그래서 주인을 설득해서 구입을 했고 사진을 찍어서 안중근 숭모회에 진품 여부를 확인했더니 진품이다, 이렇게 확인이 나니까 언론에 공개를 했지요. 그래서 굉장히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많은 기자가 취재를 했고. 그런데 이근준이라는 농민이 광주시에 기증하겠다 이런 의사를 밝혔고. 그래서 광주시는 안중근 의사 숭모비 재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제가 거기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2019년 10월 25일, 26일이 의거일이어서 그날 했으면 좋았을 텐데 토요일이어서 25일에 다시 중외공원에 극적으로 건립하게 됩니다.

◇ 지창환: 드라마틱한데요. 이근준이라는 분이 하필이면 그날, 평소 식사하던 댁이 아닌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신문 1면 광고를 보고 그렇게 됐군요. 재건립 과정이 이렇게 극적인데, 그런데 안중근 의사 숭모비가 기념사업회에서 전 국민 모금을 통해서 건립한 것이잖아요. 왜 광주공원에 세워졌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 노성태: 그것이 저도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김창숙이 비문을 쓰셨는데 거기에 저는 단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문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제 이 비석을 세우는 일은 전남 유림으로부터 시작되어 전국이 호응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비석의 기록을 실은 자는 늙은 앉은뱅이 김창숙이라고 쓰여 있거든요. 모금 운동을 했는데 가장 열렬하게 참여한 지역이 전남이었다. 그러니까 광주공원에 건립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광주민의 참여가 가장 많았던 것이 그 이유인 것 같고요.

◇ 지창환: 그때만 해도 광주가 전라남도 광주였으니까요.

◆ 노성태: 그런데 참여가 가장 많았다는 것은 늘 안중근 의사를 광주, 전남인들은 마음속에 독립의 상징 인물로, 멘토로 품고 살아왔기 때문은 아닌지. 그러니까 우리 지역의 정서인 어떤 정의로움, 시대정신의 실천지라고 하는 정서와 맞아떨어졌던 그것이 이유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지창환: 사당도 이곳에서 처음 만들어지고 동상도 제일 많고 국민이 모은 기금으로 만들어진 숭모비가 왜 광주에 건립되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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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의 아침] 석재상 방치 비석 알고 보니 안중근 의사 숭모비…농민이 신문광고 보고 발견
    • 입력 2021-10-20 11:55:24
    • 수정2021-10-20 11:5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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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10월 20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5_pIdYceJ5I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이지요.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은 어떤 이야기입니까?

◆ 노성태: 저번 시간에 인터넷 압도적 검색어 1위, 가장 사랑받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말씀드렸는데요. 오늘 2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지역에 안중근 의사 관련 기념 시설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데요. 그 이야기 말씀을 드리고 왜 광주 전남에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런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지창환: 궁금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황해도 해주 출생이라고 하셨잖아요. 황해도 분인데 왜 우리 고장에 안중근 의사 기념물이 많은가 궁금합니다.

◆ 노성태: 전국적으로 1971년도에 서울 남산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비롯해서 많은 기념 시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 지역에 많이 남아있거든요. 최초의 아마 유일한 안중근 의사를 모신 사당이 해동사인데 1955년 장흥에 건립이 되고요. 그리고 아마 최초의 안중근 의사 숭모비가 1961년 광주 공원에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아까 안중근 의사 동상이 전국에 15개 정도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중에 5개나 우리 고장에 있는 것이지요.

◇ 지창환: 안중근 의사 최초의 사당도 장흥에 있고 최초의 숭모비도 광주에 있고. 그다음에 동상이 여러 개 있는데 그중에 3분의 1이 광주, 전남에 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그러면 남도에 남아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 시설물 하나씩 살펴보겠는데요. 사당이 해동사라고 하셨잖아요. 언제 건립됐습니까?


◆ 노성태: 보성 장흥 일대에 죽산 안씨들이 많이 삽니다. 1952년도에 장흥군 장동면에 죽산안씨들이 자기들 조상인 고려 말 유학자인 안향, 이분을 모시는 사당 만수사를 건립하게 되는데 이것을 건립하고 같은 안 씨잖아요. 안중근 의사는. 순흥 안 씨예요.

◇ 지창환: 본관이 다르네요.

◆ 노성태: 그래서 후손들이 없어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안홍천이라고 하는 분이 중심이 되어서 안중근 의사 사당 건립에 뛰어들게 되자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됐고. 그래서 1955년 만수사 사당 바로 옆인데 서로 처마가 이렇게 마주보더라고요. 아주 작은 한 칸짜리 사당을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해동사예요. 그런데 제가 사당을 많이 봤잖아요. 한 칸짜리 가장 적은 아담한 사당이 이렇게 세워지게 됩니다.

