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단체 활동가 사이에선 '기승전 개고기'라는 말이 있다. 동물권 이야기를 시작하면 결국엔 개고기 찬반 논쟁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개는 인간의 친구", "소·돼지는 괜찮냐"는 말까지 뒤섞이면 그때부턴 진흙탕 싸움이다. 이 논쟁,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말복인 오늘(15일), 개고기 논쟁의 긴 역사를 소개한다.
■ 잘못 끼운 첫 단추
시작은 1975년이다. 당시 국회는 축산물 가공처리법(현 축산물 위생관리법)을 개정해 정부 차원에서 도살과 위생 점검을 하도록 했다. 개고기를 법 테두리 안에 둔 셈이다. 동물 단체와 국제 여론 반발에 부딪혔다. 군사 정부가 외국 눈치 많이 보던 시절이었다.
1978년 개고기를 축산물에서 제외하도록 법을 다시 바꾼다. 그러나 식용 목적 개 농장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축산법'은 그대로 남았다. 개 식용 산업은 완벽한 불법도, 합법도 아니었다. 개 식용은 회색 지대에서 생명을 이어갔다. 정부는 민감한 문제에 손 대기 싫어 애매한 법령을 방치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개고기가 혐오 식품이 아니라는 법원 판결을 보도한 KBS 뉴스9(1991.11.19)
1988년 서울올림픽 앞두고, 외국 동물보호단체에서 압박을 가했다. 한국 제품 불매운동·올림픽 보이콧 얘기까지 나왔다. 서울시는 자체 고시를 통해 혐오식품으로 지정해 판매를 금지시킨다. 보신탕집들이 대도시 바깥으로, 골목 뒤편으로 강제로 밀려났다(서울시는 해당 고시가 사실상 사문화됐다고 밝힌 바 있다).
■ 개 식용 옹호 진영의 역습
2002년 월드컵 앞두고 다시 논쟁이 불붙는다.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동물 보호 운동을 하던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손석희와 라디오 생방송 인터뷰에서 개 식용 문제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바르도는 속된 말로 '탈탈 털리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한국인은 야만인"이란 바르도 말은 국민 공분을 불렀다.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에 문화 상대주의의 사례로 개고기가 소개됐다(이 예시가 삭제된 건 올해 3월의 일이다).
2002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한국 개고기 문화를 비판하는 피파 회장의 발언을 보도한 KBS뉴스광장(2001.11.09.)
개 식용 옹호론자들은 입법 시도로 '굳히기'에 나선다. 2001년 말 김홍신 의원 등 국회의원 20명은 이른바 ‘개고기 합법화 법안’으로 불렸던 축산물 가공처리법 개정안을 발의한다. 축산물 가공처리법 제2조 1항의 ‘가축’에 개를 추가해, 도축과 유통을 양성화 하려고 했다.
하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아서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된다.
■ "식용 중단" 55% vs "합법화" 39%
20여 년이 흐른 지금 여론은 어떨까? KBS는 사회적 합의 기구인 '개 식용 문제 논의를 위한 위원회'가 실시한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입수했다.
정부 차원에서 개 식용 문제에 대해 대국민 여론조사를 한 건 처음이다. 과거 지방자치단체나 학술 단체 등이 했던 여론조사보다 표본도 크고, 전문 기관이 조사해 현재까지는 가장 공신력 있는 결과다.
국민 절반 이상이 개 식용을 멈춰야 한다고 답했다. 의외인 결과는 '개 도축 합법화'에 40% 가까이 찬성했다는 점이다. 물론 반대 의견이 10% 넘게 더 많긴 했다. 하지만 개 식용을 양성화하자는 의견도 결코 적지는 않았다.
국민 10명 중 8명 이상이 '개고기를 먹지 않고, 앞으로도 안 먹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반려 인구 증가로 수요층은 확실히 많이 줄었다. 현재 경기 성남 모란시장 등 개고기 식당의 주요 손님은 고령층이나 외국인 노동자 등으로 알려져 있다.
동남아 일부 국가엔 개 식용 문화가 남아있다고 한다.
■ 이상한 나라의 개고기
한국은 개고기는 불법인데 개 농장은 합법인, 이상한 나라다.
