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을 통해 이 시대를 생각하다

입력 2022.02.2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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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6월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이 출간됐다. 그 후로부터 어언 4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제3세계의 일원으로 후진국이자 개발도상국에 가깝던 한국은 이제 UN이 인정하는 선진국이자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변모했다. 유신 말기의 어둠, 가난, 문화적 빈곤과 고투하던 한국사회는 이제 여느 사회 못지않게 민주주의가 구가되고 있으며, BTS, 드라마 <오징어게임>, 영화 <기생충> 등 한류문화가 세계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난쏘공은 발간 이후 반세기에 가까운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독자들의 변치 않는 사랑과 폭넓은 관심을 받는 문제작으로 평가받고 있거니와,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난쏘공은 난장이, 꼽추, 앉은뱅이 등 사회적 소수자(장애인)이자 도시빈민 가족의 애환과 절망, 죽음, 고통, 유예된 희망을 놀랄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문제작이다. 그 과정에서 당시 한국사회의 빈부격차와 양극화, 생태계 오염, 상류층의 일탈, 산업화의 그늘, 서울 중심주의, 운동권의 변절, 빈민과 대학생의 연대(連帶) 등의 민감하고 첨예한 여러 아젠더들이 하나하나 드러난다. 난쏘공에서 개진된 이런 문제 제기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때로 어떤 사안은 난쏘공이 발표된 시기보다 한층 심각하게 변한 경우도 존재한다. 가령 절대적 가난은 많이 줄었으되, 상대적 빈곤으로 인해 양극화에 대한 체감지수는 지금이 훨씬 커진 게 아닌가.

무엇보다 난장이의 큰아들 영수의 공책에 적혀 있던 아래 문장이 지닌 의미와 현재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각한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지금 읽어도 마음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아마 위의 구절은 지금의 현실에도 그대로 해당하는 통렬한 진단이 아닐까. 이런 영수의 생각은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라는 영수와 연대하는 대학생 지섭의 생각과 포개진다. 이렇듯 난쏘공은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에 이미 이즈음 폭넓게 회자되는 ‘타자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는 능력’이라는 문제의식을 선구적으로 펼치고 있다.

난쏘공의 주요 등장인물 중의 한 명인 신애가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는 난장이에게 전하는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라는 발언과 청년 노동자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가사 “함께 느끼는 기쁨과 슬픔/함께 나누는 희망과 공포”는 이른바 ‘각자도생’으로 대변되는, 관계가 단절되고 연대의 정신이 사라진 우울한 코로나 시대를 되비추는 대목이리라.

현재 지구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인 환경오염 문제도 난쏘공에 이미 등장한다.

바다에 떠 있는 기름을 서울 사람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 그곳 공기 속에는 유독 가스와 매연, 그리고 분진이 섞여 있었다. (…) 은강 내항은 썩은 바다로 괴어 있다. 공장 주변의 생물체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 은강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서울에 있었다.

위의 문장에는 환경문제와 생태오염을 서울 중심주의와 연계하여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이 스며 있다. 작가는 환경오염이 서울 중심주의라는 정치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은강’이라는 위성도시의 오염된 바다를 통해 설파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난쏘공의 내용이 지닌 문제적 성격과 더불어 조세희 작가 특유의 단단하고 간명한 문장, 철거 계고장이나 확인원, 통계조사 자료, ‘클라인씨 병’ 그림 등을 작품 속에 그대로 제시하는 실험적 형식 역시 난쏘공의 문학적 성과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요컨대 난쏘공은 사회 고발이라는 리얼리즘 소설의 내용이 미적 형식의 혁신과 잘 맞물린 작품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말해, 난쏘공에는 이 시대 문학이 충분히 펼쳐놓지 못한 문학의 사회적 대응과 성찰이 치열한 방식으로 형상화돼 있다고 하겠다. 난쏘공의 에필로그에는 작품 첫머리에 나오는 담임교사가 다시 등장해 “한 주전자의 커피와 한 말의 술을 마시면서 좋은 글을 못 쓰고 울기만 한 나를 이해하라”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여기서 담임교사는 작가의 그림자다. 그렇다면 이 메시지는 조세희의 문학적 염결성을 알려주는 상징일 테다.

