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상규명 주역]② 진상규명의 선봉 ‘제주4·3 연구소’

입력 2022.04.01 (19:55) 수정 2022.04.01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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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제주 4·3을 우리 역사의 한 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헌신한 주역들을 만나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엔 민간 연구소로서 30년 넘게 진상규명에 앞장선 제주4·3 연구소를 짚어봅니다.

김가람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1990년 4월 '민족사 속에서의 4·3'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학술 세미나.

민주화 물결에도 4·3을 언급하기 어렵던 시절, 제주 4·3 연구소가 문을 연 뒤 마련한 첫 학술젭니다.

[고창훈/전 제주 4·3 연구소장 : "강연을 하든 뭘 하든 다 녹화를 해요. 그러니까 내가 어디서 뭔가 실수가 나오길 기다리는데 그걸 잘 넘어야 하기 때문에."]

1989년 5월 당시 서문통 공임쌀집 2층에서 둥지를 튼 제주 4·3 연구소.

제주사회문제협의회와 제주도 증언조사팀 등 말 그대로 몇 안 되는 사람들이 '4·3'을 세상 밖으로 꺼냈습니다.

[김창후/전 제주 4·3 연구소장 : "(1987년 6월 항쟁 이후) 자연스럽게 모여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4·3 일을 하자. 4·3 일을 하면서 무얼 먼저 할 것인가, 그러면서 증언조사가 시작됐고."]

개소식과 함께 선보인 '이제사 말햄수다'는 감시의 눈을 피해 채록한 기념비적인 증언집으로 남아있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의 진상을 밝힌 제주신보와 비극의 현장 다랑쉬굴을 발굴한 것도 연구소의 큰 성과입니다.

[고창훈/전 제주 4·3 연구소장 : "내가 다랑쉬굴을 갔을 때 딱 느낌이 이제 4·3은 해결되겠다, 순간적으로. 진상규명도 되겠다 했는데, 또 하나는 등골이 오싹한 게 내가 엄청나게 당할 것 같아."]

여기에 시민단체들과 41주기 4·3 추모제를 주도하는 등 범도민 위령제의 밑돌을 놓았고, 4·3 유적지 기행이나 학술세미나 개최 등 4·3의 대중화에도 큰 기여를 한 연구소.

[김창후/전 제주 4·3 연구소장 : "(지금은) 언론의 역할, 공적 기관의 역할, 시민단체의 역할, 다 분리돼서 차근차근 다 해가는데 초창기는 그 모든 역할을 연구소가 중심이 되어서."]

4·3 50주년에는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선 뒤에도 암매장지 유해발굴 등 진상규명 과정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규배/제주 4·3 연구소 이사장 : "보통의 노력 갖고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어요. 그 사람들이 4·3 연구소의 토대를 쌓았고, 그런 힘들이 축적되어서 하나하나."]

올해부터 배보상이 시작되고 재심도 본격화됐지만 남은 과제가 많다는 제주 4·3 연구소.

젊은 연구자들이 부족한 현실적인 한계에도 4·3이 박제화되지 않고 살아있는 역사로 전승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계획입니다.

[허영선/제주 4·3 연구소장 : "4·3은 미래세대의 기억 계승이 상당히 필요하다고 봐요.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를 하면서 또 한편에서는 4·3의 대중적 확산도 꼭 해야 된다고 봅니다."]

KBS 뉴스 김가람입니다.

촬영기자:양경배/그래픽:조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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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진상규명 주역]② 진상규명의 선봉 ‘제주4·3 연구소’
    • 입력 2022-04-01 19:55:56
    • 수정2022-04-01 20:33:32
    뉴스7(제주)
[앵커]

제주 4·3을 우리 역사의 한 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헌신한 주역들을 만나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엔 민간 연구소로서 30년 넘게 진상규명에 앞장선 제주4·3 연구소를 짚어봅니다.

김가람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1990년 4월 '민족사 속에서의 4·3'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학술 세미나.

민주화 물결에도 4·3을 언급하기 어렵던 시절, 제주 4·3 연구소가 문을 연 뒤 마련한 첫 학술젭니다.

[고창훈/전 제주 4·3 연구소장 : "강연을 하든 뭘 하든 다 녹화를 해요. 그러니까 내가 어디서 뭔가 실수가 나오길 기다리는데 그걸 잘 넘어야 하기 때문에."]

1989년 5월 당시 서문통 공임쌀집 2층에서 둥지를 튼 제주 4·3 연구소.

제주사회문제협의회와 제주도 증언조사팀 등 말 그대로 몇 안 되는 사람들이 '4·3'을 세상 밖으로 꺼냈습니다.

[김창후/전 제주 4·3 연구소장 : "(1987년 6월 항쟁 이후) 자연스럽게 모여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4·3 일을 하자. 4·3 일을 하면서 무얼 먼저 할 것인가, 그러면서 증언조사가 시작됐고."]

개소식과 함께 선보인 '이제사 말햄수다'는 감시의 눈을 피해 채록한 기념비적인 증언집으로 남아있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의 진상을 밝힌 제주신보와 비극의 현장 다랑쉬굴을 발굴한 것도 연구소의 큰 성과입니다.

[고창훈/전 제주 4·3 연구소장 : "내가 다랑쉬굴을 갔을 때 딱 느낌이 이제 4·3은 해결되겠다, 순간적으로. 진상규명도 되겠다 했는데, 또 하나는 등골이 오싹한 게 내가 엄청나게 당할 것 같아."]

여기에 시민단체들과 41주기 4·3 추모제를 주도하는 등 범도민 위령제의 밑돌을 놓았고, 4·3 유적지 기행이나 학술세미나 개최 등 4·3의 대중화에도 큰 기여를 한 연구소.

[김창후/전 제주 4·3 연구소장 : "(지금은) 언론의 역할, 공적 기관의 역할, 시민단체의 역할, 다 분리돼서 차근차근 다 해가는데 초창기는 그 모든 역할을 연구소가 중심이 되어서."]

4·3 50주년에는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선 뒤에도 암매장지 유해발굴 등 진상규명 과정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규배/제주 4·3 연구소 이사장 : "보통의 노력 갖고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어요. 그 사람들이 4·3 연구소의 토대를 쌓았고, 그런 힘들이 축적되어서 하나하나."]

올해부터 배보상이 시작되고 재심도 본격화됐지만 남은 과제가 많다는 제주 4·3 연구소.

젊은 연구자들이 부족한 현실적인 한계에도 4·3이 박제화되지 않고 살아있는 역사로 전승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계획입니다.

[허영선/제주 4·3 연구소장 : "4·3은 미래세대의 기억 계승이 상당히 필요하다고 봐요.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를 하면서 또 한편에서는 4·3의 대중적 확산도 꼭 해야 된다고 봅니다."]

KBS 뉴스 김가람입니다.

촬영기자:양경배/그래픽:조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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