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원년 강타자 정현발의 딸, ‘최초의 여성 메인 디렉터’ 되다

입력 2022.05.09 (15:10) 수정 2022.05.0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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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중계 방송 사상 첫 메인 디렉터가 된 KBS N의 정효진 PD.

한국 프로야구 중계 방송 사상 첫 메인 디렉터가 된 KBS N의 정효진 PD.

9회 말 7대 7 동점, 한 치의 양보 없는 팽팽한 경기가 진행 중이다. 투수의 속은 타들어 가고 타자의 심장 박동도 빨라진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타자의 배트에 도달하는 시간은 0.4초도 안 걸린다. 0.4초의 전쟁이 끝나면 포수, 투수, 야수 그리고 양 팀 벤치와 관중석은 희비가 엇갈린다.

카메라 앵글은 모든 것을 쫓아간다. 이 숨 막히는 현장을 구성하고 때론 다시 보고 싶은 시청자를 위해 재연출을 한다.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중계 방송사 메인 디렉터다. 현장 중계차에서 생방송에 나가는 모든 화면의 커트를 결정한다. 따라서 중계 방송의 총 지휘자이기도 하다.

한국 프로야구 방송 사상 최초의 여자 메인 디렉터가 있어 주목받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KBS N의 정효진 PD다. 입사 연도가 2001년이다. 당시 sky KBS 공채 1기 제작팀 PD로 입사해 벌써 21년의 세월이 흘렀다.

야구, 축구, 배구, 복싱, 격투기 등 안 맡아본 종목이 없을 정도다. 그동안 결혼하고 자신을 빼닮은 붕어빵 아들도 낳았다. 스포츠는 하늘이 주신 직업이란 마음으로 여전히 현장을 누비고 있다.

정효진 PD는 핏줄부터 남다르다. 아버지가 바로 프로야구 원년 삼성 라이온즈의 오른손 강타자 정현발이다.

정현발은 류중일, 이승엽 등을 배출한 경북고 출신의 홈런 타자였다. 1971년 경북고등학교 5관왕의 주역이기도 하다. 1976년부터 실업 야구 롯데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다가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 선수로 프로 생활을 했다.

삼성에서 5년, 청보와 태평양에서 각각 1년. 7년 간의 프로 생활 동안 46홈런, 187타점을 기록했다.

왕년의 삼성 라이온즈 강타자인 아버지 정현발과 딸 정효진 PD.왕년의 삼성 라이온즈 강타자인 아버지 정현발과 딸 정효진 PD.

선구안이 좋았던 강타자의 피가 흐르는 만큼 정효진 PD의 말도 섬세하고 꼼꼼했다.

"중계방송을 할 때 경우의 수를 많이 생각해 본다. 야구 기사도 많이 읽어보며 준비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중계 캐스터와 해설위원의 멘트를 빠짐없이 기억해 조화로운 중계방송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야구는 캐릭터가 만들어가는 스포츠다. 정효진 PD는 투수, 타자, 야수, 감독, 관중 등 주요 캐릭터의 맛을 잘 살려 시청자가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을 쏙쏙 뽑아내는 중계 전문가의 길을 향하고 있다.

다음은 정효진 PD와의 일문일답이다.

○ 언제 입사해서 어느 일을 거쳤나? 야구 쪽에선 어떤 일을 맡아왔고 드디어 언제 메인 디렉터로 발돋움했나?

2001년 당시 sky KBS 공채 1기 제작팀 PD로 입사했다. 프로야구, 프로배구, 프로축구, 복싱, 이종 격투기 등에서 중계 조연출(현장 슬로모션 제작)을 거쳤다. 배구 매거진 프로그램 스페셜V 조연출, '아이 러브 베이스 볼' 메인 PD도 했다. 유럽 4개국을 돌며 진행했던 태권도 다큐멘터리, 비보이 프로그램 연출 경험도 있다. 입사 후 계속 스포츠제작팀에서만 일하다 입사 10년 차 정도 되었을 때 예능 채널 KBS JOY 채널의 편성 기획으로 자리를 옮겨 예능 채널의 편성을 했고 예능 프로그램 프로듀서(외주제작 기획 및 관리) 경험도 있다.

