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부산 영도구 대한도기 전경. 국가기록원 제공
영도는 부산 중구 광복동 옛 시청 건물 등이 들어서 있던 부산 원도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섬 지역입니다. 과거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몰려 마을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업으로도 유명한 지역인데요. 이런 영도구에 과거 국내 도기 생산량의 80%가량을 생산하는 ‘대한도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 국내 도기 생산의 ‘허브’
대한도기는 1917년 일제강점기, 일본결질도기의 분공장으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입지 등에 있어 동남아 수출에 유리하고 비교적 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에 분공장이 지어졌습니다.
1925년에는 일본경질도기의 본사가 부산 영도로 이전하게 됩니다. 광복 후에는 적산으로 분류됐고 이후에는 회사명이 ‘대한도기’로 변경됐습니다.
전국 도기의 80%를 생산하기도 했는데요.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 3천여 명을 수용했고, 피란 온 예술가들이 도기 생산에 투입돼 예술적 가치가 큰 도기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과거 조선방직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기업으로도 자리 잡았습니다.
이현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이곳에서 생활용품으로서의 도자기뿐 아니라 예술사적으로 가치를 가지는 장식용 접시도 제작했다. 그 작품들은 유럽이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로 수출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벽면 일부만 남아 있는 대한도기 공장 부지. 도로 공사로 이마저도 철거될 예정이다.
■ 1970년대 폐업…아직도 벽면 흔적 남아
하지만 유행과 시대적 흐름에 따라 도기 사업이 위축되기 시작했고, 결국 대한도기는 1972년 문을 닫게 됩니다. 대한도기 부지에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아파트가 들어섰고, 도로까지 뚫려 현재는 그 흔적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아직도 대한도기를 기억하는 영도주민들이 많지만, 현재는 대한도기의 일부 벽체만 겨우 현장에 남아 있습니다. 이마저도 이곳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철거될 상황입니다.
전문가들은 피란 시절 역사를 온전히 간직한 부산에서도 당시를 기억하는 건물들이 최근 개발 사업에 밀려 너무 쉽게 부서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앞서 행정기관의 무관심 속에 피란 역사가 온전히 담긴, 부산 서구 은천교회도 도로 확장공사에 밀려 완전히 철거됐습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은 “담벼락이 남이 있음으로 해서 대한도기가 가진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며 “근대 유산들과 관련된 체계적인 지도를 만들고 그 일대에 건축이나 토목 개발 행위를 할 때는 반드시 전문가의 자문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부산 영도구는 지역에서 대한도기가 갖는 역사적 가치에 대해 공감한다면서도 철거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그 흔적을 기억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데요. 영도구는 벽면 일부라도 잘라 인근에 보관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한도기의 역사를 알릴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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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전국 ‘도기’ 80% 생산…부산 ‘대한도기’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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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2-01-13 14:05:36
영도는 부산 중구 광복동 옛 시청 건물 등이 들어서 있던 부산 원도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섬 지역입니다. 과거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몰려 마을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업으로도 유명한 지역인데요. 이런 영도구에 과거 국내 도기 생산량의 80%가량을 생산하는 ‘대한도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 국내 도기 생산의 ‘허브’
대한도기는 1917년 일제강점기, 일본결질도기의 분공장으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입지 등에 있어 동남아 수출에 유리하고 비교적 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에 분공장이 지어졌습니다.
1925년에는 일본경질도기의 본사가 부산 영도로 이전하게 됩니다. 광복 후에는 적산으로 분류됐고 이후에는 회사명이 ‘대한도기’로 변경됐습니다.
전국 도기의 80%를 생산하기도 했는데요.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 3천여 명을 수용했고, 피란 온 예술가들이 도기 생산에 투입돼 예술적 가치가 큰 도기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과거 조선방직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기업으로도 자리 잡았습니다.
이현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이곳에서 생활용품으로서의 도자기뿐 아니라 예술사적으로 가치를 가지는 장식용 접시도 제작했다. 그 작품들은 유럽이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로 수출됐다.”고 설명했습니다.
■ 1970년대 폐업…아직도 벽면 흔적 남아
하지만 유행과 시대적 흐름에 따라 도기 사업이 위축되기 시작했고, 결국 대한도기는 1972년 문을 닫게 됩니다. 대한도기 부지에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아파트가 들어섰고, 도로까지 뚫려 현재는 그 흔적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아직도 대한도기를 기억하는 영도주민들이 많지만, 현재는 대한도기의 일부 벽체만 겨우 현장에 남아 있습니다. 이마저도 이곳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철거될 상황입니다.
전문가들은 피란 시절 역사를 온전히 간직한 부산에서도 당시를 기억하는 건물들이 최근 개발 사업에 밀려 너무 쉽게 부서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앞서 행정기관의 무관심 속에 피란 역사가 온전히 담긴, 부산 서구 은천교회도 도로 확장공사에 밀려 완전히 철거됐습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은 “담벼락이 남이 있음으로 해서 대한도기가 가진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며 “근대 유산들과 관련된 체계적인 지도를 만들고 그 일대에 건축이나 토목 개발 행위를 할 때는 반드시 전문가의 자문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부산 영도구는 지역에서 대한도기가 갖는 역사적 가치에 대해 공감한다면서도 철거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그 흔적을 기억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데요. 영도구는 벽면 일부라도 잘라 인근에 보관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한도기의 역사를 알릴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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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록 기자 kiyuro@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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