난쏘공이 베스트셀러임에도 불구하고, 조세희는 이후 두 번째 소설집 『시간여행』, 사진 에세이『침묵의 뿌리』, 미완의 장편 「하얀 저고리」만을 남겼다. 그는 평생을 좋은 글과 작품 완성에 대한 강박과 결벽증 속에서 살아왔다. 어떤 경우에도 쉽게 후속작을 발표하지 않았다. 조세희의 작가적 여정은 치열한 장인정신에 기반한 과작으로 귀결되는데, 그래도 그 가운데 난쏘공이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현대소설사의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작가가 조세희가 밟아온 그런 고통스러운 도정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시대 환경, 작가를 둘러싼 조건도 많이 바뀌었다. 조세희의 글쓰기 자세와 투철한 장인정신, 엄정한 자의식도 그 시대 분위기와 모종의 연관성이 존재하리라. 하지만 난쏘공을 비롯한 조세희 문학이 지닌 미적 보편성과 통시대적 성격, 치열한 문제의식은 문학과 작가정신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되새겨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난쏘공은 이제 하나의 고전(古典)이다.

조세희 작가는 2008년 개최된 ‘난쏘공 발간 30주년 기념 행사’에서 “난쏘공을 처음 썼을 때 이렇게 30년 넘게 읽힐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토로하며, 난쏘공이 더 이상 안 읽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말을 젊은 독자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난쏘공에는 “우리나라에서 십 대 노동자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른바 N포 세대로 약칭되는 이 시대 청년들의 힘겨움과 절망을 생각하면, 이 대목이 하나의 문학적 예언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1978년의 10대 노동자는 지금의 20대 비정규직과 얼추 겹쳐진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줄 사람이었다.”는 난쏘공의 주인공 영수의 자각에 부합되는 사람들은 지금 얼마나 있는가.

여전히 한국 사회는 난쏘공을 시대의 맥락에 비추어 다시 읽을 수밖에 없는 사회임을 절감한다. 조세희 작가의 표현대로 난쏘공이 안 읽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난쏘공이 전하는 메시지의 현재적 의미를 곰곰이 사유하며, 다시 난쏘공의 세계를 통과해야 한다. 그 시간은 난쏘공에 비추어 지금 이 시대의 양극화와 불평등, 불공정을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과정일 테다.

권성우 문학평론가·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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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을 통해 이 시대를 생각하다
    • 입력 2022-02-20 21:30:59
    취재K

1978년 6월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이 출간됐다. 그 후로부터 어언 4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제3세계의 일원으로 후진국이자 개발도상국에 가깝던 한국은 이제 UN이 인정하는 선진국이자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변모했다. 유신 말기의 어둠, 가난, 문화적 빈곤과 고투하던 한국사회는 이제 여느 사회 못지않게 민주주의가 구가되고 있으며, BTS, 드라마 <오징어게임>, 영화 <기생충> 등 한류문화가 세계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난쏘공은 발간 이후 반세기에 가까운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독자들의 변치 않는 사랑과 폭넓은 관심을 받는 문제작으로 평가받고 있거니와,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난쏘공은 난장이, 꼽추, 앉은뱅이 등 사회적 소수자(장애인)이자 도시빈민 가족의 애환과 절망, 죽음, 고통, 유예된 희망을 놀랄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문제작이다. 그 과정에서 당시 한국사회의 빈부격차와 양극화, 생태계 오염, 상류층의 일탈, 산업화의 그늘, 서울 중심주의, 운동권의 변절, 빈민과 대학생의 연대(連帶) 등의 민감하고 첨예한 여러 아젠더들이 하나하나 드러난다. 난쏘공에서 개진된 이런 문제 제기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때로 어떤 사안은 난쏘공이 발표된 시기보다 한층 심각하게 변한 경우도 존재한다. 가령 절대적 가난은 많이 줄었으되, 상대적 빈곤으로 인해 양극화에 대한 체감지수는 지금이 훨씬 커진 게 아닌가.

무엇보다 난장이의 큰아들 영수의 공책에 적혀 있던 아래 문장이 지닌 의미와 현재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각한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지금 읽어도 마음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아마 위의 구절은 지금의 현실에도 그대로 해당하는 통렬한 진단이 아닐까. 이런 영수의 생각은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라는 영수와 연대하는 대학생 지섭의 생각과 포개진다. 이렇듯 난쏘공은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에 이미 이즈음 폭넓게 회자되는 ‘타자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는 능력’이라는 문제의식을 선구적으로 펼치고 있다.