3년 정도 편성국에 근무하다 다시 스포츠국으로 복귀했다. 여자 프로농구와 K리그 중계 현장 조연출을 하던 중 결혼하고 출산한 뒤 복직했다. 디지털콘텐츠팀으로 발령받아 회사 SNS(유튜브, 페이스북 등)의 스포츠 업무를 맡았다.

이때 프로야구 전지훈련 취재를 통해 디지털 콘텐츠 제작을 시도했다. 그렇게 5년 정도 일하다 스포츠제작팀으로 발령받은 것이 작년 초. 분데스리가 위성 생중계를 시작으로 오랜만에 다시 스포츠 제작에 참여했다.

가장 최근엔 타 플랫폼 제작 대행으로 미식축구(NFL) 위성 생중계를 한 시즌 마쳤다. 2월 중순 미식축구 슈퍼볼 중계를 마친 직후 프로야구 메인 디렉터로 업무를 배정 받아 곧바로 전지훈련 취재를 시작했다. 중계방송 메인 디렉터 데뷔 일은 지난 3월 29일이다. 잠실구장에서 시범 경기를 중계했다.

○ 그동안 누구와 일을 했고 누구한테 일을 배웠나?

입사 20년이 넘었으니 스포츠국 선배, 후배들과는 거의 모두 같이 일을 했다. 고인이 되신 하일성 해설위원님이 기억난다. 그리고 복싱의 홍수환, 김광선 위원님부터 현재까지 수없이 많은 해설위원님과 함께 작업했다.

각종 국제대회의 국제신호 제작에 참여했는데 육상, 배구 등의 국제신호 제작 조연출로 일했고 대구세계육상대회에서는 대구지역 문화를 전 세계에 소개하고 또한 선수촌의 이모저모를 매일 촬영하고 편집해 세계 각국에 송출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당시 제작팀장님이 한 달에서 한 달 반 사이 긴 일정동안 팀원들을 통솔하고 제작에 관련된 수백 명 인원을 이끌어 주었던 것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20대에는 해외 복싱 프로그램(HBO 복싱) 위성생중계 및 녹화중계를 꽤 오래 했다. 오스카 델라 호야와 메이웨더 Jr.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라스베가스 현지에 출장 간 적도 있고 북한 여자 복싱 선수들과 우리나라 선수들이 중국 심양에서 만났는데, 이를 녹화중계 하기도 했다.

선배 PD와 아나운서분들도 기억난다.

복싱 중계를 하면서 정지훈 PD 선배와 권성욱 아나운서, 변정일 해설위원과의 추억이 많았다. 오랜 시간 복싱 중계를 하면서 복싱에 흠뻑 빠져 영상도 많이 제작하고 복싱 관련 토론도 하고 해설위원님을 통해 챔피언들과 식사 자리도 하고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복싱을 직접 배워 보는 게 제작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며 권성욱 아나운서와 같이 복싱체육관에도 다녔던 기억이 있다.

○ 아나운서와의 협업도 중요한데 누가 기억나는가?

지금도 친구처럼 지내는 후배 아나운서가 있다. 바로 '아이 러브 베이스 볼'에서 같이 일했던 최희 아나운서다. 시간이 정말 오래 지났는데도 한결같이 따뜻하고 온화하다. 헛똑똑이 느낌(?) 있는 모습의 최희 후배는 내가 예전에 알았던 선후배 사이의 어려움을 다 깨고 휴일에도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펜션 여행도 같이 다니고 할 정도로 잘 지냈다.

지금처럼 매거진 프로그램의 시청률 경쟁이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시청률과 화제성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아이 러브 베이스 볼의 힘이 제작진과 출연진의 원활한 소통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진심이었던 열정의 30대 초반이었다.

○ 투수 공이 0.4초 만에 포수에 전달된다. 포수, 투수, 야수, 감독, 관중 모두 짧은 시간에 희비가 엇갈린다. 어떤 스타일로 연출하는가?

세 시간 반이 넘는 긴 시간의 중계를 소화하는 것은 무척 벅차다. 극도의 긴장 상태로 화면을 노려보다 보면 편두통도 오고 시야가 뿌옇게 되기도 한다.