개고기는 식품 원료로 쓸 수 없어 불법이다(식품위생법). 또 전기 도살 등 잔인한 도축 방법은 학대에 해당해 처벌된다(동물보호법). 그런데 개는 가축으로 분류돼 식용 목적의 개를 농장에서 키울 수 있다(축산법). 일정 조건을 갖춰 신고하면 되는데(가축분뇨법), 정작 도축·유통 관련 규정은 없다(축산물 위생관리법).
농림축산식품부의 첫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개 농장은 1,156곳이다. 52만 마리가 길러지고 있고, 38만 마리가 넘는 개가 1,600곳이 넘는 식당에서 음식으로 소비된다.
개 사육 농장주들은 혐오시설을 운영한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그런데 법적으론 엄연한 '농업인'이다. 농협에 가입할 수 있고, 세금 혜택과 일부 지자체에서 보조금도 받는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63.8세. 고령에 업종 전환이 어려워 생계 대책을 호소한다.
■ 사회적 합의 기구인데 논의는 비밀
잘못의 주체는 명백하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12월 사회적 합의 기구 '개 식용 문제 논의를 위한 위원회'를 출범하면서, 활동 기한을 6개월로 정했다. 위원회 이름에 '종식'을 넣으려다 육견업계 반발에 부딪혔다. 사실상 '답정너'였던 셈이다.
수십 년간 이어온 논쟁을 몇 달 논의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바통을 물려받은 윤석열 정부는 논의를 무기한 연장했다. 위원회 논의 내용은 비공개 규정에 묶여 있다.
세금 들여 조사한 사육 개 실태조사·대국민 인식조사 결과도 KBS 취재로 겨우 공개됐다(합의 때까지 비밀에 부치려고 했다). 투명한 정보 공개 없이, 논란만 걱정하고 있다.
개 식용 문제 주무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의 정황근 장관은 지난 10일 대통령 업무보고 관련 브리핑에서 "개 식용 문제는 이견이 있기 때문에, 단계를 밟아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위원회가 중재해서 최선의 방안을 도출해내는 게 가장 좋다."라면서 "사회적 합의를 가장 중시하도록 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이쪽저쪽 눈치 보며 우물쭈물하는 사이, 복날이 돌아왔다. 개고기 논쟁은 오늘 어딘가에서 또 벌어질 것이고, 쉽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인포그래픽 : 김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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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복, 개고기 드실 겁니까?…47년 논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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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2-08-15 07:00:18
동물단체 활동가 사이에선 '기승전 개고기'라는 말이 있다. 동물권 이야기를 시작하면 결국엔 개고기 찬반 논쟁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개는 인간의 친구", "소·돼지는 괜찮냐"는 말까지 뒤섞이면 그때부턴 진흙탕 싸움이다. 이 논쟁,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말복인 오늘(15일), 개고기 논쟁의 긴 역사를 소개한다.
■ 잘못 끼운 첫 단추
시작은 1975년이다. 당시 국회는 축산물 가공처리법(현 축산물 위생관리법)을 개정해 정부 차원에서 도살과 위생 점검을 하도록 했다. 개고기를 법 테두리 안에 둔 셈이다. 동물 단체와 국제 여론 반발에 부딪혔다. 군사 정부가 외국 눈치 많이 보던 시절이었다.
1978년 개고기를 축산물에서 제외하도록 법을 다시 바꾼다. 그러나 식용 목적 개 농장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축산법'은 그대로 남았다. 개 식용 산업은 완벽한 불법도, 합법도 아니었다. 개 식용은 회색 지대에서 생명을 이어갔다. 정부는 민감한 문제에 손 대기 싫어 애매한 법령을 방치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앞두고, 외국 동물보호단체에서 압박을 가했다. 한국 제품 불매운동·올림픽 보이콧 얘기까지 나왔다. 서울시는 자체 고시를 통해 혐오식품으로 지정해 판매를 금지시킨다. 보신탕집들이 대도시 바깥으로, 골목 뒤편으로 강제로 밀려났다(서울시는 해당 고시가 사실상 사문화됐다고 밝힌 바 있다).
■ 개 식용 옹호 진영의 역습
2002년 월드컵 앞두고 다시 논쟁이 불붙는다.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동물 보호 운동을 하던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손석희와 라디오 생방송 인터뷰에서 개 식용 문제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바르도는 속된 말로 '탈탈 털리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한국인은 야만인"이란 바르도 말은 국민 공분을 불렀다.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에 문화 상대주의의 사례로 개고기가 소개됐다(이 예시가 삭제된 건 올해 3월의 일이다).