◇ 지창환: 죽산 안씨 사당 옆에 순흥 안씨인 안중근 의사 사당이 세워졌군요.

◆ 노성태: 오히려 죽산 안씨 사당 만수사는 조금 크고요. 안중근 의사 사당은 한 칸짜리 사당을 옆에 세우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제사조차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웠다고 하는데 안중근 의사 후손들이 있지 않습니까?

◆ 노성태: 있지만 아들이 보통 사당을 짓는 것은 아니고요. 주변에서 이렇게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이 힘을 보태야 되는데요.

◇ 지창환: 그러면 안중근 의사 사당이 해동사라고 했는데요. 해동이 우리나라를 뜻하는 것 같기는 한데 어떤 의미를 품고 있습니까?

◆ 노성태: 그렇습니다. 이 사당이 만들어지자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잖아요. 이승만 대통령이 해동명월이라고 하는 글씨를 써서 내려 보냅니다. 앵커님이 말씀하셨지만 해동은 바다 건너 동쪽, 중국에서 봤을 때. 그래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고요. 그래서 옛날 해동 역사라든가 이런 것이 우리나라 역사인 것입니다. 아무튼 해동은 우리나라이고 명월은 밝은 달이잖아요. 그러니까 대한민국을 밝게 비춘다, 이런 뜻이니까 비쳤던 분이 누구라는 것이에요? 안중근 의사라는 것이지요. 1955년 사당이 준공되던 해이고, 그해 10월 27일인데 이때 안 이사 위패 봉안식이 열립니다. 위패 봉안식은 당시 장안의 화젯거리가 돼요. 그래서 장흥, 강진, 보성 군민뿐만 아니라 멀리 경상도 진주에서도 전국에서 1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고요.

◇ 지창환: 농촌에서 1만 명이면 엄청난 것인데요.

◆ 노성태: 안중근 의사의 큰딸이 현생이에요. 딸 한 분인데 이분이 안 의사 영정을 들었고 또 5촌 조카였던 안춘생이 안 의사 위패를 안고 오셨는데 그때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 지창환: 사당은 그렇고요. 안중근 의사 동상이 우리 지역에 많다고 했잖아요. 5개나.

◆ 노성태: 제가 전국에 확인해보니까 15개 정도 되더라고요. 그 중에 5개가 우리 지역에 있는데 최초의 안중근 동상이 서울 남산에 세워졌다가 그것이 광주 상무대로 옮겨지게 돼요. 상무대가 다시 장성으로 갔잖아요. 현재 장성 상무대 안에 최초의 안중근 동상이 있다. 상무대는 한국 장교들을 길러내는 요람이니까. 안중근 의사가 썼던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은 어찌 보면 한국 장교들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고요. 그리고 우리 지역 인물 중 임시정부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벌였던 분이 함평 출신 김철 선생이신데요. 이분 생가가 있는 신광면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은 2010년도에 안중근 장군이라고 하는 이름을 단 동상이 건립됐고요. 그리고 해동사가 있는 장흥 땅 정남진 있잖아요. 정남진 땅끝에도 안중근 의사 동상이 서 있는데 의거지였던 하얼빈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 지창환: 광주에도 안중근 의사 동상 있잖아요.

◆ 노성태: 2개가 있습니다. 95년도가 광복 50주년을 맞았던 해잖아요. 그래서 광주에 보면 중외공원,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 있고 비엔날레 전시관 있는 데 있잖아요. 중외공원에 권총을 든 안 의사 동상이 건립됩니다. 그리고 2017년도에는 상무시민공원에 또 건립이 되는데 상무시민공원 동상은 남도에 있었던 5개 동상 중에 가장 안중근 의사의 얼굴과 잘 닯았다 이런 평을 받고 있는 동상입니다.

◇ 지창환: 안 의사 숭모비, 전국에서 가장 먼저 광주에 건립됐다고 하셨잖아요. 그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 노성태: 1961년 12월 3일인데요. 안중근 기념사업회 회장이 당시 독립운동가였고 또 성균관대학을 건립했던 심산 김창숙 선생인데 이분이 비문을 쓰고 그리고 소전 손재형이라고 하는 유명한 서예가가 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라고 해서 전국 최초의 안 의사 추모비가 광주 공원에 세워졌다가 이것이 광주공원 성거사지 오층석탑 이쪽으로 옮겨진 뒤에 87년 중외공원으로 다시 옮겨집니다. 그러다가 95년 갑자기 숭모비가 내려지고 거기에 아까 권총을 든 동상이 세워지면서 숭모비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2019년 2년 전이지요. 24년 만에 극적으로 나주 석재상에서 숭모비가 발견되었고 그래서 다시 그해 10월 25일에 중외공원에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 지창환: 극적으로 발견돼서 다시 세워진 것 조금 이따 이야기 듣기로 하고 그러면 1961년도에 광주공원에 세워진 것이잖아요. 광주공원에 처음 들어선 경위가 궁금한데요.