시즌 초반 사직 경기 중계 중 연장 11회까지 가며 중계 말미까지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마주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후에 모니터를 해보니 하나도 긴장감이 없고 밋밋한 느낌마저 들었다. 팀장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묻고 또 물었다.

다른 선배들이 제작했던 영상들을 무한 반복하며 모니터하고 있고, 경우의 수를 많이 생각해 보며 기사도 많이 읽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중계 캐스터와 해설위원의 멘트를 빠짐없이 기억하며 조화롭게 중계를 만들어 가야겠다고 느꼈다.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스태프, 특히 카메라 감독님들과의 호흡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록원이 작성한 자료를 바탕으로 감독님들과 많이 대화하면서 중계를 진행해야 한다. 캐스터와 해설위원, 카메라 감독님과 기록원, 현장 연출 PD들의 조화로움이 반복되고 이 같은 경험들이 쌓이면 짧은 시간에 희비가 엇갈리는 순발력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좋은 영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일반 야구팬들은 어떤 과정으로 중계방송되는지 모른다. 어떤 과정이 필요하고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나?

프로야구 중계는 현장과 부조(회사 내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어 주조(회사의 최종 송출시스템)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된다. 현장에서는 10여 대의 카메라가 연결된 중계차에 디렉팅 PD, 슬로모션 제작 PD, 기술감독, 오디오감독, 비디오감독, 송출담당 감독이 일하고 야구장에서는 카메라감독, 캐스터, 해설위원, 현장기록원, 플로어 감독이 일한다.

카메라 감독들이 현장에서 각자 맡은 장면을 촬영하면 연결된 중계차에서 상황에 맞게 디렉팅 PD가 그림을 잘라(컷) 영상을 만들고 중요한 상황은 슬로모션 PD가 만든 느린 화면을 첨가한다.

동시에 캐스터와 해설의 중계해설이 입혀지며 부조로 전달된다. 이 또한 동시에 부조에 있는 부조 진행 PD의 지휘에 맞춰 기술감독, 오디오, 비디오 감독 등 기술팀이 현장에서 수신된 영상을 최적화한다. 여기에 스포츠 코더 요원들이 코더 자막을 넣고 기록원이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 그래픽을 첨가한다. 또 여기에 가상광고팀 직원들이 광고 그래픽을 얹으면 시청자들이 볼 수 있는 프로야구 중계가 완성된다.

○ 야구 선수들처럼 PD로서 루틴이 있을 것 같다. 경기 전 경 기후 어떤 루틴이 있나?

3연전을 시작하기 전에는 양 팀이 직전 3연전에 어떻게 경기를 하고 왔는지 가능하면 풀 영상을 다 보려고 한다. 기사 검색하고 캐스터와 해설위원, 후배 PD와 기록원의 자료를 보며 회의를 한다.

아침부터 물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경기 후 인터뷰까지 하면 4시간 넘게 화장실에 갈 수 없을 가능성이 있어서 아침부터 그냥 물을 안 먹고 경기 종료 때까지 버틴다.

경기 후 루틴은 종료 후 스태프들과 인사하고 아이에게 전화한다. 숙소로 가거나 집으로 가서 중계한 영상 모니터하고 취침한다.

○ 아버지 정현발이 왕년의 삼성 강타자였다. 아버지로부터는 어떤 것을 배웠고 어떤 조언을 듣고 있나?

아빠의 별명은 성인군자다. 하하하! 거기에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다. 아빠에게 듣는 조언은 "그저 건강 유의하고 차 조심하고 어디 아픈 데 없재~?”이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눈빛만 봐도 통한다. 중계는 항상 처음부터 끝까지 보시고 응원해 주신다.

프로야구 선수와 코치를 하셨던 아빠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야구는 '나의 생활'이었다. 어린 시절 대구에 살았던 우리는 자주 부산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당시에는 놀러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커서 보니 (당시에 부산에는 일본 방송이 나왔다.) 일본 야구 보러 가는 거였다.