개 식용 옹호론자들은 입법 시도로 '굳히기'에 나선다. 2001년 말 김홍신 의원 등 국회의원 20명은 이른바 ‘개고기 합법화 법안’으로 불렸던 축산물 가공처리법 개정안을 발의한다. 축산물 가공처리법 제2조 1항의 ‘가축’에 개를 추가해, 도축과 유통을 양성화 하려고 했다.
하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아서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된다.
■ "식용 중단" 55% vs "합법화" 39%
20여 년이 흐른 지금 여론은 어떨까? KBS는 사회적 합의 기구인 '개 식용 문제 논의를 위한 위원회'가 실시한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입수했다.
정부 차원에서 개 식용 문제에 대해 대국민 여론조사를 한 건 처음이다. 과거 지방자치단체나 학술 단체 등이 했던 여론조사보다 표본도 크고, 전문 기관이 조사해 현재까지는 가장 공신력 있는 결과다.
국민 절반 이상이 개 식용을 멈춰야 한다고 답했다. 의외인 결과는 '개 도축 합법화'에 40% 가까이 찬성했다는 점이다. 물론 반대 의견이 10% 넘게 더 많긴 했다. 하지만 개 식용을 양성화하자는 의견도 결코 적지는 않았다.
국민 10명 중 8명 이상이 '개고기를 먹지 않고, 앞으로도 안 먹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반려 인구 증가로 수요층은 확실히 많이 줄었다. 현재 경기 성남 모란시장 등 개고기 식당의 주요 손님은 고령층이나 외국인 노동자 등으로 알려져 있다.
동남아 일부 국가엔 개 식용 문화가 남아있다고 한다.
■ 이상한 나라의 개고기
한국은 개고기는 불법인데 개 농장은 합법인, 이상한 나라다.
개고기는 식품 원료로 쓸 수 없어 불법이다(식품위생법). 또 전기 도살 등 잔인한 도축 방법은 학대에 해당해 처벌된다(동물보호법). 그런데 개는 가축으로 분류돼 식용 목적의 개를 농장에서 키울 수 있다(축산법). 일정 조건을 갖춰 신고하면 되는데(가축분뇨법), 정작 도축·유통 관련 규정은 없다(축산물 위생관리법).
농림축산식품부의 첫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개 농장은 1,156곳이다. 52만 마리가 길러지고 있고, 38만 마리가 넘는 개가 1,600곳이 넘는 식당에서 음식으로 소비된다.
개 사육 농장주들은 혐오시설을 운영한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그런데 법적으론 엄연한 '농업인'이다. 농협에 가입할 수 있고, 세금 혜택과 일부 지자체에서 보조금도 받는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63.8세. 고령에 업종 전환이 어려워 생계 대책을 호소한다.
■ 사회적 합의 기구인데 논의는 비밀
잘못의 주체는 명백하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12월 사회적 합의 기구 '개 식용 문제 논의를 위한 위원회'를 출범하면서, 활동 기한을 6개월로 정했다. 위원회 이름에 '종식'을 넣으려다 육견업계 반발에 부딪혔다. 사실상 '답정너'였던 셈이다.
수십 년간 이어온 논쟁을 몇 달 논의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바통을 물려받은 윤석열 정부는 논의를 무기한 연장했다. 위원회 논의 내용은 비공개 규정에 묶여 있다.
세금 들여 조사한 사육 개 실태조사·대국민 인식조사 결과도 KBS 취재로 겨우 공개됐다(합의 때까지 비밀에 부치려고 했다). 투명한 정보 공개 없이, 논란만 걱정하고 있다.
개 식용 문제 주무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의 정황근 장관은 지난 10일 대통령 업무보고 관련 브리핑에서 "개 식용 문제는 이견이 있기 때문에, 단계를 밟아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위원회가 중재해서 최선의 방안을 도출해내는 게 가장 좋다."라면서 "사회적 합의를 가장 중시하도록 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이쪽저쪽 눈치 보며 우물쭈물하는 사이, 복날이 돌아왔다. 개고기 논쟁은 오늘 어딘가에서 또 벌어질 것이고, 쉽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인포그래픽 : 김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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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혁진 기자 analogu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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