◆ 노성태: 해방이 되고 8월 15일 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독립운동가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잖아요. 이승만 친일파들이 권력을 거머쥐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여기저기에서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현창사업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을 드린 것처럼 유림의 대표였고 독립운동가였고 성균관대학을 세웠던 심산 김창숙 선생이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를 구성해서 그리고 전국 유림이라든가 국민의 성금을 받아서 숭모비를 세웠는데 그 장소가 서울도 아니고 광주였고 광주공원이었던 것이지요.

◇ 지창환: 김창숙 선생 고향이 이쪽인가요?

◆ 노성태: 아닙니다.

◇ 지창환: 안 의사 숭모비가 광주공원에 건립되었다가 중간에 다시 중외공원으로 옮겨져서 그런 이후에 사라졌다고 했잖아요. 설명을 좀 들어야 될 것 같습니다.

◆ 노성태: 61년 12월 3일에 광주공원에 세워졌다가 중외공원으로 옮겨졌다는 말씀을 드렸고요. 95년도는 우리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잖아요. 그래서 의미 있는 해이기도 합니다. 김영삼 정부가 일본 조선 총독부 폭파했던 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숭모비를 내리고 동상을 올렸다고 하는데 95년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2019년 나주 석재상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것이지요.

◇ 지창환: 그러면 나주 석재상에서 발견되고 최근 재건립이 됐는데 노 원장님도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 노성태: 조금 힘을 보탠 것 같습니다. 제가 사라진 안 의사 숭모비의 존재를 안 것은 10여년 전이었고요. 2019년은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그래서 제가 모 신문사에 제안을 했지요. 안 의사 숭모비 찾자. 그리고 2월 그 신문사에서는 1면에 대문짝 만하게 안 의사 숭모비를 찾는다는 광고를 싣게 됩니다.

◇ 지창환: 신문사에서 노 원장님 말씀에 공감을 했군요.


◆ 노성태: 찾으려고 그랬는지 나주에 사는 농민 이근준이라고 하는 분이 평상시에는 집에서 점심을 드시는데 그날따라 식당 밥이 먹고 싶어서 식당을 찾았고 식당에 가서 신문을 봤는데 그런데 5년 전에 본인이 집을 짓고 돌을 구하기 위해서 석재상에 갔는데 넘어진 돌에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안중근이라고 쓰인 기억이 나서 바로 석재상에 달려갔던 것이지요. 5년 뒤에도 그대로 있었어요. 그래서 주인을 설득해서 구입을 했고 사진을 찍어서 안중근 숭모회에 진품 여부를 확인했더니 진품이다, 이렇게 확인이 나니까 언론에 공개를 했지요. 그래서 굉장히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많은 기자가 취재를 했고. 그런데 이근준이라는 농민이 광주시에 기증하겠다 이런 의사를 밝혔고. 그래서 광주시는 안중근 의사 숭모비 재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제가 거기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2019년 10월 25일, 26일이 의거일이어서 그날 했으면 좋았을 텐데 토요일이어서 25일에 다시 중외공원에 극적으로 건립하게 됩니다.

◇ 지창환: 드라마틱한데요. 이근준이라는 분이 하필이면 그날, 평소 식사하던 댁이 아닌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신문 1면 광고를 보고 그렇게 됐군요. 재건립 과정이 이렇게 극적인데, 그런데 안중근 의사 숭모비가 기념사업회에서 전 국민 모금을 통해서 건립한 것이잖아요. 왜 광주공원에 세워졌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 노성태: 그것이 저도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김창숙이 비문을 쓰셨는데 거기에 저는 단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문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제 이 비석을 세우는 일은 전남 유림으로부터 시작되어 전국이 호응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비석의 기록을 실은 자는 늙은 앉은뱅이 김창숙이라고 쓰여 있거든요. 모금 운동을 했는데 가장 열렬하게 참여한 지역이 전남이었다. 그러니까 광주공원에 건립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광주민의 참여가 가장 많았던 것이 그 이유인 것 같고요.

◇ 지창환: 그때만 해도 광주가 전라남도 광주였으니까요.

◆ 노성태: 그런데 참여가 가장 많았다는 것은 늘 안중근 의사를 광주, 전남인들은 마음속에 독립의 상징 인물로, 멘토로 품고 살아왔기 때문은 아닌지. 그러니까 우리 지역의 정서인 어떤 정의로움, 시대정신의 실천지라고 하는 정서와 맞아떨어졌던 그것이 이유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지창환: 사당도 이곳에서 처음 만들어지고 동상도 제일 많고 국민이 모은 기금으로 만들어진 숭모비가 왜 광주에 건립되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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