기억 나는 일화가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경기 후 현관문이 열리면 가장 먼저 살피는 게 아빠의 표정이었다. 안타를 쳤나 못 쳤나 어린 나는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분위기가 좀 더 이상했고 한참 후에 아빠가 엄마에게 얼음 좀 달라고 해서 아빠의 등과 허리 쪽을 보니 피멍이 들어 있었다. 눈물이 났다. 그냥 어린 마음에 엉엉 울면서 나와 동생이 얼음찜질을 해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날부터는 아빠가 안타를 쳤나 못 쳤나가 아니라 데드볼(몸에 맞는 공) 맞았나 안 맞았나가 우리 가족의 걱정거리였다.

야구 가족으로 살아와서 경기장의 선수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이해가 수월한 것 같다.

○ 내 손을 거친 영상을 볼 때 어떤가? 흐뭇하지 않을까? 아쉬웠던 경기나 잘했다고 생각되는 경기가 있을까?

내 손을 거친 영상을 볼 때 흐뭇했던 기억은 아직 없다.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랐던 적은 있다. 처음 중계를 마치고 경기 후 매거진 프로그램에 하이라이트로 방금 내가 중계한 경기가 방송되는 걸 보고….

KBS 스포츠 뉴스와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등에 내가 중계한 영상이 나가는 걸 보고 정말 무섭기까지 했다. 정말 잘해야겠구나! 세상에 유일한 오늘 현장 영상이 내가 중계한 것이구나 생각하면서 정말 노력해야겠다고 다짐 중이다.

○ 마지막으로 야구팬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린다.

요즘 야구팬들, 시청자들의 수준과 눈높이가 무척 높다는 걸 느끼고 있다. 야구 선수의 딸이지만 야구 선수가 아니었고 야구를 좋아하기는 했어도 전문적으로 야구를 연구하지 못했다. 스포츠가 좋고 특히 야구가 좋아서 20년 넘게 스포츠 현장에 있다. 같은 스포츠팬으로서 많이 교감하고 싶다. 부족하지만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려고 한다. KBS N 스포츠는 남녀노소 모든 연령대의 시청자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노력 중이다.

'들으려는 노력'과 함께 '실천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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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년 원년 강타자 정현발의 딸, ‘최초의 여성 메인 디렉터’ 되다
    • 입력 2022-05-09 15:10:06
    • 수정2022-05-09 15:11:08
    스포츠K

한국 프로야구 중계 방송 사상 첫 메인 디렉터가 된 KBS N의 정효진 PD.

9회 말 7대 7 동점, 한 치의 양보 없는 팽팽한 경기가 진행 중이다. 투수의 속은 타들어 가고 타자의 심장 박동도 빨라진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타자의 배트에 도달하는 시간은 0.4초도 안 걸린다. 0.4초의 전쟁이 끝나면 포수, 투수, 야수 그리고 양 팀 벤치와 관중석은 희비가 엇갈린다.

카메라 앵글은 모든 것을 쫓아간다. 이 숨 막히는 현장을 구성하고 때론 다시 보고 싶은 시청자를 위해 재연출을 한다.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중계 방송사 메인 디렉터다. 현장 중계차에서 생방송에 나가는 모든 화면의 커트를 결정한다. 따라서 중계 방송의 총 지휘자이기도 하다.

한국 프로야구 방송 사상 최초의 여자 메인 디렉터가 있어 주목받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KBS N의 정효진 PD다. 입사 연도가 2001년이다. 당시 sky KBS 공채 1기 제작팀 PD로 입사해 벌써 21년의 세월이 흘렀다.

야구, 축구, 배구, 복싱, 격투기 등 안 맡아본 종목이 없을 정도다. 그동안 결혼하고 자신을 빼닮은 붕어빵 아들도 낳았다. 스포츠는 하늘이 주신 직업이란 마음으로 여전히 현장을 누비고 있다.

정효진 PD는 핏줄부터 남다르다. 아버지가 바로 프로야구 원년 삼성 라이온즈의 오른손 강타자 정현발이다.

정현발은 류중일, 이승엽 등을 배출한 경북고 출신의 홈런 타자였다. 1971년 경북고등학교 5관왕의 주역이기도 하다. 1976년부터 실업 야구 롯데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다가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 선수로 프로 생활을 했다.