난쏘공의 주요 등장인물 중의 한 명인 신애가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는 난장이에게 전하는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라는 발언과 청년 노동자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가사 “함께 느끼는 기쁨과 슬픔/함께 나누는 희망과 공포”는 이른바 ‘각자도생’으로 대변되는, 관계가 단절되고 연대의 정신이 사라진 우울한 코로나 시대를 되비추는 대목이리라.

현재 지구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인 환경오염 문제도 난쏘공에 이미 등장한다.

바다에 떠 있는 기름을 서울 사람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 그곳 공기 속에는 유독 가스와 매연, 그리고 분진이 섞여 있었다. (…) 은강 내항은 썩은 바다로 괴어 있다. 공장 주변의 생물체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 은강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서울에 있었다.

위의 문장에는 환경문제와 생태오염을 서울 중심주의와 연계하여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이 스며 있다. 작가는 환경오염이 서울 중심주의라는 정치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은강’이라는 위성도시의 오염된 바다를 통해 설파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난쏘공의 내용이 지닌 문제적 성격과 더불어 조세희 작가 특유의 단단하고 간명한 문장, 철거 계고장이나 확인원, 통계조사 자료, ‘클라인씨 병’ 그림 등을 작품 속에 그대로 제시하는 실험적 형식 역시 난쏘공의 문학적 성과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요컨대 난쏘공은 사회 고발이라는 리얼리즘 소설의 내용이 미적 형식의 혁신과 잘 맞물린 작품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말해, 난쏘공에는 이 시대 문학이 충분히 펼쳐놓지 못한 문학의 사회적 대응과 성찰이 치열한 방식으로 형상화돼 있다고 하겠다. 난쏘공의 에필로그에는 작품 첫머리에 나오는 담임교사가 다시 등장해 “한 주전자의 커피와 한 말의 술을 마시면서 좋은 글을 못 쓰고 울기만 한 나를 이해하라”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여기서 담임교사는 작가의 그림자다. 그렇다면 이 메시지는 조세희의 문학적 염결성을 알려주는 상징일 테다.

난쏘공이 베스트셀러임에도 불구하고, 조세희는 이후 두 번째 소설집 『시간여행』, 사진 에세이『침묵의 뿌리』, 미완의 장편 「하얀 저고리」만을 남겼다. 그는 평생을 좋은 글과 작품 완성에 대한 강박과 결벽증 속에서 살아왔다. 어떤 경우에도 쉽게 후속작을 발표하지 않았다. 조세희의 작가적 여정은 치열한 장인정신에 기반한 과작으로 귀결되는데, 그래도 그 가운데 난쏘공이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현대소설사의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작가가 조세희가 밟아온 그런 고통스러운 도정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시대 환경, 작가를 둘러싼 조건도 많이 바뀌었다. 조세희의 글쓰기 자세와 투철한 장인정신, 엄정한 자의식도 그 시대 분위기와 모종의 연관성이 존재하리라. 하지만 난쏘공을 비롯한 조세희 문학이 지닌 미적 보편성과 통시대적 성격, 치열한 문제의식은 문학과 작가정신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되새겨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난쏘공은 이제 하나의 고전(古典)이다.

조세희 작가는 2008년 개최된 ‘난쏘공 발간 30주년 기념 행사’에서 “난쏘공을 처음 썼을 때 이렇게 30년 넘게 읽힐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토로하며, 난쏘공이 더 이상 안 읽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말을 젊은 독자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난쏘공에는 “우리나라에서 십 대 노동자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른바 N포 세대로 약칭되는 이 시대 청년들의 힘겨움과 절망을 생각하면, 이 대목이 하나의 문학적 예언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1978년의 10대 노동자는 지금의 20대 비정규직과 얼추 겹쳐진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줄 사람이었다.”는 난쏘공의 주인공 영수의 자각에 부합되는 사람들은 지금 얼마나 있는가.

여전히 한국 사회는 난쏘공을 시대의 맥락에 비추어 다시 읽을 수밖에 없는 사회임을 절감한다. 조세희 작가의 표현대로 난쏘공이 안 읽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난쏘공이 전하는 메시지의 현재적 의미를 곰곰이 사유하며, 다시 난쏘공의 세계를 통과해야 한다. 그 시간은 난쏘공에 비추어 지금 이 시대의 양극화와 불평등, 불공정을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과정일 테다.

권성우 문학평론가·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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