삼성에서 5년, 청보와 태평양에서 각각 1년. 7년 간의 프로 생활 동안 46홈런, 187타점을 기록했다.

왕년의 삼성 라이온즈 강타자인 아버지 정현발과 딸 정효진 PD.
선구안이 좋았던 강타자의 피가 흐르는 만큼 정효진 PD의 말도 섬세하고 꼼꼼했다.

"중계방송을 할 때 경우의 수를 많이 생각해 본다. 야구 기사도 많이 읽어보며 준비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중계 캐스터와 해설위원의 멘트를 빠짐없이 기억해 조화로운 중계방송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야구는 캐릭터가 만들어가는 스포츠다. 정효진 PD는 투수, 타자, 야수, 감독, 관중 등 주요 캐릭터의 맛을 잘 살려 시청자가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을 쏙쏙 뽑아내는 중계 전문가의 길을 향하고 있다.

다음은 정효진 PD와의 일문일답이다.

○ 언제 입사해서 어느 일을 거쳤나? 야구 쪽에선 어떤 일을 맡아왔고 드디어 언제 메인 디렉터로 발돋움했나?

2001년 당시 sky KBS 공채 1기 제작팀 PD로 입사했다. 프로야구, 프로배구, 프로축구, 복싱, 이종 격투기 등에서 중계 조연출(현장 슬로모션 제작)을 거쳤다. 배구 매거진 프로그램 스페셜V 조연출, '아이 러브 베이스 볼' 메인 PD도 했다. 유럽 4개국을 돌며 진행했던 태권도 다큐멘터리, 비보이 프로그램 연출 경험도 있다. 입사 후 계속 스포츠제작팀에서만 일하다 입사 10년 차 정도 되었을 때 예능 채널 KBS JOY 채널의 편성 기획으로 자리를 옮겨 예능 채널의 편성을 했고 예능 프로그램 프로듀서(외주제작 기획 및 관리) 경험도 있다.

3년 정도 편성국에 근무하다 다시 스포츠국으로 복귀했다. 여자 프로농구와 K리그 중계 현장 조연출을 하던 중 결혼하고 출산한 뒤 복직했다. 디지털콘텐츠팀으로 발령받아 회사 SNS(유튜브, 페이스북 등)의 스포츠 업무를 맡았다.

이때 프로야구 전지훈련 취재를 통해 디지털 콘텐츠 제작을 시도했다. 그렇게 5년 정도 일하다 스포츠제작팀으로 발령받은 것이 작년 초. 분데스리가 위성 생중계를 시작으로 오랜만에 다시 스포츠 제작에 참여했다.

가장 최근엔 타 플랫폼 제작 대행으로 미식축구(NFL) 위성 생중계를 한 시즌 마쳤다. 2월 중순 미식축구 슈퍼볼 중계를 마친 직후 프로야구 메인 디렉터로 업무를 배정 받아 곧바로 전지훈련 취재를 시작했다. 중계방송 메인 디렉터 데뷔 일은 지난 3월 29일이다. 잠실구장에서 시범 경기를 중계했다.

○ 그동안 누구와 일을 했고 누구한테 일을 배웠나?

입사 20년이 넘었으니 스포츠국 선배, 후배들과는 거의 모두 같이 일을 했다. 고인이 되신 하일성 해설위원님이 기억난다. 그리고 복싱의 홍수환, 김광선 위원님부터 현재까지 수없이 많은 해설위원님과 함께 작업했다.

각종 국제대회의 국제신호 제작에 참여했는데 육상, 배구 등의 국제신호 제작 조연출로 일했고 대구세계육상대회에서는 대구지역 문화를 전 세계에 소개하고 또한 선수촌의 이모저모를 매일 촬영하고 편집해 세계 각국에 송출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당시 제작팀장님이 한 달에서 한 달 반 사이 긴 일정동안 팀원들을 통솔하고 제작에 관련된 수백 명 인원을 이끌어 주었던 것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20대에는 해외 복싱 프로그램(HBO 복싱) 위성생중계 및 녹화중계를 꽤 오래 했다. 오스카 델라 호야와 메이웨더 Jr.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라스베가스 현지에 출장 간 적도 있고 북한 여자 복싱 선수들과 우리나라 선수들이 중국 심양에서 만났는데, 이를 녹화중계 하기도 했다.

선배 PD와 아나운서분들도 기억난다.

복싱 중계를 하면서 정지훈 PD 선배와 권성욱 아나운서, 변정일 해설위원과의 추억이 많았다. 오랜 시간 복싱 중계를 하면서 복싱에 흠뻑 빠져 영상도 많이 제작하고 복싱 관련 토론도 하고 해설위원님을 통해 챔피언들과 식사 자리도 하고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복싱을 직접 배워 보는 게 제작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며 권성욱 아나운서와 같이 복싱체육관에도 다녔던 기억이 있다.

○ 아나운서와의 협업도 중요한데 누가 기억나는가?

지금도 친구처럼 지내는 후배 아나운서가 있다. 바로 '아이 러브 베이스 볼'에서 같이 일했던 최희 아나운서다. 시간이 정말 오래 지났는데도 한결같이 따뜻하고 온화하다. 헛똑똑이 느낌(?) 있는 모습의 최희 후배는 내가 예전에 알았던 선후배 사이의 어려움을 다 깨고 휴일에도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펜션 여행도 같이 다니고 할 정도로 잘 지냈다.

지금처럼 매거진 프로그램의 시청률 경쟁이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시청률과 화제성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아이 러브 베이스 볼의 힘이 제작진과 출연진의 원활한 소통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진심이었던 열정의 30대 초반이었다.

○ 투수 공이 0.4초 만에 포수에 전달된다. 포수, 투수, 야수, 감독, 관중 모두 짧은 시간에 희비가 엇갈린다. 어떤 스타일로 연출하는가?

세 시간 반이 넘는 긴 시간의 중계를 소화하는 것은 무척 벅차다. 극도의 긴장 상태로 화면을 노려보다 보면 편두통도 오고 시야가 뿌옇게 되기도 한다.

시즌 초반 사직 경기 중계 중 연장 11회까지 가며 중계 말미까지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마주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후에 모니터를 해보니 하나도 긴장감이 없고 밋밋한 느낌마저 들었다. 팀장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묻고 또 물었다.

다른 선배들이 제작했던 영상들을 무한 반복하며 모니터하고 있고, 경우의 수를 많이 생각해 보며 기사도 많이 읽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중계 캐스터와 해설위원의 멘트를 빠짐없이 기억하며 조화롭게 중계를 만들어 가야겠다고 느꼈다.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스태프, 특히 카메라 감독님들과의 호흡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록원이 작성한 자료를 바탕으로 감독님들과 많이 대화하면서 중계를 진행해야 한다. 캐스터와 해설위원, 카메라 감독님과 기록원, 현장 연출 PD들의 조화로움이 반복되고 이 같은 경험들이 쌓이면 짧은 시간에 희비가 엇갈리는 순발력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좋은 영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일반 야구팬들은 어떤 과정으로 중계방송되는지 모른다. 어떤 과정이 필요하고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나?

프로야구 중계는 현장과 부조(회사 내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어 주조(회사의 최종 송출시스템)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된다. 현장에서는 10여 대의 카메라가 연결된 중계차에 디렉팅 PD, 슬로모션 제작 PD, 기술감독, 오디오감독, 비디오감독, 송출담당 감독이 일하고 야구장에서는 카메라감독, 캐스터, 해설위원, 현장기록원, 플로어 감독이 일한다.

카메라 감독들이 현장에서 각자 맡은 장면을 촬영하면 연결된 중계차에서 상황에 맞게 디렉팅 PD가 그림을 잘라(컷) 영상을 만들고 중요한 상황은 슬로모션 PD가 만든 느린 화면을 첨가한다.

동시에 캐스터와 해설의 중계해설이 입혀지며 부조로 전달된다. 이 또한 동시에 부조에 있는 부조 진행 PD의 지휘에 맞춰 기술감독, 오디오, 비디오 감독 등 기술팀이 현장에서 수신된 영상을 최적화한다. 여기에 스포츠 코더 요원들이 코더 자막을 넣고 기록원이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 그래픽을 첨가한다. 또 여기에 가상광고팀 직원들이 광고 그래픽을 얹으면 시청자들이 볼 수 있는 프로야구 중계가 완성된다.

○ 야구 선수들처럼 PD로서 루틴이 있을 것 같다. 경기 전 경 기후 어떤 루틴이 있나?

3연전을 시작하기 전에는 양 팀이 직전 3연전에 어떻게 경기를 하고 왔는지 가능하면 풀 영상을 다 보려고 한다. 기사 검색하고 캐스터와 해설위원, 후배 PD와 기록원의 자료를 보며 회의를 한다.

아침부터 물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경기 후 인터뷰까지 하면 4시간 넘게 화장실에 갈 수 없을 가능성이 있어서 아침부터 그냥 물을 안 먹고 경기 종료 때까지 버틴다.

경기 후 루틴은 종료 후 스태프들과 인사하고 아이에게 전화한다. 숙소로 가거나 집으로 가서 중계한 영상 모니터하고 취침한다.

○ 아버지 정현발이 왕년의 삼성 강타자였다. 아버지로부터는 어떤 것을 배웠고 어떤 조언을 듣고 있나?

아빠의 별명은 성인군자다. 하하하! 거기에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다. 아빠에게 듣는 조언은 "그저 건강 유의하고 차 조심하고 어디 아픈 데 없재~?”이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눈빛만 봐도 통한다. 중계는 항상 처음부터 끝까지 보시고 응원해 주신다.

프로야구 선수와 코치를 하셨던 아빠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야구는 '나의 생활'이었다. 어린 시절 대구에 살았던 우리는 자주 부산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당시에는 놀러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커서 보니 (당시에 부산에는 일본 방송이 나왔다.) 일본 야구 보러 가는 거였다.

기억 나는 일화가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경기 후 현관문이 열리면 가장 먼저 살피는 게 아빠의 표정이었다. 안타를 쳤나 못 쳤나 어린 나는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분위기가 좀 더 이상했고 한참 후에 아빠가 엄마에게 얼음 좀 달라고 해서 아빠의 등과 허리 쪽을 보니 피멍이 들어 있었다. 눈물이 났다. 그냥 어린 마음에 엉엉 울면서 나와 동생이 얼음찜질을 해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날부터는 아빠가 안타를 쳤나 못 쳤나가 아니라 데드볼(몸에 맞는 공) 맞았나 안 맞았나가 우리 가족의 걱정거리였다.

야구 가족으로 살아와서 경기장의 선수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이해가 수월한 것 같다.

○ 내 손을 거친 영상을 볼 때 어떤가? 흐뭇하지 않을까? 아쉬웠던 경기나 잘했다고 생각되는 경기가 있을까?

내 손을 거친 영상을 볼 때 흐뭇했던 기억은 아직 없다.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랐던 적은 있다. 처음 중계를 마치고 경기 후 매거진 프로그램에 하이라이트로 방금 내가 중계한 경기가 방송되는 걸 보고….

KBS 스포츠 뉴스와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등에 내가 중계한 영상이 나가는 걸 보고 정말 무섭기까지 했다. 정말 잘해야겠구나! 세상에 유일한 오늘 현장 영상이 내가 중계한 것이구나 생각하면서 정말 노력해야겠다고 다짐 중이다.

○ 마지막으로 야구팬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린다.

요즘 야구팬들, 시청자들의 수준과 눈높이가 무척 높다는 걸 느끼고 있다. 야구 선수의 딸이지만 야구 선수가 아니었고 야구를 좋아하기는 했어도 전문적으로 야구를 연구하지 못했다. 스포츠가 좋고 특히 야구가 좋아서 20년 넘게 스포츠 현장에 있다. 같은 스포츠팬으로서 많이 교감하고 싶다. 부족하지만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려고 한다. KBS N 스포츠는 남녀노소 모든 연령대의 시청자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노력 중이다.

'들으려는 노력'과 함께 '실천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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